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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형동검 (細形銅劍) - 한국식 동검]
위 검들은 흔히 [한국식 동검]이라 불리는 [세형동검]들.
거의 다 한반도 중부 남부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한국식 동검]이라 불린다.
[한국식 청동검(세형동검)의 조립식 구조 - 대구 출토 청동검의 예]
[조립된 세형동검(한국식 동검)의 한 예]
평안남도 성천군 백원리 9호 고인돌 무덤에서 발굴된 세형동검이
3천4백년전 것으로 드러나면서 세형동검은 더더욱 한국고유의 검으로 확인되었다.
세형동검은 청천강 이남에서 주로 발견된다.
세형동검 영역은 [남방식 고인돌] 영역과 일치한다.
[남방식 고인돌]이란 관이 땅 속에 있는 고인돌을 말한다.
( [북방식 고인돌]은 관이 땅 위에 있다.)
세계고고학계에서 한국이 고인돌의 나라로 유명하듯이
한국에는 세계고인돌의 반 이상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돌도 한국에 있으므로(전남 화순 - 8천년전 것)
[남방식 고인돌] 역시 한국고유의 것.
ㅇ 마한 - 세형동검과 남방식 고인돌 주요존재지
ㅇ 진한 - 비파형동검과 북방식 고인돌 주요존재지
ㅇ고조선연방 - 포괄적 [ 세형동검+ 비파형동검] 지역
후대에 고구려,백제,신라는 말 즉 언어가 같았다.
이를 보아도 마한과 진한은 원래 같은 민족이었고
단군왕검을 지도자로 추대하여 고조선연방(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그림은 대강 3천년 이상 전 고조선과 은나라의 강역도 |
[약 2천2백년전 삼한도]
고대 중국인들은 변한(弁韓)을 변진(弁辰)이라 많이 불렀다.
즉 변한(弁韓)은 진한(辰韓)의 일부로 생각했다.
진한(辰韓)사람들이 중국동부로 건너가서 된것이 변한(弁韓)이기 때문.
중국 고대책인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 동해의 안쪽, 북해의 주변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朝鮮)이라 한다.
하늘이 지극히 아끼는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 朝鮮 天毒 其人 水居 偎人愛之]
(여기서 [북해]란 [발해] 즉 [서해 위 바다]를 말한다.)
후대에 약 2천1백년전 한사군 때 변한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온다.
[변한인들의 이동]
평양에서 [낙랑 유물]이 발견되는 것도 그 이유로 본다.
변한의 한 지역이었던 [낙랑]사람들이 선조의 고향인 한반도로 되돌아와서
현 함흥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최씨 낙랑국]도 세운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낙랑은 [고조선 연방]의 한나라였고 발해만 북부에 존재했으며
한4군 설치 때문에 다시 한반도로 돌아온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그보다 1백년전
진시황 때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진한(辰韓)인들의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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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그곳의 노인들이 세대를 넘어 전하기를
'옛날 진역(秦役 : 만리장성 만들기에 동원 추정)을 피해 망명(亡命)하여
자연스레 차츰 한국(韓國)에 왔다.' 한다.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을 떼어내 주었다."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 출처: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韓(辰韓))
(이 삼국지는 소설 삼국지가 아니라 역사책 삼국지.
소설삼국지는 이 역사책 삼국지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
그런데 위 기록에서
[진한(변한)인들이 자연스레 차츰 한국(韓國:마한)에 왔다.(來適韓國)]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을 떼어내 주었다.(馬韓割其東界地與之)]
라 했듯이
전쟁도 없이 그냥 받아들여서 땅까지 떼어준 것.
즉 마한과 진한은 서로 [아주 가까운 사이 (사실상 하나의 나라 - 고조선 연방)]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 기록에 나오는 진한(辰韓)은 압록강 유역에 존재했던 [원조 진한]이 아니라
놀랍게도 멀리 중국 북서부 [함양 ( 서안(장안)의 서부)]에서 온 사람들로 보인다.
