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면의 힘-레인스뷔르흐의 철도
서동욱
곡면의 힘에 대해 점잖지 못한 생각을 한 적 있어요
취기가 오른 안경점 주인은 말했다 엉덩이 말이에요 이혼했을 때나 지금도 생각은 그런데,
곡면을 통해 빛을 휘어지게 만드는 게 직업이지만
중력과 대결하는 살덩어리의 노력이야말로
곡면의 힘
신체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선 어떤 힘이 필요한가?
신체를 수제비 그릇에서 구원하는 밧줄
그러므로 곡면은 시간의 예술이다
모든 것이 스웨터 실처럼 풀려나가기 직전까지만 인생이다
그리고 기차는 네덜란드의 들판을 미끄러졋다
17세기 이 고장에 숨어든 스피노자의 기하학이
곡면에 던져진 기차의 탈선을 막았고 소들과 운하를 지켰고
반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고개를 숙이는 손잡이처럼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형선고로 마감되는 법원 놀이를 좋아하는 성직자가 등장한다면?
사형선고는 종교의 기원이니
삶을 신성하게 하기 위해 늘 반복하라고 가르친다면?
십자가가 원형으로 구부려 곡면으로 된 형틀도 기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아
어느 날 눈이 덮이며 원한이 도래했다
인형의 관절보다 정적한 것은 없다
윷놀이처럼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때 기차의 운행이란
윷가락처럼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환호하는 가족들을 위해
설날의 부드러운 담요에 좋은 패를 만드는 것
눈이 덮인다 말은 뚜벅뚜벅 움직인다
얼굴들은 제 영혼을 미처 덮지 못하고 과자 포장처럼
좌석들 아래로 흩어졌고
현장에 도착한 수학자는 화를 내며 무리한 곡면을 계산했다
방금 전까지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던 들판이
오래된 폐허로 변했으며
한 세계가 불타는 동안에도 나는 휴대폰의 메모들은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령, 곡면의 힘은
소파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었어, 라고 임시 저장해 놓은 문자
그리고
가령 가령
실없는 안경점 주인 말이야 술 한잔하는데 웬 수다가 그리 많은지
엉덩이 말이에요, 하하, 미친 녀석
그러나 그는 레인스뷔르흐가 간직한 정직한 곡면의 철학자였고
나는 실없이 너의 엉덩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소파의 아름다움 같은 것
네 옆에 와서 누운 밤, 여러 번 사형선고를 받았기에
내 영혼이 있던 자리는 에프킬러로 박멸한 쓰레기통처럼 깨끗한 빈방
그래서 수색대가 탐내지 않는 장엄한 고기만이
네 몸 곁에 꼭 붙어 있었어 아마 엉덩이 옆에?
괄약근 옆 입술 계속 인간을 초대하고 질문을 던지며 무한히 열리는 문들
쓰레기 하치장! 누군가 증오를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악을 쓸 것이고
음탕한 철학자의 손이 따라간 곡면에 화가 난 사람들이 표백제를 끼얹을 때
우리 몸은 눈 덮인 들판에 버린 옷처럼 매장될 거야
감전
옷장 안에 전기를 잘 가두었다
버려진 스웨터 속에서 잠을 자던
영혼의 마지막 조각 같은 정전기
생과
생을 통과하는 감전
나는 마흔을 슬프게 보낸 것 같고
너는 저녁이 와도 불을 켜지 않았으며
아마도 대홍역의 똑같은 개찰구를
언젠가 통과했겠지
세월을 인내할 줄 아는 것은
옷장이 아니고 냉장고다
저토록 엄격한 보호자를 보라
개찰구의 센서들만이 안과율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한 사람이 우는 물처럼 지나갔고 왜
한 사람이 오지 않는지
그러나 금방 치워지는 식당 밥상처럼
새 밤이 오고 새날이 온다
어느 날 마른 발걸음은 기억을 잃어버리고서
역에서 내린다
탁, 탁 정전기 하나가 별을 괘도 밖으로 던질 때마다
깜짝 놀라서
낯익은 난간을 꽉 쥐어 본다
― 서동욱 시집, 『곡면의 힘』 (민음사/2016)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벨기에 루뱅 대학 철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세계의 문학>과 <상상>의 봄호에 각각 시와 평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저서로 「들뢰즈의 철학-사상과 그 원천」, 「차이와 타자-현대 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시집으로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이 있으며, 「들뢰즈에 대한 오해들」, 「인터넷 시대의 소통과 책임성」등의 논문과 비평을 발표했다. 옮긴 책으로는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등이 있다. 현재 서강대, 서울예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