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저항시인 김지하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지지한 데 이어 백낙청 전 서울대 교수를 독설로 비판하면서 논란이다. 이번 백 전 교수 비판 글도 조선일보 4일 자에 실렸다. 기고에서 김지하는 백 전 교수를 “한류 르네상스를 가로막는 쑥부쟁이”이라고 비난했다.
김지하는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사망정국 때 역시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한 뒤 30년 저항시인의 짐을 내려놓고 이후 20년간 저항세력에 맞섰다.
도사이길 멈추고 시인이 되라
김지하는 이 책을 기준으로 맛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현실에 눈 감고, 현학적 종교관과 형이상학의 피안으로 도망쳐 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김지하는 이 책 문제제기의 소재는 현실에서 찾지만 그 결론과 대안은 머리에서 찾는 궤변의 단초를 열었다. <뭉치면 죽고 헤치면 산다>(동광, 1991.6) 책 제목부터 궤변이다. 이 책으로 들어가기 전, 최근 김지하의 생각이 어디까지 뻗쳤는지 알아보자.
“율려(栗呂)는 중국 삼황오제 신화에 나오는 조율기로서 12개의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율려는 서양의 12음계와 대비되는 동양적 음악 구조를 상징한다. 양의 6률, 음의 6려로 구성된다. 이는 우주의 ‘중심음’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김지하의 율려(栗呂)운동의 핵심이다. 이쯤 되면 병원 가야 한다. 김지하는 철학의 선계(仙界)로 끌어올렸다.
논객들은 김지하가 자신의 신비체험을 철학적 인식의 기반으로 확고히 믿는다는 사실에 문제를 제기한다. 문화연구가 조흡은 <인물과 사상>에서 “율려운동은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양 이론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며 김지하를 원색 비판하고 나섰다. 조흡은 한마디로 “김지하에게 도사이기를 포기하고 시인이 되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우주를 바꾸려는 생각이나 만 년 후의 세상을 걱정하지 말고 오늘 당장 헐벗고 굶주린 인간들을 위한 이론으로 율려운동을 펴 나가기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런 달나라 사상가로 변해가는 첫 길이 이 책 <뭉치면 죽고 헤치면 산다>에 있다. 이 책의 김지하는 30년 저항정신과 20년 선계(仙界)정신 사이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다.
만년 뒤 세상 걱정 접고 당장 헐벗은 민중에게
이 책을 쓸 당시 우루과이 라운드 등 농업시장 개방압력에 대해 김지하는 “우리 농업의 유일한 출구가 ‘고부가 가치’로서의 생명농업 유기농업 환경농업으로의 전환”이라고 주장했다. 생명농업 유기농업 환경농업에 동의한다. 그러나 김지하의 그것은 ‘고부가 가치’라는 개발시대의 사고에 기반한 배금주의에 뿌리 박혀 있다.
김지하는 이 책에서 강경대 정국의 잦은 분신사태에 대해 “자꾸만 분신자가 늘어나는지 그 깊은 까닭을 생각하지 않는다. 배후의 조직된 자살 특공대설이 있다. 없을지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말장난을 벌인다.
이 책 제목은 지방자치제도 예찬에서 따왔다. 지방분권이란 역사적 대의에 천착한 나름의 뜻이 있다. 그러나 김지하는 과유불급이었다. “지방자치는 좌절에 빠진 우리 민주주의의 유일한 활로다. 지방자치에서의 성공은 바로 민족통일 사회의 전망이며 모델이 될 것”이라고 격찬했다. 지금 지자체 시행 20년이 넘은 현재 이 제도의 꼴을 한 번 봐라. 지역 소통령 부럽지 않은 권력집단으로 변해 매년 청사만 우뚝 서는 꼴을 보고서도 이런 말이 나올까.
