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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복용할 경우엔 비타민 A는 16%, 비타민 E 4%, 베타카로틴 7% 사망률 높아져
합성 비타민, 천연 비타민과 체내에서 효능 달라… 야채·과일 등 음식 통해 비타민 섭취해야
직접적 메커니즘은 구명 못 해… 비타민 C는 사망률에 큰 영향 안 끼쳐
서양 의학계에 지난 3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인체에 유해한 활성산소를 막아주고 신체의 노화를 방지해 준다는 이유로 ‘생명의 묘약’이라 불렸던 비타민 A, 비타민 E, 베타카로틴이 건강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사망률을 5% 이상 증가시킨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가 나온 것이다.
비타민의 효능에 대한 기존 학설을 정면으로 반박, 서양 의학계에 파문을 일으킨 이 연구는 놀랄 만한 내용으로 인해 ‘코펜하겐 쇼크’라고까지 불렸다. 연구 주체는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병원 연구소의 고란 젤라코비치(Goran Bjelakovic) 박사팀. 이 연구소는 덴마크 코레인 그룹(Cochrane Hepato-Biliary Group)이 지원하는 비영리 연구기관이다.
연구팀은 무려 23만2606명(44.5%는 여성)의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기존의 학술논문 68건을 통계학적 방식으로 재분석해 그 결과를 ‘미국 의학협회보(JAMA·The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2007년 3월 1일자(현지시각 2월 28일)에 게재했다. 제목은 ‘항산화 비타민 보조제와 사망률에 관한 통계적 분석(Mortality in Randomized Trials of Antioxidant Supplements for Primary and Second Prevention;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이다. 미국 의학협회보는 1883년 창간, 12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 권위의 의학저널이다.
연구팀은 논문을 통해 “비타민 A, C, E, 베타카로틴을 함께 복용했을 경우엔 ‘보수적으로 잡아도’평균 5% 이상 사망률이 높아진다”며 “이를 따로따로 먹었을 경우, 비타민 A는 16%, 비타민 E가 4%, 베타카로틴이 7% 사망률을 높인다”고 발표했다. 연구팀은 하지만 “비타민 C의 경우엔 사망률 증감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사망률에 영향을 끼친 직접적 메커니즘은 아직 구명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 대부분의 비타민 보충제는 이번에 논란이 된 비타민 A, C, E, 베타카로틴 중 최소 한 가지 이상을 함유하고 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종합 비타민은 대부분 화학적 방법으로 제조되고 있다. 세포 재생을 촉진시켜 얼굴 주름을 펴준다고 알려진 ‘레티놀’은 비타민 A의 화학명이며, 노화를 막아주고 정력을 증강시킨다고 알려진 ‘토코페롤’은 비타민 E의 화학명이다. 베타카로틴은 사람의 몸속에서 비타민 A로 전환되는 물질이다.
코펜하겐 연구팀은 논문을 통해 “매일 또는 이따금씩 평균 2년7개월간 비타민 보충제를 복용한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향후 평균 3년3개월간 신체의 변화 상황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이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대상자의 평균 복용량은 비타민 A가 2만219IU, 비타민 E는 569IU였으며, 베타카로틴은 17.8㎎이었다. 여기서 IU(International Unit)란 비타민 효과를 측정하는 국제 단위로, ㎎으로 표시하기 어려운 미량의 영양소를 따질 때 사용한다. IU의 절대량은 영양소마다 차이가 있는데, 비타민 A 1IU는 0.3μg이며, 비타민 E 1IU는 0.667㎎이다. 베타카로틴 1IU는 0.6μg이다. 참고로 1μg은 1000분의 1㎎이다.
연구팀의 크리스티안 글루드(Christian Gluud) 박사는 “연구 결과는 우리에게도 충격적이었다”며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비타민 보충제를 먹지 말고, 비타민을 섭취하기 위해 보충제를 먹지도 말라”고 권했다.
미국 비타민 시장 21조원 규모
코펜하겐팀의 연구 결과는 서양 의학계를 발칵 뒤집었다. 논문 결과를 놓고 학계는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제약업계에선 즉각적으로 “말도 안된다”며 반박하고 나섰다. 언론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 USA 투데이, 보스턴 글로브, 로이터, 영국의 더 타임스 등 세계 유력 언론은 일제히 이 내용을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3월 7일자로 논문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 결과는 2006년 5월의 미국 국립보건원(NIH·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발표와 상통한다”고 보도했다. 미국 NIH는 “미국 성인이 매년 비타민 보충제 구입에 쓰는 금액이 무려 230억달러(약 21조7120억원)에 달한다”며 “그 비중이 너무 과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시장평가기구 스핀스(SPINS)는 “미국 비타민 보충제 시장이 2005년 한 해만 무려 18%의 성장률을 보였다”고 발표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성인의 절반이 어떤 형태로든 비타민 보충제를 복용하고 있다”며 “미국과 캐나다, 유럽을 합쳐 보충제를 먹는 사람 은 8000만~1억6000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코펜하겐 연구소의 연구 결과는 이렇게 막대한 돈을 비타민에 지불할 가치가 있느냐에 관한 논의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USA 투데이는 미국 소비자과학센터의 영양학자 데이비드 샤트의 말을 빌려 “코펜하겐팀의 통계적 접근은 일리가 있다(well accepted)”면서 “비타민이 사망률을 증가시킨다는 연구결과도 흥미롭지만, 비타민이 긍정적 효능을 보이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 또한 흥미롭다”고 비꼬았다.
보스턴 글로브지 2월 28일자는 연구에 참여했던 글루드 박사의 입을 빌려 “비타민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제약업계는 이같은 연구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어 미국 터프츠 대학(Tufts University) 식품영양학과의 앨리스 리히텐슈타인 교수의 입을 통해 “연구의 메시지는 간단하다”며 “비타민 보충제가 아니라 식품을 먹으라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유럽 의학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연구 결과가 공개되자 영국심장재단(The British Heart Foundation)은 “비타민 보충제를 먹지 말고 식품을 통해 천연 비타민을 섭취할 것”을 권장하고 나섰다. 영국심장재단의 엘렌 메이슨 박사는 “항산화 비타민 보충제가 심장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과학적 이유는 있다”면서도 “하지만 결정적 증거는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영양학회도 가세했다. 학회의 프랭키 필립스 박사는 “여러 가지 제제를 조합해 화학적으로 만든 비타민 보충제는 결코 천연 비타민을 대체할 수 없다”며 “식품을 통해 비타민을 섭취할 것”을 권했다. 박사는 “비타민 보충제가 균형잡힌 식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며 연구 결과를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였다.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의 성미경 교수는 “이런 방식의 연구는 기존의 수십 가지 유의미한 실험을 모아 다시 분석한 것”이라며 “이런 방식으로 하면 편견이 들어갈 여지가 없기 때문에 신뢰도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비타민 미네랄 사전’을 쓴 최현석 박사(전 삼성제일병원 내과 과장, 서울 현내과 원장)는 미국의학협회보(JAMA)에 대해 “학계에서 많이 인용하는 저널”이라며 “이 논문은 의과대학 교과서에 실어야 할 정도로 의미가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