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에 스페인(Spain)의 무적함대(無敵艦隊,Spanish Armada)를 물리친 영국은 이후 400여 년간 바다의 절대r강자(絶對强者)로 군림(君臨)했습니다.
이 시기(時期)에 전략(戰略), 전술(戰術), 제도(制度), 하다못해 군복(軍服)에 이르기까지 영국 해군(海軍)이 만들어낸 모든 것은 모두가 따르는 규범(規範) 아닌 규범으로 여겨졌습니다.
비록 20세기 중반(中盤)에 이르러 꼭대기에서 내려왔으나 그들의 영향력(影響力)은 현재(現在)도 진행형(進行形)입니다.
특히 군함(軍艦)의 개발(開發)과 운용(運用)에 끼친 흔적(痕迹)은 대단합니다.
↑위대하고 가장 축복받은 함대(스페인어: Grande y Felicísima Armada 그란데 이 펠리시시마 아르마다,
혹은 무적함대(스페인어: Armada Invencible 아르마다 인벤시블레는 1588년 메디나 시도니아(Medina Sidonia) 공작(公爵)의 지휘(指揮)하에 영국 상대로 출항(出港)했던 에스파냐의 함대(艦隊)이다.
흔히 영국-에스파냐 전쟁에서 영국의 함대에 분쇄(分碎)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영국 함대와의 교전(交戰)으로 잃은 배는 3척에 불과(不過)하다.
나머지 배는 태풍(颱風)으로 말미암은 비전투 손실(非戰鬪損失)로 침몰(沈沒)하였다.
무적함대는 메리 1세 여왕의 남편이었던 펠리페 2세 왕이 파병(派兵)하였다.
파병 목적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일부인 네덜란드 공화국(共和國)에 대한 영국의 지원(支援)을 억제(抑制)하고, 신세계(新世界)에 있는 스페인령 영토(領土)와 대서양(大西洋) 보물 선단(船團)에 대한 영국의 공격을 차단(遮斷)하는 것이었다.
교황(敎皇) 식스토(Sixtus) 5세는 상륙 보상금 계약(上陸報償金契約, the promise of a subsidy should it make land)을 통해 원정(遠征)을 지원하였다.
어느덧 패션이 된 군복
설령 군(軍)에 대해 알지 못하는 여성(女性)이라도 길거리에서 병사(兵士)가 착용(着用)한 군복(軍服)을 보고 해군(海軍)은 쉽게 구분(區分)할 수 있습니다.
삼군 공통(三軍共通)인 전투복(戰鬪服)을 착용한 경우를 예외(例外)로 하고 흔히 '세일러복(Sailor Suit)'라 불리는 특징적(特徵的)인 수병용(水兵用) 복장 때문에 쉽게 눈에 뜨입니다.
특히 스트라이프 무늬(Stripe,
줄무늬를 뜻하는 영어)가 들어간 네카치프(Neckerchief)는 세일러복을 여타 군복과 명확(明確)히 구분 짓는 요소(要所)입니다.
↑세일러복은 해군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나라별로 세부 색상(細部色相)이나 디자인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基本的)인 특징은 만국(萬國) 공통이라 해도 과언(過言)이 아닙니다.
유래(由來)에 대해 설왕설래(說往說來)가 많은데 네카치프가 배위에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때 깃을 세워 소리를 모으는 기능(技能)을 하며 불의(不意)의 사고(事故)나 전투 중 바다에 빠진 병사를 쉽게 잡아 올릴 수 있다는 자료가 많습니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세일러복은 실용적(實用的)인 목적(目的) 때문에 탄생(誕生)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카치프는 세일러복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 해군에서 세일러복은 장교(將校)와 하사관(下士官) 같은 간부용(幹部用)은 없고 병사들도 근무(勤務) 할 때가 아니라 행사 참가(行事參加)나 외출(外出) 시에 동정복(動靜服)으로만 착용합니다.
따라서 과거에는 어떠하였는지 모르겠지만 배 위에서 작전의 편리성(便利性) 때문에 세일러복을 착용한다는 주장은 그리 신빙성(信憑性)이 없어 보입니다.
주장대로라면 함정(艦艇) 근무 시 간부건 사병이건 모두 착용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한국 해군 수병 복장
어쨌든 이러한 기능(技能)상의 주장은 차치하더라도 해군의 상징 중 하나인 세일러복의 역사(歷史)는 오래되었습니다.
자료(資料)에 따르면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9세기 초반에 영국 해군의 수병용 복장으로 세일러복이 처음 등장(登場)했다고 기록(記錄)되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치세(治世) 당시에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擊破)하고 세계 최강의 위치에 오른 이후 세계 해군의 바로미터(barometer, 잣대나 지표, 척도)가 되었습니다.
↑해군 총을 발사하는 영국 해군 선원, 1880 년대, 19 세기
↑영국은 세계 해군을 선도한 바로미터였습니다. (19세기 영국 해군 수병의 모습)
그것은 함정(艦艇)이나 전술(戰術) 같은 군사적(軍事的)인 부분은 물론 이거니와 복장(服裝) 같은 문화(文化)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넘버원이 만들거나 시작한 것은 당연히 모두가 벤치마킹하여야 할 부분을 넘어 점차 규범(規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일러복의 유래에 대한 근거(根據)가 미약(微弱)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거의 만국 공통(萬國共通)으로 사용(使用)되는 것을 보면 오랜 기간을 거치며 해군에게 가장 적합(適合)한 형태(形態)의 복장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북한 해군도 세일러복을 착용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세일러복이 일반(一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별도(別到)로 있습니다.
여성이나 아동용(兒童用) 복장으로도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1846년 그려진 에드워드 7세의 네 살 당시 초상은 복장사(服裝史)에 가장 오래된 세일러복 스타일의 아동복 기록입니다.
이것이 최초(最初)라는 견해(見解)도 있지만 이미 이전에 널리 유행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입은 것이라는 증거(證據)로 보기도 합니다.
↑임시 갑판을 설치한 미 해군 순양함 버밍햄에서 역사상 최초로 항공기가 이함(離艦)하는 순간
제1차 대전 말기에 영국은 퓨리어스(47)와 아거스(I49)를 취역시켜 새로운 역사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항모(航母)는 단지 바다에서 항공기를 운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호기심(好奇心)에서 출발(出發)한 실험함(實驗艦) 정도로 취급(取扱)받았습니다.
그러나 20년 후 제2차 대전이 발발(勃發)하자 항모는 해군의 역사를 새롭게 썼습니다.
함포(艦砲)의 사거리(射距離) 밖에 있는 목표(目標)를 공격(攻擊)할 수 있게 되면서 해전(海戰)의 방법(方法)이 완전히 바뀐 것이었습니다.
기존함을 개조한 형태
비록 바다에 착수(着手)한 후 크레인으로 건져 올리는 식으로 운용(運用)하였지만 함재기(艦載機)를 배에 싣고 유지(有志), 보수(保守, Maintenance)하고 출격(出擊)과 회수(回收)까지하는 일련의 프로세스(Process)를 벌였다는 측면(側面)에서 본다면 수상기 모함(水上機母艦)도 분명히 항공모함(航空母艦)의 역할(役割)을 담당(擔當)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항공모함과 구별(區別)하기 위해 수상기모함이라는 단어(單語)가 별도로 사용되지만,
적어도 이들이 처음 활약하였을 때는 그러한 구별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