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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덕주사의 마의 태자 와 덕주 공주의 전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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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덕주사의 마의 태자 와 덕주 공주의 전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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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랑자가 월악산 자락 덕주골에 자리 잡은 덕주사를 찾아간다. 덕주사는 上德周寺[상덕주사]와 下德周寺
[하덕주사]로 나뉜다. 상덕주사는 하덕주사에서 1.5Km 떨어진 위쪽으로 극락보전, 응향각, 그리고 마애여래입상
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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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상,하, 둘다 돌아 볼 참이다. 먼저 정확한 기록은 오락가락 하지만 덕주사의 창건 연대를 보면 신라 진평왕
9년인 557년에 월형 산에 월악사 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는 하지만 막상 덕주사에서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들어 '속설에 이르길 德周夫人[덕주부인]이 창건하였다'라는 기록을 따라 후삼국시대~고려 초기인 10세기
중반에 창건했다고 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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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상덕주사는 1622년[광해군 15]에 중수되었음이 옛 극락전 자리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지금의 덕주사에서는 1206년[희종 2]에 조성된 禁口[금구]가 발견되어 고려시대 덕주사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덕주 부인이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딸이자 마의태자[김일金鎰]의 누이인 德周公主[덕주공
주]를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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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마의태자는 마로 된 옷을 입고 살았다 하여 '麻衣太子[마의태자]'라 불렸다. 금강산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
던 마의태자[김일]의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자면 경순왕이 신라를 고려에 바치는 군신회의 에서 마의태자는 동
생 덕지왕자 및 이순유 등과 함께 불가함을 극력 諫[간]하였으나 결국은 경순왕의 뜻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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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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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5년 11월 이미 고려에 입조할 뜻을 전한 경순왕이 개경으로 옮겨가자 그는 동생 ‘덕지’, ‘덕주 공주‘와 함께 월악
산에 잠시 머물다가 덕주 공주만 남겨 놓은 채 개골산[금강산의 겨울산]에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麻衣[마
의:삼베옷]만 입으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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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德周山城[덕주산성]의 명칭이 인근의 덕주사 및 덕주 공주의 이름과 관련된 것은 덕주사 주위에 성을 쌓
았고 절을 짓고. 마애불을 조각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제천 덕주 산성과 관련하여
“주의 동쪽으로 45리에 있고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2,670자이고 안에 샘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폐기되었다”라
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산성의 둘레를 布帛尺[포백척]으로 환산하면 15,266.69m로 약 15㎞가 넘는 규
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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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해를 돕기 위해서 布帛尺[포백척] 이란 민간의 생활과 가장 연관을 많이 가지고 사용된 나무로 만든 자(尺)
이다. 다른 척들은 일반 백성들이 반드시 소유할 필요가 없었지만, 포백척은 옷감의 재단을 위해서나 포의 매매
를 위해서 상인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였다. 따라서 포백척은 민의 생활사의 이해를 위해서도 정확한 복원이 필
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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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60대 이상의 장년들은 과거 시장에서 썼던 1m 정도의 대나무 자를 기억할 것으로 안다.
각설하고 현재 절은 원래 하덕주사로 불리던 절로 대동지지 등의 서적엔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上德周寺
[상덕주사]라 하고, 이곳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지금의 덕주사를 예전에는 下德周寺[하덕주사]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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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마당에서 바라본 북바위산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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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행히도 1951년 한국 전쟁 당시 군의 작전상 상ㆍ하덕주사는 군인들에 의해 모두 불태워져 버렸다.
