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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묵상글 ( 연중 제2주일. - 몰랐다, 보았다, 증언하였다.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4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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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18 05:41
- 몰랐다, 보았다, 증언하였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주님께 대해 말하는 것을 동사를 중심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나도 저분을 몰랐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내가 증언하였다.
이것을 보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왜 증언해야 하고 우리는 왜 증언해야 합니까?
그것은 지난주 세례를 통해 어른이 된 주님께서 처음 당신을 공현하셨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시고 하느님 맘에 드는 아들이심이 드러났지만
그걸 보고 안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고 세례자 요한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도 그렇고 우리도 그분을 알지 못하였고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세례자 요한은 나도 그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그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하거나 크게 문제시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어쩌면 알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고,
알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이 본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비(神祕)란 무슨 뜻입니까?
신적인 비밀이란 뜻이 아닙니까?
그리고 신적인 비밀이란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고,
하느님이 스스로 비밀을 열어 보일 때만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오늘 세례자 요한도 비밀을 성령께서 알아보게 하셨음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관건은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알아봐야 하는데
그러기까지 조건이 있고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하고,
영적인 눈을 지니기 위해서는 영적인 겸손이 있어야 하고,
영적인 겸손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화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눈이 영적인 눈이 되기 위해서는
백태가 끼면 그 백태를 제거해야 하듯이
세속의 백태를 제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의 단련이 있어야겠지요.
어쨌거나 우리도 이런 과정을 거쳐
세례자 요한처럼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말은 쉽지만 어려운 일이고 쉽지 않은 과정이 필요함을 각오하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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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사랑, 주님 증언의 삶
“주님의 제자답게, 종답게, 사도답게 살기”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편40,8ㄴ과 9ㄱ)
시편 화답송 후렴이 오늘 강론을 요약합니다. 국내외 정세가 참 혼란스럽고 예측불가능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AI 만능의 시대라도 윤리가, 신뢰의 관계가 무너진 비인간화의 세상이라면 도대체 어디서 인류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런지요.
너나할 것 없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참 힘든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평범한 일상을 온전하게 살아감이 제일입니다. 이런저런 정보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희년의 거룩한 문들은 닫혔으나, 그리스도의 마음은 늘 열려있디.”
바티칸 베드로성전의 수석사제의 말입니다.
“교황청의 외교관들은 ‘선(goodness)’이 흔들릴 때, ‘희망의 다리들(bridges of hope)’이 되어야 한다.”
교황청 외교관들에게 주신 교황의 말씀입니다.
“인류는 제로 인구 성장률이 아니라, 마이너스 성장률로 빠르게 가고 있다.”
<인구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 책 저자의 음울한 진단입니다. 인류의 미래가 밝지 않음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옛 현자의 지혜가 반갑습니다.
“공부란 매일 보던 풍경을 낯설게 보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다산>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부유하면서도 예(禮)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논어>
역시 우리 주님의 제자다운 삶에도 어울리는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을 증언하는 삶은 우리 믿는 이들의 항구한 목표입니다. 발광체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로서의 증언자의 삶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라!”
한결같이, 열렬히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규칙에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 극구 강조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제자답게, 사도답게, 종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삼 우리의 신원은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요, 주님의 종임을 깨닫습니다.
첫째,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주님 사랑에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린 요한은 주님의 정체를 알아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많은 사람들중 요한만이 눈이 열려 주님의 정체를 알아봅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온 인류의 죄를 치워 없앤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마음 깊이 모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고백은 우리가 미사전 성체를 모시기전, 빵나눔전 또 사제를 통해 듣는 은혜로운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평화를 주소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증언하는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참제자의 모범입니다. 사랑의 눈이 활짝 열린 요한의 다음 고백도, 우리에게 더욱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는 것이다.”
