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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덕수형!!
제목을 쓰고 보니 요즘 트렌드인 나훈아의 ‘아, 테스형’을 페러디한 것 같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내 나름대로의 추억 때문에 붙인 제목이다.
십여 년 전 우리 약국으로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한국투자증권에 새로 소장으로 부임해 와서 인사차 찾아왔노라 했다. 나는 그저 고객 유치 차원에서 인사 온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는 뜻밖에도 고향 풍기 출신이며 풍기고를 졸업했단다. 집은 금계동이고.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확인하니 풍고 출신이 확실하였다. 나는 지금껏 풍고 출신이라면서 나를 찾아온 사람은 그 친구가 전부다. 사실 학교가 워낙 변변치 않기에 사회에 진출하여 한 인물한 사람도 거의 없는 것이 한 이유일듯하다. 같은 학교를 나온 내가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너무 자기비하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심지어 나는 태백에 살 때 안동고 출신들과 모임을 갖기도 했다. 풍고 출신은 없다시피 했고, 안고 출신은 여렷이었고
유명 인사도 있었다. 나는 부끄럽게도 박쥐 행세를 했다.
나를 찾아온 그 후배에게 나는 선뜻 오천만원을 주고, 니 맘 대로 투자해서 불려오라고 했다. 그리고 이리보객(以利報客; 이문을 남겨서 고객에게 보답한다)라는 액자를 써 주었고, 그는 그 액자를 제 사무실에 걸어놓고 고객에게 자랑도 하고 설명도 해주었단다.
나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그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그해 연말에는 종이가방에 2천여만원을 만원짜리로 담아 와서 수익금이라고 건내 주었다.
수표나 송금으로 해도 될 일을 굳이 현금으로 들고 온 것은 아무래도 실적을 자랑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당시 나는 주식의 ‘주’자도 몰랐기에 매매를 전적으로 그에게 맡겼었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에게 금일봉을 수고비로 주었다.
그는 실적이 좋아서 강릉 사무실에 오래있지 못하고 서울로 영전이 되어서 갔다. 내가 써준 액자와 함께.
내가 이런 자랑 비슷한 것을 쓴 이유는 나는 그 이전에 내가 어떤 선배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이다.
나는 충북 약대를 나왔는데, 17기로 졸업하였다.
당시 중부벨트, 즉 충청남북도와 강원도, 3개도에 약대는 충북 약대가 유일하였고, 그것도 고작 한 기에 스무명 밖에 되지 않았다. 3개 도에 20명!
충남대와 강원대에 약대가 생긴 건 내가 졸업하고도 근 십여년이 흘러서였다. 그래서 이 3개도에는 우리 동문이 수두룩했다.
한번은 단체로 전라도 여행을 갔다가 총무를 맡은 여자 친구가 돈을 다 잃어버려서 간신히 기차를 타고 쫄쫄 굶고 대전역에 도착했었다. 그리고는 일면식도 없는 약국에 찾아가서 배가 고프니 밥 사달라고 다짜고짜로 매달렸다.
일면식도 없었지만, 그도 충북대 선배였다. 한 끼 잘 얻어먹었음은 물론이다. 스무 명이 국밥에 술 까지 얻어먹었다.
그 만큼 충북대가 대전에는 흔했고, 3년 선후배 사이는 다 합쳐야 백여명 밖에 되지 않았기에 모두 친하게 지냈다.
동문이라면 그저 초등학교나 중학교 정도가 고작인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학 동문회는 없고 친밀도도 떨어진다.
그러나 내가 아는 유일한 예외가 충북 약대 강원도 동문회다. 현역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속초에서 건장하게 사시는 윤모 선배가 1기로는 유일한 분인데, 그분이 주도하여 강원도 동문회를 결성하였으니, 벌써 50년도 넘는다.
그래서 우리 동문은 자연스럽게 ‘다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강릉 원주는 따로 소규모 친목 모임도 가졌다. 한 때는 강릉에서도 일곱명 정도가 매월 모여서 술 마시고 고기굽는 모임을 가졌으나, 하나 둘 작고 하고 이젠 나 위에 한 분만 계셔서 소모임은 없다.