룸살롱 가서 술 먹고 퇴폐이발소 가서 유사성행위나 하면서 살던 김지하가 생명사상에 미친 이유는 그 자신의 고백처럼 술집 여자를 두 번씩 임신시킨 뒤 낙태한 때문이다. 정보부나 안기부에서 주는 명절 떡값은 늘 받아 챙겼다. 김지하 이름 뒤에 늘 붙어 다니는 ‘4.19 혁명’의 날 정작 그는 거리시위는커녕 자취방 이삿짐을 날랐다. 그가 4.19 혁명의 날에 썼다는 ‘양심선언’은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것이다. 감옥에 들어가기만 하면 꼬박꼬박 반성문을 썼고, 책을 팔아 생긴 돈으로 80년대 말에 이미 부동산 투기로 일산의 57평 아파트에 들어앉은 저항시인이었다. 부끄러운 투기 사실마저 아내 탓으로 돌린다. 이 모든 사실을 그의 입으로 들어 보자.
서문 : 뭉치면 죽고 헤치면 산다
현실의 요구는 급박하고 확실한 대안은 없기 때문에 해묵은 구닥다리 혁명론이 여전히 그리고 오히려 더 맹폭하게 난무하고 이와 맞물려 反개혁세력이 더욱 완악해지며 겉핥기 절충주의가 부질없이 유행한다.
토지문제가 초점이 되었다가 공개념이 슬그머니 후퇴했을 때 방송드라마 ‘땅’이 도중하차 했을 때 큰 울분 속에서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느낀 것은 토지가 결코 독점이나 투기나 함부로 이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인간생존의 거룩한 제일의 토대라는 것, 인간은 자기 생명을 유지보존하고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공간, 생태적 공간을 가질 권리가 자연법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땅은 낡은 중세국가적 국유화 개념이나 그 자연법적 근거가 애매모호한 사회적 공개념의 대상이 아니라 생태학적 개념으로서의 ‘생명권’의 원리에 입각해서 토지 사용의 생태학적 공공성을 조건으로 하는 모든 개인의 사적인 토지 소유의 정당성을 파악 인정해야 하며, 환경 및 생산의 생태학적 공공성에 따라 인간 생태의 기초단위인 지역공동체의 공동관리 아래 그 분배와 이용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밥은 어떤가? 우리는 밥 한 그릇을 벌어먹기 위해 정든 고향이며, 친구며 화해로운 마을의 삶 등 온갖 귀중한 인간적 가치를 다 잃어버렸다.
우루과이 라운드 압박에 대응해 우리 농업의 유일한 출구가 ‘고부가가치’로서의 소위 생명농업 유기농업 환경농업으로의 전환, 양에서 질로의 대전환이라는 주장은 이제 소수 유기농 생산자 공동체가 아니라 카톨릭농민회가 이미 3년 전 결정, 그 뒤 기독교농민회, 그리고 얼마 전 전국농민회가 전원일치의 결의대회까지 하는 형편이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전국 4대강은 완전 오염돼 식수는커녕 농업용수도 될 수 없는 3급수 이하의 죽어버린 강이 되었다. 노동운동가 자칭 혁명가라는 사람들이 환경운동을 우습게 보는 발언을 하고 행동하는데 이해가 안 간다. 노동자와 혁명가는 기계인가? 아니다. 생명이다.
수출산업은 어떤가? 수출은 우리나라 산업의 대종이다. 듀폰의 기술 내용도 사실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연구비가 많이 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만의 자체 환경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페놀 사건 터지자 우리나라 산업귀족인 대구시민들이 관계 행정책임자를 ‘죽여라’고 외쳤다. 산업화로 경제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사람들이 그런다. 우리나라 수출의 대본은 제조업이다. 노조다 가장 잘 조직돼 있고 임금도 가장 높은 편이다. 경제가치가 높다. 그런데 이 부분으로부터 서비스부분으로 노동력 이동은 마치 보 터진 물처럼 막을 길 없다. 서비스 부분 노동력이 천만이 넘었다. 왜 이런가? 돈 좀 적게 벌더라도 사람답게 좀 편하게 살고 싶다 이 말이다. 노동자 자신이 삶의 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질이 뭔가? 생명가치다.