둘째, 주님의 종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주님의 종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닮아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려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빛나리라...네가 나의 종이 되어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어지는 주님의 종의 고백은 바로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빛을 발하는 예수님의 신원이요 우리의 신원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종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애초부터 하느님께 선택받은 주님의 종, 주님의 빛으로서 우리의 복된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셋쩨. 주님의 사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답게 증언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주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사람들입니다.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하는 사도 바오로가 그 좋은 사도적 삶의 모범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바오로 사도뿐 아니라 주님께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역시 예수님의 사도입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 역시 마음으로 이웃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빌어야 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1,3)
바로 이 대목은 미사전례가 시작되면서 주님의 축복을 전하는 사제의 인사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새삼 미사전례 구조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어 주님의 축복을 담아 전달하는지 주님의 교회에 감사하게 됩니다.
교회는 해마다 오늘 1월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기도를 바칩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신자들 모두가 오늘 강론의 가르침대로 주님의 제자답게, 주님의 종답게, 주님의 사도답게 산다면 교회 일치에는 제일이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제자답게, 주님의 종답게, 주님의 사도답게, 사랑의 발광체(發光體) 주님을 반사하는 빛나는 사랑의 반사체(反射體)가 되어 주님 증언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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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 안에 있는 더 깊은 진리를 신뢰하기 - 두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창조주의 빛나는 섭리 안에서, 별의 티끌로부터 태어난 존재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한처음에
하느님 안에 있는 더 깊은 진리를 신뢰하기 - 두 번째 주간 실천
2026년 1월 17일 토요일
저자 셰리 미첼(Sherri Mitchell)은 과학의 지혜와 페노브스콧(Penobsot) 전통의 유산에 힘입어, 우리 각자의 창조 이야기에 귀 기울이도록 초대합니다.:
우리의 창조 이야기는 별들 속에서 시작됩니다… 별의 티끌이 발하는 찬란한 빛 안에서 우리가 태어나, 영혼들의 거룩한 순례가 그때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우주 안으로 들어올 때, 첫 번째 생태계인 어머니의 태중에 태어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생명의 탯줄을 통해 어머니의 몸과 연결되어 양육되고 지탱됩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그 탯줄의 연결은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대지의 어머니께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대지의 어머니와의 탯줄 같은 연결은 우리의 인간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리를 돌보고 지탱해 줍니다.
비록 우리는 먼 길을 걸어왔지만, 별의 티끌이 발하는 그 빛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울려 퍼집니다. 그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본질이며,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신비입니다. 그 신비는 우리 깊은 곳을 흔들며, 기억과 인식으로의 부르심이 됩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자연 세계에, 그리고 하나로 모아지는 하느님의 근원에 무한히 연결되어 있음을 말입니다. 우리의 공동 기원을 증거하는 표징은 곳곳에 있습니다. 과학은 이제야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진리에 다다랐습니다. 곧, 우리가 모두 서로 친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근본적 요소로 지어졌습니다. 단지 그 요소들의 배열이 달라 눈앞에 보이는 형상이 구별될 뿐입니다. 우리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와 DNA를 나눕니다. 약 98%는 다른 영장류와, 약 35%는 식물과도 공유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창조의 근원에서 비롯되었고, 같은 근본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우주(uni-verse), 곧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래 안의 개별 음표들입니다. 그 노래는 모든 생명을 불러일으킨 창조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우주의 깊은 울림이며, 모든 구조가 세워지는 기초입니다. 우리가 귀 기울이면, 그 창조의 노래가 우리의 뼛속 깊이 메아리치고 있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References
Sherri Mitchell, Weh’na Ha’mu’ Kwasset, Sacred Instructions: Indigenous Wisdom for Living Spirit-Based Change (North Atlantic Books, 2018), 4–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ergey Kvint, untitled (detail), 2023,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숲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한 줄기 푸른 새싹은, 창조주께서 심어주신 땅의 생성적 상상력이 고요히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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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결국 평범한 것은 곧 비범한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 예언서입니다. 제1이사야서(1~39장: 심판), 제2이사야서(40~66장: 위로와 소망)로요. 물론 일부 성경 학자들에 의하면 세 부분으로도 나눌 수 있다고도 합니다. 즉 1~39장(심판), 40~55장(위로), 56~66장(회복),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어쨌든 제2이사야서에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네 개의 노래, 곧 시편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미사 제1독서로 선포되는 두 번째 노래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네 노래는 모두 '야훼의 고통받는 종'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인물은 흔히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의인화한 것으로 이해되거나, 민족을 대표하는 한 개인으로 해석됩니다. 네 번째 노래에서는 이 종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받고 죽으며, 그로써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3-5).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고통받는 종'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그 유사성이 너무도 놀라워서, 이사야서의 이 부분은 "제5복음서"라 불리기도 합니다.
