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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6일 연중 제17주일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When Jesus raised his eyes
말씀의 초대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의 예언자였다. 어느 날 그는 자신에게 바친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으로 백 명이 넘는 군중을 먹게 한다. 시종은 불가능한 일로 여겼지만 예언자는 주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킨다(제1독서). 신앙인은 일치를 위한 노력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한 분이시고 성령께서도 한 분이시다.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이기에 언제나 일치를 위해 애써야 한다(제2독서). 군중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 그분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병자들을 낫게 하시고 마귀 들린 이를 풀어 주시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확인했던 것이다. 하지만 먹을 것이 부족했다. 영혼은 풍요로웠지만 육신은 배고팠다.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기적을 베푸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분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불치병을 낫게 하셨으며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빵 몇 개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우리는 기적을 좋아합니다. 어려서부터 도깨비방망이가 일으키는 기적 이야기를 들어 왔습니다. “금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이 나오고, “은 나와라! 뚝딱!” 하면 은이 나오는 그런 도깨비방망이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적 속에서 살아갑니다.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으면서도 먹고삽니다. 공장을 다녀 본 적이 없으면서도 옷을 입고, 컴퓨터 놀이를 하고,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우리는 값을 치르지 않고도 따뜻한 햇볕을 즐기고, 시원한 바람을 맞습니다. 표를 사지 않고서도 아름다운 대자연의 경치를 즐깁니다. 자동차는 기름으로, 컴퓨터는 전기로 작동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금치나 빵이나 밥이나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고도 힘을 냅니다. 기계는 고정된 작용만을 되풀이하는데 우리는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기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기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저는 요즘, 매일 아침마다 보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다. 바로 일기예보 사이트입니다. 날씨가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며칠 뒤에 우리 본당 Camp가 있거든요. 500명 가까운 본당 식구들이 이동하는 캠프이기 때문에 날씨가 걱정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면,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캠프가 엉망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캠프 가는 기간 동안 날씨가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수요일에 조금 흐리지만,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맑음으로 표시가 되더군요.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오늘 아침에 보니 수요일에 그 지역은 비가 온다고 되어 있더군요. ‘왜 날씨가 바뀐거야?’하면서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기는 합니다. 캠프 기간 내내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이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긴 내 앞 길이 항상 평탄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고속도로를 생각해 보세요. 이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목적지를 갈 수 있도록 만든 도로입니다. 그래서 신호등이 없지요. 또한 횡단보도도 없어서 일부러 멈출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고속도로라고 해서 막히지 않을까요? 이 고속도로도 꽉 막혀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삶이 무조건 잘 되리라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욕심입니다. 고속도로가 막힐 수 있는 것처럼, 내 삶도 갑자기 막힐 수 있습니다. 믿었던 직장에서 해고당할 수도 있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믿었던 자녀와 친구가 나를 슬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뻥 뚫려야 정상인 것 같은 내 삶이 갑자기 막혀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막혀 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려니’ 하면서 포기해야 할까요? 이때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우 인간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의 안목으로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서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측면으로 생각하지도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어느 아이가 가지고 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지요. 하느님의 측면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만 가능한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 분명히 꽉 막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라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과 같은 커다란 기적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이가 가져온 아주 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같이 우리에게 아주 작은 정성만 있어도 주님께서는 우리 편이 되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커다란 기적은 우리의 삶 안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기적들을 느껴 가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부자인지 알고 싶다면 오늘밤에 가진 돈을 모두 잃는다고 했을 때 내일 무엇이 남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라(보에트커).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 일 -황지원 신부- 수도원 본원에서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행사를 치를 일이 많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전삼용신부- 저는 어렸을 때부터 행복을 삶의 모토로 삼고 살았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하고 건강해야 하고 사람들과 사이도 좋아야 하고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해야 하는 등의 수많은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계획 중 이루어 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오게 되었고 대학도 결혼도 돈 버는 것도 다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행복합니다. 저는 공부를 가장 싫어했습니다. 유학 나가기도 싫었고 기도만 하며 조용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생 때 유학을 나갔고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제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석사만 하고 박사를 하지 않기 위해서 꾀를 썼습니다. 논문 점수를 낮게 받는 것입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지막에 논문 지도 교수님께 짜증을 내게 되었고 성격이 좋지 않은 그 교수님은 박사를 하지 못할 성적을 주었습니다.