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월 27일
아폴로1호 불, 우주비행사 3명 사망
1967년 오늘, 모의발사 연습 중이던
미국 유인 우주선 아폴로1호에 불이 났다.
우주선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화염에 휩싸
였다. 안에 갇힌 버질 그리섬(V. Grissom)
과 에드워드 화이트 등 우주비행사 3명이
모두 숨졌다.
아폴로1호는 한달 뒤 발사될 예정이었다.
이번 화재로 미 항공우주국 NASA가 추진한
달 착륙 계획은 2년 6개월 뒤에야 실현됐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착륙에 성공했다
▶2010년미국 진보 역사학자 하워드 진 별세
▶2010년‘호밀밭의 파수꾼’
미국 소설가 J D 샐린저 별세
▶2010년 1월 27일 도요타,
안전결함으로 주력차종 판매·생산 중단
도요타 리콜대상에 포함된 캠리.
▶2009년독도경비대원 1명 실종
▶2003년휴대전화 ‘010‘ 통합. 통신위서 결정
2004년 1월 1일부터 모든 휴대전화 신규가입자의 식별번호가 ‘010’ 으로 통일되며 010 사용자끼리는 ‘oooo-oooo’ 식의 8자리 고유번호만 입력해 통화할 수 있다. 또 기존 가입자도 원할 경우 010으로 바꿀 수 있다.
통신위원회(위원장 윤승영·윤승영)는 27일 정보통신부가 상정한 이동전화 식별번호 010 통합 방안과 번호이동성제도를 내년 1월부터 도입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통신위는 또 1위 사업자부터 6개월씩 번호이동성을 순차적으로 실시하기로 한 정통부안에 대해 실시 간격을 정통부 장관에 일임했다.
이에 따라 정보통신부와 SK텔레콤 사이에 논란이 됐던 ‘010’ 이동전화 식별번호 통합과 번호 이동성 도입문제가 일단락됐다.
번호이동성이 실시되면 가격이나 서비스를 비교해 자신이 원하는 기존 번호를 그대로 갖고 이동통신 회사로 옮겨갈 수 있다. 다만 특정업체에 가입자가 몰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 간격을 두고 일방향 이동만 허용한다. 실시 간격은 당초 6개월이나, 줄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통신위의 이번 결정에 대해 2,3위 업체인 KTF와 LG텔레콤은 환영한 반면, 선두업체인 SK텔레콤은 불만을 표시했다. SK텔레콤은 정통부가 010식별번호통합과 번호이동성 시차별 실시안을 마련하자 “특정업체 봐주기” 라며 반발했었다.
휴대전화 ‘010‘ 통합.
▶2003년남북한 군사분계선 통행 타결.
폭 10m임시도로 개방
▶1998년WHO 첫 여성사무총장에 브룬틀란트 선출
그로 하를렘 브룬틀란트.
▶1997년마스하도프, 체첸 대통령에 당선
아슬란 마스하도프.
▶1996년프랑스, 남태평양의 팡가투파환초에서 시라크대통령 취임이후 6번째 핵실험
▶1995년한국-세이셸 국교 수립
▶1994년김대중 전민주당대표,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 설립
아태평화재단 현판식.
▶1989년김현철 전 내각수반 사망
▶1989년영국 항공기 설계가 소프위스 사망
▶1989년장세동 전 대통령 경호실장,
직권남용혐의로 구속
▶1987년김태홍, 신홍범,
김주언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기소-군사독재 정권의 보도지침 폭로 파문
▶1983년소련, 중부유럽 비핵화지대 제의
▶1982년진해만 오염방지를 위해 첫 그린벨트로 설정
▶1977년국내 최초 남성이 간호학과(서울대) 입학
▶1973년민주통일당 창당(대표 양일동)
▶1973년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파리평화협정 조인
베트남 평화협정 조인식에 참가한 각 정부대표단.
▶1971년김대중후보 자택 폭발물사건 발생
▶1971년과테말라의 대통령(1951-54) 아르벤스 사망
▶1971년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 국내 발효
▶1967년미국-영국-소련, 우주평화조약 조인
▶1967년미국 우주왕복선 아폴로1호 조종사3명 사망
http://naver.me/Gnz5w7Cd
▶1965년월남 쿠데타로 칸 재집권
▶1964년프랑스, 중국정권 승인
▶1963년민정당 발기인대회 개최
▶1961년민주당 소장파 32명 신풍회 결성
▶1959년프라우다지 이동준 기자 판문점에서 귀순
1959년 1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96차 군사정전위원회의 도중 소련 프라우다 신문사의 평양지국 번역기자 이동준씨가 `나는 자유를 선택한다`며 군사분계선을 넘어 자유세계로 탈출했다.
이동준씨.
남루한 남색 양복에 흑색 외투를 걸치고 레닌 노동모를 쓰고 회담장소에 나타났던 이씨는 이날 아침 회담이 시작된 지 약 5분후인 오전 10시35분경 때마침 공산대표가 자유세계에 대한 욕설과 비난을 한참 퍼붓고 있는 동안 북한기자들과 군인들의 눈을 피해 회담장소건물 바로 옆에 있는 유엔군전방기지 사무소로 넘어왔다. 이후 이씨는 그가 입고 있던 낡은 옷을 유엔군복으로 갈아입고 극비리에 서울로 왔다.
이씨는 28일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1956년 프라우다지 번역기자로 들어갔던 것도 오늘의 성공이 목적이었다고 말하면서 북한의 실정을 폭로했다.