언제까지 기업가는 노동자를 임금으로만 붙잡을 건가? 언제까지 노동운동가는 노동자를 경제투쟁에만 동원할 건가? 언제까지 혁명가는 노동자를 경제적 불균등으로만 정치적 변혁을 선동할 건가? 노동운동은 생명가치를 과감하게 임금평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
자꾸만 분신자가 늘어나는지 그 깊은 까닭을 생각하지 않는다. 배후의 조직된 자살 특공대설이 있다. 없을지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있다 하더라고 그따위 마귀 같은 것들이 그런 끔찍하고 괴기한 흉계를 정치의 이름으로 획책하게 만든 현실문화의 질병, 그 핵심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가치관이다. 혁명을 한다고 그 지향하는 가치가 경제가치의 평등한 분배에 약간의 성공을 얻은 대가로 개인의 인격과 정신적 해방과 사회적 친교와 생명 가치를 소외시키며 엄청난 환경 파괴, 생태계 파괴를 심화 확산시키며 노동 자체의 창조성 자발성을 소외 증발시킨 참담한 실패로 낙착한 소련 동구 중국 북한 등 기존 사회주의 국가의 실패모델을 여전히 추종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혁명도 아닐뿐더러 그런 혁명은 애당초 시작할 최소한의 도덕적 명분도 없다.
생명 경시, 생명 파괴의 가장 나쁜 경우는 역대정권의 군사문화이며 현 정권의 백골단, 그에 의한 학생의 타살이고 노조위원장의 시체탈취와 부검 사건 등이다.
다수의 침묵, 그 의미를 알라 (1991.5.15)
나는 지금 시골에 와 있다. 싱그러운 녹음. 사위가 고요하다. 떠나오기 전 내가 서울에서 본 것은 끔찍한 자해와 분신의 연쇄, 전경과 시위대의 살벌한 육박전, 최루탄과 화염병의 아수라장, 야당의 이기주의와 언론의 기회주의, 그리고 정부의 유례없는 무능과 오만이다. 더 큰 인상을 심어준 것은 시민들의 그 싸늘한 침묵이다. 시민의 침묵은 정부와 재야운동권 및 야당을 다함께 거부하는 단호한 의사표시다.
자살한 자는 저승에 갈 수 없다. 그는 삼도천을 건널 수 없으며, 극도의 괴로움 속에 원기가 되어 울부짖으며 현사회의 모든 정신과 그 소통관계를 어지럽힌다. 원기는 그 자신을 위해서도 바삐 저승으로 가야하며 이 사회를 위해서도 빨리 저승으로 보내져야 한다. 원귀를 불러 혼돈과 증오심을 일으키고 원귀를 이용해 투쟁을 선동하려는 일체의 어두운 소란의 굿판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도 시민들 자신이 친구의 마음의 경건한 굿, 슬퍼하는 마음, 엄격한 부모와 스승과 밝은 마음, 따뜻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 또하나의 깊은 해원의 침묵, 천도의 침묵, 신원의 침묵으로 그들 혼백을 삼도천 건너 보내줘야 할 것이다.
‘나는 도적’ 고백운동 벌이자 (1991.2.15) - 원주 수정여관 301호실에서
신미년 설날 새벽 강원도 원주 한 초라한 여관방에 홀라 앉았다. 오적(五賊) 이후 실로 20년 만에 부정부패에 관한 글을 다시 쓰는 셈이다. 그러나 이 글은 그 시절처럼 기세 좋은 성토나 풍자가 아니라 회한에 찬 고백이다. 나 역시 그 사이에 도적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잇단 부정부패 사건은 결코 검찰 수사와 법적 응징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도적놈들이 도적질해먹기에 안성맞춤의 구조로 전락해 버린, 낡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따라서 지방자치제의 확대 강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국민주권에서 주민주권으로 중심을 이동하여 창조적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운동으로 현체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나도 여기에 찬성이다.
이 사회는 예비도적으로 가득 차 있다. 기회가 안 주어져서 그렇지 주어지기만 하면 순식간에 백탕 천탕 해먹을 정신무장이 단단히 돼 있는 사람들 천지다. 독재독점 부패세력을 강한 정신적 항체로 포위하여 근절하는 대정신혁명의 시작이다.