이후 지금의 상, 하덕주사는 1963년에 재건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1970년 중창과 1985년에 중건을 각각 하였는
데, 1985년 중창 때에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는 한수면 역리에 있던 고려시대 석조약사여래입상을 덕주사로 옮
겨 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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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8년에 새로 대웅보전을 지었고, 2007년부터 주지스님이 불사를 크게 일으켜 예전 전각 등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앞서 여행기 에서 설명 한 대로 월악산은 산 자체가 여자산신령이 머무는 곳이라 음기가 강하다
는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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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석 :덕주사에는 생뚱맞은 남근석 3개가 있는데 이는 월악산이 예로부터 여신이 다스리는 산이라 음기가
강해서 그 음기를 누르려고 남근석을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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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주범자비: 비석의 내용은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으로 범문을 번역하지 않고 음 그대로 외는
'다라니'를 새긴 사례는 한반도에 4곳이 발견되는데 모두 북한 지역에 있고 남한에는 이곳 송계리가 유일하여 보
존가치가 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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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산의 지형도 여인의 모습이라고 해서 충주호 쪽에서 올려다보면 여인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누워있는
모습이고, 제천 덕산 쪽에서 보면 영락없는 여인의 젖가슴이라고 한다. 또 미륵 리에서 보면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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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까, 하덕주사에는 소형 주차장을 지나면 좌측으로 작은 언덕위에 남근석이 3개나가 삼각을 이루며 서
있고 또 절 주변에 남근석이 종종 보이는데 이건 산의 강한 음기를 누르려는 민간신앙의 흔적이라 할 수 있겠다.
또 한 월악산 주변에서 절이나 절터로는 덕주사, 중원 미륵리사지(사적 제317호),신륵사, 보광암, 보덕암, 자광사,
등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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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주범자비: 대웅전 옆에 자리 잡은 '대불정주범자비' 1988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송계계곡 하천 정비
를 하던 중 발견된 것으로 인도의 옛 문자인 범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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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덕주사에는 마의 태자와 그의 누이인 덕주 공주의 이야기가 있다. 마의 태자가 덕주사 미륵불을 만들고 나
서 금강산에 들어갔고, 덕주 공주는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한다. 재미난 것이 하나 있는데 주역과 불교 철학을 깊
이 연구하였던 예언가 탄허 스님의 여러 예언 중 하나가 있는데. "월악산 靈峰[영봉] 위로 달이 뜨고, 이 달빛이 물
에 비치고 나면 30년쯤 후에 여자 임금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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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임금이 나오고 3-4년 있다가 통일이 된다."라고 탄허 스님은 덕주사에서 이렇게 예언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월악산에는 물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기에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러나 우연의 일치
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언 8년 뒤인 1983년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월악산의 달빛이 물에 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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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30년 뒤인 20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실제로 이 말도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아
직까지도 마지막 문장인 통일 예언은 실현되지 않고 남아있다. 오히려 그 여자 임금이 쫓겨났기 때문일까?
아무튼 월악산의 해발고도는 그리 높지 않다. 당장 인근에 있는 산들(소백산. 태백산)만 봐도…….하지만 길이 험
하기로는 소백산, 태백산을 아득히 뛰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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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남한 영내 산 중에서 월악산보다 더 험한 산은 설악산, 지리산 두개밖에 없다. 월악산은 그 정도로 오르
기 빡센 최종 보스급 산이다. 끝으로 이왕지사 마의 태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마의 태자와 덕주 공주의 설화에 대
한 이야기를 꾸려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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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이 사라진 절을 다시 짓다보니 창건연대에 비해 오래된 건물이나 석물 등은 없는 편이나 절에서 보는
덕주봉 쪽 풍경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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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태자와 덕주 공주의 전설[편집]
신라 마의태자는 아직도 전국 곳곳에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전설로 꿋꿋하게 남아 있다. 1000여 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을 이기지는 못한 것 같다. 사실 마애불과 덕주사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딸 덕주
공주와 마의 태자가 신라의 멸망을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마애불이 있는 이곳에 머물러 절을 세우고,
개골산[금강산의 겨울]으로 떠난 오빠 마의 태자를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는 기록 이외에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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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의 태자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
까지 친일 반민족 행위자인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신문 소설을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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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전 석조약사여래입상: 약사전 석조불상은 한수면 정금사 절터에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신체의 비례가 맞지 않아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충주댐을 만들면서 수몰지역이 되
어 1983년 이곳으로 옮겨왔으니 덕주사의 불상은 아니다.