첫 번째 노래(오늘의 독서)는 고받는 종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라 선포합니다. 곧 하느님의 백성을 하나로 모으고, 세상의 빛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시며 하느님의 백성을 하나로 모으시는 첫걸음을 보게 됩니다.
오랜 세월의 기다림 끝에 일이 갑자기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요한 1,38). 그러고 나서 곧이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뒤따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요한 복음 저자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고, 그의 복음 전체를 관통하며, 요한 묵시록에도 등장합니다. 학자들은 요한 복음 저자가 바로 그 두 제자 중 한 명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는 그 첫 만남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새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탈출기에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을 가져온 파스카 어린양을 가리킵니다. 매년 파스카 축제 때마다 유다인들은 이 사건을 기억하며 성전에서 어린양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선포합니다. 이는 이사야서 네 번째 노래의 말씀과도 겹칩니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이사 53,5).
요한 복음은 이 주제를 정교하게 엮어냅니다. 파스카 어린양을 잡을 때 “뼈를 꺾어서는 안 된다”(출애 12,46)는 규정이 있었는데,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군사들에게 다리가 꺾이지 않고 대신 창에 찔리신 사건은 바로 이 규정을 성취한 것입니다. 세기가 끝나갈 무렵, 요한은 묵시적 환시 속에서 "어좌와 네 생물 사이에 서 있는,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묵시 5,6)을 보았습니다. 이는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모든 시대가 갈망해 온 성취에 참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다." (마태 13,17).
.....
이제 우리는 연중 시기를 시작했습니다. 특정하지 않은 일상적인 시간 속에 있는 듯하게 느껴지지요?
그러나 연중 시기(ordinary time)는 단순히 '평범한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전례력에서 '연중' 혹은 '일상'(ordinary)은 첫째, 둘째, 셋째 주일처럼 서수(ordinal number)로 주일을 세는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탄이 지나고 사순과 부활이 아직 오지 않은, 특별한 절기가 없는 일상의 시기를 연중 시기라고 우리는 부릅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 연중 시기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그분을 알지 못했지만, 내가 물로 세례를 준 것은 그분께서 이스라엘에 드러나시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요한의 소명은 오직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눈앞에 서 계실 때조차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는 환시를 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왜 그토록 중요한 순간을 놓쳤을까요? 그것은 바로 일상의 시간 속에서 무심히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요한에게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는 일이 늘 하던 일이었고, 예수님께서 오신 날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특별히 알아보지 못한 채 다른 이들처럼 세례를 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바로 그 일상 속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선행을 하거나 장엄한 전례를 드리거나 열렬히 기도하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 사랑을 돕는 수단이거나 그 사랑의 열매입니다.
육화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오심은 권력이나 드라마틱한 방식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서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걸으시며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그 평범한 시간과 자리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따라서 영성은 단순히 기도의 문제라기보다, 일상의 사건과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차리는 민감함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그 민감함을 키워, 우리 앞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도록 돕습니다.
결국 평범한 것은 곧 비범한 것입니다. 평범한 시간, 평범한 장소, 평범한 사건,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삶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 안에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서 함께하시며, 우리를 부르시고 격려하시며,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중요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믿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과 세상 속으로 오셨기에, 그분을 만나는 일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에 있어 더더욱 중요한 일은 하느님을 찾는 일이라기보다는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을 감지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이 미사 성제를 통해,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 매일 이루어지고 있고, 또 우리가 평범한 일상이라고 여기는 이 순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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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해줍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통해 당신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민족들의 빛으로 세울 것’이라는 예언자 이사야의 예고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소스테네스 형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증언하며, 성도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를 빌어 줍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두 가지로 증언합니다.
