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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2천년 동안 세계사의 중심에서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또한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개화기 암울했던 민족사에 한줄기 빛이었다. 그래서 해방 이후 교회는 민족종교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얻었고 5.16이후 산업화 도시화에 힘입어 양적으로 급속히 팽창 되어 인구의 5/1 이상이 흡수 되는 거대한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말썽도 많고 문제도 많아져서 “이래서는 안 된다” “새로워져야 한다.” 하는 여론이 기독교 내외에서 일고 있다. 그래서 어디 좀 새로운 곳이 없나 해서 찾던 중에 "새롭게 하시는 예수"라는 주제로 여름 켐프를 한다는 곳이 있어서 찾아가 보았다.
골짜기를 따라 맑은 물이 흐르고 땅으로 스며들었던 물줄기가 연약한 지반을 통해 생수로 솟아나듯, 우리가 마셔야할 물은 세상을 덮은 거대한 물결에서보다 지하수처럼 감춰진 곳에서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크고 위대하고 대단한 것을 찾는 세상에서, 참된 가치는 밭에 묻힌 보화처럼 어느 시대에나 늘 그렇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한 복판, 소백산 기슭에서는 대구교회 여름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교회는 기존의 어떤 교파에도 소속 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서 부정과 긍정이 엇갈리는 가운데 교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 그래서 직접 들어 보고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되었다.
1500여 명이 참여한 이번 집회에는 이현래 목사의 여덟번에 걸쳐 전해진 메세지가 전부라 할 수 있다. 조용히 선포 되는 말씀 속에서 청중들의 진지함과 뜨거운 열기, 그리고 자연스러운 흐름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메시지 전 내용은 교회 홈페이지(churchlife.net)에 올려져 있음으로 누구나 볼 수 있다고 한다.
기자에게 가장 특이하게 들렸던 말씀은 전능자는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새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원래 하나님의 경륜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를 새롭게 하는 것이었으나, 아담이 그 길에서 이탈함으로서 만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탄식하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인하여 다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속 받은 새사람으로서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이름을 새로 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에 대하여, 천사에 대하여, 물질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면 자신과 교회가 새로워지고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이현래 목사의 메시지 특성은 인간의 행위를 개선하려는 설교가 아니라 인간 문제의 근원을 밝혀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근원을 알면 그 뒤에 발생하는 모든 현상들은 필연적인 결과로 따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것이 어디 있을까 찾고 있던 기자는 그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지표면에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깊은 땅 속 암반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고 있는 잔치를 본 것 같았다.
집회는 너무나 단순했다. 말씀을 듣고 떼를 지어 흩어져서 그 말씀으로 교통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만한 여가가 없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4박5일의 일정이 너무 짧다고 아쉬워들 했다. 어떤 면이 다른가를 알아보려고 찾아 갔던 기자는 이 목사의 메시지와 그 말씀을 듣고 교통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충만한 집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충격을 받았다. 다른 것이 전혀 없어도 말씀만으로 만족하고 충만할 수 있다면 교회가 새로워지고 사회가 새로워질 것이라는 소망이 보인 것이다.
질문) 안녕하십니까? 저는 뉴스메거진의 이재성 기자입니다. 목사님 메시지를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항간에는 이 목사님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이 있던데 이번 기회에 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목사: 예 좋습니다. 무슨 말씀이라도 물으시면 성심껏 대답하겠습니다.
질문: 목사님 말씀이 일반적인 설교와 좀 다른 것 같은데 그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목사: 나는 35 년여 동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생의 길을 말했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은사나 능력을 구했고 큰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즉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지요. 그런데 어떤 계기로 주의 손에 다루어진 인격만으로 영광스러운 사람을 보게 되면서 일을 잘하고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인격이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의 인격에 관심이 쏠렸는데 결국 그 뿌리와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일보다 이 한 사람만을 사모하고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의 주제는 언제나 “예수 그는 누구인가?” 이고 내용은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오신 분들 중에는 아무리 들어보아야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질문)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의 길’이라는 주제가 그것과는 어떻게 연관이 있습니까?
