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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포스터가 예술이다 … ‘아르누보의 꽃: 알폰스 무하 원화전’ 서울 마이아트뮤지엄
‘알폰스 무하’ 탄생 165주년 기념
초기 작품부터 후기 작품까지, 300여 점 전시
기자명 김연제 기자
서울프레스 기사 입력 2025.03.29. 00:17
서울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아르누보의 꽃: 알폰스 무하 원화전’이 개최 중이다. 이번 전시는 체코 출신 화가 알폰스 무하의 탄생 16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로, 오리지널 포스터, 판화, 드로잉, 유화, 도서 간행물, 장식 오브제 등 작품 300여 점을 선보인다. 그의 초기 상업 작품부터 후기 걸작까지 아우르며, 프랑스에서 성공을 넘어 체코 민족 정체성으로 이어진 예술 여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알폰스 무하(Alphonse Maria Mucha, 1860-1939)는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디자이너로, 체코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이름을 알렸다. 화려한 색감, 부드러운 곡선, 신비로운 여성상이 특징이다. ‘르 스타일 무하(Le Style Mucha)’로 불리며 아르누보 양식의 상징이 됐다. 아르누보(Art Nouveau)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에서 꽃피운 예술 운동으로, 식물에서 영감을 받은 유기적인 형태와 장식을 강조한다.
알폰스 무하는 상업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허물며 예술을 대중 속으로 가져왔고, 특히 연극 ‘지스몽다’ 포스터로 명성을 얻은 뒤 파리 거리를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말년에는 조국 체코로 돌아와 슬라브 민족의 이야기를 담은 대작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를 완성하며,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과 깊은 의미를 남겼다.
이번 전시는 알폰스 무하의 삶과 예술을 총 4부로 나눠 소개한다. 1부 ‘뮤즈가 건넨 붓, 화가가 그린 전설’은 배우 사라 베르나르와의 만남으로 시작된 초기 시절을 다룬다. 2부 ‘아르누보의 꽃’은 포스터와 장식 패널로 아르누보의 대표 화가가 된 과정을 보여준다. 3부 ‘무하 오디세이’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뒤 미국으로 활동 영역을 확대한 시기를 조명하며, 고향으로 귀환을 준비한 여정도 엿볼 수 있다. 4부 ‘슬라브의 화가’는 체코로 돌아와 민족 정체성을 담은 작품에 몰두한 시간을 담았다.
섹션 1 : 뮤즈가 건넨 붓, 화가가 그린 전설
섹션 2 : 아르누보의 꽃
섹션 3 : 무하 오디세이
섹션 4 : 슬라브의 화가
우선 눈여겨봐야 할 작품은 ‘지스몽다’ 포스터다. 1894년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을 위해 제작된 이 작품은 섬세한 묘사와 우아한 곡선, 화려한 금빛과 세로로 길게 뻗은 구도로 아르누보의 미학을 완벽히 구현하며 알폰스 무하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지스몽다
또 하나 주목할 작품은 1895년에 제작된 ‘사계’로, 봄·여름·가을·겨울을 신비로운 여성으로 의인화한 장식 패널 연작이다. 부드러운 색감과 자연 모티브가 돋보이며, 알폰스 무하의 상업 예술 전성기를 대표한다.
‘사계 봄’, 파리, 1895
하이라이트는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재현한 공간으로, 체코 수호성인과 역사적 인물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그의 사명을 생생히 보여주며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전한다.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도안
[리뷰] 일상의 우아함 - 아르누보의 꽃 : 알폰스 무하 원화전 [전시]
by 오지영 에디터
아트인사이트 기사 등록 2025.05.03. 10:31
전시기간 2025년 3월 20일 ~ 7월 13일 (공휴일 정상 개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오래전부터 무하의 일러스트 한 장면이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 몽환적인 배경. 그 인상적인 잔상에 이끌려 이번 전시장을 찾게 되었다.
무하의 일러스트 전시인 [아르누보의 꽃 : 알폰스 무하 원화전]은 무하가 상업 예술가이자 민족적 화가로서 가졌던 정체성과 예술과 콘텐츠 산업 사이에서 그의 작업이 지닌 지금의 의미를 다룬다. 단순한 미적 감상에 그치지 않고, 무하의 예술 세계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어떤 사회적 기여와 문화적 상상력을 가능케 했는지를 조명한다. 그의 오리지널 포스터, 판화, 드로잉, 유화, 도서 간행물, 디자인 장식 오브제 등 300여 점의 작품을 통해 예술적 여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무하의 궤적을 따라 전시는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1장은 무하가 프랑스로 건너가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한 초기 작업을, 2장은 파리에서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를 다룬다. 3장은 무하가 체코로 돌아와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작업에 집중하던 시기를 조망하며, 마지막 장은 ‘슬라브의 화가’로서의 무하를 그린다. 특히 체코 독립 이후 참여한 지폐·우표 디자인, 성 비투스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도안, 공공 포스터 등의 작업을 통해, 그가 어떻게 '국가적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는 지를 보여준다.