먼저, ‘첫 번째 증언’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말은 대체 무슨 말일까요?
사실, 우리는 오늘도 미사 중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이름을 다섯 번이나 부릅니다. <대영광송>에 한 번(“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영성체 예식>에서 네 번(“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두 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어린양”의 네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야훼 이레”, 곧 하느님께서 준비한 제물로서의 “어린양”(야훼이레; 야훼께서 준비하신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갔을 때,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에서 보듯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제사에 쓰기 위해 준비한 ‘제물’입니다.
<둘째>는 ‘파스카의 어린양’(탈출 12,1-27;레위 23,5-6;신명 16,1-7)입니다. 곧 하느님께서서 모세를 통해 이집트의 맏자식을 치는 죽음의 재앙을 내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맏아들을 살리기 위해 문설주에 발라진 ‘희생양’입니다.
<셋째>는 “아자젤”, 곧 대신 죽는 ‘속죄양’으로서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여 년 동안 사막을 헤매면서 사나운 맹수들이 위협할 때마다 염소나 양을 한두 마리 맹수들에게 보내주었고, 가나안에 정착 후에는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 제의로 바쳐지면서(매년 7월 10일),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양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하느님께 번제로 불살라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자기와 온 민족의 죄를 자복한 후에 광야로 내보냈던 “아자젤”, 곧 ‘속죄양’입니다.
<넷째>는 승리하신 ‘천상의 어린양’(묵시 5장)으로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함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신 분”(묵시 5,13 참조)임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특별히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라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물질적 공간적 그릇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도, 옛날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사는 사람들도 그리고 장차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곧 ‘전 인류’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들, 동서고금의 전 세계 모든 인류의 죄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어린양’이심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의 죄인들을 없애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 또한 세상의 죄를 없애고, 평화를 주는 ‘어린양’으로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곧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을 따르는 우리 역시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소명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자신보다 뒤에 오신 분이지만 당신보다 앞서신 분이요, 이미 전에 증언한 분이요, 자신이 세례를 준 것이 바로 이 분을 세상에 알려지시게 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인 다음, ‘두 번째 증언’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증언입니다.
그는 먼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2-33)라고 환시를 통해 보고 들은 바를 말하고,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예수님 위에 머무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원이 존귀하신 분, 곧 아버지의 권능이신 성령으로 도유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생명의 푸른 잎사귀를 물어온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물어오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안에서는 하느님 아드님의 신적 생명이 자라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옷 입듯이 입었고(갈라 3,27), 그분은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일인지요!! 그러니 이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활짝 드러내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주님!
죄를 탓하기보다
스스로 짊어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
하늘을 여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기꺼이 바치는 삶이기에
그 어떤 억울함도 원망도 없게 하소서.
위하여 내어놓는 삶이기에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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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사제의 보람은 교우들과의 만남입니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건강하던 자매님이 한 달 전에 몸이 아파서 병원엘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큰 병원에서 조직검사를 하니 암이었고, 이미 많이 전이되었습니다. 복수가 차서 빼냈지만, 곧 다시 복수가 찼습니다. 집으로 찾아가서 고백성사와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오랫동안 냉담했던 자매님은 만나를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성체를 모시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신앙이 없던 남편은 성당에 다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아내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말하니 기뻐하였습니다. 80이 넘은 친정어머니는 신발도 신지 않고 마중 나왔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함께 기도하겠다는 남편이 있으니 건강한 몸으로 가족들과 다시 지낼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운동치료가 약속되어 있었지만 나보다 더 아픈 분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그리고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주일 오후에 3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1달 전에 새롭게 문을 연 형제님의 음식점 ‘수라’의 축성식이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아들과 함께 복사하고 있고, 자매님은 성물방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축성식에는 복사단 형제들이 함께하였습니다. 음식점이 번창 하도록 기도하였고, 음식점을 찾는 사람이 음식을 먹고 건강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축성식을 마치고 50대 형제님들의 모임인 ‘이냐시오 회’의 송년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형제님들은 본당의 허리와 같았습니다. 많은 분이 여러 단체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세례받지 않은 형제님은 하느님을 찾아 여러 곳을 찾아보았지만, 하느님을 찾지 못했는데 성당에 오니 마음이 편하다고 하였습니다. 성당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93세 장모님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님들은 경품 추첨도 하면서 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에도 열심히 봉사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이냐시오 회 송년 모임을 마치고 자선 음악회 평가회로 갔습니다. 악기 연주자들과 봉사자들이 모여서 평가회를 하였고, 내년에는 음악 피정을 하자는 저의 의견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주일 오후 3가지 일을 함께하면서 몸은 피곤했지만,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사는 교우들을 보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그리고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저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저희를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되었나이다.”