(북경대 출판 중국 고대사 교학참고지도집상의 "진장성(秦長城)" - 송준희님 제공) |
위 지도의 중국 북서부 "진장성(秦長城)"이 바로 진시황이 쌓았다는 장성.
지금의 만리장성은 진시황보다 1천수백년 후대인 명나라때 중국 북부의 여러 성들을 연결해서 만든 것.
게다가 위 그림의 만리장성의 동쪽 부분은 사기다.
명나라때 완성된 만리장성은 그 동쪽 끝이 위 지도와 같이
발해만 북부 산해관(山海關)에서 끝난다.
산해관의 끝은 바다로 들어가 있다.
위의 [함양]이라는 곳은 서안(장안) 옆에 있는데 진시황이 수도로 삼은 곳.
- 진나라는 여러번 수도를 옮기다가 마지막에 함양을 수도로 삼는다.
[진장성(秦長城)]은 중국 서북부의 호전적인 민족으로부터
진시황이 자신의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세운 것.
그런데 [함양]은 그 전에 이미 고대 한국인들이 건너가서 수많은 피라미드를 세운 곳.
그래서 진시황 당시에도 많은 고대한국인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위 사진들처럼 함양과 서안(장안)에는 피라미드들 고대한국인들이 건너가서 만든
피라미드들이 많다. - 중국당국은 흙으로 만든 중국황제릉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런데 구글어스도 [피라미드]라고 설명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집트 대피라미드보다 밑면적이 더 큰 것도 있다.
[피라미드의 전파]
피라미드의 원조는 황해평원에 있다고 보고
한강유역 -> 대동강 유역 -> 압록강 유역 -> 중국 등으로 전파됐다고 본다.
즉 세계 피라미드의 원조는 남한지역
[진한, 변한인들의 이동]
진시황 당시 중국의 함양에 살던 자신들이 [진한(辰韓)인의 후예]라는 것을
강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함양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고대한국인들은 중국 땅으로도 퍼져서 원주민 들에게 문명을 전하고 합해졌지만
특히 [함양, 서안(장안)]같은 곳은 고대한국의 상징인 피라미드를 많이 건립한 [특별한] 곳이므로
그 곳에서는 오랫동안 [진한(辰韓)]이라는 이름으로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며
지금의 중국 [소수민족]처럼 별개의 나라로 존재하지 않았나 한다.
그러다가 진시황 때에 이르러 그들 중 상당수가 그들 선조의 원 고향인 남한 땅으로 이동한 것으로 본다.
[도제기마인물상 (국보 91호)]
가야, 신라는 대강 [경상도 토착민과 진한, 변한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평야가 많은 전라-충청-경기는 마한의 중심지 였으므로
[진한, 변한에서 온 사람들]은 비교적 평야가 적은 경상도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마한이 받아준 것만 해도 그들은 다행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위 [도제기마인물상 (국보 91호)]은 진시황의 장성 쌓기를 피해서
그들의 선조들의 고향 한반도로 온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위 기마인물상의 말 뒤에 올린 것은 솥.
밥해 먹으며 왔다는 것은 먼 거리를 왔다는 것.
그러나 말을 타고 배를 타고 이동했으면 생각보다 빨리 남한 땅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 함양(咸陽)에서 온 사람들은 경기-충청-전라보다는
대체로 주로 경상도로 간 것으로 본다.
경기-충청-전라는 평야지대가 많기 때문에 마한의 중심지 였을 것이고 그래서
위의 삼국지에 나오는 것처럼 [마한의 동쪽] 즉 경상도로 많이 간 것으로 본다.
이 사람들이 신라 건국의 한 축이 되었을 것인데
위 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경남에는 [함양]이라는 곳이 있다.
경주 등 비교적 평야지대로 간 사람들은 그 곳에 원주민들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에
주로 흡수 되는 경향이었을 것이나
지금의 경남 함양 같은 산지에는 원주민이 별로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곳에 자신들이 온 곳인[함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지 않았나 한다.
물론 [원조 함양 ]즉 [피라미드 지역]은 남한 지역
생각있는 분들이라면 부정할 수 없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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