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 좋은 시 다시 읽기
존재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김효숙(문학평론가)
인간보다 집이 더 많아 보이는 이 세계는 집들의 공간처럼 보인다. 인간이 들어가 사는 집은 그 외양으로만 외부에 보일 뿐 내면은 은폐된다. 인간이 언어의 집으로 들어간다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 집은 문자라는 기표로 표면화할 뿐 인간의 심층 심리는 은폐된다.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일컬은 사람은 하이데거다. 그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언어에 심오한 생각을 실어낸다고 썼다. 언어 속으로 들어간 인간은 그곳에 집을 짓고 오직 언어로써만 자신을 내보인다. 이 철학자는 예술 중에서도 특히 시에 절대권을 부여하여 시언어에 진리를 실어낼 수 있다면서 시를 특별히 고안된 진리의 전달자로 보았다. 시는 일상 언어로 소비하고 마는 장르가 결코 아니며 존재의 집을 수립하는 특별한 언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매개로 존재의 집을 세울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은 이 철학자 덕분이다. 강고한 진리가 사라지고 숱한 담론 속에서 이 세계가 재편되는 지금 시대에도 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당도한다. 진리와 담론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설령 그것을 부정한다 해도 편편의 시는 존재의 집 한 채나 다름없는 고유하고 특수한 언어의 집적물이다. 시인이 쓴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존재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눈에 익은 문자들이 배열되어 있으나 우리는 이것을 컴퓨터 자판을 바라보듯 현상적으로만 대하지는 않는다. 그 문자들 안에 기꺼이 기거하면서 그 집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발성들을 내 안의 것인 양 들을 때가 있다. 그 언어를 나의 것으로 전유하면서 그 의미에 깊이 잠겨 들 때 우리는 마침내 존재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런 뒤에야 시언어에 밀착하여 내밀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언어는 본래 언어로써만 모든 것을 현출하기 때문에 언어의 집에서 사는 시인도 오직 언어로써만 자신의 실존을 언명한다.
그런데 그 언어가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데서 시인의 시적 수행은 언제나 결핍을 자각하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보편적인 지시어는 앞서 쏟아낸 부실한 말을 보충하면서 수다한 말을 생산하지만, 시인의 언어는 이와 다르다. 시인은 되도록 적게 말하면서 그 이면에 의미의 층을 깔아둔다. 우리네 존재의 집이 그러한 것처럼 시언어도 마찬가지로 불완전하기만 하다. 한 편의 시가 나에게 올 때 마음에 세워지는 존재의 집.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 무언가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가로지르는 언어의 집에는 온갖 감정들이 엉켜 있다. 《시와산문》 여름호에 실린 신작시 중에서 존재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는 시편들은 이 같은 문제를 사유하기에 알맞다. 인간의 삶이 시작되는 곳과 마무리되는 곳이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자도, 집을 떠나 먼 곳으로 이동하는 자도, 마음의 거처를 묻는 자도 궁극에는 존재의 집을 찾아 떠도는 주체들이다. 다음 같은 시가 태어나는 배경을 보면, 이토록 정처 없어 보이는 삶에도 다 이유가 있고 그것이 존재의 집과 연루된다.
세입자 여러분
이주 기한이 지나면 도시가스 수도 전기가 모두 차단됩니다
삽살개는 띠를 두른 담벼락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서랍장은 혀를 내밀고 있네요
냉장고는 가슴을 언제 여밀까요?
골목 전봇대는 재개발이라는 부귀영화를 상연할지
돌봄 익스프레스 어디 가시거나 울울창창하십시오
함께 얘기 나누던 평상도 이제 고아가 되겠지요
젖병을 물며 이사 온 민이는 어느덧 담배를 피우네요
대문을 열면 뜨락에 옹기종기 숨 쉬는 장독대
분수처럼 퍼지던 호스의 물줄기
딸부잣집 치마폭의 웃음소리
풀벌레 우는 반지하까지
바람을 연주하던 붉은 숨결을 간직할게요, 부디
모란의 잎끝은 갈라져도 환호작약은 갈라지지 않습니다
- 박수빈, 『모란댁』 전문
이 시는 떠난 자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자를 초점화한다. 시현실은 어느 재개발 지역의 주택가에 맞춰져 있다. 말 그대로 존재의 집들이 모여 있는 실존 현장이다. 표면으로만 읽으면 시인의 내심을 드러내지 않고 심상하게 써 내려간 것처럼 보인다. 재개발 구역을 소담한 풍경으로 내걸면서 이미 떠난 사람들과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살피고 있다. 시현실은 우리의 상상 범주에서 충분히 구성할 수 있을 법한 풍경이고, 이미 떠난 자들과 달리 아직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이들이 남아 있는 정황이다. 시인은 어떠한 갈등도 비참도 슬픔도 내비치지 않으면서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으나 마지막 행에서 전환이 일어난다.