본당에는 민족들의 빛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본당에는 하느님의 뜻을 즐겨 이루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 대림 시기에 성경 필사를 기쁘게 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성경 필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고, 마음에 새긴 하느님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였습니다. 매일 병원에 누워있는 형제를 찾아가서 말동무를 해 주는 분도 있습니다. 하루 이틀은 할 수 있지만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매일 형제님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픈 몸을 주물러 주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2027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위해서 묵주기도 100만 단을 봉헌하기로 했습니다. 시작한 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많은 분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지난 성 목요일에 구역별로 성체조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기를 청하셨습니다. 몇몇 자매님들은 밤을 꼬박 새우며 기도하였습니다. 저도 함께 하였지만 1주일은 힘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아들을 증언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2000년 동안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아들을 증언하는 교우가 있었기에 50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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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요한 1,29–34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초대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요한은 사람들을 자기 제자로 만들지 않고,
모두를 그리스도의 식탁으로 인도하였다.”
어린양은
힘으로 세상을 바꾸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세상을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성체의 날인 오늘,
우리는 그 어린양을
‘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받아 모시며’,
그분의 삶의 방식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당신을 받아 모시며
당신의 자비로운 방식으로 살게 하소서.
내어 주는 사랑을
오늘 제 삶으로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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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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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 어느 날 한 노인이 강을 건너려고 서 있었습니다. 날씨는 추웠고 강에는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노인은 무엇인가를 타고 그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노인이 오랫동안 강가에 서서 기다리는데, 마침 말을 탄 사람들이 줄지어 지나갔습니다. 네 번째가 지나가고 다섯 번째 말을 탄 사람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노인은 여섯 번째 말을 탄 사람에게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사님, 나를 저쪽까지 좀 태워다 주실 수 있겠소?” 그러자 그 사람은 선뜻 말했습니다. “예, 타시지요.” 강을 건넌 후 노인이 말에서 내리자, 기사가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는 왜 저에게 말을 태워 달라고 하셨습니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앞선 사람들이 타고 있는 말은 크고 건장하여 안심할 수 있었지만, 말 주인의 눈을 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다, 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타고 있는 말은 보잘것없어 보였으나, 당신의 눈을 보고는 금방 사랑과 동정심이 있는 사람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나를 건너편까지 태워다 주리라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분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보이는 것을 보고 믿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그 이면 裏面을 볼 수 있는 눈, 즉 영적인 혜안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혜안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을 잘 알아보고, 그분을 따를 때 무사히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1, 29.31) 고 고백하며, 우리가 따라야 할 분이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그분이 누구신지 몰랐었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사실 아예 몰랐던 분이 아니고 친척이었고 잘 알던 분이었습니다. 다만 그분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증언을 통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그분은 내가 아는 사람,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모습 곧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은 처음부터 그러한 혜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일러 주셨다.”(1,33)라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고신 극기를 하면서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도 세례자 요한처럼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고통을 광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갈 때, 그 안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볼 수 있는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며, 예수님을 따라 그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라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지만,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로마 시민임을 자랑으로 여겼고 부귀영화를 추구하며 살았지만, 예수님을 알고 나서부터는 바오로 사도도 세속과 물질이 주는 기쁨이란 한낱 쓰레기에 불과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교자들도 처음에는 주님을 몰랐지만, 주님을 알고 난 후에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주님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보다도 주님을 더 귀중하게 여겼고 마침내 목숨까지 바쳐 순교했던 것입니다. 