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한 번 장난 아니게 더운 지금은 어딜 가기도 어렵다. '이불 밖이 위험하'다지만, 이불 안도 더워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에어컨 빵빵한 곳에 들어와야만 '이불 안'이 제일 안전한 곳인 현실에 '멘붕'이 온다. 그래도 기왕 여름 기분 내려 바캉스는 갈 만한데, 어디를 가면 좋을까 하는 생각에 버스표를 찾아보지만, 이미 매진 행렬이 장난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시내버스는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된다. 운행 거리가 긴 노선은 동네마다 다 들렀다 가랴 하는 덕분에 2시간을 넘게 운행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또 지금은 사라졌으리라 믿었던 완행 시외버스와 '통일호'에 필적할 정도의 정차 수를 자랑하는 완행 고속버스까지, 다양한 도시에서 다양한 '장거리' 교통수단이 다니고 있다.
에어컨 하나는 빵빵하다. 수도권의 장거리 시내버스 두 노선과 부산, 광주를 출발하는 장거리 시내버스 한 노선씩을 소개한다. 또 완행 시외버스, 그리고 다 타는데 '근성'이 필요한 완행 무궁화호 노선들도 소개한다. 열차나 버스를 타는 것이 콘텐츠가 되는 노선도 소개하지만, 내려서 반나절 정도 즐길만한 곳이 있는 곳들도 소개한다.
'한 번 가본 적 없는 동네', 적성까지 서울에서 두 시간 걸려요
▲ 파주 적성은 시내버스로 접근하기에 꽤나 매력적인 여행지이다. 사진은 매표의 필요성이 낮아져 폐쇄된 적성공용버스터미널.
파주 적성에서 법원읍, 봉일천을 거쳐 서울 불광동을 잇는 30번 버스는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는 버스에서도 손꼽히는 산간 오지를 오가는 버스로 유명하다. 불광동에서 버스를 타면 신도시 개발이 진행 중인 삼송을 거쳐 통일로, 1번 국도 위를 내달린다. 벽제와 봉일천을 거쳐 월롱역을 넘으면, 1번 국도에서 빠져나와 파주읍과 법원읍으로 향한다. 법원까지만 한 시간 반이 걸린다.
서울에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읍내 분위기를 기대로 간직하고 있는 법원읍에서 잠시 내리면 우시장이 먼저 보인다. 현재도 장이 열리면 소를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일 정도. 그렇게 작은 마을에 복닥복닥 모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걸어서 20분, 택시로 기본요금 거리에는 개인 박물관 중 가장 뛰어난 소장품을 지니고 있는 두루뫼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 적성은 연천, 양주, 파주 세 도시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주변에 한우농가가 많아 이렇게 한우마을이 발달했다.
따복버스(주말에만 운행)와 11-3번의 시간이 맞으면 율곡 이이의 덕행을 전수한 자운서원을 방문할 수도 있다. 다시 30번 버스에 올라 파평산, 비학산 사이를 30여 분 누비며,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면 종착지인 적성에 도착한다. 적성면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연천, 의정부, 파주가 만나는 교통 접경지에 있어 한우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서울보다 저렴한 가격에 한우숯불구이를 즐길 수 있다.
적성에서 의정부로 가는 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감악산 출렁다리가 나오고, 운계폭포가 나온다. 때 묻지 않은 피서지 감악산 계곡도 볼거리이다. 30번 버스 대신 다른 길로 나오고 싶다면 전곡 가는 95번 버스를 타고 나오면 된다. 전곡선사역사관을 보고 한탄강변에서 피서를 즐기다가, 하루 12번 있는 한국 최후의 통일호, '통근열차'를 타고 동두천으로 나오면 좋은 여행이 된다.
강화도로 2층 버스 타고 가요, 3000A번
▲ 최근부터 2층 버스가 절찬리에 운행하고 있다. 그 중 3000A번은 관광 목적으로 이용하기에도 제격이다.
수도권에 도입되기 시작한 2층 버스는 현재도 출퇴근 시간에 운행하고 있고, 출퇴근 시간대의 혼잡을 완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타본 사람이 아직 많지는 않다. '피서'를 핑계 대고 2층 버스 타고 서울, 김포 곳곳을 구경하기 좋은 기회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3000A번은 신촌과 강화도를 1시간 50분에 잇는다.
