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화라도 났는가. 불덩이 같은 입김을 내뱉는다. 늦더위에 지친 탓인지 즐거운 여행의 출발에도 괜히 짜증이 났다. "공항으로 갑시다.” "해외여행 가시나 보죠?" 택시 기사의 질문에 누구 부아를 지르나 싶어서 응대를 않고 가만히 있었다. 옆자리의 아내가 공백을 깼다. "아니요, 제주도 가요. “아! 그래요. 여기서 삼십 분이면 충분히 도착합니다.” 시간에 쫓기는 듯한 모습이었던지 기사는 묻지도 않는 도착 시간까지 알려주었다. “손님, 내 나이가 얼마쯤 돼 보입니까?"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별 사람 다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대각선으로 힐끗 쳐다보니 앞머리가 약간 벗겨졌으나 이마에 주름이 없어 “한 오십쯤 됐습니까?" 하면서 되물었다. "아이고 잘 맞추시네요. 사십 여덟인데요.”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까지 술 한 잔 안하고 담배 한 대 안 피웠으며 그 흔한 회관에도 안가고 노래방에만 두세 번 가봤다면서 무슨 자랑처럼 늘어놓았다. 들어보니 요즘 세상에 이런 별난 사람이 있나 싶어서 다시 한 번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금껏 무슨 낙으로 살았으며 왜 사느냐고 물었더니 술과 담배는 체질에 안 맞아서 못 했단다. 이런 머저리 같은 사람이 ‘남자 망신은 혼자 다 시키는 구나.’ 웅얼거리면서 말문을 닫았다.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아내가 신기한 질문을 했다. “부부는 성격이 반대로 만나는데 집의 아주머니는 어떤 분이세요?" "예, 맞심다. 우리 집사람은 술도 잘 먹고 노래도 잘 부르고 회관에도 자주 가는 모양입디다." 하며 아주 마누라 자랑에 신바람이 났다.
흔히들 제 마누라 자랑을 하면 팔푼이라 하는데 가슴이 덜컥했다. 이 남자가 정신이 있나? 시원해져 오는 에어컨 공기 탓인지 대화가 차츰 식어갔다.
비행기가 제주 공항으로 기수를 잡고 기류 탓인지 기체가 너울춤을 추듯 뭉게 구름을 헤치고 있다. 휴가철이 지난 평일이어서 빈 좌석이 절반 이상이었다. 아내와 여행을 다녀도 언제나 별로 대화가 없었다. 집안일에 대해 의논하려고 끄집어낼 기미가 보이면 말도 하기 전에 집안에서 살림만 하면서 그런 것도 해결 못 하느냐며 지레 입을 막았다. 그러는 나를 보고 폭군과는 대화가 안 된다고 아내는 포기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아기자기한 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아내가 느닷없이 공항에 오는 택시 기사 이야기를 했다. 그런 남자와 사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하겠냐면서 술과 담배를 안 하니 마누라는 속 썩일 일도 없을 것이며, 마음대로 나다닌다니 자유롭고 세상 걱정할 일이 없지 않느냐면서 중얼거렸다.
“술, 담배도 못하고 오십이 다 되도록 회관 한번 가지 않은 그런 꽁생원을 그것도 남자야? 아까 그 택시 기사가 했던 말 정말로 곧이듣나? 다 거짓말이야. 이 사람아." "거짓말은 무슨 거짓말, 사람이 진실해 보이고 나는 참말인 것 같던데." "그런 남자와 결혼하지 왜?”
싸우다시피 오가는 대화는 대꾸 없는 아내의 중단으로 침묵이 흘렀다. 남국을 연상케 하는 제주 공항 앞의 야자수가 찾아온 여행객을 반가이 맞아주는 손짓을 보며 호텔로 향했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 3박 4일 동안의 여행기간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3박 4일간의 여행이었지만 별로 느끼고 감동 받은 것이 없었다. 몇 번 가본 탓도 있었지만 직장에서 보내주는 공짜 탓인지 입장료가 없는 시시한 곳만 다녔기에 머리에 남은 것은 떠오르지 않고 한라산 산행만이 기억에 새롭다. 그것도 정상 등반 통제 탓으로 중턱의 위세 오름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쉬운 미련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여행 때 봤지요. 다들 몸 생각한다고 술 안 마시는 분들이 많은 것을……. 이번에 가시거든 그 택시 기사 분처럼 술, 담배 안하고 건강 생각 좀 하소,” 순간 화가 났다. 여행기간 내내 그 택시 기사만 생각했었나. “술, 담배 안 한다고 오래 사냐. 사람 목숨은 하늘만이 아는 걸 왜 모르는데!”
소리를 워낙 크게 질렀더니 앞뒤 옆 좌석 사람들이 돌아봤다. 창피스러웠던지 성질 건드려 봐야 좋을 것 없다고 판단했던지 아내는 아무 대꾸가 없다. 대꾸 없는 침묵이 무섭다. 한 동안의 침묵이 목덜미에 땀을 내게 하며 숨 막히는 시간이 달리는 비행기의 롤링과 피칭이 뒤엉켜져 머리가 어찔했다. 침묵을 깨고 수습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서 .....“앞으로 절대 술 안 먹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구공항 도착이 가까워오니 내리실 준비를 하라는 기내 방송과 겹쳐졌다. "누가 술 먹고 싶어 먹는 줄 아나.”
직장 생활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여자들은 모른다. 변명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에 여자라는 단어를 끌어 들였다. “여자, 여자 하지마소!, 여자들은 다 바보인줄 아나, 여자들은 스트레스 없는 줄 알지만 살림 살면서 남자들보다 더 스트레스 받는다는 것을 한번이라도 생각 해 봤어요?"
여자 여자 하지 않겠지만 남자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남들과 비교하는 것이니 앞으로 남자 같지 않은 꽁생원 같은 택시기사와 절대 비교하지 말라는 엄포성 발언이 활주로에 넣는 기체의 흔들림과 함께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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