이토록 하느님에 관해서 앎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고 따르며 살아가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지혜를, 그분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로써 성령을 따라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하느님의 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 (요 14,6)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하늘 향한 길이며, 아버지께 이르는 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호칭하며,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축성된 빵을 나누기 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하며, 하느님의 어린양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평화를 달라고 기도하지요. 또 성체를 영하기 직전에 사제는 미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을 만큼 성체를 높이 들어 외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과 우리는 왜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칭할까요? 이 어린양의 사명은 바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1,29) 것입니다. 여기서 없애다, 는 말은 자기의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 제거하다, 없애다, 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 요한 복음사가는 이 의미를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고 본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를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시어 그 죄를 없애주심으로써 거룩한 때를 시작하게 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이 내용은 '야훼의 종'에 관한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이사야는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53, 12)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으신 분이심을 앞서 밝혔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거저 내어주시고 당신의 순명과 희생을 통해 종의 사명인 구원의 사명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구원을 역사의 매 순간 모든 사람을 위해 실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 안에 잠기게 하신다, 즉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베풀어 주시는 항구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선물들, 특히 세상의 죄를 태워버릴 성령의 선물이 우리에게 넘쳐흐르기 위해서는 어린양이 반드시 죽임을 당하셔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십자가 사건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 드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19, 33~34)라고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월절의 어린양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희생되시어 모든 사람을 항구한 당신 성령의 선물로써 죄의 종살이에서 끊임없이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소리 높여 부르게 된 것입니다. 어리석고 어리숙해 보일 정도로 하느님의 길을 따른 예수님의 삶이 실패처럼 보였지만 결국 승리했음을,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 또한 자신을 희생하면서 타인을 살리는 어리석은 십자가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모시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신자들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고 평화를 빌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은 이제는 내가 예수님처럼 세상의 죄를 없애고, 평화를 주는 어린양으로서 살겠다는 결심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은 우리의 삶 한 가운데 우리를 위해 친히 제물이 되어 오신 ‘야훼이레’ 하느님 이십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주님은 저희에게 당신 희생에 대한 조건과 단서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십자가 위에 두 팔을 드리운 체 묵묵히 우리를 바라보시는 당신 앞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강요하고 강박했던 욕망이란 이름의 집착을 내려놓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해 희생양이 되셨듯이 누군가를 위해 선뜻 저 자신을 희생양으로 놓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희생은 겸손 없이는 이룰 수 없음에도 교만이 자기의 존재를 보증하는 줄 알았던 무지를, 당신의 중재로 얻게 된 영원한 생명을 마치 제가 쌓은 공덕으로 얻은 것인 양 거들먹거린 저의 불신을 어린양이신 당신 앞에 내려놓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1,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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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23:59 추가>
■ 생활묵상 : 오늘 주일을 보내면서 한 이런 저런 생각들.........
오늘 주일 미사를 참례하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 이웃 본당에 가려고 하고 집을 나서면서 가다가 불과 미사 15분을 남겨두고 불과 지난주일에도 마음속에 굳게 맹세를 하고 또 같은 레지오 단원들한테도 마음 독하게 먹고 1년 동안은 본당을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그만 오늘 그 다짐이 무너졌습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 발걸음은 제가 영세를 받은 본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머리로는 가고 싶지 않은데 몸이 가는 것입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미사 후 신부님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마지막 강복 후에 빠져나왔습니다. 성당 주변에서 교우들과 인사를 좀 나누었습니다. 사실 어떤 교우들은 말은 안 해도 제 사정을 아는 사람도 많지만 모르는 분들은 어떻게 교적을 옮겼는데 가끔 한 번씩 미사를 참례하는 걸 보면 뭔가 모를 곡절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전전 연령회 회장님 내외분이 식사를 하자고 해서 본당과 좀 떨어진 고깃집에서 함께했습니다. 메뉴는 소고기 전골이었는데 그곳은 공교럽게도 어제 올린 글에서 언급한 성체조배회장님과도 가끔 가는 곳이었습니다. 또 오늘은 식당에서 미사 후에 인사를 드렸는데 본당에는 제 고등학교 때 은사님이 계십니다. 그 은사님이 사모님과 같이 오시지 않고 혼자 어떻게 식당에 오셔서 인사를 드렸고 나중에 은사님을 모처럼 식당에서 뵈었는데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올 수 없고 밥값은 제가 계산해드리고 나왔습니다.