이 목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은 내가 말하는 “인생”의 주제 중의 주제이시고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알려면 이분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참 사람”이 되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고, 하나님을 만났다면 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학은 곧 인간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질문) 목사님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신인합일 사상을 주장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인합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 목사)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실이 아닐 뿐 아니라 나는 신인합일을 반대합니다. 합일이라는 말은 성경에도 없고 주로 동양 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동양 종교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가 신인합일의 상태입니다. 이는 인간이 신과 합일에 이르러 육체의 제한을 초월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전하는 말씀은 육신의 한계를 벗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사람의 자리에 있는 축복을 경작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을 씨와 흙,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자주 비유합니다. 흙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씨를 받아 풍성한 열매를 생산하고, 여자는 연약하지만 생명을 출산 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씨를 가지신 분에게 흙과 같은 존재이며, 남자 앞에서는 연약하지만 사랑 받는 여자와 같이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신 됨을 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 드려야 합니다. 신일 합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또한 신약의 비유로 말하자면 머리와 몸의 연합,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합 등은 한 생명이면서도 분명한 구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유기적인 연합이지 존재를 구분할 수 없는 합일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적으로 구별 된다는 생각을 깊이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 어떤 방법으로도 사람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전한 말씀이 거의 전부 우리 홈페이지에 있으니까 내가 얼마나 이 문제를 강조했는가는 들어 보면 곧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그럼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양태론을 주장한다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목사) 나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양태론을 주장할 만한 자격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신약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에 관한 말들을 다 모으면 삼위일체가 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정의하고 2천년을 고백해 왔습니다. 적어도 기독교 안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식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기독교가 전해준 하나님을 믿으니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려면 정확히 이해하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시며, 삼위는 일체시다.”라고 말하면 흠잡을 데 없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설명하려 든다면 이단으로 지목 받게 되지요. 삼위를 구분해서 설명하려하면 삼신론 이라 하고, 일체를 설명하려 하면 양태론 자라고 하지요.
우리가 쉽게 접하는 성경공부 교재들에도 흔히 볼 수 있는 태양, 빛, 열이라든지 물, 수증기, 얼음 같은 비유가 양태론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지만 다른 비유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비유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어쩔 수없이 이런 비유를 사용한 일이 있지마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럴만한 지식도 없고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모릅니다.
성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에 대해 “인간의 작은 정신세계에서 무한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은 작은 조개껍질에 바다를 담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질문) 목사님은 모든 사람이 성육신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이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이목사) 예 맞습니다. 성육신이라는 말을 예수님에게만 적용하다 보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용어에 문제가 있다면 다른 말을 찾아야 하겠습니다마는 나는 새 언약의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이 돌비에 새겨진, 즉 인간 밖에 있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지키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만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심비에 새겨지는 것을 말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달리 그 법이 인간의 생각과 마음속에 새겨진다고 했고(렘31;33참) 히브리서 기자 역시 이 약속을 확인했으며(히10;16참) 바울은 이것을 향기, 편지, 혹은 심비 등으로 새 언약의 일꾼 된 축복을 말했고(고후2,3장 참고), 예수께서 친히 말씀이 육체가 되심으로써 첫 열매로써 이 문을 열었습니다.(요1;14참)
만일에 이것이 없다면 그릇을 비워놓고 내용물이 없는 것과 같고 밭을 갈아엎어 놓고 씨를 뿌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속은 그릇을 비우고 밭을 갈아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두면 또 다시 다른 것들이 들어가서 잡초 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릇을 비웠으면 새로운 내용물은 담아야 하고 밭을 갈았으면 씨를 뿌려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말 한 것입니다.
예수는 예레미야로 예언한 하나님의 새 언약이며 그 실제이고 성취로써 사단에 대한 인간 승리이고 인류의 희망이며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법(말씀)이 생각과 마음에 새겨진 후에는 다시는 사단의 계교가 통하지 못 할 것입니다.