2층 버스 2층 맨 앞자리에 앉으면 마치 서울의 지붕에 앉은 듯한 착각이 든다. 홍대를 거쳐 양화대교를 지날 때 더욱 그렇다. 송정역을 지나 김포로 들어서면 한강신도시와 마주한다. 한강신도시를 지나 한숨 돌리다 보면 어느새 버스는 강화대교를 지나 갑곶돈대 바로 앞을 거쳐 강화터미널로 들어온다.
▲ 강화도의 포대 중 하나인 갑곶돈대의 모습. 옆의 다리는 이전에 강화와 서울을 이었던 구 강화대교이다.
울산 언양읍에서 양산 하북면, 양산시내, 그리고 부산 명륜동까지 잇는 양산 버스 12번은 영남지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장거리 시내버스로 이름이 높다. 통도사에 놀러 나가는 사람부터, 언양에서 부산에 일 보러 나가는 사람, 양산에서 부산을 잇는 출퇴근객까지 다양한 승객들을 싣고 달리는 버스가 바로 12번이다.
명륜역에서 12번을 탑승하면 부산대와 범어사역을 지나 30분 만에 양산시내에 도착한다. 최근 들어 신도시가 속속 건설되면서, 부산 구도심보다도 훨씬 발전된 듯한 모습을 전부 지나치기 전에 북정동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 보자. 양산의 역사를 담은 양산시립박물관과 사적 제93호로 지정된 신라시대의 무덤인 북정동 고분군을 만날 수 있다.
버스를 다시 타고 쭉쭉 올라가면 하북면이 나온다. 삼보사찰 중 '불보사찰', 즉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통도사를 만날 수 있다. 신평터미널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되는데, 절의 규모에 놀라고 성보박물관에 모셔진 다양한 불교 유물에 놀라게 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언양으로 올라가면 총 1시간 40분 정도의 버스 여행을 마친다.
언양에 도착하면 언양읍성을 둘러보아도 좋고, 영화루를 둘러보아도 좋다. 맛이 좋기로 유명한 언양불고기를 맛보아도 무리가 없다. 버스 여행을 더 하고 싶다면 언양터미널에서 1703번이나 1723번을 탑승하자. 시내버스로 부산에서 울산까지 여행할 수 있다. 태화강역 도착해서 버스를 갈아타고 대왕암공원에 갈 수도 있고, 일산해수욕장에서 피서를 즐길 수도 있다.
화순에 가 본 적 없다고요? 처음 보는 곳까지 데려가 줄게요
▲ 능주면을 지나는 운주사행 화순교통 버스. 화순교통의 대부분 노선이 장거리 운행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광주는 전남의 중심도시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나주, 화순, 장성, 함평, 담양 등 인근 지역에서 광주까지 오는 버스를 절찬리에 운행하고 있는 것으로 들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시외지역에서 광주에 유출입하는 버스가 단순히 한 개의 노선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유지를 지닌 버스로 운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나주와 광주를 잇는 999번, 160번, 1160번이다.
하지만 화순은 더욱 다양하다. 화순군의 농어촌버스의 대다수가 광주에서 출발해 화순을 거쳐 다양한 화순의 읍면지역으로 향하는데, 이 버스들의 대부분이 장거리 노선이라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광주에서 시내버스 한 번 갈아타고 순천을 가거나, 보성을 갈 수도 있을 정도이니 엄청난 운행 거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추천할만한 버스는 중장터로 가는 218번 중장터행 버스와 순천 주암면까지 가는 217번 주암행 버스이다. 화순읍과 능주면을 거쳐 천불천탑의 신비를 간직한 운주사로 간다. 능주면사무소는 특이하게도 관아지에 그대로 지어져 있고, 영벽정과 조광조 생가 역시 볼만하다. 운주사는 탑과 불상이 계곡물 퍼지듯 퍼져있어 이들 탑 등을 돌아보는 매력이 있다.
주암행 버스는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순천 주암까지 간다. 중간에 사평을 들르는데 읍내에서 머지않은 곳에 폭포와 한적한 계곡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평에서 버스를 바꿔 타면 보성까지 갈 수도 있다. 순천 주암에서 시간을 맞춰 시내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면 얼떨결에 '순천 구경'까지 가능하니, 얼떨결의 여행이 되지도 않을까.