전시 동선 또한 이 흐름에 따라 구성되어 있어, 관람객은 자연스럽게 무하의 예술적 여정과 정체성의 변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각 장의 구성은 단순히 작품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기 무하가 처한 정치적·사회적 배경과 예술적 고민을 드러낸다.
2장의 상업 포스터 중심 구간에서는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를 비롯해 광고물과 달력 일러스트 등 다양한 작품이 등장하며, 무하가 예술성과 대중성을 어떻게 조율했는지를 보여준다.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였던 무하의 작품들이, 실은 전략적으로 기획된 이미지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다시 보게 된 무하의 스타일은 ‘선’이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가는 듯하지만, 힘 있는 윤곽선, 그리고 정교하게 장식된 배경. 색채는 온화하면서도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인물들은 현실보다는 상징의 세계에 가까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종이 질감, 누런 바탕, 붉은 벽과 금 펄이 섞인 전시 벽의 조화는 신화적 감각을 한층 강화한다.
인상적이었던 작품 ‘동백꽃 여인’은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의 표정, 주위로 펼쳐진 꽃들과 곡선의 패턴, 화면을 감싸는 장식 프레임까지 무하 스타일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무하 특유의 ‘존재감 옅은 인물 묘사’와 상징성 짙은 구성 방식이 가장 매끄럽게 구현된 대표적 작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장에선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도안'을 마치 실제처럼 재현한 공간은 마치 그때의 시대를 지금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러스트와 회화의 경계에서 무하의 화풍은 일러스트와 회화, 두 장르의 경계에 서 있다. 그는 인물의 피부나 옷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으며, 오히려 장식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들로 구성한다. 꽃, 별, 금색 프레임 등이 화면을 채우며, 구도는 대칭적이되 고요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그는 과연 순수 예술가인가, 상업 예술가인가? 그 경계를 넘나든 존재 알폰스 무하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다. 포스터, 지폐, 광고, 장식화 등 그의 작업은 대중과 가까웠고, 상업적으로도 성공적이었고, 그래서 상업 예술가로서 더 조명이 되었다. 이번 전시는 상업 예술가로서의 모습 외에도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예술가로 조명하며, 무하가 ‘시대를 꿰뚫는 콘텐츠 제작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단지 상품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속한 시대의 문화, 신념, 정치적 이슈를 시각적으로 해석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능했다. 무하처럼 지금도 ‘시각 언어’로 시대의 정체성과 감각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아름다움만을 좇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언어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무하의 작업은 단지 미적 영감에 그치지 않고, 기획과 전략, 그리고 실현 가능성을 동시에 담고 있었기에 더욱 오늘날에 가까운 예술가였다.
이번 전시를 통해 무하가 남긴 시각 언어의 아름다움, 그 순수한 감각의 미학 자체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Review] 알폰스 무하, 신비의 베일 뒤 인간을 보다 - 알폰스 무하 원화전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사람에 공감하는 시간
by 서예은 에디터
아트인사이트 2025.04.27. 10:26
예술가의 세계를 아는 데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술은 예술가가 지닌 의식과 불가분하다는 당연한 이치를 이해하면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 예로 최근 논란이 되었던 지브리 생성형 AI 일러스트가 비난 받았던 배경을 생각해볼 수 있다. 부족한 저작권 의식에 관한 비판이 주를 이뤘지만, AI에 프롬프트를 입력해 수 초만에 지브리 화풍의 일러스트를 만들어내는 행위 자체가 환경 파괴에 대한 경종을 울렸던 여러 지브리 작품의 정신과는 대척점에 있는 행동이라는 점에서도 비난을 산 바 있다. 한 예술가의 세계를 안다는 것은 곧 그의 예술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물려받는 행위와 같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도 우리는 남겨진 예술 작품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퇴색되지 않는 연민과 분노, 슬픔과 사랑 등의 감정을 발견하면서 삭막한 현실 속 말라가는 감성에 물을 주고 인간성을 지키는 이유를 되새기게 된다. 예술을 즐길 때 작품 자체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나 생애 주기에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누구나 이렇게 무언가를 느끼고 싶다는 욕망을 막연히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예술가를 깊이, 제대로 알아가는 일은 한 사람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며 표현 자체에 대한 인식에만 머무르지 않게 해준다. 작가가 진정으로 초대하고자 했던 곳으로 걸어 들어가며 그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이아트뮤지엄의 <아르누보의 꽃 : 알폰스 무하 원화전>은 알폰스 무하의 스타일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만들어진 신비의 베일을 한꺼풀 벗겨준 좋은 전시였다.
