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 - 김광섭
너무 크고 많은 것을 혼자 가지려고 하면 인생은 무자비한 칠십 년 전쟁입니다 이 세계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신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낮에는 해 뜨고 밤에는 별이 총총한 더 없이 큰 우주를 그냥 보라고 내 주었습니다
♧ 매화를 보다 - 성숙옥
광양 매화 언덕, 뭇별이 얽힌 곳에 겨울이 벗겨지고 있다 무채색에 지쳐서 꽃을 보고 싶은 마음엔 눈 마주쳐야만 채워지는 그리움의 속성이 있다 소문으로 번지어 벌떼처럼 흘러온 눈빛들 잔설 속 늙은 햇빛이 막 피어난 풋풋한 꽃에 부딪히고 있다 바람이 핥는 희고 푸른 향기에 마음을 적셔 보니 등에 붙은 시름이 다 떨어지는 것 같다 언덕의 별들은 밤마다 섬진강의 머리맡으로 걸어 내려가고 있다는데 성마른 나는 그 별의 집을 물어 언덕길이 뭉클 피어나는 하늘을 오르고
♧ 검은등뻐꾸기 - 나병춘
임도를 걷고 있는데 홀딱 벗고 홀딱 벗고 홀딱벗고 새가 운다 홀딱 벗고 홀딱 벗고 무엇을 벗으라는가? 단 한 번 보지도 못한 검은등뻐꾸기가 홀딱 벗고 홀딱 벗고 은근한 밤에 무엇을 하자는 건가? 떼꾼한 초생달 한쪽 눈 한쪽 날개로 짝 찾아 날아가는 한밤 캄캄한 개구리 떼 합창 속에서 유혹하듯 춤추듯 노래하는 저 홀딱벗고 가락 잠 못 이루는 내게 탈 많은 탈 탈탈탈 털어버리라고 저토록 암팡지게 울어쌓는가?
♧ 개별꽃 - 임영조
올해 대학 간 딸애의 생활기록부 보호자 직업란에 나는 선뜻 ‘시인’이라 써준다 딸애는 시인이 무슨 직업이냐며 역정을 내듯 화이트로 지운다 다른 애들은 장관 사장 교수 군인 변호사 의사 또는 이사라고 썼는데… 하아, 그런데 나는 시인을 직업으로 알다니! 뭉개진 여백 다시 들여다본다 어느새 시인은 간 곳 없고 몸둘 바 몰라 허허허허 웃는 꽃 개별꽃만 하얗게 홀로 부시다.
♧ 폐소공포증 - 김성중
그 해 벽두에 안면도로 달려가던 연수버스에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네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요금소에서 연수단 일행과 헤어져야 했네 익산까지 택시를 타고 달려갔다가 광주행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네 곧바로 아내가 자주 가는 한의원을 찾아갔네
한의사는 몸뚱이 여기저기에 침을 놓으며 “당신은 화를 너무 많이 내서 비장이 상했소.” 아, 나는 비위가 상했구나. 비위가 약해졌구나 비위가 약했던 중학교 시절 친구 집에서 코를 막고 숨도 쉬지 않으며 목구멍으로 넘기던 김치와 밥알들이 떠올랐네 “세상과 화해하며 살라.”는 한의사의 말씀을 들으며 날마다 침을 맞고 부황을 뜨고 약을 마셨네 폐소공포증을 조금은 잊을 수 있었네
한겨울에 용산행 케이티엑스 열차를 탔네 그날은 안개가 세상을 가로막고 있었네 나는 그만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열차에서 내렸네 매실액병만 없었으면 서울행을 포기했을 것이네 친구에게 줄 매실액병을 보는 순간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열차에 올라탔네 출입문 쪽에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으니까 안개가 시나브로 걷히고 있었네 내 폐소공포증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네 용산행 케이티엑스 열차는 씩씩하게 잘도 달려갔네
♧ 누이와 칡꽃 - 박영배
초혼에 실패한 누이가 지천명 되도록 가슴을 닫고 어두운 귀퉁이로 숨어 살다 요즘 세상 밖으로 얼굴 내밀며 물고기 마냥 뻐끔뻐끔 들숨을 시작했다
찢긴 가슴 보듬고 밤이면 달빛으로 별빛으로 곪은 상처를 핥아대며 한때 꿈이었던, 사랑이었던 미운 허물 벗느라 가시를 품고 지냈을 텐데
갱년기에 좋다고 칡꽃을 말려 보내 달란다 꽃 한 번 못 피워도 꽃 지는 시름이 남았던가 마지막 생生을 내려놓으며 또 한 번 허물 벗는 누이
붉은 듯 검은 듯 내 산간 막에 지천으로 피어 눈길도 주지 않은 꽃잎을 한 잎 한 잎 정성껏 거두면서 칡넝쿨처럼 억척같이 살아 줄 누이를 떠올려 본다
♧ 검은 혓바닥 - 배두순
벌컥벌컥 빗물을 들이키며 검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아스팔트길 로드킬 당한 동물들의 항거인 듯 간간히 피비린내가 올라오기도 한다 가끔은 운명의 역주행을 낚아채는 순발력 속도를 노리다 속도를 잡아채는 노련한 사냥 솜씨 빗물 속의 흔적마저 놓치지 않는 예리한 촉각으로 긴 혀를 내두르며 악착같이 따라오는 빗속의 아스팔트 공포에 움츠린 방심의 기회를 틈타 바퀴를 비트는 힘을 완강하게 제압하며 핸들을 움켜쥐고 빗속을 달린다 태풍을 가르고 폭설을 뚫으며 달려온 생이 아니던가 폭우가 무섭다고 멈출 수는 없는 일 무작정 달린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비는 그치고 짱짱한 태양을 마주한다 돌아보니 어느새 입을 다문 검은 혓바닥 순한 표정으로 길이 되어 길을 열어주고 있다
♧ 겨울 산 - 이강하
천년 전에도 그랬고 백년 전에도 그랬고 겨울 산에는 백색의 백일이 산다
골짜기 지나면 더 빨라지는 발자국 소리 뽀드득 뽀드득, 묵언 수행의 오름은 광활하다 사월의 바다가 기록된 난간 고래 몸을 닮은 기다란 등뼈 어디쯤 백색 물고기 똬리를 트는 저녁이면 깨진 안개 날리듯 눈송이 칙칙 뿌리는 하늘 이젠, 접힌 길도 두렵지 않아요 투명한 입김이 천천히 날리는 고개 숙일 수 없는 백일로 백색 오름을 견딜 수밖에
눈송이 톡톡 깨며 날아오른 겨울 새 한 마리가 구멍을 내며 사라진다 뼛속까지 하얘지는 나, 백색의 백일이 가벼워지는 순간이다
* ‘우리詩’ 2017년 2월호(통권 344호)에서 사진 : 봄까치꽃(본명 : 개불알풀) |
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