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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12월〔冬十二月〕1일 정해(丁亥)
김 대장(金大將)이 진지(陣地)를 허곡(墟谷)으로 옮겼다. 의병(義兵)의 여러 유사(有司)들과 나는 인사드리고 물러나 신창(新昌)에서 숙박했다.
○ 12월 2일 무자(戊子)
의병장(義兵將) 민여훈(閔如塤)은 거창(居昌)으로 향하였다. ○ 장사(將士)들 가운데 힘써 싸운 사람은 자품(資品)을 올려 지급했다. 우리 군(郡)에서는 박원일(朴元日)ㆍ서응원(徐應元)에게 겸사복(兼司僕)을 제수하였다.
○ 12월 3일 기축(己丑)
전라도(全羅道) 의병장(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이 병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의 지휘 아래로 들어갔다.
○ 12월 4일 경인(庚寅)
순찰사(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했고, 곽재우(郭再祐)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했다는 전갈이 왔다. 순찰사는 변란이 발발한 초기부터 본도(本道)를 담당하는 직무를 맡으면서, 힘을 다해 충성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천지에 서약하고, 한 지방을 방어하여 흉측한 칼날을 막았으니, 공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비변사(備邊司)나 이조(吏曹) 등은 태만하여 왕에게 포상을 건의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왕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 주라고 명령하자, 이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유감을 가진 자들이 더욱 심하게 입방아를 찧으며 가로막는 데 꺼림이 없었으니, 나라의 명맥이 위태롭구나!
○ 12월 6일 임진(壬辰)
초모관(招募官)인 종부 정(宗簿正) 곽간(郭趕)이 군(郡)에 도착했다. 순찰사(巡察使)가 좌우도(左右道)의 유민(流民)들이 도로에 잇달아 있어 날마다 천 명을 헤아리며 개중에는 전투에 나아가기를 자원하는 자도 없지 않으므로 곽간에게 여러 고을로 다가가서 유민을 불러 모으라고 명령했으나, 한 명도 여기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애를 끌어안고서는 배고픔에 울부짖으며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 처지에 있는 자들이 어찌 자원하여 전투에 나갈 리 있겠는가.
○ 12월 7일 계사(癸巳)
초모관(招募官)은 산음(山陰)으로 향했다. ○ 오늘 밤 큰 눈이 내렸다. ○ 전란의 과정에서 사망한 충청도(忠淸道) 의병장(義兵將) 조헌(趙憲)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승려 영규(靈圭)가 동지(同知)에, 전라도(全羅道) 의병장(義兵將) 고경명(高敬命)이 이조 판서(禮曹判書)에, 유팽로(柳彭老)가 사간(司諫)에, 안영(安瑛)이 첨정(僉正)에, 경기도(京畿道) 의병장(義兵將) 김제갑(金悌甲)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각각 증직(贈職)되는 전교가 내려졌다. 조정에서 나라에 충성한 사람들에게 보답하려는 뜻이 아름답다고 말할 만하다. 하지만 혹시 온갖 죽을힘을 다해 적을 토벌한 사람이 한 차례의 명도 받지 못하고서 장수와 사졸이 해체되는 경우가 있으니, 얼마나 애석한가. ○ 영천(永川)의 의병장(義兵將) 권응수(權應銖)가 적을 토멸한 공로가 있어,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하여 좌병영의 우후(虞候)로 삼고, 양주 목사(楊州牧使) 고언백(高彦伯)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삼고, 홍계남(洪戒男)은 통정대부에 올려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는다는 전교가 내려졌다. ○ 포로로 잡혀 있던 재상(宰相) 김귀영(金貴榮)과 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등이 왕자(王子)를 보호하지 않고서 자기들만 먼저 도망쳐 왔으므로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라고 주청하였다. [이 얘기는 거짓이다.]
○ 12월 8일 갑오(甲午)
적들이 함창(咸昌)의 당교(唐橋)에 모여 진을 쳤다. ○ 양산 군수(梁山郡守) 변몽룡(邊夢龍)이 왜적의 함선 60여 척과 막사 천여 칸을 불태웠는데, 불에 타 죽은 자가 무척 많았다.
○ 12월 9일 을미(乙未)
나는 모간(毛看)으로 가서 숙모(叔母)에게 인사를 드렸다.