무하의 아르누보, 그 중심에 선 인간
전시장에 들어서고 느꼈던 첫인상은 말 그대로 '아름다움의 집약체'였다.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무하의 원화를 감상하며 아르누보 예술가로서의 그의 절묘한 테크닉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무하는 예술을 일상으로 데려오기 위한 아르누보 정신에 따라, 극도로 치밀한 디테일 묘사와 사실성에 집중한 전통적인 예술과는 달리 절제된 묘사로 오묘한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실제로 원화를 가까이에서 보니 무하의 그림을 볼 때 현대의 일러스트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선 하나 삐져 나오지 않은 단정한 드로잉으로 더욱 부각되는 디테일의 아름다움, 색의 조화, 선의 굵기를 조절해 핵심 주제와 주변부에 대한 시선을 적절히 분산하는 스타일은 뒤로 갈수록 능숙함이 배를 더해갔다. 이러한 그의 높은 집중력과 관찰력에서 비롯된 표현에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이 묻어나왔다. 특히 포스터 디자인 속에서 그가 그려낸 인간은 생동감이 넘친다.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 광고에서 인간 피사체를 내세운 데는 극장의 포스터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얻은 무하의 인지도를 백분 활용하려는 광고주의 영향이 크겠지만, 눈에 보이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는 인간 피사체는 자본 너머 여전히 인간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하는 생명력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곧 브랜드와 상품을 사람들이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유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그림을 쭉 스캔하다 보면 한 가지 무시할 수 없는 특징을 또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여성 피사체에 대한 관심이다. 무하는 남성 피사체도 그렸지만, 그의 그림은 대부분 여성을 피사체로 삼았다. 단순히 예술 사조의 특징이라고만 이해하기에는 그가 이후 슬라브 민족을 위해 그린 그림 속에서도 소녀나 여성의 형상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그가 순수하게 지향하는 예술의 방향과 여성이 서로 깊이 결부된 존재가 아닐지 추측해보았다.
무하의 그림 속 여성 피사체는 신성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가 그린 계절 연작에 등장하는 여성은 자연 그 자체로 치환되는데, 자연이 배경으로 묘사되지 않고 여성이 자연을 그려내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때문에 인간으로 무엇이든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스타일을 함축하는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그림과 디자인을 조화시키는 그의 예술은 인간의 시선을 가장 오래 머무르게 하고 가장 쉽게 시선을 잡아끄는, 인간 피사체를 보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그의 순수한 관심과 절묘하게 맞물린 것 같았다.
전시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그의 상업 예술 작품 구간을 지나치면, 슬라브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한 명의 국민으로서의 무하를 발견할 수 있다. 전시의 끝자락에서는 아르누보 정신 속에서 그가 지닌 민족과 이웃에 대한 애정과의 접점을 발견하고 무하라는 사람과 무하의 스타일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그가 그렸던 그림은 민족의 단결을 염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주제를 담고 있다. 광고와 상품 디자인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산뜻하고 온화한, 신성한 인간이 아니라 동등한 권리를 지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바라보고 궐기하기를 권유하는 결의에 찬 눈빛을 지닌 사람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물론 그가 체코에서 체류하는 동안 그렸던 그림들이 전부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다. 무하 특유의 아름다운 여성 피사체가 민족을 수호하는 여신이나 슬라브 민족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당당한 소녀의 모습으로도 그려졌다. 상업 예술의 대가답게 절묘한 구도와 여러 인물의 적절한 배치와 적절한 색조를 이용해 이 시기 그림은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을 자연스럽게 덜어내면서 주제의식에 집중하게 하는 듯했다. 그가 인간을 그리는 방식은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점을 이 구간에서 특히 실감했다. 그의 그림은 이렇게 인간 그 자체와 인간이 지닌 의지의 표상이다.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소비자에게 상품과 브랜드를 소구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데 회의감을 느꼈을 그의 마음에 그의 그림을 통해 공감할 수 있었다.