▶1958년미국, 소련 문화교류협정 조인
▶1956년엘비스 프레슬리 히트곡
`브레이크 호텔` 발매 시작
▶1953년덜레스 미국 국무장관, 롤백정책 언명
▶1951년미국, 네바다에서 원자폭탄실험 개시
1951년 네바다주에서 실시된 원폭실험. 당시 미국은 500개가 넘는 원폭을 보유하고 있었다
▶1950년미국, 나토가맹국과 상호방위협정 체결
▶1948년유엔한국위원회에서 남북주둔군
철수 후 자유선거 실시가능 주장
▶1945년소련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1945년 1월27일, ’20세기의 치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다. 소련군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700kg이나 되는 머리가락, 사람의 골분(骨紛),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의치와 안경태였다. 5kg으로 1000명을 살상할 수 있는 ‘사이클B’ 가스가 사용된 흔적도 발견됐다.
미군이 해방시킨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수용자들. 줄무늬 옷을 입은 이들은 `화장소(火葬所)` 행이 결정됐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가스실 처형은 1944년 11월부터 중단됐고, 죄수들도 5000여명의 환자들만 남기고 걸을수 있는 6만명은 모두 독일로 옮겨졌다. 아우슈비츠에 있는 3개 수용소 중 이날 소련군이 해방시킨 수용소는 독일군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곳이고 이보다 20배나 큰 인근의 비르게나우 수용소는 독일군의 파괴로 흔적만 남았다.
1940년 4월 아이히만 히틀러의 지시로 건설된 아우슈비츠에서 가스학살이 시작된 것은 이듬해 9월부터. 유대인 절멸을 결정한 1942년 1월부터는 이른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가 자행됐다.
150만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떼죽음당한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전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 전쟁이 끝난 1947년에 처형됐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유럽 각지에서 끌려온 유대인이 90%였다. 집시, 여호와의 증인 신도, 동성연애자 등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1926년영국 베어드, 세계최초로 텔레비전 실험에 성공
1926년 1월 27일 스코틀랜드 출신 존 베어드가 영국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 앞에서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실험에 성공했다. 회원들 앞에 놓여 있는 인형이 무선장치를 통해 멀리 떨어진 브라운관 화면에 영상으로 그대로 보여진 순간이었다.
베이드가 인형을 이용해 실험실에서 영상실험을 하고 있다
사진처럼 평면적이지 않고 인형에 햇빛이 비치는 부분과 그림자 부분이 선명하게 구별되는 입체적인 영상이었다. 비록 주사선이 30개에 지나지 않고 초당 프레임도 10개에 그치는 조잡한 형태였지만 베어드는 이 장치를 ‘텔레비전’이라고 명명했다. 베어드는 이에 앞서 1924년 텔레비전 방송으로 물체의 외관을 전송했고, 1925년에는 인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화상으로 전송한 바 있다.
▶1921년한인기자단체 무명회 발족
▶1901년이탈리아 오페라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사망
베르디 [Verdi,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1813.10.9/10~1901.1.27]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가 1901년 1월 27일 사망했다. 1813년에 태어나 향년 88세를 살다간 베르디의 삶은 ‘오페라에 의한, 오페라를 위한, 오페라의 인생’그 자체였다.
신화적, 초자연적 소재보다는 나약한 인간 내면의 본성에 관심을 기울인 그의 불후의 명작들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오텔로’ ‘리골레토’ 등은 오늘날 오페라 무대서도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가장 크고 웅장한 산을 쌓아올린 거장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음악가가 아닌 그의 개인적 삶은 거장으로서 온갖 부와 명예를 누린 특별한 삶은 아니었다.
농부의 피가 흐르는 베르디는 이탈리아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시골마을인 고향 부세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타가타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그는 틈나면 책을 읽거나 작곡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특히 농가를 방문하여 이웃들과 농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베르디는 생전에 발표하는 오페라마다 대부분 최고의 성공을 거두어 대도시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이탈리아의 영웅으로까지 추앙받으며 명예욕을 충족시킬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세속의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유롭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 1881년독립운동가 김규식 출생
광복후 미군정의 주된 관심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안을 맡길 지도자 선정이었다. 김구는 고집스럽게 반탁을 주장해 일찌감치 대상에서 제외됐고, 이승만 역시 반공·반소의 극우파로 비쳐져 배제됐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인물이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을 펼치고 있던 우사의 노선이 미국의 의도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1881년 1월 27일에 태어난 우사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10여 년간을 후진양성에 힘썼으나 나라의 명운이 다하자 중국으로 망명,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파리강화회의(1919년)에 참가하고, 이승만과 함께 미국 조야를 상대로 독립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22년간 중국에 머물며 임정 부주석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귀국한 우사도 초기에는 반탁 대열에 동참했지만, 남북분단을 우려해 ‘임시정부 수립’ 우선쪽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이를 위한 좌우합작이 그가 풀어야 할 선결과제였다.
1947년 4월 7일, 미군정이 대통령직 수락을 요청했지만, 김규식의 대답은 뜻밖에도 ‘노’. 계획이 차질을 빚으면서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이 힘을 받자 우사는 북행까지 감행하며 좌우합작 돌파구를 찾으려 했으나 이도 실패하는 바람에 낙담해 있던 중 6·25를 맞아 납북됐다. 1950년 12월 평남 만포에서 69세로 숨졌다.
▶1814년독일 철학자 피히테 사망
▶1756년오스트리아 작곡가 모차르트 출생
▶98년제13대 로마제국 황제 트라야누스 즉위
▶98년제12대 로마제국 황제 네르바 사망
https://youtu.be/nke83hUYJcc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