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천상륙작전 72주년
풍전등화” 의 기로에 선 대한민국” 을 공산화 속에서 구출한 미국” 을 비롯한 민주열강” 의
활약상을 보시죠..
72년전 9월15일에 있었던 민주국제연합군” 의 인천상륙작전 실화 입니다.
지금의 세계경제10위권으로 도약한 원동력 인데~~ 요즘 젊은 층 들은 전연 그런 상황에
대해 모르고 고마운 마음도 없네요 !
** 한국전쟁의 대 역전극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비롯되었다.
상륙목적지가 아주 불리한 仁川港 인지라 사전에 적을 속이기 위한 기만작전 즉 陽動作戰
(양동작전)이 필요했다. 양동작전 지역으로 서해안의 군산, 동해안의 포항 근해, 주문진 근해
가 거론되기도 했다. (사진 양동, 선제 작전 참조)
한국전쟁을 지휘하기 전에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전쟁을 치루면서 미해군에 대한 깊은 신뢰
를 갖게 되었다.니밋츠 제독과 태평양을 半(반)으로 갈라 西南태평양사령관 임무를 수행하면
서 수많은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천생 군인인 맥아더는 적의 背後(배후)를 찌르는 강점과 스릴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해군 상륙전단의 잠재력과 무서운 힘을 믿어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최종평가회의가 열렸다.
1950년 8월 23일 오후5시 일본 도쿄 맥아더 사령관 집무실에서 열린 각 군별 작전 설명회에
서 상륙전단을 직접 지휘하게 될 제임스 도일(James H. Doyle) 해군 소장은 상륙작전에 "어려
움은 있으나 불가능 하지는 않다" 라고 보고를 마치었다. 이어 맥아더 장군의 百戰老將(백전
노장)다운 소신과 확신에 찬 웅변적 논리 전개가 있었다. 장장 45분 간의 열정이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이 자리에는 미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가 직접 파견한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대장,
미 해군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만' 대장, 극동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 제7함대사령관 '스트
러블' 중장, 그리고 호랑이 굴로 직접 뚸어 들 제1상륙전단 사령관 '제임스 도일' 소장 外 기라
성 같은 미 육, 해, 공군 장군들이 배석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주장한 인천 상륙작전의 핵심은 :
(1) 전략적으로 수도 서울의 신속한 奪還(탈환)
(2) 미국의 위신 회복과 유엔군의 사기 전환
(3) 固着(고착)된 낙동강 전선 역전
(4) 북괴군 괴멸과 失地(실지) 회복 등의 이유였다.
(4)항의 失地(실지) 회복은 38션 以南을 의미하였다.
[실지 회복에 관하여는 李承晩의 뚯과 배치되는 부분이었다.]
미국 최고 수뇌부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뚯을 꺽지 못하였다. 맥아더 다운 카리스마였다.
1950년 9월 9일 일명 "크로마이트(Cromite)" 인천상륙작전은 승인되었다.
본격적으로 세분화 계획이 진행되었다.
우선 仁川 수로 문턱에 있는 섬들을 확보하고 인천과 수도 서울지역의 군사첩보를 수집하는 일
이었다.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미 해군 '마이클 제이 루시' 중령이 孫元一 총장의 보좌관 겸 첩보
수집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7월 10일 루시 중령은 한국해군으로 구성된 부대장(CTG 96.7)으
로 임명되었다. / 한국 해군참모 총장(CTE 96.70) 손원일은 즉시 부산 경무대로 가서 李承晩
대통령에게 인천상륙작전 계획에 대한 개략 보고를 하였다.
李承晩은 대단히 만족스러워 하면서 "에드머럴 손 잘해 주어..." 라고 격려해 주었다.
손원일 총장은 본부의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을 불러 임무를 주었다. 우선 인천 水路(수로) 외곽
의 목표는 靈興島(영흥도)와 德積島(덕적도)였다.
작전명령 93호로 시달된 작전명은" Lee Operation" (702 함장 이희정 중령의 이름)으로 명명되
었고, 부대 편성은 한국 해군 PC-702함 외 7척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유엔군 영국 순양함 '케냐
(Kenya)'함 과 카나다 구축함 '아다바스칸' 함이 함포지원 임무를 맡았다.
8월 16일 이희정 중령은 각 함정에서 차출된 110명으로 상륙군 중대를 편성하고 702함 항해사
장근섭 중위를 중대장으로 임명했다. 8월 18일 새벽 작전을 개시해 오후 2시경 덕적도를 완전
탈환하였다.
그리고 미처 피난가지 못한 청년들로 국군 의용대를 편성하였다. 戰果(전과)는 북괴군 26명 사살,
7명 생포 그리고 구금되었던 주민 9명을 구출하였다. 아군의 피해는 全無(전무) 하였다.
"Lee Operation" 島嶼(도서)확보 작전을 하드웨어라고 한다면, 인천+ 수원+ 서울 지역에 대한
북괴군 군사 첩보와 민심 동향을 파악하는 "Xray Operation"은 소프트웨어 확보 작전이었다.