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유학가라는 주교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은 과목을 바꾸어서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다른 석사를 하나 더 따게 되었습니다. 석사 하나 더 할 때는 매우 힘이 들었지만 성경을 하고 교의를 하니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잔꾀 부리다가 제 자신이 당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 하느님 뜻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폭넓게 공부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계획대로 된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계획이나 계산이 안 통하나봅니다. 오늘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외딴곳까지 몰려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해 기적을 베푸실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필립보에게 이 많은 사람을 다 먹이려면 그 빵을 어디에서 살 수 있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이는 그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필립보는 세상적인 계산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의 모델입니다. 그는 열심히 계산해보고 그들을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도 부족하겠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리 잡고 앉게 하라고하신 다음에 한 아이가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시고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고작 두세 명이 먹으면 끝나버릴 것을 가지고 장정만 오천 명이 넘는 배고픈 군중을 앞에 두고 감사기도를 바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그것들을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각자 모여 앉은 백성들은 개별 교회들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제들입니다. 또 빵은 신자들이 봉헌하는 예물이고 예수님의 성체를 의미합니다. 이 복음 말씀에서 조금 더 읽어보면 이 기적의 빵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내려오게 했던 만나와 이어지고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인 당신의 몸과 음료인 당신의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심으로써 이 기적이 단순히 빵만 늘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인 당신의 성체를 사제들을 통해 배부르도록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실 것임을 알게 됩니다. 미사 때 사제들도 빵과 포도주를 하늘로 들어 올리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 빵과 포도주는 사실 신자들이 농사를 지어서 봉헌하는 예물입니다. 신자들은 이 때 일주일동안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그 소득의 십분의 일을 봉헌합니다. 사실 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셔서 받게 되는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감사의 표로 십분의 일만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사제는 그것을 받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봉헌제물을 받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천 배, 수만 배 더 늘려서 다시 봉헌하는 우리들에게 되돌려주시려고 미사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작은 예물과 다시 우리에게 되돌려주시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와 성혈의 가치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십일조를 바치는데 하느님께서 다시 갚아주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감사’가 빠져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더 많이 받기 위해서 예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 벌게 해 주셨어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쳐야 참다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란 희랍어로 하면 ‘에우카리스티아’라고 하고 ‘미사’를 ‘에우카리스티아’라고 불렀습니다. 미사 때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봉헌이 없다면 진정한 미사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성체와 성혈을 영하더라도 각자의 마음 자세에 따라 그 받는 은총의 정도가 다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하면서도 만 원짜리가 지갑에서 나오면 깜짝 놀라서 다시 천 원짜리를 찾다가 천 원짜리가 없으면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일단 줄을 섰으니까 오천 원짜리를 내고 갑니다. 정말 모든 것을 봉헌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감사의 봉헌은 그 봉헌한 것의 수천 배, 수만 배로 돌려받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예전에 제가 한 여자를 사랑할 때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한 여자도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인가보다.’ 왜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해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고 다른 무언가를 더 찾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을 해 보시고 결혼을 해 보신 분들은 그런 느낌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만을, 남편은 아내만을 바라보고 만족해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겨도 남편만, 혹은 아내만 있으면 길에 나 앉아도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장담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말은 불가능한 약속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외에는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즉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오천 명을 배불리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을 깨달을 때, 그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을 하느님께 봉헌할 줄 알게 되고 그 봉헌으로 자신은 물론 다른 수많은 사람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제가 혼자서 한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저는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저는 당신 것이니 당신이 가지십시오. 저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했더니 수많은 사람이 만족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었던 제가 하느님께 제 자신을 봉헌하고 났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제 강론과 강의를 듣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전화를 하기도 합니다. 봉헌의 삶이란 마치 봉헌된 밀떡이 주님의 살로 변화 되듯,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은총이 왜 이렇게 오지 않는지 불평하지 말고 진정으로 많은 은총을 받을 자세가 되어 있었는지 먼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카인과 아벨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카인은 봉헌 할 줄 몰라서 가진 작은 은총마저 빼앗긴 사람이고 아벨은 봉헌할 줄 알아서 은총을 부풀릴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준비하고 계십니다. 