질문) 대구교회에서는 목사님을 주님 또는 그리스도라 부르고 목사님뿐만 아니라 교회 구성원 서로를 주와 그리스도라 부르기도 하는가요?
이 목사) 나는 그런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불리기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예수를 나의 유일한 구원자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고 그의 은혜에 빚진 자일뿐입니다.
주님이란 말은 자기의 주인이란 말인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 바꾸어 보면 ‘당신은 나의 주인,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뜻인데 요즘 세상에 누가 누구의 종이 되겠다는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만 ‘존경한다’ 혹은 ‘인도를 받겠다’는 마음을 과도하게 표현한 것이라 이해합니다.
성경에서는 주라는 표현을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야곱이 형 에서에게 한 것처럼 보편적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약에서 오신다고 한 메시아가 예수이며 그가 유일한 구원자라고 믿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안에서는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에 감동 되어 주님 혹은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그러지 말라고 해서 지금은 그런 말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질문) 그러면 절대로 못하게 하면 구설수에 오르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좀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닌지요?
이 목사)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일도 없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도 없기 때문에 가만 두어도 저절로 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은 사람이 누가 높인다고 높아지겠으며, 누가 낮춘다고 공연히 낮아지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소멸 시켰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다 사라질 것입니다.
질문) 마지막으로 교회에 관해 묻고 싶습니다. 대구교회는 제도와 예배 형식이 좀 다르다고 하는데 목사님의 교회관은 무엇이며, 다른 교회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목사) 나는 원래 특별한 것 보다. 평범하고 실제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처음 모였을 때 30명 정도의 학생들이 둘러 안자서 성경공부를 했는데 그것이 자연스럽고 좋아서 사람이 많아졌어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보고 어떤 이들은 의식들이 없어서 편하고 자연스러워서 좋다하고, 또 다른 이들은 좀 이상하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연스러운 것이 좋습니다. 꾸미는 것은 좀 어색해서요. 그러나 이런 것은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대 따라 형편 따라서 의식이나 제도 같은 것들은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습니다. 진리는 불변하지마는 형식은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흠 없는 정결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려면 정결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께끗하게 하려고 주님께서 쉬지 않고 일 하고 계십니다.(엡5;26참) 그리스도의 성분 이외의 모든 것들은 씻겨지고 오직 신랑이신 그리스도만을 사모하는 것으로 단장 된 신부가 되는 것이 오늘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주의 몸인 교회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 되신 주님의 어떠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러야 합니다.
교회는 현재적으로는 주님의 몸이고 장차 올 새 예루살렘이며, 하나님이 이 땅위에 두실 그의 형상으로써 인류의 최종적 소망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너무도 크고 완전해서 그 누구도, 어느 교파도 단독으로 건축할 수가 없습니다. 집은 연합으로 지어집니다.(엡2;21,22참)
성막을 건축할 때 모든 사람들이 드린 각양의 예물들을 받아서 사용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과 인격의 경작을 통하여 드린 예물들을 자유롭게 드릴 때 주님은 지혜로운 건축자로서 자신의 몸을 세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인생에 주신 것들과 우리 교회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더 많은 교회들과 함께 나누려고 홈 패지에 남김없이 공개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들의 경험도 우리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기자) 건강이 어려우시다고 들었는데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집회를 참관하고 이 목사를 만나 본 결과 보고 듣기 전에 무엇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목사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줄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이 중심에 있었고 그 중심을 따라서 새로워진 세계를 전파하고 있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리다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교회들이 서로 다른 것을 포용해서 연합하여 더 큰 풍성으로 발전한다면 좋지 않을까? 오늘날 복음적이면서도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근본적인 진리와 본질을 함께 한다면, 다양할수록 좋은 것이다. 표면적인 차이들을 극복하고 귀중한 경험들을 함께 공유한다면, 기독교가 미래 사회에 해답을 줄 참된 가치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취재: 뉴스메거진 이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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