○ 12월 10일 병신(丙申)
순찰사(巡察使)의 비장(裨將) 원사립(元士立)이 양주(楊州)에서 왔다. 그가 말하기를, “경성(京城)에 머물고 있는 적들은 남산(南山)의 아래에 모여 진을 치고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산(北山) 아래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조정(朝廷)과 왜(倭)가 각처에서 모의하여 내응(內應)을 도모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일은 양주 목사(楊州牧使) 고언백(高彦伯)이 꾸민 것이다. ○ 적의 무리들은 칠원(柒原)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
○ 12월 14일 경자(庚子)
김 대장(金大將)이 장수들을 보내 밤을 틈타 개령(開寧)에서 적을 베도록 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우리 군(郡)의 사람 최상량(崔祥良)이 퇴주했다는 이유로 목을 베여 효시(梟示)되었다. ○ 장모(丈母)가 돌아가셨다는 부음(訃音)이 비로소 도착했다. 처음에 처형(妻兄) 김득윤(金得允)과 그의 동생 득지(得智)가 어머니를 모시고 산속으로 피난을 가서는, 아침저녁으로 옮겨 다니면서 겨우 목숨을 온전하게 부지하고 있었다. 가을에는 속리산(俗離山) 아래로 들어가 초막(草幕)을 지어 머물고 있었다. 장모는 본래 중풍을 앓았는데, 깊은 산속의 타관살이때문에 이전의 증세가 재발하였다. 11월 26일에 산막(山幕)에서 숨을 거두었다. 산속에 임시로 빈소를 설치했지만, 소식을 끊다시피 하고 살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야 처형이 처가 자식을 거느리고 왔기 때문에 비로소 그 전말을 상세하게 알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 12월 15일 신축(辛丑)
호남(湖南)의 대장(大將) 임계영(任啓英)이 장졸(將卒) 5백여 명을 파견하여, 성주(星州)의 적을 들판 한가운데로 유인한 뒤 습격을 감행하고, 다수의 적을 사살하여 거의 섬멸했다. 하지만 성주 목사(星州牧使) 제말(諸沫)과 고령 현감(高靈縣監) 곽천성(郭天成)이 머뭇거리며 가만히 앉아 진격하지 않아서 입성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때문에 정 대장(鄭大將)이 크게 노하여 성주 목사 제말과 고령 현감 곽천성 등에게 곤장을 쳤다.
○ 12월 17일 계묘(癸卯)
우리 군(郡)의 군졸들이 추위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교대할 수 있는 법을 수용해 달라고 대장에게 요청했으나, 대장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 데리고 도망한 자가 4백여 명에 이르렀다.
○ 12월 18일 갑진(甲辰)
무곡 차사원(貿穀差使員) 정랑(正郞) 박성(朴惺)이 군(郡)으로 들어왔다. 나와 노 원장(盧院長)ㆍ박공간(朴公幹)ㆍ노지부(盧志夫)가 정랑을 만났다.
○ 12월 19일 을사(乙巳)
우리 군(郡)에서는 총 96섬의 의곡(義穀)을 모아 장부를 만들어 박 정랑(朴正郞)에게 올렸다. 박 정랑이 칭찬하며 감탄했다.
○ 12월 20일 병오(丙午)
김 대장(金大將)이 군사를 변암(弁巖)으로 옮겼다. ○ 수령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장(大將)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 12월 21일 정미(丁未)
순찰사(巡察使)가 여러 고을에 전령(傳令)을 보내어, 모든 산의 사찰(寺刹)에 있는 놋쇠로 만든 기물을 찾아내어 철환총통(鐵丸銃筒)을 주조하도록 했다.
○ 12월 22일 무신(戊申)
호서(湖西) 순찰사(巡察使)와 방어사(防禦使)가 죽산(竹山)에서 대전(大戰)을 벌여, 적의 머리 6백여 급을 베었다. ○ 큰 눈이 내렸다.
○ 12월 25일 신해(辛亥)
나는 집에 있으면서 편전(片箭)을 쏘고자 후원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화살이 왼손을 잘못 맞혔는데, 합곡(合曲)으로부터 장지(長指)를 관통하였다. 왼손이 장차 못쓰게 될 형편이니, 걱정이 어떠하겠는가. 심하다! 이것도 왜적으로 인해 입은 피해이다. 진정 이 적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활쏘기 연습을 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 12월 26일 임자(壬子)
나는 손을 다쳤기 때문에 의병(義兵)이 있는 곳에 갈 수가 없었다. 공간(公幹)과 현경(玄卿)이 와서 병을 살피고 문안하였다.
○ 12월 27일 계축(癸丑)
개령(開寧)에서 접전을 벌였다는 기별이 비로소 왔다고 한다. 25일 새벽에 제장(諸將)이 군사를 거느리고 개령을 포위한 가운데, 김충민(金忠敏)이 7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들어가서 적에게 활을 쏘다가 말에서 떨어져, 적의 무리 10여 명이 아군(我軍)을 향해 곧바로 돌진해 왔다. 아군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적들이 승세를 업고 아군을 추격해 왔는데, 아군 가운데 상해를 입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 군(郡)에서는 우문부(禹文敷)ㆍ백수진(白守眞) 등 30여 명이 사망했으니, 비참한 일이다. 이날 정 대장(鄭大將)의 군대도 역시 성주(星州)를 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 나는 감기를 앓아 두통이 심하게 일어났다. ○ 김산(金山)의 도장(都將) 최기준(崔琦準)이 개령에서 적을 맞아 힘써 싸우고도,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돌아왔다.
○ 12월 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金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金大將) 면(沔)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徐禮元)을 김해(金海)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金睟)가 체직(遞職)되었다.
○ 12월 29일 을묘(乙卯)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이 산음(山陰)을 출발해서 사근(沙斤)에 도착했다가 곧바로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 나는 병이 너무 고통스러워 먹고 마시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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