전시를 보기 전에도 무하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시를 보고 나오니 그것은 그저 인지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예술을 하는 데 한계가 있듯 예술가를 보지 않고는 보이지 않는 그림도 있는 것이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세상을 위해 예술을 하는 예술가의 소명이라면 그 한 명의 사람을 알아주는 것이 곧 예술을 보는 우리가 그와 진정으로 소통하는 방법이 아닐까. 예술가가 두른 신비를 동경한다면 그 신비의 근원을, 그의 영혼을 알아줄 가치와 이유도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르누보의 꽃, 서울에 피다 ‘알폰스 무하 원화전’
브라보마이라이프 기사 입력 2025-05-09 08:33
[미술관 탐방] 19세기 말 유럽 예술 운동, 아르누보의 대표 작가
알폰스 무하를 모른 채 프라하를 다녀왔다면 그 도시의 절반만 보고 온 셈이다. 무하는 체코가 사랑하는 국민 화가이자 ‘프라하의 별’이라 불린다. 화려한 그림으로 상업예술에서 큰 성공을 거둔 화가로 알려졌지만, 그는 나치의 고문 끝에 생을 마감한 비극적 운명을 지녔다. 그의 이름이 낯선 이라도 이번 전시를 마주하고 나면 무하의 예술과 삶이 깊은 인상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맞벌이로 바쁜 어머니가 목에 걸어준 연필 목걸이로 그림을 그리던 알폰스 무하는 재능에 비해 운이 따르지 않았다. 서른네 살까지 이렇다 할 대표작은 없었지만 그는 쉬는 날도 없이 일할 만큼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 성실함은 결국 기적을 만들어냈다. 1894년 파리의 인쇄소에서 서브 디자이너로 근무할 당시 모두가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난 때였다. 프랑스 국민 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포스터를 대타로 그렸고, 파리 시내에 붙은 4000장의 포스터는 밤새 모두 사라졌다. 아름다운 포스터에 반한 시민들이 전부 떼어가 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연극의 대성공으로 이어졌고, 무하는 여배우의 전속 작가로 발탁되며 단숨에 스타 작가로 떠오른다.
이후 그는 색채와 곡선, 꽃과 자연, 아름다운 여성의 조화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구현한 19세기 말 유럽의 예술 운동, 아르누보의 대표 작가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그는 상업 광고로 부와 명성을 얻은 뒤에도 가난한 예술가를 돕고, 귀족의 전유물이던 예술을 대중과 나누려는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50대에 접어든 그는 조국 체코로 돌아가, 슬라브족(동유럽의 주된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주제로 한 대작 ‘슬라브 서사시’에 착수한다. 당시 체코는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그는 민족주의 활동으로 게슈타포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후 1939년 세상을 떠난다. 나치의 억압 속에서도 장례식에 무려 10만 명이 운집했고, 그는 ‘프라하의 별’로 남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무하 탄생 165주년을 기념해 오리지널 포스터, 판화, 드로잉, 유화, 장식 등 300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화려한 작품 너머, 예술로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화합, 사랑을 전하려 했던 그의 여정을 꼭 느껴보길 바란다.
주요 작품
크리스마스의 기적 ‘지스몽다’
알폰스 무하의 인생을 바꾼 연극 ‘지스몽다’의 미국 순회공연 포스터. 당시 일반적인 포스터 크기는 세로 1m였으나 무하는 포스터 두 장을 이어 붙여 최초로 2m의 긴 포스터를 제작했다.
‘지스몽다’, 신시내티, 1895, 스트로브리지 석판 인쇄소, 197.5 × 74.5cm.
1895년에 제작된 ‘사계’
1895년에 제작된 ‘사계’로, 봄·여름·가을·겨울을 신비로운 여성으로 의인화한 장식 패널 연작이다. 부드러운 색감과 자연 모티브가 돋보이며, 알폰스 무하의 상업 예술 전성기를 대표한다.
‘사계 봄’, 파리, 1895, F. 샹프누와 101.6 × 52.5cm.
한 사람의 인생을 표현한 ‘황도 12궁’
아르누보의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작품으로, 모델은 사라 베르나르다. 무하 스타일의 특징인 원형 후광 안에 모델과 열두 개의 별자리가 배치되어 있으며, 하단 원 안에는 해와 달이 들어 있다. 태양과 달이 뜨고 지는 시간들이 쌓여 한 달, 일 년이 되고,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 된다는 철학이 담겨 있다. 실제로 달력 표지로 사용된 작품이다.