오천 명이 아니라 오만 명, 오십만 명이라도 충분히 배불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은총을 받으려는 우리 그릇이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것도 감사하는 맘으로 봉헌하실 줄 알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축복을 한 아름 안겨주실 수 있었습니다. 은총을 받을 수 있는 큰 그릇이란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자신이 가진 작은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오롯이 그 분께 맡길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불평불만만 하면 불평불만할 일이 더 생기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더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와 찬미와 봉헌을 드리고 그것에 합당하게 주시는 은총을 받아가는 시간이 바로 미사입니다. 이 미사 동안 우리에게 일주일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봉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찬미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크게 하며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아 가도록 합시다.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되고 -김찬선신부- 제가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안 돼”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내게 먹을 것 주었느냐? -배광하신부-
나누어 주어라
▤밥상 공동체
3실링과 하느님은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이기양신부-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말로,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 -장광재신부-
오늘 복음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대한 내용입니다. 풀이 많은 들 판에 지쳐 있는 이들이 떼를 지어 앉아 있는 모습과 그들을 산 위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 까지마음속으로그려보노라면이런성가가떠오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무것도 아쉽지 않네. 푸른 풀밭 시냇가에 쉬게 하사 나의 심신을 새롭게 하네.” 가톨릭 성가 54번입니다. 이 성가를 저는 장례식장에서 많이 듣고 부릅니다. 왜 장례식장에서 자주 불릴까요? 그 것은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유족들에게‘주님께서 그의 목자시니 하늘나라에서도 아무것도 아쉽지 않도록 책임 져주실 것입니다’란 의미가 위로와 용기를 주기에 충분하 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아이가 가지고 온 물 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를 유심히 보시고 오히려 그 걸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작 은 집보다는 큰 집이 좋고, 소형차보다는 중형차가 더 멋있 어 보입니다. 냉장고의 음식들도 버리는 것이 많을 때도 있 습니다. 그냥 있으면 좋으니까 또 없으면 불편할 것 같으니 까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 장만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자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또 짐이 되어 버립니다. 인사이동 때마다 힘든 것이 바로 이삿짐을 싸는 것입니다. 읽지 않는 책을 정리하면서도 맞지 않는 옷을 정리하면서 도 언젠가는 읽을 거야, 살을 빼면 입어야지 하며 다시 짐 속으로 넣어버리는 저 자신을 보면 이삿짐이 아닌 욕심 덩 어리들을 챙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데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많지 않아도 되고 부족해 도 되며 없어도 상관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은 마음, 겸손한 마음, 주님을 바라보려는 열의만으로도 우리 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 주십니다 (마태6,25-34).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알 려주시려는 뜻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느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작거나 부족한 것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며 감사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믿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산다면 오늘 복음의 기적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일러 주시려고 하신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의 덧셈은 이상하고도 특별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90에 10을 더해 100을 만드십니다. 또 70을 가지고 있 는 나에게 30을 더해 100을, 50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50을, 10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90을 보태 100을 만들어 주십니 다. 우리는 복음에서‘이백 데나리온으로도 부족합니다’라 고 말하는 제자와 아이의 작은 음식으로도 감사를 드리신 예수님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런 주님께서 당신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군중을 피해 혼자 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주일을 지내는 우리도 주님 을 따라 고독 속으로 물러가는 시간을 가져봄이 어떨까요?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이스라엘에서 ‘보리빵’은 빵 중에서 가장 흔하고 값싼 빵이었기에 동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빵이었다고 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아이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던 아주 가난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하시면서 가난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잘것없는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중요한 재료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려고 했던 중요한 일은 배고파 하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일과 그 일을 통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한 6,41)이심을 나타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새벽을 열며
얼마 전,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고 있는데 급한 전화가 온 것이에요. 얼른 성지로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도로 하나만 건너면 저의 목적지인 가게였거든요. 따라서 저는 조금 늦더라도 물건을 사가지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도로를 건너기 위해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도 신호를 바뀌지 않던 지요. 그렇다고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널 수도 없고……. 이 신호등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꾹 참고 이겨냅시다. 빨간 불 후에 반드시 파란 불이 켜집니다. 빠다킹신부
나눔
“어떤 것을 자기 혼자만 갖고 싶다는 소원은 악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정원순 신부-
◆10년 전 나는 필리핀에서 가장 큰 민다나오 섬 다바오에서 2년간 산 적이 있다. 그곳 학생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던 나는 매주 토요일에 가난한 지역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주일에 돌아오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모자람 없이 채워 주시는 주님 -홍승모 신부-
나를 내어 놓을 때 기적 일으켜 -김영수 신부-
요즘에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점심식사를 급식으로 하고 있어서 도시락에 얽힌 추억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배고픈 학창시절에 도시락은 가장 큰 위안이며 즐거움 중의 하나였습니다.
