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묻어둔 별 / 신서영
이탈리아의 아씨시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작은 도시다. 구름 위에 떠 있는 요새 같다. 그 지역 산에서 채취한 돌을 다듬어 지은 건물들이 방어하듯 눈에 들어온다. 돌이 요술을 부린다고나 할까. 한낮의 뜨거운 열기 속에선 수줍은 소녀 얼굴처럼 분홍빛이었다가 해 질 녘이면 장밋빛으로 변한다. 중세의 숨결이 흐르는 양 혼탁한 세상의 시간이 멈춘 성스러운 곳이다.
성인 프란치스코 무덤 위에 건축물을 세웠다는 대성당이다.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로 유해가 공개되고, 다양한 행사로 순례객과 관광객들이 많았다. 벽면에는 화려한 조각상 하나 보이지 않는다. 내부도 소박하다. 웅장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에 숙연해진다. 당대 최고의 화가 조토(Giotto)가 성인의 생애를 그린 28점의 프레스코화가 벽화로 걸려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찬찬히 읽는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무소유로 청빈한 삶을 실천했던 성직자의 공간이다. 유품은 남루한 옷 한 벌이 전부다. 살아오면서 욕망에 사로잡혀 물질적 풍요만을 탐닉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묵상하며 마냥 오래 머물고 싶었다.
성당을 나와 기념품점에 들렸다. 대부분 성물聖物이고 그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이지만, 봉쇄 수도원에서 만든 수공예품들도 많았다. 나도 모르게 작은 묵주에 손이 갔다. 은은한 나무 향에 매끄러운 감촉이 좋았다. 성모자상이 새겨진 묵주 주머니까지 사자 딸내미가 놀란다. 매년 초파일이면 절에 연등을 올리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엄마 그걸 왜 사는 거야”
“그냥”
내 의지와는 다르게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냥 사고 싶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빌려온 삶이요, 이 세상은 나그네의 삶이다”라고 한 성녀 클라라를 기념한 키아라 교회에서의 여운 탓일까. 밀폐된 공간에서 기도만 하며 살았다는 봉쇄 수도원과 온몸으로 부딪친 가난이 아름다웠던 이 땅의 성자들, 우리나라 세월호 사고 때도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고 전한다.
한때 하얀 레이스가 달린 미사포와 까만 묵주는 고이 간직한 소중한 물건이었다. 시골에서 천주교 재단인 여학교로 진학했다. 교내에는 성당도, 수녀원도 있었다. 어떤 수업과목은 수녀님이 가르치기도 했다. 자연스레 수녀님과 마주할 시간이 많았다. 까만 수도복을 입은 수녀님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때마침 김수환 추기경님이 마산 교구로 오시면서 우리 성당에 거주하셨다. 주일이면 행사도 많았으며 인자하신 그분을 자주 뵙기도 했다. 그래서 쉽게 천주교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선배인 잼마 언니와 수녀가 되자고 약속도 했다. 그때 언니가 묵주와 미사포를 선물로 주었다.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성당 다니는 일이 여의치 않았다. 언니와 주고받던 편지도 뜸해지면서 소식도 끊어졌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 언니는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수녀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바른 언니가 수녀가 된 모습을 마음속에 자주 그려 보았다. 직장생활로 바쁘고 지친 날이 많았다. 주일 미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종종 늦은 저녁 성당에 갔다. 묵상하며 그냥 앉아만 있어도 어수선한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이와 오래 사귀면서도 정작 종교에 대해서는 논의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하고 시집온 첫날 밤 긴장했던지 새벽에 잠이 깼다. 이른 시간에 시부모님 방에서 염불 소리가 들렸다. 그이는 대수롭지 않게 오래전부터 매일 하시는 일이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교는 가끔 절에 다니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한국SGI불교회’라는 데 이름조차 생소했다. 불교 교리는 분명한데 뭔가 많이 달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지극한 신앙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주일에 차마 성당엘 가지 못했다. 서너 달이 지나면서 시름이 깊어졌다. 어른들은 어떤 눈치도 주지 않았지만, 묵주와 미사포를 보자기에 싸서 서랍 깊숙이 넣었다. 한집에 맏며느리로 살면서 다른 종교로 분란을 일으켜 시끄럽게 하기 싫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몹시 아렸다. 남매가 태어나고, 식구가 많은 살림살이라 정신없이 바빴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성당에 가지 못하니 믿음도 차츰 얕아져 갔다.
목련꽃이 우아하게 핀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집은 성당 가까이 있었다. 아이들이 성당 재단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다녔다. 아침에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성모상 앞에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새집은 거실이 넓어선지 시어른은 가끔 종교 모임을 집에서 열었다. 하루는 아버님이 안방으로 나를 불렀다. 왠지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당신께선 자신이 믿는 종교를 함께 하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심장이 콩닥거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매사에 정확하고 진중하신 아버님이 아니신가. 얼마나 벼르고 심사숙고하면서 이 말을 꺼냈을까. 결혼하고 십 년 만에 하신 말씀이셨다.
“저는 아버님의 종교를 누구보다 존중합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절로 우러나야 하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귀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거절을 했다. 당신께선 내 의향을 듣고 얼마나 상심하셨는지 사흘 동안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셨다. 나 역시 큰 실망을 준 것 같아 내내 잠을 설쳤다.
그날 이후 모임이 있는 날에는 거실에 있는 항아리에 풍성하게 꽃을 꽂고, 다과도 준비해 놓았다. 꽃을 좋아하시는 아버님은 흐뭇해하셨다. 어쩌면 며느리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삼 십여 년을 넘게 사는 동안 나의 응답을 듣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가셨다. 두려움이 앞섰다. 밤낮없이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당신을 따라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 생전에 그 대답을 드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참 많이 울었다.
낯선 땅을 여행하면서 유독 기억에 남는 곳이 아씨시다. 어디를 봐도 성당이요, 수도원이 눈길에 머물렀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나무 숲이 성벽처럼 이어진다. 건물이라고 하나 보이지 않는 움브리아 평원에서 맞이하는 일몰은 장엄하다 못해 먹먹했다. 노을빛에 반사되어 붉게 물든 성당들. 그곳은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이 있는 곳이다. 종교를 향한 순결한 마음이 그림이 되고, 시詩가 되고, 음악이 되어 우리 모두를 위로하고 치유해 준다. 어떤 인연이 닿았는지 내게로 온 묵주가 지난날의 기억들을 되살려낸 것이다. 그렇더라도 내가 간직할 성물이 아닌 것 같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지인을 떠올린다.
늦은 밤, 어둠을 밝히는 별 하나 마음에 불을 밝힌다. 세상을 떠도는 인생길에서 늘 한 발짝씩 뒤늦게 깨우치는 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순례자가 아닌가. 이런 부끄러움마저 말없이 품어 안는다. 이번 주말에는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꽃을 들고 산소에 가야겠다.
첫댓글 선생님 글을 올리고
좋은 소식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