완행버스의 개념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지 오래다. '표를 끊고 버스에 타서'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줄어들 때마다 밀려오는 이유 모를 쾌감을 느끼던 그 완행버스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완행버스가 아직 남아있는 노선이 있다. 바로 동해안을 바로 옆에 끼고 달리는 동해대로, 즉 7번국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는 부산 - 속초 간 시외버스 노선이다.
오후 1시 정각에 부산에서 출발하는 속초행 버스는 특이하다. 부산에서 포항까지는 고속도로를 타지만, 포항에서부터 나루끝, 흥해, 청하, 송라 등 처음 보는 지명을 거쳐 영덕과 울진을 지난다. 삼척, 동해 등 모든 정류장을 지나면 마지막에 도착하는 정류장은 속초 정류장. 9시간 40분이 걸려 밤 11시가 다 되어 도착한다. 다만 속초까지는 너무 시간이 길고, 직행노선이 있어 매표가 불가능해 양양까지만 탑승할 수 있다.
이외에도 완행버스 중에는 동서울터미널에서 태백까지, 서울남부터미널에서 경강까지 운행하는 노선들이 있다. 시간은 일반 버스에 비해 두 배,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리지만 백두대간을 그대로 관통하며 산세 깊은 곳을 굽이굽이 넘어가는 신기한 버스이다. 단양 구인사나, 태백, 정선행 버스의 일부 구간이 예매가 가능한데, 고속도로로 2시간 걸리는 거리를 4~5시간에 오가는 신기한 매력이 있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경강행 노선을 타면 3시간 50분간 천안, 광정, 공주, 하마루 등 11개의 경유지를 거쳐 경강으로 간다. 상주행 노선은 석소, 청주, 미원, 낙서 등 15개 경유지를 거쳐 4시간에 상주로 간다. 동서울터미널에서는 대강, 녹전, 마차, 별방, 증산, 예미 등으로 발권하면 오랜 시간 동안 운행하는 완행버스를 탈 수 있다. 이들 버스는 처음 보는 신기한 지명의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는 맛으로 여행하기에 좋다.
타는 데 근성이 필요한 열차가 존재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5시간도 힘든데,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바삐 달려야 하는 열차 말이다. 종착역에 도착해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이면 다리가 풀려 휘청거릴 수도 있지만, 열차 안을 충분히 음미하다 보면 긴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완행무궁화호들 말이다. 지금도 여러 노선에서 오전, 오후, 그리고 심야를 가리지 않고 완행열차가 다닌다.
대표적인 예로 부산역에서 김천역을 거쳐 강릉 정동진역으로 가는 #1691, #1692 열차와 부산 부전역에서 경주역을 거쳐 정동진역으로 가는 #1681, #1682 열차를 들 수 있다. #1691 열차는 경북선을 관통하는 야간열차이고, #1681 열차는 단선 선로만을 경유하기 때문에 오전 9시 10분에 출발해 해가 질 무렵인 오후 5시에 정동진에 도착한다.
▲ 완행열차는 이렇듯 처음 보는 논밭, 그리고 작은 도로에 이르기까지 하나 빠짐없이 눈 안에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열차는 분천, 승부 등 자동차의 접근이 어렵기로 소문난 기차역 외에도, 바다와 가장 가까운 구간을 지나고 사람이 잘 타지 않는 경북선, 중앙선의 간이역을 지난다. 열차를 타며 바라보는 차창풍경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8시간이 넘게 걸리는 여행을 하기에 충분한 이유이다. 정동진역에 내리면 탁 트이고 시원한 동해바다가 눈 앞에 펼쳐지니 일석이조. 다만 식당칸이나 자판기가 없으니 미리 먹거리를 사두는 것이 좋다.
수도권에서는 '지하철'에 이러한 장거리 노선이 있다. 광운대역을 오전 8시 33분에 출발해 2시간 51분 만에 신창역에 도착하는 1호선 열차가 대표적인 예이고, 경의중앙선에는 하루 세 번 지평역과 문산역을 잇는 열차가 오간다. 양평 지평역에서 파주 문산역까지는 2시간 41분이라는 '어마무시한' 시간이 걸린다. 책 한 권 읽으며 가기 적당한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