오늘 식사를 하기 전에 자매님께서 "베드로씨, 오늘 밥값은 우리가 살 테니 혹여라도 부담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제가 대접을 해드릴려고 했는데 일단 사양하지 않고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식사 도중에 제가 "오늘은 그럼 회장님께서 사주는 거 감사하게 잘 먹고 제가 다음번에는 제가 내겠습니다" 했더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자매님이 "오늘은 우리가 대접하고 싶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일단 감사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긴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순간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오늘 자매님께 식당으로 들어가기 전 차에서 내린 후에 회장님 연세를 여쭤보니 여든 셋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대충 자매님도 어느 정도인지는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보통 이럴 경우 흔히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물론 세상적으로도 나이를 봐도 한참 아들뻘 정도 될 그런 나이임에도 '대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보통은 "우리가 내겠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살 테니 함부래 신경쓰지 마세요" 이렇게 표현하곤 합니다. '함부래'라는 말 제가 이건 아직 검색을 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경상도에서만 사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제가 지금 잠시 검색을 해봤는데 '함부로'의 방언으로 나오긴 하는데 실제 검색해서 나온 뜻과 언중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뜻과는 조금은 상이한 면이 있습니다. 이 사투리는 경상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렇게 표현하는 게 보통인데도 저는 그 순간 한 생각이 "역시, 사람은 말에서 품격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순간 글을 작성하다가 회장님께 문자를 생각났을 때 보내드렸습니다. "오늘 자매님의 말씀에서 '대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전했습니다.
저 같은 정도의 사람한테는 그런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고 그냥 흔히 표현하는 방식으로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 하나를 사용했을 뿐인데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 단어 하나로 인해 자신의 인격과 품격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실 식사를 마친 후에 제가 커피숍으로 모셔서 차를 대접해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식사 후에 댁에서 어떤 치료를 해야 하는데 치료를 해 주시는 분과의 약속 때문에 차는 나중에 마시기로 하고 성당 근처에서 헤어졌습니다. 헤어진 후에 레지오 단장님과 다른 단원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제가 있는 장소 근처 그 바운더리 내에서 단원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계실 거라서요. 요즘 잘 가시는 곳에 가니 오늘은 안 계셔서 제가 전화를 했는데 다른 곳에 계신다고 해서 그 장소로 가는데 마침 근처에서 지금 현 본당 회장님과 신부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전전 회장님도 함께하는 것이었고 제가 그냥 자리를 회피했는데 이게 오늘 그 장소를 가는데 평소 같이 함께하는 자매님이 오늘 가브리엘 총회가 있어서 이제 그곳에 간다고 하시면서 안내를 하는데 그 장소 외 다른 장소로 착각해 안내하셨는데 어떻게 아까 길에서 마주할 뻔했던 신부님이 그 커피숍에 계셔서 하마터면 신부님과 만날 뻔했습니다. 겨우 피해 원래 계신다는 장소로 가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집에 와 이렇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올리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제 일상에서 묵상한 내용이 한 서너개 정도됩니다. 그 중 제일 먼저 한 게 바로 오늘 회장님 내외분과 식사를 하시면서 자매님이 하신 그 말씀에 대한 단상을 올리려고 하다가 그냥 통합적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왕 언급한 것이기 때문에 좀 더 상세하게 부연을 해 묵상한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회장님이 성당 근처에서 저를 내려주신 다음 잠시 이동을 하는데 아주 오랜만에 예전에 저희 본당에 계셨고 실제 교적은 제가 영세 받은 본당에 있지만 현제는 다른 본당에 나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분이십니다. 형제님과 자매님이시고 사실 그분들은 평신도입니다. 