이는 咸明洙(함명수) 소령이 담당하였다.
1950년 8월 어느 날 부산 해군사령부의 함명수 소령은 마음에 두었던 정보국 소속 장교들을 광복
동 중국집에 불러 식사를 나누면서 믿을 만한 부대원들을 5-6명 씩 선발토록 지시하였다.
이유나 목적에 대해서는 일체 불문에 부쳤다.
8월 16일 첩보공작 요원들을 최종 선발하고 함명수는 손원일 총장에게 보고하였다. 함명수 소령은
특수첩보대 요원들을 이끌고 8월 18일 새벽 1시 자갈치 시장 부두를 출발하였다. 보조선 1척이 뒤
를 따랐다. 부산을 출항 6일째 되던 날 배는 영흥도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咸(함) 소령이 출동 목적과 임무를 설명하였다. 이 작전에는 최규봉 켈로부대(3 명)도 합류
하였다. 그만큼 철저한 비밀이 요구되었다.
김순기 중위와 임병래 소위 組(조)는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무기와 화폐를 지참, 야음을 틈타
인천 시내로 잠입했다. 전쟁 발발 전에 정보국 소속이었던 민간인 2명이 합류해 주어진 임무를
동반 수행하였다. 서울과 수원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군사첩보를 세세하게 수집하였다.
수집된 병력 규모와 화력 그리고 병참 현황 등 상세 첩보는 영흥도에 잡입 한 美극동사령부 특수
요원들에 의해 맥아더 사령관에게 직접 보고 되었다. 가장 신속하고 최신의 살아 있는 첩보였다.
맥아더 사령부의 상륙계획은 더욱 공고히 굳혀져 갔다. 孫元一 총장이 바라던 바 였다.
또다른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는 좁은 인천수로를 꼭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있는 팔미도 등대를 밝
히는 임무였다. 이 특수임무 수행을 위해 극동군사령부 "클라크" 소령 외 5 명(미군 장교3명,한국군
장교 3명)으로 구성된 팀이 일본에서 등대의 구조와 고장 수리법까지 배워 특파된 것이다.
그만큼 팔미도 등대를 점화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였다. 팔미도 등대의 점화는 상륙군 부대의 모든
장병들에게 심리적 안정감과 상륙부대 함정들의 안전을 擔保(담보)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50년 9월 15일 00시 01분,1분 늦게 점화 할 수 있었다.
9월 14일 극동사령부로부터 영흥도에서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새벽 2시 특수첩보대 요원
들이 한참 철수준비를 마칠 무렵 뒤 늦게 알아챈 북괴군 1개 대대가 대부도로부터 영흥도에 상륙하
였다. 특수첩보 요원 전원이 무사히 빠져나가고 마지막 사투를 벌리던 임병래 소위 組(조)6명 만이
남았으나 이미 북괴군에 포위된 상태였다. 끝까지 버티던 임병조 소위와 홍시욱 3등병조(하사)가 최
후 저항을 하는 동안 나머지 4명도 무사히 탈출하였다. 인천상륙작전 24시간을 남겨놓고 두 사람은
가지고 있던 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체포될 경우를 생각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면서 한국군 참가부대 선발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육군은 상륙 경험이 없다
고 하여 제외시켰다. 그러나 정일권 육군총장은 甕津半島(옹진반도)에 주둔하던 17연대가 LST편으
로 철수한 경험이 있다고 주장하여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한국해병대 1개
연대가 참가 토록 허락되었다.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은 마침 제주도에서 3,000명의 학도병을 모집해 9월 8일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1948년 제주에서 "4. 3 폭동사건" 이 있었음에도 학도병을 3,000명 이나 모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주둔해 있었던 해병대가 많은 선무활동과 대민관계 개선에 노력한 결과였다.
제주도에는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해병대가 해군과 함께 굳건히 지키고 있다. 孫元一 총장은 고문
관 '루시' 중령을 통해 서울 탈환은 꼭 한국해병연대가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줄 것을 맥아더 사령부
에 電通(전통)을 띠웠다. 본격적으로 기동편성도 이루어 졌다.
9월 12일 봉쇄 및 호위부대(TG:Task Force 95)가 편성되었고, 한국해군은 TG 95.7로 기동 편성되었다.
한국해병대 3,000명은 美 해병대와 똑같은 전투복과M1을 지급 받았고, 숙달 훈련을 위해 東萊(동래)
에 있는 육군사격장에서 M1실탄 사격을 하였다.한국해군은 PC 4척을 비롯해 총 15척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손원일 총장도 현장 부대에 직접 참여 토록 맥아더는 배려하였다.
9월 12일 상륙작전 출동 하루 前 날 이었다.손원일은 대구에 있는 아우 정일권 육군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손원일 총장은 정일권 육군 총장 보다 학력이나 경력으로 보아도 훨씬 연장자 였고 선
친 손정도 목사님은 상해임시정부 임정원장(국회의장)을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함께한 애국투사의
장자로 중국 상해에서 상선대학을 수료하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과 언어에 능통한 귀중한 인재였다.
