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의 낮꿈꾸기] 새해 결심, 당신의 새로운 탄생에 초대합니다 | 서울신문
매년 달력 새롭게 바꾸는 존재는 인간뿐
시간 개념 있어서 뜻있는 삶·행복에 관심
‘새해 결심’은 자기 삶에 헌신하려는 의지
무수한 작심삼일 거쳐 새 삶 에너지 받아
고로 새해 결심은 사흘 못가도 당신 축제
달력에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새해’가 지닌 특별한 의미가 달력 속에 있는 날짜들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새해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 새해에 우리가 만드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목적,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일 뿐이다. 마치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던 칠판을 모두 지우고, 새롭게 그 칠판에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쓰는 것이 바로 새해 결심의 의미이다. 시간 개념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은 새해가 되어 이전 해의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걸면서 지난해를 돌아보며 새로운 달력 속에 그려지는 다가오는 미래를 구상하곤 한다. 과거와 다른 미래를 생각하며, 자신과 새로운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난해와 새해의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신과 새로운 약속을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새해’라는 칠판에 새로 쓴 그 기획에 따라서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 새해를 비로소 ‘새해’로 만드는 의미이다.
매년 달력을 새롭게 바꾸는 존재는 이 세계에서 인간뿐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중의 하나는 시간 개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죽음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철학과 종교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 자신의 생명이 무한히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인식은, 그 죽음성이 주는 두려움과 한계를 넘어서는 욕구를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과 종교란 이렇게 죽음을 지닌 존재로서의 두려움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한 삶을 넘어서서 어떻게 의미로운 삶 또는 행복한 삶을 이룰 것인가라는 관심을 가지게 한다. 이렇듯 철학과 종교가 죽음을 넘어서는 행복한 삶에 대하여 관심을 두는 것은 동식물과 달리 인간이 시간 개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죽는다, 식물과 동물은 소멸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키에르케고르가 ‘결혼은 해도 후회를 할 것이고, 하지 않아도 후회를 할 것이다’라고 한 말을 빌려서 ‘새해 결심은 해도 후회할 것이고, 하지 않아도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키에르케고르는 새해 결심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새해 결심이란 특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개입하고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담아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헌신을 통해서 비로소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의미가 구성된다. 그러한 목적에 이르기 위한 ‘의도적 헌신’이 없는 삶이란, 끝없는 실존적 심연으로 우리 자신을 사라지게 만든다. 목적의식이 없는 삶은 불안을 가져온다.
의미 있는 삶이란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만이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새해 결심이란 이러한 진정한 의미의 ‘자기 사랑’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 사랑’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니체는 그의 ‘즐거운 학문’에서 ‘새해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나는 여전히 사유한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사유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새해를 맞이하여 자신으로부터 무엇을 소망하는지를 표현하는 것이 허락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니체 자신이 새해에 원하는 것은 모든 사물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배우는 것, 그리고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새해 소망을 가지면서 새해 결심을 한다. 모든 것에 ‘예스를 말하는 사람(Yes-sayer)’이 되고 싶다는 그의 새해 결심은 ‘삶의 철학자(philosopher of life)’로서 삶에 대한 전적 긍정에 대한 갈망을 담아내고 있다. 인간을 동물과 다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약속을 할 권리(the right to make promises)’를 지닌다고 니체가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많은 철학자가 인간의 죽음성(mortality)을 그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삼은 반면 한나 아렌트는 ‘탄생성(natality)’을 중요한 개념으로 삼는다. 아렌트는 ‘탄생성’을 사실적 탄생성, 정치적 탄생성 그리고 이론적 탄생성으로 나눈다.
여기에서 사실적 탄생성은 생물학적 탄생을 의미하며 인간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지닌 존재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정치적 탄생성과 이론적 탄생성이다. 생물학적으로 탄생하는 것은 인간에게 오직 한 번만 일어나는 사건이다.
(인간 출생이라는 것은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재생산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문제로 확장되어서 다루어져야 한다. 인간 출생의 사건은 인간들 사이의 상호 존중과 신뢰로부터 용서와 약속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 는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더 나은 방향으로의 인간 사회를 예고하는 정치 적 사건이다)
(아렌트의 정치행위 이론을 떠받치는 두 주요개념인 ‘자유’와 ‘다수성’은 모든 이해관계와 도구성을 떠나 있는 무중력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아렌트는 무엇보다 ‘시작으로서의 자유’를 이야기하는바, 이는 인간의 출생성(탄생성, natality)에서 비롯되는 자유이다. 인간 누구이든 배제-부정됨 없이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자유를 탄생이라는 실존적 경험-사실을 통해 정치-공영역의 이유로서 살려낸 아렌트에게서 자유란 새로운 정치적 시작(공동의 공간에 모여 함께 말하고 행위하는 삶의 시작)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자유는 세계 내의 유한하고 우연적인 자유이며, 비주권적-무근거적인 자유이다.
시작으로서의 자유와 함께 정치행위의 기원이자 귀결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다수성이다. 다수성에 의한, 다수성을 위한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다수성은 정치 행위의 자유-자기목적성-자기충족성의 징표로서, 이 다수성의 공간이 얼마나 온전히 형성-유지되는가가 아렌트적 순수정치의 척도인 셈이다. )
그러나 인간의 내면은 끊임없이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믿고,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끝을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탄생의 능력은 새로운 해의 시작에 새로운 결심을 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이 점에서 보자면 새해 결심은 자신의 새로운 탄생성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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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탄생성 - 시작하는 자
"인간은 각자가 탄생함을 근거로 해서 이니티움, 즉
시작이면서 세계로 새로 온 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시작하는 자발적 능력을 지니며, 그래서 시작하는
자가 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아렌트는 세계창조설과 연관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니티움”(initium; 시작, 출발)과 “프린키피움”(principium; 태초)의 구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린키피움”은 요한복음에서 “세계의 시작”을 의미하지만, “이니티움”은 오히려 "시작(출발)으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세계가 창조되고난 이후에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점을 아렌트는 주목한다. 인간은 세계와 함께 동시에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시작인 이니티움”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마치 이 세계가 그와 함께 새로이 발생하듯이” 하나의 시작이며, 이 세계 속에서 인간은 “새로 온 자들”이면서 “낯선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의 인간의 시작(initium)으로서 인간의 탄생은 개별적이고 유일하고 불가역적인 “누군가”의 시작이다.
“탄생성” 덕분에 모든 인간은 우선적으로 “한 번 유일하게 새로운 자"로서 세상에 나타난다. 탄생이라는 사태로 주어진 이 유일성 때문에, 유일한 새로운 것은 마치 모든 인간에게서 다시 신의 창조 행위가 반복되고 증명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인간이 “시작(initium)으로서” 창조되었다면, 그 인간은 최초로 이 세계에서 새롭고 유일한 “누군가”의 시작함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나 아렌트의 새로운 시작으로서 탄생성은 “아무도 아닌 자” 였던 자가 “왜 도대체 누군가”로 존재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것은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라는 의미를 묻는 물음이며, 이것의 대답은 바로 누군가가 하나의 시작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시작하는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나 아렌트의 이러한 탄생성(출생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구원과 결부된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겪는 실수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인간의 실존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