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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7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요한 16,12-15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누구나 자기가 지닌 경험, 혹은 지식수준에 따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생각이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 생각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문제를 냈습니다.
‘술에 취해 거리에서 크게 소리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일컫는 ‘가’로 끝나는 사자성어는? 답: (고)(성)(방)가
아이들 재미있는 오답들.
고음불가, 이럴수가, 미친건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짜 압권인 오답, 아빠인가
아이들은 답을 알지 못하여 자기 수준에서 대답한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그릇이 있습니다.
자기의 한계가 있고 자기의 수준이 있습니다.
가끔은 위의 예와 같이 재미있게 끝나기도 하지만,
가끔은 자기의 ‘수준’을 알지 못하면 커다란 위험에 처하는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엄마 젖을 먹는 아기가 딱딱한 견과류나 떡과 같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자칫 목에 걸리면 생명이 위험해 질 수도 있습니다.
어른도 떡이 목에 걸리거나, 낙지가 목에 걸려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그래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 않으면 어떤 행동을 취하기보다는 행동을 취하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전에 들은 가슴 아픈 사연이 떠오릅니다.
한 형제님이 친구들과 있다가 갑자기 간질 발작 증세를 보였습니다.
주위에 있던 친구들이 그 형제님을 돕겠다고 응급처치로 흉부압박을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그 형제님은 목숨을 잃었는데, 그 원인이 응급조치를 잘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질은 발작을 하면 압박을 가해선 안 되고 그냥 발작이 끝날 때까지 놓아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내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것을 하다가 보면 이렇게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안 좋은 일이 벌어지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말씀이 아직도 많이 있지만 아직은 제자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제자들도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준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님이 오시면 모든 것들을 알려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충만한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성경 하나를 놓고 수많은 해석들이 오고갑니다.
그래서 많은 종파로 그리스도교가 갈라졌습니다.
모두가 성경해석의 차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각 종파도 각자의 한계 안에서 진리를 해석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요?
만약 성령님이 도와주셨다면 해석은 하나만 정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도 한 분이시고 진리도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말씀에 서로 다른 해석을 일러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가톨릭교회의 성경해석이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가장 권위가 있는 해석이라는 것을 증명해낼 수 있을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을 정해서 지금 이대로 묶어놓은 권위가 바로 가톨릭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신약성경을 27권으로 정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여기저기에서 서로 다른 정경목록을 구성하였고, 또 사실은 그 이후에도 그것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세력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복음들(예: 야고보 원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막달레나 복음서, 유다 복음서 등)과 더 많았던 서간들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었음을 명확히 짚어낼 수 있다는 것은 교회가 그만한 진리를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문제를 풀 때 많은 예문 가운데서 어떤 것이 정답인지 오류 없이 하나하나 짚어낼 수 있는 완전한 진리를 알고 있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당신의 성령을 주신 교회의 권위에 따라서만 성경을 해석하지 자유해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그릇이 될 수 없음을 겸손되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충만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전한 해석과 가르침을 줄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정한 성경 목록은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정해준 교회의 권위는 무시하고 자신들 뜻대로 각자 해석하겠다는 것은 교회가 성경을 정할 당시의 성령님이 이제는 자기 자신들에게 옮겨오셨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갈라진 그리스도교에서 더 이상 분열이 없었어야 했는데 그 이후로도 너무 많은 분파들이 생겨난 이후가 바로 갈라져나간 교회들에
충만한 진리의 영이 함께하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로 일치시키는 분이시지 분열을 일으키는 분은 아니신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면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각을 각자가 오류 없이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성령이 충만하고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을 쓰지 않으시고 교회를 세워 그 교회에 당신 진리를 보존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교회의 권위에서 나온 하나의 믿을 교리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믿으면서 그 성경을 믿을 교리로 선포한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순입니다.
3년 동안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는 교만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17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요한 16,5-11
성령께서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죄, 우리의 연약함을 못 견뎌하시는 분이십니다!
