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追憶)에서
박재삼
진주(晉州) 장터 생어물(生魚物)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晉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시집 『춘향이 마음』, 1962)
[작품해설]
박재삼은 평범한 일상의 주변에서 소재를 구해, 그 속에 녹아 있는 한(恨)과 슬픔의 정서를 섬세하게 포착해 내는 시인이다. 그는 이러한 정서를 절데된 언어와 서정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김소월, 서정주로 이어진 전통시의 맥을 잇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생활 체험을 회상하며 어머니의 슬프고 한스러운 모습을 압축적으로 그려 낸 작품으로, 그러한 박재삼의 시 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전 4연 15행의 이 시는 시상 전개에 따라 기· 서 · 결의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단락은 1·2연으로 어물전의 어둡고 슬픈 분위기가 어머니의 고달픈 삶과 한을 보여 준다. 어머니가 팔다 남은 고기들의 ‘빛 발하는 눈깔들’과 ‘은전’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어머니의 심정을 ‘은전만큼 손 안 닿는 한’으로 형상화한다. 바로 이 ‘한(恨)’은 이 시의 지배적 정서로 어머니의 고달픔이 응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단락은 3연으로 ‘울 엄매’가 돌아오기를 초조히 기다리며 떨고 있는 오누의의 슬픔을 ‘머리 맞댄 골방’과 ‘손 시리게’와 같은 표현으로 절실하게 나타낸다. 어린 그들에게 ‘울 엄매’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로 그들의 생존과 애정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셋째 단락은 4연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가 별을 보고 느꼈을 심정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여기에 이르러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한의 정서는, 달빛 아래서 빛나는 ‘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는 것으로 표현된다. 관념적 이미지가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되어 표현된 이 구절을 통해 작품의 주제 의식이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달빛에 반사되는 항아리릐 반짝임에서 어머니의 눈물을 발견함으로써 화자는 고통스런 어머니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그려낸다.
이 시는 가난했지만 사랑과 아름다움이 있었던 화자의 옛 추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특히 ‘어물전의 생선’ · ‘옹기전의 옹기’와 같은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소중한 기억을 재생시킨다. 이 과정에서 시상은 ‘어스름’으로 표현된 생활의 각박함이나 슬픔 등의 부정적 형상으로부터 ‘별빛’ · ‘남강의 맑은 물’ · ‘반짝이는 옹기’의 분명하고 밝고 긍정적인 형상으로 바뀐다. 아울러 ‘울 엄매야 울 엄매’ · ‘오명가명’ · ‘손 시리게 떨던가’ 등의 반복적 표현을 통해 운율감을 확보하고, ‘울엄매’ 같은 경상도 사투리로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정감을 불러일으켜 어머니에 대한 근원적인 친근감을 더욱 크게 느끼게 해 준다. 또한 ‘-다’와 같은 직설적 종결 어미 대신 ‘-을’ · -가‘ · ’-꼬‘ 등 가정과 영탄의 종결 어미를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애틋한 한의 정서를 심화시킨다.
[작가소개]
박재삼(朴在森)
1933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하여 경상남도 삼천포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국문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물에서」가 추천되어 등단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정적(靜寂)」, 시조 「섭리(攝理)」가 추천되어 등단
1956년 제2회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1967년 문교부 문예상 수상
1977년 제9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82년 제7회 노산문학상 수상
1983년 제10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6년 중앙일보 시조대상 수상
1997년 사망
시집 : 『춘향이 마음』(1962),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밤』(1975), 『어린것들 옆에서』(1976), 『뜨거운 달』(1979), 『비듣는 가을나무』(1980), 『추억에서』(1983), 『아득하면 되리라』(1984), 『거기 누가 부르는가』(1984), 『간절한 소망』(1985), 『대관령 근처』(1985), 『찬란한 미지수』(1986), 『박재삼시집』(1987), 『사랑이여』(1987), 『가을 바다』(1987), 『바다위 별들이 하는 짓』(1987),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7), 『햇볕에 실린 곡조』(1989), 『해와 달의 궤적』(1990), 『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1991), 『허무에 갇혀』(1993), 『나는 아직도』(1994), 『다시 그리움으로』(1996),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1997), 『박재삼시선집』(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