-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 근방 어느 산등성이에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미 기록된 세 개의 복음서들 안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 중 중요하다고 생각한 주제들을 선택하여 명상하는 식으로 엮어 기록하였습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기적 이야기들은 그것이 사실인 지를 묻기 전에, 그 이야기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서들은 정확한 사실만 기록한 현대식 전기가 아닙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그 시대 독자들이 알아듣고, 같은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조욱현 신부-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다운 배려인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이것을 마르코 복음에서 취하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취하는 것은 이 기적에 이어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체성사에 대한 교의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21주일까지 요한복음에서 언급되는 성체성사에 관한 것이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Life is a Miracle) -이수철신부- ‘잘 참아 견디라’라는 등 쉽게 말한 것이 참 마음에 걸리고 부끄럽습니다. 내가 아파보니 말은 쉽게 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큰 실패, 실직, 미취업, 가족 간의 불화, 이혼을 앞둔 부부, 알콜이나 도박 중독, 재산 다툼, 심한 우울증 등, 복잡한 사회만큼이나 복잡하고 힘든 일들 얼마나 많은지요!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따른 남북의 긴장과 국제적 냉기류,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참으로 총체적 난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에 있습니다.
이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 소원 이뤄지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은 다른 데 있음을 깨닫고 훌훌히 자신의 뜻을 털어버리고 즉각 주님께 순종하는 것, 이게 진정 믿음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굶주림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 치유 받았던 이들 결국은 모두 죽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진리, 사람은 언젠가는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온통 아버지의 원하시는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래야 진정 내적 평화요 자유로움입니다. 기적도 치유도 일어납니다.
아버지께 전적으로 위탁합니다.
말 그대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입니다. 이래야 후회함이 없고 하느님 앞에서도 떳떳합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도와 정성이 담겼으면 하느님은 기적의 도구로 쓰십니다.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전혀 초조하거나 불안한 기색 추호도 없어 보입니다.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합니다.
최선을 다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온전히 아버지께 그 결과를 맡겼을 때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 육신의 양식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주님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하여 억지로 예수님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아 현실적 욕구를 채우려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체험, 내적 기쁨, 내적 평화의 체험이 더 큰 기적입니다.
지금 여기서 영원한 삶을 사는 게 우리의 궁극 목표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고립 단절감의 외로움 속에 영육이 황폐화 되어가는 겁니다.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신 하느님이요,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복잡하고 산만한, 천박한 얕고 가벼운 세상에서 때때로 떠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온통 삶은 하느님의 기적이요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아버지와 깊은 일치의 친교를 나누려 혼자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늘 ‘한분’이신 주님과 일치감 속에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주님을 모시니 참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주님 주시는 참 좋은 선물,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멘. 한 아이의 전재산 -박상대신부-
오늘은 나해 연중 제17주일이다. 오늘 주일부터 연중 제21주일까지 주일미사의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이 봉독된다: 연중 제17주일(요한 6,1-15), 연중 제18주일(요한 6,24-35), 연중 제19주일(요한 6,41-51), 연중 제20주일(요한 6,51-58), 연중 제21주일(6,60-69). 요한복음 6장은 예수께서 인간이 매일 필요로 하는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위한 성체성사를 (간접적으로) 제정하시고 그 신비를 밝혀주시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 6장은 앞선 5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짜타 못가의 중풍병자를 치유하자, 유다인들의 예수의 권한에 시비를 걸어 논쟁을 벌이는 5장 전체의 내용이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보도되고 있는 반면, 6장의 내용은 갈릴래아 호수와 바로 근처인 가파르나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긴 대목의 요한복음 6장은 구조상 대략 6단락으로 구분된다. ① 단락: 예수께서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다.(1-15절) ② 단락: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서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신다.(16-21절) ③ 단락: 군중들이 호수 동편에서 가파르나움으로 이동한다.(22-24절) ④ 단락: 예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대화형식으로 내리신다.