[이이]
이이는 공로책(貢路策)에서 이황의 말을 빌려 “신이 알건대 하늘에는 두개의 해가 없고 인류에는 두 제왕이 없습니다. 조선이 멀리 바다에서 동떨어져 편벽한 위치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먼 곳에 떨어져 있지만 중국에 조공을 해왔습니다. 사대의 대의에 의하여 중국은 상국(上國)이고 조선은 하국(下國)이므로써 군신의 분이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세의 이해를 떠나 중국에 충성을 해야 합니다. 바라옵건데 전하께서는 더욱 충성을 다하여 중국을 잘 받들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이이는 명나라가 가정제를 제사하는 제문에는 “소신은 명나라를 옛날 황제가 용을 타고 승천 할 때에 용의 수염에 붙었다가 떨어진 자처럼 지성을 다하려고 합니다. 명나라에 달려가서 혈맹의 지성을 다할 길이 없사옵고 입은 있사오나 다 할말이 없습니다. 명나라의 은혜는 하늘같이 끝이 없고 크옵니다.”라고 썼다.
당당한 독립국가의 지도자로서 임금에게 명나라에 충성하라고 글을 올리며 명나라 임금에게 미신수번(微臣守藩)이라고 조아린 이이의 사대사상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사대사상에 찌들어 남의 나라 죽은 임금에게까지 소신이라 자칭한 이이는 명의 만력제가 보낸 사신이 조선에 왔다가 돌아갈 때 읊은 시에서 “바다 밖에 떨어져 사는 송사리 같은 제가 천조의 사신을 배웅하여 먼 천리 길을 사순(四旬)간이나 내왕하면서 훌륭한 인격을 대하고 은혜를 입사와 잊을 길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명나라 사신을 천사라고 칭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스스로 송사리같은 사람이라 비하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고려 말 유학자 정몽주! ]
이색과 더불어 대유학자로써 우리에게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알려진 성리학의 대가이다.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라고 불렀고 벼슬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와 대사성(大司成)을 거처 좌명공신(佐命功臣)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는 우왕(禑王)에게 올린 절원귀명(絶元歸明)의 상주문에서 “대명나라가 창업하여 사해를 휩싸매 우리 돌아가신 임금(공민왕)께서 천명을 밝히 아시어 표문을 바치시고 신(신)이라 일컫었으니, 명나라 황제가 아름답게 여겨 왕작(王爵)을 봉하고 선물을 내리시어 서로 바라보기가 6년입니다.
금상(今上)인 우왕께서 직위하신 처음에 적신(賊臣) 김의(金儀)가 천사(天使)를 애송하다가 제 마음대로 죽이고 돌이켜 북원으로 들어가 원나라 유민들과 더불어 심왕(瀋王)에게 몸을 맡기기를 꾀하였사오니, 이일은 천사(天使)를 죽이고 또 임금을 저버리는 것이므로 흉악한 역적 짓이었습니다.”
포은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시조라 불리울 정도로 송학을 대성한 사람으로 고려말기 30년간이나 권좌에 앉아 있으며 조정을 보살핀 인물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학식이 높고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한나라의 지도자가 공민왕이 명나라태조에게 신(臣)이라 칭한 것을 옳다고 보았다.
명나라는 건국한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국가기강이 튼튼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명나라의 강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신하가 되기를 요청한 것이다.
명나라를 세운 명 태조는 비천한 유민출신으로 성질이 잔인하여 후일 부하 8만 여명을 주살하였고 영토확장의지가 강하여 군왕으로써 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가 유교문화의 종주국이라는 것과 한(漢)족 국가라는 데서 정몽주는 우리 스스로 오랑캐라고 낮추고 명나라 사신을 천사(天使)라고 부르면서 명나라에게 귀부(歸附)하기를 요청하였으니 포은 정몽주야 말로 사대모화의 시조인 것이다
[이황은]
“중국은 하늘의 태양이자 세계의 임금이며 조선은 그의 신하이다”라고 까지 말하였다. 이황은 예조판서로 재임하고 있을 때 일본국 좌무위장군 미나모도(源義淸)에게 보낸 편지에 “하늘에 두개의 해가 없고 인류에 두 임금이 없다. 춘추전국이 통일된 것은 천지의 법칙이고 고금에 변치 않는 대의 인 것이다. 큰 명나라는 천하종주국이므로 해 돋는 동방에 처한 우리나라가 어찌 감히 신복(臣服)치 않겠으리요”라고 썼다.
조선이 당당한 주권국가라고 말을 못할망정 일본장군에게 “우리는 명나라의 신하노릇을 하는 나라이다”라고 말하여 우리민족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부끄러운 일을 해온 사람이다.
또 이황은 “우리 조상은 아득히 먼데 떨어져 있으면서도 번국(蕃國)노릇을 하며 중국을 종주국으로 모시고 있다”라고 하여 중국을 속국이 되었음을 자랑으로 알았고, “단군에 대한 기록은 허황하여 믿을 수 없고, (중국인)기자가 와서 조선을 통치하게 되어 비로소 문자를 알게 되었다”하였으며 “고려4백년에 불교가 성행하여 무도한 오랑캐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라고 하였다.