약사여래불이란: 열두 가지 서원을 세워 중생의 질병 구제, 수명 연장, 재화 소멸, 의식 만족을 이루어주며 중생을
바른길로 인도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부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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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극작가 유치환의 형 유치진이 마의태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면서 마의태자의 비극적인 이미
지가 대중들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족보상 경순왕은 897년에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고, 마의태자는 경순왕
이 20살이었던 917년에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가 멸망한 936년 1월 경순왕은 39세였고 마의태자는 19세
였다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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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마의태자 일행이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병력을 양성하러 떠날 때 잠시 월악산
에 머물렀다. 그때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마애불을 만들면 억조창생을 구제할 수 있다.' 하고 말하였다. 같은
시각에 덕주 공주도 같은 현몽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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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매는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 생각하고 계곡 물에 목욕재개하고 서쪽 고개를 넘어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곳
에 석불입상을 세우고, 월악산 영봉 밑에 8년간 마애불을 조각하며 세월을 보냈는데, 그 자리가 바로 오늘의 상덕
주사 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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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덕주 공주는 계속 덕주사에 머물 길 원하여 그곳에서 출가하여 여생을 보내다 입적 했지만 마의태자는 끝내
금강산으로 떠났다. 그 후 미륵사 미륵불상과 덕주사 마애불상이 북두칠성의 빛을 받아 서로 상서로운 기운이 상
통한다고 하며, 그를 통해 나라의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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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마의 태자가 미륵불을 만들고 금강산에 들어가고, 덕주 공주는 마애불을 조성했다고도 하고, 고려가 마의
태자를 미륵사에, 공주를 덕주사에 감금하여 남매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불상을 새겼다는 전설도 있다. 왕자가
마애불이 되었고, 공주가 미륵사지 입상이 되었다고도 하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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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마도 남매지간의 그리움으로 인해 상대의 얼굴들을 새기지 않았을까 하는 유랑자의 생각이다. 이렇듯이
나라 잃은 서러움이 묻어있는 덕주사의 스토리텔링 치고는 기구한 운명이다. 아무튼 마지막 혈육인 마의 태자와
헤어진 공주는 절에 몸담고 날이면 날마다 아버지인 경순왕을 그리워하며 오빠 마의태자의 건승을 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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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구구절절 가슴앓이를 했을 공주를 생각하니 아련한 마음이 파고들어 가슴이 아려오는 덕주사 절집이다.
아무튼 마애불이 마의태자 얼굴로 미륵불이 덕주 공주의 얼굴이 새겨진 것이라는 설 등등이 존재한다. 그런데 유
랑자가 보기에도 마애불은 남성 형이고 미륵불이 여성에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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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무래도 마의 태자가 누이가 그리워 공주의 얼굴을 미륵불로 새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뭐가 뭔지 딱 부러지게 정리된 것은 없고 복잡하다. 하여 유랑자가 이런 저런 설들을 모아서 각색해 보았다.