‘황도 12궁’, 파리, 1896, F. 샹프누와, 65 x 48.5cm.
슬라브 민족의 자긍심을 품은 ‘성 비투스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체코 프라하성에 위치한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재현한 작품이다. 무하의 유일한 종교적 공공 작품이며, 종교적 주제를 빌려 슬라브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강조한다. 곡선적이고 유려한 아르누보 스타일과 전통 슬라브 의상 및 패턴 등 민족적 요소가 조화를 이룬다.
전시 정보
기간 : 2025년 3월 20일(목) ~ 7월 13일(일) 시간 10:00~19:40 (입장 마감 19:00)
장소 : 마이아트뮤지엄(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518 섬유센터빌딩 B1)
관람 요금 : 1만 4000~2만 2000원 정규 도슨트 월~금 11시, 14시, 16시(무료)
국세실 기자
여배우 포스터로 운명이 바뀐 삽화가 - 아르누보 대표작가 무하
금발 여인·광배·식물무늬가 특징
임종업 기자
한겨레 기사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13-07-18 19:45
체코 출신의 아르누보 작가 알폰스 무하(1860~1939) 회고전 ‘알폰스 무하: 아르누보와 유토피아’전이 9월2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에는 그의 출세작 지스몽다 포스터(1894)를 비롯해, 프라하에서 공수해온 무하의 전성기 작품 235점이 전시된다.
아르누보는 18세기 말~20세기 초 유럽을 풍미했던 예술사조, 덩굴이나 담쟁이 등 식물의 형태를 모티브로 한 구불구불한 곡선장식이 특징이다. 당시 건축, 가구, 패션, 포스터 등 시각 예술 전분야에서 두드러졌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조악한 대량생산품이 양산되면서 생겨난 중세 수공예품에 대한 향수가 불러일으킨 미술공예운동의 결과이다.
1887년 스물일곱 살에 파리에 온 무하는 가난한 삽화작가였다. 무명 7년째인 1894년 말 우연한 계기로 만든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1844~1923)의 연극 포스터 한장이 운명을 바꿨다.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석판인쇄소의 모든 직원이 쉬는 동안에 포스터를 만들어 내라는 베르나르의 ‘명령’이 떨어진 것. 마침 친구 부탁으로 인쇄소에서 교정쇄를 봐주던 그한테 일거리가 맡겨졌다. 인쇄의 모든 공정을 알고 있는 그는 스케치에서 구성, 색보정 등 일관작업을 해냈다. 화려하게 수를 놓은 옷을 입고 난초 화관에다 종려나뭇가지를 든 채 단 위에 선 베르나르는 중세 성녀 모자이크화를 연상케 한다. 한장으로는 불가능해 두장으로 나누어 인쇄한 뒤에 이어붙인 등신대의 포스터는 이듬해 연초에 극장가에 나붙으면서 선풍을 일으켰다. 그 결과 무하는 ‘베르나르 전속’이 되었고, 각종 광고 포스터 주문이 밀려들었다. 구불거리는 금발, 주인공 뒤의 광배, 주변의 덩굴식물 장식은 ‘무하스타일’로 굳어져 각인됐다.
무하는 이후 파리만국박람회 오스트리아관 벽화, 부티크 푸케 상점의 인테리어, 미국 여배우 레슬리 카터와 모드 애덤스 포스터를 만들게 된다. <사계절>, <꽃>, <하루의 시간>, <예술> 등의 시리즈 작품은 병풍으로 꾸며져 시민들의 거실에 걸렸으며 시골에서는 성화로 오인되기도 했다. 작품들은 인상파 화가 고갱과의 교유, 여제자와의 결혼, 프리메이슨 심취, 오스트리아 치하의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과 독립의 기쁨 등 그의 삶과 유기적으로 교차돼 있다.
알폰스 무하
고국 체코에서 알폰스 마리아 무하(Alfons Maria Mucha)로 알려져 있는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는 1860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받던 슬라브 지역 중 하나였던 모라비아의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이반치체에서 7월 24일에 출생하였다. 그는 온드르제이(Ondřej) 무하의 여섯 명의 자녀 중 넷째였다. 아버지 온드르제이는 이반치체의 지방법원에서 안내원으로 일했으며 그의 대가족은 마을의 수감소로 사용하고 있던 오래된 석조건물에 살았다.