젊은 사제 시절, 저희가 운영하던 아동 보육 시설에는 초딩 꼬마들도 간간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하늘같은 중고생 형들과 함께 사느라 고생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꼬마들에게 보호 본능 내지 측은지심이 느껴져 더 각별히 챙기곤 했습니다.
가끔 연피정이나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형들로부터 시달릴 꼬마들을 생각하니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은 꼬마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있을 때는 그나마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곤 했는데, 이래저래 불안함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안그래도 어린 나이에 부모와 분리된 친구들인데...이제 겨우 정붙이고 마음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데...
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장시간 자리를 비운다니, 아이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일종의 분리불안증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금방 돌아올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라며 다독이고 그렇게 떠나곤 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분리로 인해 걱정이 태산인 제자들과 오늘 우리를 향해 손수 우리의 등을 다독다독 두드리시면서 안심시키십니다.
내 일시적인 부재로 인해 너희는 근심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 걱정을 하지 말거라.
그 근심은 잠시뿐이란다.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란다. 내가 즉시 다시 돌아올 것이란다.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주님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곧 돌아 온다 해놓고, 안 돌아 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주님께서는 200퍼센트 확실히 돌아오실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셨습니다.
승천하시자마자 약속하신 대로 즉시 당신의 대리자요 우리를 악으로부터 영원히 지켜줄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가운데 머무시도록 배려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참삶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참삶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겠지요.
중재자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짓 논리에 휩싸이지 않고 참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죄,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나약함을 못 견뎌하시는 분이십니다.
큰 측은지심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당신께 합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꿰매주십니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올무에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잔잔하고 깊은 영적 샘터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6주간 수요일>
(2023. 5. 17. 수)(요한 16,12-15)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2-15).”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이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가르친 적 없는 새로운 가르침이 더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보충 설명할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이해하기에도 어렵고 받아들이기에도 어려울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관한 말씀들, 또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에 관한 말씀들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었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들이었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말씀들을 모두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믿게 되고, 그 진리에 따라서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그 도움으로 진리를 깨닫고 되고 확신하게 됩니다 바로 그 확신이 삶으로 이어집니다.
반대로,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성령을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세례를 받을 때 모두 다 성령을 받는데, 그러면 ‘성령의 은사’도 모두 다 똑같이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실제 상황을 보면, 사람마다 다른 은사를 받고 있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에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그렇게 되는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받게 되는 ‘보편적인 은사’와, 어떤 직분과 직책에 따르는 ‘특별한 은사’를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은사’는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받게 되는 은사이고, 그 은사는 각자 스스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표시가 안 나더라도, 우리는 모두 그 은사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신앙인들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특별한 은사’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 받는 은사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1코린 12,7-8).”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1코린 12,11).”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1코린 12,29)”
사도들이 일곱 봉사자를 뽑은 일이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3).”
열두 사도는 기도와 말씀 봉사와 교회를 다스리는 일에 필요한 은사는 받았지만, 식탁 봉사에 필요한 은사는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곱 봉사자를 뽑은 것인데, 그들은 교회의 청원에 따라 식탁 봉사에 필요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마다 다른 은사를 받는 것은, 교회 전체의 공동선을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에 더 좋거나 덜 좋거나 더 높고 더 낮은 차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어떻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진리를 깨닫게 된다.” 라는 말은, 성령께서 깨달음의 은총을 직접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일, 또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일은 우리가 각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깨달음’이라는 말은, 진리에 대한 믿음과 확신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은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요한 3,8).
신앙은 이론이 아니고, 학문도 아닙니다. ‘삶’입니다.
깨달음, 믿음, 확신, 삶은 모두 하느님의 은총에 인간의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령께서는 노력하는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분께서는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라는 말씀과 “나에게서 받아 알려 주신다.” 라는 말씀은,
‘성령의 인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시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잘 깨닫고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의 계시 진리는 예수님께서 모두 가르치셨고,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