그런데 유랑자가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있다. 마의태자 그는 왜? 동해안을 따라 금강산에 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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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쉬운 길을 두고 하필 험한 내륙의 산길을 택했을까? 티벳의 오체투지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당시 마의 태자는 경주∼영주 부석사∼문경∼월악산∼여주 신륵사∼양평 용문사∼홍천∼인제를 거쳐 금강산
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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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에선 은행나무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삼았다. 양평 용문산에선 그 지팡 이를 땅에 꽂으며 “단단히 뿌
리를 내려 못다 한 신라 천년사직을 대신해 달라”고 말했다. 그 지팡이가 오늘날 ‘용문사 천년 은행나무로 자랐다’
는 것이다. 아무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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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은 보수중, 12월에나 볼수 있다는 관계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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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 탑의 전설[편집]
상덕주사에는 牛公塔[우공탑]이라 하는 탑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도 전설이 있다. 어느 날 덕주사 건물을 새로 지
으려 하니 어디선가 건장한 황소 한 마리 나타나 건물을 지을 자재를 싣고 왔다. 그래서 승려들은 황소가 싣고 온
자재들로 새 건물을 짓는데, 자재가 부족할 때마다 황소가 다시 나타나서 부족한 자재를 싣고 와서 공사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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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황소의 도움으로 덕주사 건물을 완공했는데 황소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에 승려들은 덕주사 건물
완공에 큰 공을 세운 황소를 기려 탑을 세우니 바로 우공 탑이라 한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덕주사 건물이 완공되
자마자 황소가 쓰러져 죽었으므로, 황소가 죽은 자리에 우공 탑을 세웠다고 한다. 牛公[우공]은 소를 높여 부른 말
이다. 그러나 우공 탑이 정확히 언제쯤 세워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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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에 건립된 월악산 남쪽의 덕주사는 고려에 백기를 든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딸인 덕주 공주가 망국
의 한을 품고 머물던 곳으로 상덕주사 법당자리 동편의 큰 암벽 남면에 새긴 높이 14m, 폭 5.4m, 머리 높이 3.7
m의 거대한마애불(보물 제406호)은 덕주 공주가 자신의 형상을 새긴 것이라는 설과 오빠 마의태자를 그리워 하
며 새긴 것이라는 설 등, 두 개의 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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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주사 탐방을 온다면 절뿐 아니라 등산로를 따라 1.5km정도 상류 계곡에 있는 상덕주사 마애여래입상까지
다녀와야 덕주사 탐방을 제대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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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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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주사 찾아가기
도로명:충북 제천시 한수면 미륵송계로2길 87
구(지번) 한수면 송계리 125 (지번)
☎ 043-653-1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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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나들이 홈클릭👍
▶https://tour.jecheon.go.kr/base/main/vie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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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나들이 홈페이지 클릭 ✌
▶ https://tour.chungbuk.go.kr/www/index.do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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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클릭 👌
*https://cafe.daum.net/b2345/9toB/2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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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메모
▶1:당일 여행 코스= 송계계곡 8경(자연대,망폭대,덕주산성 남문, 망폭대, 와룡대, 팔랑소)
→덕주사(수경대, 학소대, 덕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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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박 2일 여행 코스=의림지→박달재→(숙박)→송계계곡→덕주사→신륵사 → 하늘재
→귀가 → PS~1박2일 산책길=월악산 만수계곡길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143,~ 걷기
좋은길 7선/거리2.0km/만수교~마의태자교~만수교[소요시간:6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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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박 3일 여행 코스
★.해설사가 직접 동행하는 가스트로 투어.[제천미식이와 떠나는 셀프맛여행]★
►체험안내: 가스트로 A, B코스 (각 코스별 식당 5곳)~사전예약 필수
-A코스 : 관계의 미학 -덩실분식 찹쌀떡 -마당갈비 영양밥 -빨간오뎅 -샌드타임
-B코스 : 대장금식당 -상동막국수 -이연순사랑식 -제천 맥주 -빨간오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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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삼한의 초록길→의림지→역사박물관 →솔밭공원→비룡담 저수지(생태숲)→ (숙박)
2일차:가스트로 A.B →중앙시장→달빛정원 → 교동 민화마을 →관란정 → (숙박)
3일차:한방엑스포공원 →탁사정 →배론성지 →박달재 →목굴암(박달과 금봉이사당)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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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찾아 가는길
▷*버스=서울-제천,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30분 간격(06:30~21:00) 운행, 약 2시간 소요.
▷*열차[Itx.]무궁화=청량이-제천역 청량리 역에서 2시간 견격, [KTX 는 1시간 간격 운행]
약 1시간 53분 소요.[KTX는 1시간 소요]
►철도고객센터는 1544-7788,1588-7788이다.
▷*자가정보= 경부(중부.충주 나들목)고속도로→영동(중부내륙)고속도로→평택제천고속
도로→중앙고속도로 → 남(북)제천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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