무하는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미술에 대한 열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무하가 기어 다니면서도 마루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무하의 목둘레에 연필을 묶어 주곤 했다고 한다. 현재 그의 초기작은 극소수만이 남아있는데 무하가 8세에 그린 예수의 십자가(Crucifixion) 작품은 가족 소장품으로 보존되고 있다. 무하의 초기 디자인은 어린 무하가 이반치체의 어느 교회의 좌석 위에 자신의 이름 이니셜의 모노그램을 새긴 데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무하는 매우 종교적인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 아멜리에(온드르제이의 두 번째 부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어린 무하는 수 년간 마을의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였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알토 목소리를 지녔으며 실제로도 뛰어난 노래 실력 덕분에 모라비아의 수도인 브르노에 위치한 명망 높은 성 베드로 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성당과 성당의 예술-건축, 프레스코화, 조각과 장신구-는 무하에게 지속적으로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훗날 무하는 “나에게 성당과 회화 그리고 음악의 개념은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성당의 음악 때문에 성당을 좋아하는 것인지, 성당이 내포하는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라고 언급했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격렬한 정치적인 분위기는 10대인 무하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1860~1870년대 동안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로 인해 거의 근절될 뻔했던 체코어와 고유문화 그리고 국가 정체성을 다시 재건하는 민족부흥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특히 16세기부터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체코 지역(모라비아, 보헤미아와 실레지아)에서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독립을 위한 투쟁이 19세기 말 다시금 격렬하게 일어났다.
브르노에서 유학 중이던 무하는 비엔나(Vienna)의 영향에 반대하는 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모라비아의 전통 미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후 고향 이반치체로 돌아온 17세의 소년 무하는 지방 법원에서 서기로 일하는 동시에 예술적 재능을 살려 전단지 디자인 및 정치적 회동을 하는 회관의 장식 등의 수많은 애국 활동에 가담하였다.
무하가 브르노에서 거주하는 동안 그의 드로잉 선생님이었던 모라비아인 화가 조세프 젤라니(Josef Zelany, 1824-1886)의 조언에 따라 무하는 1878년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in Prague)에 입학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무하는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으며 학교 측으로부터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충고를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1년 후 비엔나의 무대미술회사인 카우츠키 브리오시 뷔르가르트(Kautsky-Brioschi-Burghard)에서 젊은 화가를 모집하고 있다는 신문 광고가 새로운 기회가 되는데 이 광고를 본 무하는 곧바로 지원하였고 채용되어 19세의 나이에 무대미술 분야의 견습생으로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비엔나(Vienna)와 미크로브(Mikulov)
무하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비엔나에서 2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높은 수준의 문화와 음악의 중심지로서 비엔나는 무하에게 아름다운 교회들과 박물관, 미술관 그리고 콘서트홀 등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회사 측에서 제공한 무료입장권들로 연극을 자주 관람할 수 있었다. 여가 시간에는 미술의 최신 흐름을 다루는 야간 수업을 수강하였는데, 당시 비엔나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한스 마카르트 (Hans Makart, 1840-1884)의 스타일을 공부하였다. 또한 그는 빌린 카메라로 사진 촬영을 하며 시각 표현에서의 가장 최신의 매체를 실험해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첫 도시 생활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1881년 12월에 회사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었던 링 극장의 화재로 실직을 하게 된 것이다.
젊고 자유분방했던 무하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예술가로서 자신의 운을 시험하기로 결정하였다. 프란츠 요셉 역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탄 뒤 오스트리아-체코 국경지대에 있는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인 미쿨로프에 닿자 돈이 다 떨어져버린 무하는 그곳에서 하차하였다. 덕분에 무하가 그린 지역 귀족들의 초상화가 미쿨로프 지역의 대주주인 칼 쿠엔-벨라 백작의 눈에 띄었고, 백작은 무하를 백작의 저택인 엠마호프 성과 그의 선대의 고향이자 그의 동생 에곤 백작이 사는 티롤 지방의 강데(Gandegg)성의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일에 채용하였다. 백작 형제는 무하의 재능에 감탄하여 그의 후원자가 되었고, 후에 무하가 뮌헨과 파리에서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뮌헨과 파리에서의 학업과 초기 경력
1885년 무하는 뮌헨의 미술 아카데미(the Academy of Fine Arts, 원래는 the Royal Academy of Fine Arts)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독일에서 가장 유서 깊고 권위 있는 미술학교 중의 하나로서 학교 측은 예전 합스부르크 영토뿐만 아니라 새로운 독일 제국 전역에서 온 재능 있는 미술가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무하는 2년 동안 체코 출신 화가들인 요자 우프르카(Joža Uprka, 1861-1940), 루덱 마로드(Ludek Marold, 1865-1898), 카렐 마세크(Karel Mašek, 1865–1927), 또는 러시아 화가인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 Leonid Pasternak, 1862-1945)와 다비드 비드호프(David Widhopff, 1867-1933)등과 같은 슬라브족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속적인 우정을 쌓았다. 그는 민족주의적 열성으로 동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마침내 슬라브족으로 꾸려진 예술가 모임인 슈크레타 클럽의 대표가 된다. 또한 그는 미국의 노스다코타 주(州)에 있는 체코인 커뮤니티를 위해 세인트 시릴과 메토디오(Saints Cyril and Methodius, 1887)라는 제단화를 제작하였다.