우리 동문 중에서 5기, 즉 내 12년 선배들이 특히 강원도로 많이 진출했는데, 강릉, 묵호, 태백 등 주로 영동에 많이 자리를 잡았다. 또 그 중 특히 묵호(동해)에 제일 많았기로 같은 동기만 7명 정도가 되었다.
그 중 한 분 덕수 선배의 얘기를 여기에 쓰려고 한다.
그분은 총각 때 묵호에 왔다. 그의 부인-형수라 부르겠다-은 단양 아가씨였고, 덕수형은 청주 사람이다.
단양 아가씨는 우체국에서 교환수로 있었고, 그 총각은 묵호에 개업을 하였다. 주말이면 단양 아가씨는 제천으로 오고 묵호 총각은 태백선 기차를 타고 제천으로 와서 데이트를 했단다.
두 분은 항상 약국에서 같이 있었는데, 몸과 옷에 사치를 모르는 분이었다. 형수는 반백의 머리를 염색도 하지 않았다. 두분 다 과묵하신 편이었는데, 내가 찾아가서 인사를 하면, 부인에게, ‘후배왔어.’ 단 그 한마디만 하고는 같이 약국을 나섰다. 약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냉면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헤어지곤 했다.
8~90년대, 그 때에 내 바로 아랫 동서가 묵호에서 건어물 장사를 했고 또 내가 낚시를 좋아하여 묵호를 자주 갔고, 그 때마다 그 선배를 만나곤 했다. 늘 반백에 머리가 벗어진 맘씨 좋은 아저씨 같았다.
그러다가 98년 IMF가 터지고 건어물 장사를 하던 내 동서
(작고)가 3억이 넘는 보증을 내게 남기고 야반 도주를 했다!
나도 태백에서 강릉으로 온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돈도 없는데.
간신히 마련한 아파트도 상가도 날아갔다.
그러고도 일억이 넘는 빚이 남았다.
날개도 꺾이고 발톱도 뽑힌 수리에게 다시 하늘을 날게 해준 것은 봉화에 살던 어느 노스님의 한 마디였다.
차를 마시며 우두커니 동쪽 하늘만 쳐다보는 나에게 내 사연을 묻기에, ‘동서 보증 땜에 이러 이러 해서 죽겠습니다.’ 했더니, 그 스님 왈,
‘니 전생에 가 돈 많이 띠 먹었네.
니 지금 그 빚 갚고 있는거야!’ 했다.
나는 몽둥이로 대갈통을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을 받고 가진 돈 8만원을 그 스님에게 답례로 드리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어차피 물어줄 돈, 생각을 바꾸니 이렇게 맘이 편하고나!’ 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 하였다. 나는 덕수형을 찾아가 말씀을 드렸다.
내가 그 선배를 찾아 간 것은 동서가 돈을 빌린 곳은 묵호에 있는 상호신용금고였고, 덕수형 약국과 불과 지호지간이었고, 또 오랫동안 약국을 해온 덕에 그 동네엔 유지가 되어있었기에 그 금고의 이사장과는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사이었기 때문이었다.
선배와 이사장을 찾아갔다.
‘내 후배되는 사람이여. 이 사람이 쓴 것도 아니니 돈도 좀 탕감해주고(은행이나 신용금고에는 일정액의 손실 충당금을 적립한다) 이자도 싸게 해줘.’ 하고 부탁을 했다.
그 결과 나는 삼년 만에 모든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어떤 압류도 피할 수 있었다. 채권이 생기면 압류부터 하고 보는 신용금고의 압박을 피해서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풍고 후배에게 배풀었던 작은 도움도 덕수 선베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5회와 17회, 12년 차이.
내가 궁민학교 입학할 때 그 선배는 대학에 들어가는, 정말 일면식도 없었고 아무런 연고도 없었으나 단지 동문이라는 이유 땜에 내겐 큰 도움을 주신 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덕수 선배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건강 검진을 받은 결과 그 형수가 위암이란 판정을 받고 바로 수술을 했단다. 그리고 병원에 간 김에 그 선배도 검사를 받으니 간암말기!
