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5월 서울 금호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자동차에 홀로 뛰어올라 경성부회(府會) 평의원 등 4명을 칼로 찌른 사건이 일어났다. 스물아홉 살 송학선이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송학선은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여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다"고 했다. 총독 일행인 줄 알고 거사를 벌였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송학선의 거사 동기였다. 그는 3년 전 여름 진고개를 지나가다 어느 상점에서 안중근 사진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소원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1926년 5월 2일 자를 비롯 16차례에 걸쳐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은 최근 논문 '일제 강점기 안중근에 대한 기억의 전승, 유통'에서 '안중근의 사진이 일제 강점기 항일의 상징으로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대중들은 의거 직후부터 안 의사 사진과 엽서를 소장하려고 했다. '충신 안중근'이라 쓴 엽서도 팔렸다. 항일 의식을 가졌던 사람들 집마다 안중근 엽서가 발견되지 않는 곳이 없었다. 1914년 조선 헌병대사령부는 안중근 동생 안정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 사진엽서를 만들어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에 우송했다고 보고했다. 조선일보 1926년 1월 17일 자엔 '안중근 사진으로 청년 2명 검거' 기사가 실렸다. 황해도 재령에서 쇠사슬로 결박된 안 의사 사진을 복사해 비밀리에 팔다가 붙잡혔다는 내용이다.
안 의사를 기리는 노래도 널리 불렸다. '영웅모범가' '독립군가' 등으로 안 의사를 비롯한 역대 애국 지도자를 추모하는 노래다. 물론 단속 대상이었다. '안중근 타령者 겸이포 경찰서에'(본지 1921년 3월 30일 자)처럼 치안 방해 혐의로 처벌됐다. 그래도 막을 순 없었다. 안중근은 '항일' '애국'의 아이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