무하는 칼 백작의 후원 아래 파리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1887년 가을에 세계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 도착한 그는 줄리앙 아카데미(Academie Julian)에서 수학한 뒤 1년 후에는 콜라로시 아카데미(Academie Colarossi)에 편입하였다. ‘보수적’이었던 에콜 데 보자르의 대안으로 설립된 이 두 사립학교는 진보적인 젊은 미술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1889년 초 백작의 후원을 더 이상 받게 되지 못하면서 무하는 공부를 갑작스럽게 중단하였다. 그는 파리와 프라하에 있는 출판사의 책이나 잡지사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기 시작했고, 세심한 손재주와 개성 있는 장식 스타일로 능력 있는 삽화가로서의 인지도를 점차 높여가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무하는 그랑드 쇼미에르(Grande Chaumiere)에 위치한 마담 샬롯의 크레메리(Madame Charlotte’s Cremerie) 식당 위 층의 작은 방에 거주하면서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나 아우구스트 스트린버그(August Strindberg, 1849-1912) 등의 미술가들을 만났다.
돌파구와 ‘무하 스타일’의 탄생
1895년은 무하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파리 연극계의 수퍼스타인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를 위해 디자인한 그의 첫 번째 포스터 ‘지스몽다(Gismonda)’가 새해 첫날 파리의 도심을 뒤덮은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전설적인 포스터로 잘 알려진 이 포스터의 탄생 비화는 1894년 성 스테파노의 날(12월26일)로부터 시작한다. 사라 베르나르가 그녀의 지스몽다 역을 위한 새 포스터를 주문하기 위해 르메르시에 인쇄소의 매니저인 모리스 드 브루노프(Maurice de Brunhoff)에게 전화했을 때 무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이 인쇄소에서 교정쇄를 감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르메르시에 인쇄소의 모든 정규직 직원들이 연말 휴가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며 ‘신성한 사라’의 다급한 요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무하에게 포스터 제작이 맡겨졌다. 헌데 이것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무하를 포스터 아트의 대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길고 폭이 좁은 사각형 안에, 실사 크기의 ‘신성한’ 여배우를 표현한 그의 디자인은 파리의 길가에서 보여졌던 기존의 포스터와는 완전히 달랐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무하의 포스터는 대중과 사라 베르나르를 매료시켰다. 수집가들은 무하의 포스터를 얻기 위해 전단지를 붙이는 이에게 뇌물을 건네기도 하고 심지어 밤에 몰래 면도칼로 포스터를 뜯어내는 모험을 하기도 했다. 사라 베르나르는 그 즉시 무하에게 포스터 디자인뿐만 아니라 무대와 의상 제작까지 의뢰하였다. 또한 1896년에 그는 인쇄업자 F.샹프누아와 광고 포스터와 장식 포스터 제작을 위한 독점적인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무하 스타일’이 시작되었다. 무하는 파리 아르누보의 주창자로서 그 입지가 확고해졌다. 그 후로 5년 동안 무하는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파리의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연극과 광고 포스터부터 장식 패널, 잡지 커버, 레스토랑 메뉴, 엽서와 달력에 이르기까지 각종 의뢰가 넘쳐났다. 그가 디자인한 보석, 식기, 직물 등에 대한 수요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무하는 일반 사람들의 집과 그들의 생활양식을 향상하는데 필요한 모든 견본을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장인을 위한 핸드북’을 구상하게 된다. 1902년 파리의 미술 대학의 중앙 도서관에서 발간된 『장식 도큐멘트(Documents Décoratifs)』는 그의 장식 작업을 집대성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1900년 파리: 아이디어가 탄생하다