찢어지고 갈라지는 마음을 “모란의 잎끝”이 갈라졌다고 언표하면서 모란이 지고 난 뒤에는 작약이 피어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모란과 달리 “환호작약은 갈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양이 사뭇 닮은 모란과 작약이지만 그 본질을 따져보면 결코 동류일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는 시행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필 뿐만 아니라, 입 끝이 뾰족하게 갈라지는 꽃이 모란이고 둥근 것은 작약이다. 모란이 지고 나면 작약이 피듯이, 이 재개발 구역을 먼저 떠난 자들과 달리 아직 남아 있는 자들은 실존 조건이 확연히 다르다. 이후에 떠날 자들은 시인이 보기에 세입자들이며, 그들이 떠나야만 하는 당위성을 말없이 주입하는 것이 “이주 기한이 지나면 도시가스 수도 전기가 모두 차단”된다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관리 조치다.
박수빈 시인은 이렇듯 짧은 시행 한 줄에 모란과 작약의 생태를 담아내면서 이것을 모란댁의 마음으로 전이한다. 실존재가 젖먹이일 때 이 마을로 이사 와 흡연하는 나이가 되기까지 살아온 집을 떠나야 하는 삶의 조건에서 존재의 집은 결코 잊히지 않는 상처의 장소로 각인될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 같은 경우의 존재자들을 살피면서 이들의 심정을 모란의 갈라진 입 끝으로 비유한다. 인간에게 존재의 집은 안락한 잠자리와 식생을 위한 장소, 2차 생산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는 장소다. 아직 떠나지 못한 이들의 계절에 작약이 만개하기를 바라면서 시인은 자신이 지은 언어의 집에 작약을 심어놓는다. 이 시가 남다른 미적 성취를 보이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인간 삶의 이치를 단 한 줄에 압축하여, 시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언어라기보다 위로와 평안을 기원하는 말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갖가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동시대인을 돌아보면서 그 현장을 담담하게 알리고, 이들이 어디서나 “울울창창” 번성하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시에 담았다. 인간의 거처도 새의 둥지와 다름없는 존재의 집이지만 이것이 “부귀영화를 상연”하는 재개발 구역으로 특화된 현실을 넌지시 꼬집으면서, 작약 꽃잎이 피어나는 순간의 감정을 “환호”라는 말에 이입하여 아직 떠나지 못한 자들에게 응원의 말을 건넨다.
밤은 발굴되지 않은 누군가의 뼈가 분명하다
언제든 살아날 수 있다는 듯
숨겨진 수많은 눈들이
다족류처럼 손등을 기어가듯
여기와 거기 사이에서
죄도 없이 주뼛거린다
나는 분명 여기에 있는데
나는 나를 증명하려고 하고
나를 닮지 않은 패스포트 속 사진은
나보다 명징하다
한 세계를 건너는 데는 다른 한 사람의 말이 필요하다
나의 증명은 내가 아닌 것들로만 시작되고 끝난다
나 없이도 출구 너머의 세계는 환하고
나는 자꾸만 발목이 어두워져
이젠 되돌아갈 수 없는 먼 항로를 바라본다
손바닥을 펼치면 낯선 골목길이 지문으로 찍힌다
손바닥을 오므리면 신념이 배가 된다
나는 공손하고 너는 지시한다
나는 목적지가 과정이고 너는 과정이 목적이라서
나는 시작점이고 너는 경유지다 나는 활자로 대변되고
너는 센서에 주목한다 같은 자리 다른 패턴
환승에는 관심이 없다 당신은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여행이란 말은 떠오르지 않고 사랑이란 예감만 달라붙는다
너는 이국 물고기를 풀어 놓는다는 생각으로 진중하고
나는 패스포트 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으로 나가는 관문에서 자기소개서는 주머니 속에서 더 얇아지고
하릴없이 증명하며 살아야 하는 심사에서
늘 배경이 주인이다
어느 먼 곳은 이제 밤이 되려 한다
먼 곳은 지금 내게 가장 가까운 곳이다
나는 오래된 심장을 숨긴 채
이방의 땅으로 실종된다
- 홍성남, 『입국심사』 전문
멀리 떠나고자 하는 자는 그간에 끝없이 자기 증명을 해온 삶에서 해방되려는 마음을 품는다. 인간사가 번번이 자기를 증명하는 일로 점철되고, 그것을 완수했을 때에야 존재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방식에 점차 익숙해지는 것을 안정된 삶으로 여기지만 우리에게는 다시금 그간에 익숙해진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홍성남 시의 화자는 낯선 이방에 첫발을 디디기 전 출국 심사대 앞에서 통과 절차를 거치는 중이다. “한 세계를 건너”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의 말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보아 모국어로는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 이 세계가 자기중심으로 운행한다고 믿어 온 유아唯我의 주체가 낯선 세계에 홀로 기투된 채 잠시 막막한 현실 속에 서 있다.
