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리(扶鼎里)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교무부
올 겨울은 유난히 긴 것 같다. 춘분이 지났건만 영하의 날씨에 때 아닌 폭설로 떨어진 수온계는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일행은 찬바람을 맞으며 지금은 사라진 부정리(전북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의 옛 터를 찾아 차에 올랐다.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정읍IC를 나와 덕천면으로 가니 왼쪽에 시루봉과 객망리(신송마을)가 나왔다. 부정리 옛 터는 상제님의 생가가 있는 객망리 앞 덕천사거리에서 이평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넘어 오른 편에 위치하고 있다.
정읍에 도착해 먼저 간 곳은 부정리와 가까운 산우마을이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많은 어르신들이 시장에 가신다며 마을 앞길로 나오고 있었다. 인사를 드리고 부정리에 대해서 여쭈었더니 손가락을 가리키시며 동네 뒤로 넘어가면 나온다고 하셨다. 그분들께 안내를 부탁드렸더니 류근수(78세)옹께서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시면서 안내를 해주셨다. 그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부정리에 사람이 살지 않은 지가 20여 년이 지나 마을이 터만 남아있는 상태고 부정리에서 살던 분이 산우마을에 계시는데 연세가 많아 거동이 불편하다고 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산우마을 뒤편으로 올라가니 부정리에 있는 많은 부분의 산을 깎아 밭으로 쓰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 도착한 곳은 알미산 앞으로 양팔처럼 뻗어 있는 형상이었다. 마을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집터에는 몇 기(基)의 무덤만이 남아있었다. 할아버지께 부정리의 유래에 대해 여쭈었더니 “유래는 모르겠고 가마등이 있는 것을 보면 솥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며 손짓으로 가마등을 가리켜주셨다. 마을의 형상을 보면 알미산을 주산으로 하고 좌청룡에 해당하는 가마등이라 부르는 언덕과 우백호에 해당하는 언덕이 동네를 감싸 안고 있어 지형이 솥을 엎어놓아 다리 세 개가 올라와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제님 강세 시에 부정리는 전라도 고부군 달천면(達川面)구역이었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신월리(新月里), 삼봉리(三峯里), 쌍봉리(雙峯里), 부정리(夫亭里), 송산리(松山里), 영달리(永達里), 산우리(山隅里) 각 일부와, 우덕면(優德面) 신기리(新基里)를 병합하여 중심 마을 이름을 따서 신월리(新月里)라 하고 정읍군 덕천면에 편입하였다. 여기서 부정리의 한자를 보면 부정(夫亭)으로 되어 있어 솥 정(鼎)자와 다른 정자 정(亭)으로 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부정리(夫丁里)라고 성할 정(丁)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지명총람』에서 부정리 해석을 보면 ‘지형이 가마솥을 엎어놓은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적혀 있어 일제시대에 지명을 잘못 기록하여 해석과 한자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천상제님 강세당시 : 전라도 고부군 달천면 부정리
→ 1914년 :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부정마을
지명의 유래를 찾아보면 각 지방 각 지역마다 지명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맥과 지형을 본 딴 이름이며,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이름이거나,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나, 몇 개의 지역이 통합되면서 각각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것 등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1914년에 일제치하에서 행정구역개편을 하면서 잘못 기록된 것이 있다. 그러고 보면 부정리는 지형에서 비롯된 지명이지만 일제에 의해 한자 표기가 잘못 기록된 지명 중 하나이다.
그래서 부정리와 유사한 지명을 찾아보기로 했다. 먼저 강화도의 정족산(鼎足山) 전등사를 살펴보았다. 솥발이 세 개 올라와 있는 형상이라 하여 정족산이라고 부르며, 경남 양산시 하북면의 정족산이나 도주님 탄강지인 함안군 칠서면 생가 뒤편의 삼족산, 전북 익산시 정족동(鼎足洞) 등이 모두 솥발과 관련 있는 지명들이다. 그 외 경북 영양군 청기면 정족리(正足里) 같은 경우도 정족리(鼎足里)라고 표기를 해야 맞는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솥 정(鼎)’ 자를 ‘바를 정(正)’으로 바꿔놓았다.
정(鼎) 자를 자전(字典)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 된다. ‘솥정은 금속으로 만든 발이 셋, 귀가 둘 달린 솥으로 음식을 익히는데 쓰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한국문화 상징사전』을 보면 솥은 제사권을 상징하기도 하며, 주역의 정괘(鼎卦)는 위로는 이괘(離卦)와 아래로는 손괘(巽卦)로 되어있다. 이것은 나무(또는 바람) 위에 불이 있음을 상징하며, 상하가 서로 보완·협력함을 세 개의 다리가 안정되게 하나의 솥을 받치고 있는 ‘정(鼎)’으로 표현한 길(吉)한 괘로 화풍정(火風鼎)이며 새로운 것을 건설하여 대발전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솥은 무엇이든 넣고 쪄서 변화를 시키는 도구이다.
부정리는 주산인 알미산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덕천사거리에서 이평면으로 넘어가는 길의 오른쪽에 있는 가마등(솥가마)을 좌청룡으로 삼고, 산우마을에서 부정리로 넘어오는 능선을 우백호로 삼아 봉우리 세 개가 올라온 모양으로 되어 있다. 부정리는 주산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지형을 갖추고 있어 가마솥을 엎어 놓아 솥발 3개가 올라와 있는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솥 정(鼎)자의 부정리(扶鼎里)가 맞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할아버지와 헤어져서 마을로 내려가다 상제님 재세시 주막집이었던 덕천사거리 슈퍼 앞에서 막걸리를 드시고 있는 이 마을 어르신 몇 분을 만났다. 그 중에서 이환영(86세)옹께서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셨다. 이분은 상제님에 대하여 여러 말씀을 하시면서 주문까지 외우셨다. 부정리에 대해서 여쭈었더니 뒷산이 알미산인데 예전부터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면 동네사람들이 알미산 정상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부정리 집들은 5~6가구를 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마을에 큰 우물이 있어 주위 마을에서 물을 길러다 먹었다고 한다. 부정리 주변 지명에 대해 여쭈었더니 쪽박골을 말씀하시면서 “쪽박이 있어야 솥(부정리)에 물을 붙고 끓이지” 하시며 부정리와 쪽박골의 연관성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쪽박골은 『한국지명총람』에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이라고 되어 있어 소와도 연관성이 있다.
우리는 어르신들께 다시 찾아뵙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덕천사거리에서 이평면으로 가는 길을 넘어가면서 길 건너편에 있는 부정리와 쪽박골을 바라보았다. 이번 답사에서 우리는 상제님 강세지 주변의 명칭이 우리 도의 종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10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