나는 전면적 고백운동을 제안한다. 명상 고백 고발 주민자치사회 건설 운동이 지금의 혼란을 뚫고 갈 우리의 활로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오적 이후 결혼 전에 술집에서 일하는 한 여자를 임신시켰다. 나는 당황해서 싫다는 그녀에게 돈을 주어 억지로 낙태시켰다. 그러고 나서 차버렸다. 또 한 번 어떤 술집 여자를 임신시켰다. 그녀는 나와 의논도 없이 지워버렸다. 나는 생명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낙태를 반대한다. 그런데 낙태시켰다.
나의 약력에는 반드시 ‘4.19 혁명 참가’라는 부분이 들어있다. 그런데 사실 나는 4.19 혁명에 참가하지 않았다. 4월19일 그날 나는 데모대에 차단당해 온종일 걸려 흑석동에서 성북동 자취방까지 이불짐을 날랐다. 전 국민과 전 세계가 다 아는 그 ‘양심선언’은 명백히 내가 쓴 것이 아니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것이다. 감옥 안에서 어떻게 그 긴 문장을 쓸 수 있었겠는가? 나를 살리기 위한 벗들의 뜨거운 우정이었지만 그 뒤 적절한 시기가 되었는데도 사실대로 밝히지 않고 내가 쓴 것으로 계속 주장해온 나의 위선은 명성을 도적질한 명백한 기만이다.
출옥 후엔 언제나 각서를 썼느냐를 묻는 사람이 많다. 나는 매넌 각서를 썼다. 비어(蜚語) 사건 때는 아주 비굴하게, 민청학련 때는 아주 당당하게, 80년 출옥 때는 당당하고 비굴하게 그리고 마지막 번에는 치사하게 ‘술을 먹고 싶다’고 쓰기까지 했다. 그래서 출옥 후 5공 관계자들이 여러 번 술을 샀고 갈비짝을 보내고 사과짝을 보냈다. 나는 거물의식까지 즐기며 태연히 받아먹었다. 5공 때부터 내가 그들에게 3억 원을 받았다는 소문이 지금까지 따라다닌다. 지금의 아파트를 제 재주에 어떻게 마련했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84년 <밥>을 출판해 평생 목돈을 처음 만졌다. 4, 5천만원을 몽땅 어머니에게 드리고 나는 한푼 못 썼다. 85년 해남으로 이사했을 때 나는 빈털터리였다. 인세와 두레, 분도, 창비출판사 등에서 미리 끌어다 1천6백만원을 만들어 낡은 기와집을 샀다. 그 뒤 서울로 왔다. 지금의 목동아파트는 35평인데 장모인 박경리 선생이 6천만원을 내고 자기 이름으로 전세등기한 전셋집이다. 작년에 전세가 2천2백만원이 놀아 해남집을 8천4백만원에 팔아 전세금을 주고 나머지 6천2백만원을 쥐고 앉아 아내가 걱정으로 시작했다. 집 한칸 없이 돈을 다 야금야금 써버리면 어찌하느냐고.
나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일산아파트 청약을 넣었다. 복이 있었는데 두 번째에 가서 57평짜리가 당첨되었다. 1억원 조금 넘는 돈이 들어가야 하는데 아내는 이미 들어간 6천만원의 나머지는 동광출판사가 준비 중인 전집에서 나올 걸로 계산한 모양이다. 친구들이 날더러 앉아서 2억원을 벌었다고 하지만 아이들이 커가고 차차 시골 부모님도 모시자면 57평은 필요하다는 아내의 주장이었다. 집 한칸 땅 한뼘 없는 이웃들을 생각할 때 이 역시 도적질 같아 마음이 송구스럽다. 이것이 나의 전재산이다. 차가 한 대 있는데 이것 역시 장모님 것이고 아내가 빌려 쓰지만 아직 초보운전이라 별 도움이 안 된다.