이 시에서 문제적 지점은 자기 증명이 단지 여권이나 주민등록증에 기재된 기호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도달한 화자의 반응에 있다. 그는 자신이 지니지 않은 것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그 중심에 이방의 언어가 있을 것이며, 이제껏 자신이 누구인지 표명해 온 모국어가 잠시 무용해지는 순간이다. 시인이 쓴 것처럼 “나 없이도 출구 너머의 세계”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환히 펼쳐져 있고, 그곳으로 편입되는 절차는 자신의 것이 아닌 언어로 진행된다. 뿐만이 아니다. 검색대를 통과하면서 지문이 읽히도록 지시어의 요구대로 자신의 고유성을 적극적으로 노출해야 하고, 자세도 공손히 낮추어야 한다. 불응할 시 저 바깥의 세계는 절대 금지 구역이 되고 말며, 그는 한낱 “활자로 대변”되는 사람이자 “나는 분명 여기에 있는데”라고 독백하는 자에 그칠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화자가 ‘너’라고 부르는 상대적 타자는 그가 마주 보고 서 있는 검색대로 추정된다. 화자의 고유성을 화자보다 더 종합적으로 간파하는 지식 정보의 기술화는 “센서”가 스캔하는 이 기계의 능력으로 실현된다. 화자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예리하게 타자를 아는 기계의 역능을 화자는 잘 알지 못한다. 명령권자의 지시어는 절대 금지 항목을 내장한 언어여서, 그것을 위반하는 행위는 곧 죽음과도 같다. “자기소개서”를 소지한 채 취업 목적으로 이동하는 자가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출구 너머의 세계”로 진출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에게 현실은 이동의 가능성이 철폐된, 즉 이동 행위의 죽음을 증명하는 일에 그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지니지 못한 것으로 적극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그것은 저 너머의 세계가 원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유아를 벗어나면서야 알게 되는 이 세계의 작동 원리는 여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시인이 발견한 궁극의 이치는 언제나 “배경이 주인”이라는 사실이다. 유아적 독단, 번번이 자기화로 수렴하는 자기중심의 세계관으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의 의미에 무지할 수밖에 없다. 집 밖으로 나서면 나 아닌 타자들로 이뤄진 세계가 펼쳐질 뿐, 그 어느 곳에도 나를 위한 전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시인은 언어의 집에 들어앉아 온전히 자기중심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이 이 같은 이유로만 시작詩作 수행을 한다면 다시금 유아적 독단에 자신을 감금한 채 유폐 감정을 독백하는 차원에 그칠 것이다. 홍성남 시의 화자가 자발적으로 낯선 땅에서 “실종”되는 사태는 그러한 독단에서 해방되려는 당찬 포부를 몸소 실행하는 일처럼 보인다. 그에게 존재의 집은 여일하게 “활자로 대변”되는 세계에만 있지는 않다. 아주 먼 곳을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전환하려는 존재자가 자신의 기대를 몸소 실행하는 그곳에서만 새로운 세계는 열린다. 때문에 그는 지금 “이국 물고기를 풀어 놓”아줄 검색대와의 대면을 환영한다. 그는 언제든 낯선 곳에 기투되어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나리라는 기대를 품은 자다. 익숙한 존재의 집을 벗어나 기꺼이 실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은
나뭇가지에 맺혀 있는 빗방울을 손가락으로 옮긴다
이제부터 손가락은 나뭇가지를 대신해서
흔들리고 꺾이고
새가 날아갈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새를 향해 뻗는다. 새는 온데간데없고 새는 처음부터 없었고 새는 마음을 떼어낸 조각이고 새는 커졌다가 작아지며 꼬깃꼬깃해진다
망원경으로 새를 보면
깃털만 보여서
그려보기로 했다
내가 그린 깃털은
바다라고도 노을이라고도 부르다가
어떻게든 불러도 네가 끄덕여서
마음이라고 불렀고
그때부터
새는 날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새에 닿을 듯 말 듯 자랐다
- 강주, 『망원경』 전문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