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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9, 9-13(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신 다음,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십니다. 그러나 이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 11)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 12)
이 말씀은 예언자 호세아가 선포한 것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부부 혹은 연인의 관계로 설정하고, 스스로 부정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여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부정한 여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주는 남편의 모습을 통해서, 부패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당신 품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로 초대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진정한 회개의 길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이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이다.”(호세 6, 6)
이는 진정한 회개의 길은 애꿎은 짐승을 잡아 바치는 외적인 제사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의와 형제들에 대한 자비를 지키는 일이며, 이를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예지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곧 하느님의 신의와 자비를 배우는 일이요,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타협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두둔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크신 자비요, 신의요, 호의였습니다. 용서요, 사랑이요,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랑, 이 호의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토록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에, 또한 그토록 자비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용서를 입은 죄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2)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가? 의인이라고 여기는가? 만약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죄인이라면,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기에 앞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하심은 바로 당신께 받은 그 사랑과 호의로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을 단죄하기보다 자비와 호의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무죄한 사람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 7) |
첫댓글 아멘!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