1899년 무하는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표격으로 1900년에 개최될 파리 세계박람회에 선보일 실내 장식에 대한 공식적인 의뢰를 받는다. 무하는 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파빌리온의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 발칸 반도를 여행하며 영감을 얻고 스케치를 하였다. 그가 파빌리온을 위한 드로잉들을 완성하는 데에는 꼬박 7개월이 걸렸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위하여 일하는 자신의 상황과 제국의 통치 아래 고통받는 슬라브족의 딜레마에 고통스러워하였다. 무하는 이 경험으로부터, 훗날 슬라브 족 사람들의 고통과 영광을 위한 기념비적인 작품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무하는 파빌리온 작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기금 조성 마련을 위하여 미국에 가게 되는데 그의 이러한 선택은 미국을 여행하면서 기금 마련에 성공하였던 사라 베르나르의 사례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무하를 추앙하는 파리의 미국인들이 그가 아마도 초상화가로서 상당한 액수의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무하의 아메리칸드림은 그다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04년부터 1909년 사이에 걸쳐 이루어진 5번의 미국 방문은 무하에게 상당한 협찬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만 키워준 좌절의 시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하기도 하였다. 1906년에 그는 자신보다 19살 어린 아름다운 체코 처녀 마루슈카 히틸로바(Maruška Chitilová, 1879-1959)와 결혼을 하였다. 1909년에 딸 야로슬 라바가 태어나고 1915년에 아들 이르지가 태어난다. 그리고 슬라브 민족을 사랑한 미국의 갑부인 찰스 리처드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 1858-1939)이 [슬라브 서사시] 제작을 후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조국으로의 귀국
1910년 초반 무하는 그의 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조국으로 돌아온다. 모국에서의 첫 번째 작품인 새 프라하 시청의 시장실 장식을 마친 후에 그는 남은 생애를 [슬라브 서사시] 제작에 전념하였다. 몇 점은 6x8 미터에 달하는 20여 점의 이 기념비적인 회화들은 1000년이 넘는 슬라브족의 역사를 축복하며 체코와 관련된 다른 슬라브족 사람들은 다루었다. [슬라브 서사시]는 1912년과 1926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몰락시킨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무하의 조국은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로 재탄생 하게 된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위해 무하는 우표, 지폐와 국가의 휘장 및 경찰 단복 등 국가에 필요한 것들을 무상으로 디자인하였다. 192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 10주년을 맞이하자 무하와 찰스 크레인은 [슬라브 서사시]를 프라하 시에 공식적으로 기증하였다. 1928년과 1933년 사이에 이 연작은 프라하, 브르노와 플젠의 세 도시에서 전시되었다.
슬라브 서사시를 창조함으로써 무하는 인류의 평화라는 보편적 목표를 위해 모든 슬라브 민족이 함께 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독립을 이룩한 지 채 20년이 되지 않아 1938년 뮌헨 협정이 체결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 나치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939년 3월 15일에 독일군은 프라하를 침공하였고 무하는 게슈타포가 첫 번째로 체포했던 인물들 중 하나였다. 비록 심문 후에 집으로 보내졌지만 무하는 정신적으로 약화되고 건강을 해쳤다. 그는 79세 생일을 열흘 남겨 둔 1939년 7월 14일에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7월 19일에 프라하의 비셰흐라드 공동묘지에서 행해진 그의 장례식에는 공공집회와 연설에 대한 독일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군중들이 참석하였다. 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막스 스바빈스키(1873-1962)가 다음과 같은 장례 연설을 낭독하였다.
“가장 고귀한 장소 슬라빈의 가장 성스러운 곳 비셰흐라드 이곳에 체코와 프라하는 당신을 묻는다. 당신은 이곳에서 히라드차니와 성 비투스 성당을 보게 될 것이다. 어두운 가을의 구름이 당신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겨울의 흰 눈이 슬라빈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곧 봄이 다시 돌아올 것이고 체코 영토의 목초지와 숲은 온통 꽃으로 덮일 것이다. 영원한 평화 속에서 편히 쉬거라! 체코는 훌륭한 아들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알폰스 무하의 주요 작품
슬라브 서사시 연작 No.1, 알폰스 무하, 1926년
보헤미아의 노래, 알폰스 무하, 1918년
‘살롱데상 전시회’ 포스터, 알폰스 무하, 1899년
‘지스몽다’ 포스터, 알폰스 무하, 1894년
발행일 : 2013. 07. 19.
출처 :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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