유교가 공자로부터 이루어진 학문이라 하지만 우리민족의 뿌리조차 인정치 않고 마치 중국의 통치를 받은 것으로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이기이원론과 사단칠정론을 주장하며 2백년간을 사단칠정논쟁의 원인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연구했던 이황이지만 민족정체성이나 우수성은 보지 못한 채 오로지 주자의 이론과 중국을 상국으로 떠받드는 사대사상은 우리민족을 중국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한 것이다.
중국의 번국!
중국이 주장하는 고구려는 한국사가 아닌 중국의 번국! 또는 지방정부로 매도해버리는 역사왜곡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이씨조선을 창건한 이성계가 정치적으로 중국의 개가 되기를 자청했다고 하지만 학문을 하는 학자들이 스스럼없이 중국의 개가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송시열의 사대사상]
송시열은 불벌의 타당성을 “춘추대의를 말하며 조선이 명을 종주국으로 받들기 위해서는 청나라를 쳐야한다고 상주하였다” 송시열의 뜻이 효종과 달랐지만 효종과 송시열 사이에는 불벌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여 은밀한 가운데 불벌을 계획하였으나 이 계획은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송시열은 일평생을 통하여 사대존화(事大尊華)를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송시열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명나라를 높일 것을 유언했다.
송시열이 장희빈의 소생 자를 책봉하는 일에 이론을 제기한 일로 숙종의 진노를 사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후명을 정읍(井邑)에서 받았다. 그는 임종시 자손과 문인들에게 유계를 남겼는데 “천지 만물이 생긴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까닭은 오직이 직(直)뿐이니 이것은 공맹(孔孟)이래로 상전(相傳)한 것 이니라” 라고 하였다.
제자 권상하 에게 유명을 내려 임진 전쟁 때 조선을 도아 준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건설하라고 부탁한 것이다. 송시열의 부탁을 받은 권상하는 인근의 유생들과 함께 충청도 괴산의 화양동에 만동묘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
이이와 이황선생의 경우에는 서인,동인당들의 정신적 지주였는데
화담 서경덕,남명조식같은 분처럼 선조시대에 학자로 이름난 분들이
어째서 이들은 이런단 말인가?
송자로 이름난 송시열은 효종의 북벌을 이론적인 북벌로만 생각하고
명을 받드는 사대주의자이며 남인의 허목은 송시열처럼 사대는 안했다고 하니
우리가 받들고 존경하는 인물들이 이러니 실망하지....
어떻게 동시에 극과 극인 인물이 있는건지
"한왕조가 5백년 천년을 지속하는 나라에서 무엇을 배우겠냐"
일본방문 때 한국까지 가지 않겠냐는 질문에 토인비가 한말
토인비께서는 한국의 역사를 삼국시대부터로 알고 게신다고 하니....
어떻게 이렇게 되실수가 있습니까?
첫댓글 토인비가 우리역사에 선입견을 가진다는 것과 그가 언급한 천년왕조를 지속한 로마제국을 찬향하는 것은 한국사에 대해 상당히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것이죠. 암행어사제도나 범죄수사같은 뛰어난 제도를 갖춘 국가였는데도 불과하고 일개 외국인따위가 삼국시대이전의 역사를 알겠나 지나족의 땅이 우리땅이라는것을 알겠나
토인비의 이 개색기. 그럼 한 종교가 2천년이나 가는 유럽은 뭐냐. 으이구.
토인비나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사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그냥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나라일뿐...
토인비나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사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그냥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나라일뿐...
힘이있는 사람은 약소국을 깔보는 법이며 고위관직자들은 힘있는자를 찬향하는 거죠. 실제로 퇴계가 벼슬을 안했다면 이런 오점은 없었을텐데 말입니다.
딴나라당 여전히 미국숭배하고 대통령 반미주의자로 몰아서 압박하고...역사는 반복되는걸까요? 휴우. 정치인들부터 싹 갈아치워야 하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어떻습니까? 신라시대부터 중국 사대주의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우리 민족과 문화가 명맥을 유지해 올 수 있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중화를 지배했던 만주족, 거란, 흉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리고 학자들의 사대사상을 말했는데, 그래도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무조건 중국것이라고 하여 숭배하지않앗습니다. 명나라때 붐이었던 양명학을 퇴계 이황이 비판한 "전습록변"을 보아도 알수 있듯이, 중국에서 유행하고 존중받는다고하여 그대로 추종하지는 않았죠. 물론 이황의 양명학 비판후에 성리학이 교조화 되는 경향을 보여 학문의 다양성이 사라진것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황의 책임이라기 보다, 그 후세 학자들의 다양성과 창의성의 결여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박세당과 윤휴같은 진취적인 사상가들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라지게 된 책임은 송시열과 같은 교조주의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어찌 퇴계나 이이선생때문이라 하겠습니까? 오랬동안 샇여온 뿌리는 신라의 학자겠지만 무조건 사대는 아니며 일부만 받아들일 뿐이였죠
동양에선 중국의 왕을 천자라고 칭했고 천도를 대행하는 자라 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는 교황이 그런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고요. 교리(유교, 천주교)의 실천을 통해 위계에 따른 각자 소임을 지킴으로써 세계 질서를 이룬다고 봤습니다. 그들이 이룬 학문적 성과는 시대를 초월해 분명 뛰어난 것이나, 그들 역시 자신이 처한 시대상(세계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존재였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