명성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터무니없는 영웅심이 있으며 이른바 페르소나(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동일시가 심하다. 여자관계가 많았는데 매우 어둡고 색정적이고 복잡했다. 알콜에 탐닉하고 룸살롱에 가서 술 먹고 부화방탕하기를 즐겼으며 퇴폐이발소도 가끔 드나들었다. 알콜 중독, 어머니 콤플렉스, 종교적 환상과 함께 원인이 된 나의 병명은 심한 정신분열증이었다. 두 번이나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치료는 끝났다. 그러나 이것이 내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티없이 맑았던 유년으로 따뜻한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도적놈들
수서 특혜 등 요즘 일련의 부정 사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내뱉는 똑같은 말 한마디가 있다. “도적놈들”
박정희 시대 도적들, 전두환 시대의 이철희 장영자 부부도, 노태우 시대의 수서 거간꾼으로 연명한 도적 계보가 이어져오는 동안 그 형질도 그악에서 ‘우악’으로 눈부신 비약을 이룩했다. 질적으로는 가히 세계 으뜸의 첨단기술이요, 양적으로는 무한세포분열로 정경관은 물론 전사회를 도적놈 천지로 바꿔놓았다. 기회와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주어지기만 한다면 순식간에 한탕 아니라 백탕도 거뜬히 해먹을 도덕(盜德)적 무장이 단단히 돼 있는 뻔뻔한 예비도적들의 천지다.
밤새 잠 못 이룬 새벽별 뜨는 시각 (1990.12.13 새벽)
인권변호사 조영래 씨가 돌아갔다. 1990년 12월 12일 새벽별. 고인을 처음 만난 건 언제였던가 확실치 않다. 다만 선명한 건 70년 11월 13일 밤 명동성모병원 앞길 건너 자그만 이층 찻집에서다. 그날은 전태일 씨가 분신한 날이었고 성모병원에 안치된 시신을 두고 전씨의 친구들과 경찰이 옥신각신 몸싸움을 벌이던 때였다. 장례식을 서울대 법대 마당에서 치른 뒤 영구를 메고 평화시장으로 가 노동자들과 합쳐 종로와 광화문을 거쳐 청와대로 간다는 계획이었다. 고인은 고시공부를 중단하고 이 사건에 뛰어들었다. 고인은 내게 조시 작성을 부탁했다. 반대가 중론이어서 결국 나는 빠지고 ‘불’이라는 제목의 구상메모만 법대 이종률 씨에게 건네주고 돌아왔다.
71년 가을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불붙기 시작한 부패정권 규탄운동이 순식간에 무서운 불길로 확산된 건 고인의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조직력 때문이었다. 종교계의 사회참여는 이때가 시발이었다. 고인의 신조는 철저한 공수신퇴였다. 천주교 원주교구청 방에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 “어찌 일을 해나갔는지 말해 주시오” “모르십시오” 오른손과 왼손 사이의 관계. 고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72년 그가 살던 역촌동 뒷산 기슭 풀언덕이 생각난다. 고시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을 다니면서 고인은 전국학생연맹을 조직했다. 노동자와 학생 시민의 연대가 공식 논의되고 윤필용이네 탱크가 고대에 난입해 여학생을 구타하고 위수령이 선포되고 고인은 체포돼 감옥가고 나는 강원도 탄광으로 피했다. 감옥에서 1년6개월 법관의 꿈도 깨져 버렸다. 73년 가을 출옥 직후 성치 않은 몸의 고인에게 다시 위험한 일을 맡긴 건 나였다. 민청학련 자금책. 고인은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그 때문에 6년을 아내와 어린아이와 함께 골방에 숨어 살아야만 했다. 출옥 뒤 만난 고인의 사상은 놀랍도록 성숙하고 크고 넓어졌다. 생명운동 환경운동에 대한 고인의 전폭적 동의와 지지는 그 무렵 외로웠던 나에게 태산 같은 반석이었다. 새벽별 뜨는 이 시각에 깨어 앉아 눈물을 삼키며 이 글을 쓴다.