난 하늘이 깜깜해지는 충격과 분노를 누를 수 없었다.
충격은 충격이거니와 분노는 자다깨서 만져보아도 양반임이 분명한 그 분들에게 하늘은 왜 이러나 싶었다.
바로 약국을 폐업하고 형수님 뒷바라지에 매진한 보람도 없이 형수가 돌아가셨다. 문상을 가니 망연사실한 모습으로 ‘운명이지뭐.’ 하셨다.
그리고 일년이 못되어서 형님도 강릉 아산 병원에 입원을 했다. 내가 찾아가니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충청도 특유의 짧은 환대,'왔어?'하고 웃으며 맞아주셨다.
‘아무리 혼자 쓰는 특실이라도 병원에서 담배피면 지랄 안하나요? ’했더니,
‘다 된 걸 뭐. 이제 안피면 뭐해? 심심하기만 하지.’
나도, ‘맞아요.’ 했다. 병색은 완연하였느나 표정은 평온하고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무덤덤했다.
선배는 입원 조건으로 어떤 연명치료도 하지 말고 막판에 아파서 힘들어하면 마약이든 뭐든 진통제만 놔라 라고 병원에 서약을 받고 입원했단다.
그리고는 나에게,
‘순복아, 이젠 면회 오지 마. 점점 더 나빠지기 밖에 더 하겠어? 추한 모습 더 보여주기 싫어.’ 하셨다.
그리고 한 달여만에 돌아가셨다. 육십을 갖넘은 나이에!
그런데, 정말 그런데 말이다.
그 날이 바로 일 년 전 그 형수님이 가신 그 날이었다!
단양과 제천, 묵호와 제천을 오가면서 견우와 북두처럼 만났던 그 형수님이 가신 날이었다.
그래서 그 선배님의 얼굴이 그렇게 밝았나 보다.
아,덕수형! 형수님도 잘 계시던가요?
거기도 해가 뜨고 노을이 물들던 가요?
辛丑年 春分節
후배 豊江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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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고출신도 옆에 있고
풍고 출신도 옆에 있다!
나도 담배 끊은지 13년 됐지만
지금도 한대 빨아봤으면......
풍강! 자네 글에 가장 감동하는 나는 자네와 세포가 같아서 그런거야!
내 장인 어르신!
이북서 단신 월남하셔서 풍기에서 고향만 그리시다가 돌아 가셨지.
덕수!
내 바로 위의 형님 존함이 "덕수"!
어렵게 살고 계시지만 .................
아, 그렇구나. 위에 형님이 계신지는 몰랐네. 자네와는 자주 어울려 논 기억이 별로 없으니 몰랐네.
충청도, 특히 충북 서족이나 대전을 중심으로한 충남지역 사람들은 말이 느리나, 아주 함축적인 말을 쓰는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예를 들어 너 보신탕 먹을 줄 아니? 하는 말을 '개혀?' 하면 된다는 말은 잘 알려져있다.
위의 덕수형도 그 부인에게, '후배가 찾아와서 함게 냉면먹고 올테니 약국 잘 보고있게.' 하는 말을, '후배왔어.' 한마디로 끝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란 뜻이다.
병원에 면회갔을 때도 '약국일도 바쁠텐데 뭐하러 면회를 왔아?' 하고 쓸데없이 말을 길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왔어?' 이 한미디에 모든 내용이 다 함축되어있다.
다언삭궁(多言數窮)! 말을 많이 하면 궁색해지고, 口業을 쌓기 쉽다.
노 스님의 한마디 처럼 일갈(一喝)이면 족하다.
내가 내게 하는 말이다.
충청도의 교훈도 잘 새겨봅시다.
순복이의 베움의 길 약사 동문의 이야기 후배와 주식 모두 잘봤고
나는 첫 구절에서 혁수백씨 덕수 형님을 떠올리며 읽어으며 또 한번 놀란것은
댓글 을 보면서 덕수 형님이 생전에 계시다니 이무순 이야긴고 싶다네 나는 덕수 형님이
총각 시절 떠나신 것으로 알았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