후일 국방장관과 초대 🇪독일 대사를 역임하였다)
"내일 떠납니다. /형님 우리 17연대 잘 부탁합니다. 이쪽은 걱정하지 마십시요. 죽음으로 버티겠습
니다./ 서울에서 다시 만납시다...침묵이 흘렀다. 사나이들의 비장함이 오고 갔다.
오랫 만에 동대신동 관사로 향하였다. 孫元一은 모친 박신일 여사에게 큰 절을 올렸다.
"어머님 한동안 못 뵈 올 것 같습니다. 몸 건강히 챙기십시오" 그리고 아내 홍은혜 여사에게 "중요
한 회의가 있어 얼마동안 못 들어오니 아이들 잘 챙기고 건강하게 지내요" 후일담으로 홍은혜 여사
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한다.그리고는 막 바로 돌아서 부대로 복귀하였다.
한국해병대는 美 수송함 피카웨이(APA)함에 승선했고, 孫元一과 신현준도 함께 하였다.
미 제1해병사단은 일본 고베에서, 미 제7사단은 요코하마에서 각각 9월 11일 이미 출발하였다.
9월 12일에는 부산에서 미 제5해병연대가 출항하였다. 이 무렵 태풍 키지어(Kezia)가 북상 중이어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인천 북부 해상을 경계하던 이성호 중령(PC-703/삼각산 함)으
로 부터 機雷(기뢰)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작전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기뢰 는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였다.
後日 우려했던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 [10군단 元山灣 상륙작전이 기뢰 로 인해 행정 상륙을 하게 된다.]
극동해군사령관 조이 제독은 미 해군총장 셔먼 제독과 태평양함대 사령관 래드퍼드 제독에게 掃海艦
(소해함)의 증파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전 함정에 注意報(주의보)가 발령됐다.
견시를 강화하고 눈으로 직접 발견 토록 할 수 밖에 없었다.
9월 14일 맥아더 사령관이 승선한 旗艦(기함) '마운트 맥킨리' 함(구축함)을 비롯한 함대 세력이
격렬비열도 를 비롯 덕적도 외해에 벌 때 같이 집결하였다. 세계 역사이래 가장 불리한 협 수로 항구에
가장 많은 다국적 함대 규모였다.
한국해군 15척, 미국 225척, 영국 12척, 카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네델란드 1척
등 모두 261척으로 구성되었다. 상륙부대는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 휘하의 미 해병1사단, 미 7보병
사단, 미 제1해병항공단 등으로 구성되었다. (한국 해병대 2,786 명)
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33분 미 해병 5연대 3대대가 녹색해안(Green Beach) 월미도에 상륙함으로
시작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조석 간만의 差(차)로 오전, 오후로 나뉘어, 오전에는 감재고지 月尾島(월미
도)를 확보하고 오후 밀물 때에는 적색+청색(Red Beach + Blue Beach) 해안에 공격 주력부대가 상륙
하였다. 녹색해안(월미도)과 황색해안(인천 내항)은 군수물자를 하역 하는 해안이었다.
筆者(필자)는 초등학교 어린 나이로 모친과 仁川문학산 산 넘어(청색해안 바로 넘어 시골마을) 작으마
한 부락 헛간에 피난 중에 있었다. 전날 밤새도록 엄청난 굉음과 폭팔 음이(함포사격) 계속된 기억이
생생하다. 아침에 보리 꽁대기 밥술을 막 뜨려는 찰나 지축을 뒤 흔드는 요란함 속에 山體(산체)만한
괴물(탱크)이 길가에 버티고 있었다. 처음보는 흑인 병사의 웃음과 탱크 헷지 너머로 던져준 바둑 껌과
生前 처음 먹어보는 쵸코릿 의 그 달콤함을 아직도 잃을 수 없다.
한국해병대는 인천항 북서쪽 적색해안(Red Beach)에 상륙하였다. 9월 15일 1800시 미 해병1연대와
제5연대 그리고 한국 해병1연대가 함께 행동했다. 해안에서 저항하던 북괴군 2 천여 명을 소탕하였다.
손원일 총장은 해병대와 함께 적색해안에 상륙하고 첫날 밤을 병사들과 함께 참호 속에서 보냈다.
사실 최고 지휘관이 최전선에 병사들과 함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이었다.
孫 총장은 수도 서울 탈환시까지 해병대와 내내 함께 했다. 그 옆에는 통역관 겸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한국을 조국으로 여기고 참전한 미국청년 쇼어” 대위도 함께 였다. 쇼어 대위는 서울 탈환 연희
고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를 기리는 동상이 얼마전 한국해군에 의해 세워졌다.
***
무릇 올바른 인간이란 남의 도움의 손길을 잊어서는 않 되는 데~교육이 잘못됐는지?
망각하고 살아 가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