오윤을 생각하면
오윤을 생각하면 슬프다. 그의 그림은 처음 봤을 때 충격이었다. 대학 초년때 쌍문동 그의 집에 놀러갔을 때 노을 무렵 분홍빛으로 물든 몇 개의 구름을 그런 기름그림을 봤다. 노을은 쇠잔해가는 것이 아니라 기이한 정열로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 밑바닥에는 슬픔이었다.
오윤이 멕시코의 서사적 사실주의 운동에서 영향받은 것은 사실이다. 69년 그가 아지 미술학교에 다닐 때 벌어졌던 그 불발의 쿠데타, 그 <현실동인전>의 그림들은 서사적 사실주의 영향과 관련 있다. 모두 압수당하고 찢어졌고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오적 사건 이후 나는 바빴고, 오윤은 경주로 가 파묻혔다. 오윤은 생전에 강증산을 좋아했으니 강증산 따라 서천으로 갔을까. 오윤을 생각하면 즐겁다. 특히 그의 도깨비들을 생각하면 깨가 쏟아지게 즐겁다.
말
줄임말이 대유행이다. 창비, 문지, 전민련, 전노협, 전농, 빈의협, 인의협, 신식국독자론, 정투, 임투, 농활, 전경련, 경실련 등등. 가두어 갖지 않으면 제가 죽을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힌 것일까. ‘NLPDR’ 따위 외국어 줄임말까지 뒤범벅이 되고 있으니... 자본주의 기업가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똑같이 이런 말을 즐겨 쓰고 있으나 단순한 시장신비주의 조직신비주의 암호숭배 외국숭배를 넘어서 이것은 필경 문명의 병이요 폐쇄회로적 사고이며 닫힌 세계관의 산물이다.
한자와 서양말로 뒤발을 한 위에 그놈의 사회과학 논문이나 좌담에서부터 신문기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도처에서 불거져 나오는 ‘~에 다름 아니다’ ‘~에 값한다’ ‘~되어진다’ ‘~으로 된다’의 홍수다.
오늘날 삶의 복잡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와의’ ‘에의’ ‘에로의’도 자주 쓰는데 이 말 밑에 작위성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말을 되찾아야 한다. 산 말, 열린 말, 푸는 말 안에 살아있는 신명, 그 신령한 생명의 춤을 타고 열고 나오면서 한자 서양말 줄임말 가둠말을 모두 전향시켜야 한다.
시민연대회의를 위한 메타포 10개
조직하지 말라 / 부패할 것이다 / 체계화하지 말라 / 죽을 것이다 / 개인 속에 삶이 있다 / 개인과 개인의 자유로운 그물 / 네트워크! / 이것이 살 길이다 (1991년 3월 18일)
종말론 넘어 새 문명의 빛으로
1991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지리산 도사 50명이 하산했다고 한다. 이제 곧 닥쳐올 개별과 함께 온 세상을 뒤덮을 미증유의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작년에 만난 미국의 비트 시인이며 환경운동가인 알렌 긴스버그는 자기 스승인 티베트의 한 라마의 말을 전했다. “소용없다. 어떠한 인간의 노력도 소용없다. 인류는 전멸한다. 핵이나 전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병으로 전멸한다.”
꽃을 피워야 봄바람이 분다
운동권 젊은이들이 내게 찾아와 ‘민중의 명령이니 난초 이십 장만 그려 주시오. 팔아서 자금으로 쓰겠습니다’고 한다. 그래 그려주면 실컷 팔아 그 돈으로 술 처먹고 나서 이렇게 씹는다. “난초가 치고 자빠졌는 반동새끼!” 엉터리 같은 녀석들이다. 그 따위 녀석들이 하는 언필칭 민중의 출판사에서 몇 번을 또 사기당했는지 모른다.
그것도 ‘민중의 이름으로’ 민중의 이름으로 들볶고 겁주고 구박하고 을러대고 삿대질하고, 민중의 이름으로 사기치고 제 이익을 도모한다. 이와는 반대로 요즘 젊은이들의 개인 이기주의는 오히려 싱싱한 시대적 가능성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