(25-59절) ⑤ 단락: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제자들의 불신을 토로하자 예수께서는 배신자를 예고하신다.(60-66절) ⑥ 단락: 시몬 베드로가 대표적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께서는 12사도 중에 배반자가 있음을 예고하신다.(67-71절) 오늘의 복음은 6장의 첫 번째 단락에 속하는 대목으로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빵의 기적(표징)을 보여주고 있다.(1-15절)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 많은 군중이 떼를 지어 예수님을 따른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은 하루 종일 예수를 따라 다닌 것 같다. 조그만 산등성이에 이르러 예수께서 제자들과 자리를 잡자, 그 주위로 무려 5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앉았다. 다들 지치고 굶주린 모습이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누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들이다. 예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 물론 불가능함을 알고 하신 말씀이다. 돈도 없고, 그만한 양의 빵을 살 곳도, 파는 곳도 없다. 예수께서 다시 한번 제자들과 군중들을 살펴보신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허리춤을 움켜쥔다. 무엇이 잡히는 모양이다. 사실 사람들은 길게 내려 입은 겉옷 속에 전대(纏帶: 돈이나 물건을 넣어 허리에 차기 위해 무명이나 베 따위의 헝겊으로 만든, 중간을 막고 양끝을 튼 긴 자루)를 차고 있었다. 그 속에 며칠 먹을 빵이 들은 게다. 그들은 통상 집을 나설 때 누룩 없이 납작하게 만든 빵(무교병)을 몇 개씩 전대에 넣어 다녔다. 그냥 먹어도 되고, 쨈을 발라먹으면 맛이 그만이다. 하루 종일 예수를 따라다니다 보니 빵을 다 먹어버린 사람도 있고 아직 남아 있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하나 선뜻 자기 것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안드레아가 용케도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아이를 지목한다. 아이가 자기 생명과도 같은 양식을 잘못 간수한 것인가? 아이의 작은 체구 때문에 허리춤이 불룩해서 안드레아에게 들킨 것인가? 아니면 순수한 아이 마음이 자기의 것을 몽땅 식사의 음식으로 내어놓은 것인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제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건네어진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다. 복음서는 그저 "감사의 기도"라고 하지만 분명 이 기도는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기도였을 게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렀던 눈으로 사람들을 살펴보신다. 삼삼오오 둥글게 모여 앉은 군중들 가운데 빵도 마른 물고기도 수북히 쌓여있다. 모두가 배불리 먹는다. 여기 저기서 이야기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따금 한바탕 웃음소리도 들린다. 그야말로 즐거운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단 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것도 예수님의 손을 통하면 모두를 위한 큰 사랑의 기적이 된다 나눔으로써 소유한다 -상지종신부- '나눔'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눔'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면을 보지 못하기에 갈수록 나누기를 꺼립니다. 인정이 메말라가고, 서로가 자신을 것을 챙기려고 바둥거리는 모습이 안쓰럽게 다가오는 요즈음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곧 나눔의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빵 한 개를 백 개로 만들고, 물고기 한 마리를 천 마리로 부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내 빵'을 '네 빵'으로, '내 물고기'를 '네 물고기'로 내어놓을 수 있도록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닫혀져 있던 마음을 열고, '나'와 '너'라는 울타리를 깨부수어 하나의 '우리'로 묶어 세우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함께 한 사람들은 이제 하나가 되었습니다. 나는 너의 것이고, 너는 나의 것임을 체험하였습니다. 이 체험은 세상이 주는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미로운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라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기적, 이 체험, 나눔으로써 얻어진 소유는 결코 세상에서 말하는 소유, 인간적인 욕망에 따른 소유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안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서로를 나눔으로써 서로의 소유가 되라는 초대를 받는 것입니다. 이 소유는 지배를 뜻하지 않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는" 소유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소유야? 이런 소유는 필요 없어.' 라고 말입니다. '소유'를 '지배'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예수님의 소유가 된 신앙인들은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기 나눔은 성체 성사를 통해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게서는 성체와 성혈로 자신을 완전히 나누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소유물로 만드십니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눔, 예수님의 소유는 곧 우리의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완전한 나눔을 통해 완전한 소유를 이루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나'와 '너'가 하나가 됩니다. '나'와 '너'가 하나가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완전한 소유,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이 담긴 완전한 소유입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신 아름다운 소유입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우리 자신을 벗들을 위하여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내어놓음으로써 서로를 소유해야 합니다. 서로를 완전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세상에 드러내는 살아있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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