사실 성인은 아니지만 거의 성자에 가까운 분이라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인품을 가지신 분이고 또 외적으로도 그런 모습이 우러나오는 분입니다. 형제님은 소아과 의사 출신이셨습니다. 큰 아들은 꽃동네에서 수사로 계시고 지금은 외국에 계십니다. 큰 아들은 원래 의사였는데 수사님으로, 따님은 수녀님으로 그렇게 두 분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분이십니다. 막내 아들 한 번 본 적은 있는데 막내 아들은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 두 분은 저를 대할 때 잘은 모르는데 원래 누구나 사람을 귀하게 대하시지만 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확실하게 아는 바는 없습니다만 좀 더 특별하게 대해주십니다.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건 아마 제가 예전에 본당 주보 1면에 몇 년 동안 올린 글 같은 걸 보고 뭔가 좀 특별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장례미사 때 이 내외분 중 자매님이 성가대에 오셔서 함께해 주셨습니다. 예전에 성가대 봉사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특별히 와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했었습니다. 오늘 잠시 오랜만에 뵙고 인사만 드렸는데도 사람을 대하는 자매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자태는 실로 겸손이 그냥 몸에서 교만하게 행동하려고 하셔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로 절제된 품위 있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에게서 저런 품위가 나올지 존경스러울 지경입니다. 또한 얼굴에서는 신앙인의 경건함 같은 게 녹아 있습니다. 정말 닮고 싶은 분입니다.
원주교구 님의길을 걸을 때 원주교구민들과 함께하면서 우연히 제가 어느 곳에서 유일하게 타교구에서 그것도 먼 마산교구에서 함께한다는 이유로 소감을 나누는데 제가 마산교구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중에 어떤 자매님이 한 분 오셔서 자매님이 예전에서 마산에 자신이 모셨던 의사 선생님이 계신다고 하시며 설명을 하시는데 마침 이 의사분이시고 저희 본당에 계신 분이고 해서 놀아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을 언제 한 번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후 몇 차례 그 자매님과 원주교구에서 순례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분 형제님 이야기를 하셨는데 감동적인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자매님의 이 이야기도 제가 글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사실 이 자매님은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표현으로 하면 콧대가 높고 약간 절제된 표현으로 하자면 교만한 그런 사람이었는데 성당을 다니면서 또 강론을 들으면서도 '겸손'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는데 예전에 이분을 마산에서 모실 때 이분과 함께하면서 '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원주교구 자매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이심전심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두 분의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본당 연령회 회장님을 지내신 분의 아내분과 또 방금 언급해드린 자매님 두 분입니다.
한 분은 식사를 하면서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졌고 또 한 분은 잠시 인사만 하고 헤어졌던 분입니다. 이 두 분을 보면서 공통적으로 떠오른 묵상의 결론입니다. 다 같은 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의 품격이 굳이 어떻게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품격을 지니신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품격이야말로 진정으로 '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는 품격 '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같은 시간을 보내며 같이 신앙생활을 해도 어떤 사람은 저게 어떻게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금 언급한 분과 같은 그런 평가를 받는 분이 계시는 걸 보면서 참으로 많은 걸 느낍니다. 의사 출신인 형제님의 자매님은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제가 언급한 내용을 다 인정할 정도의 그런 품격을 지니신 분입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누구나 다 신앙을 가진다고 해서 다 훌륭한 신자로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긴 알지만 한편으로는 달리 생각해 이런 질문을 모든 신앙인이 자신에게 자문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는 아주 존경받을 만큼의 품격있는 신앙인으로 자리매김을 하는가 반면에 그렇지 못한 신앙인도 있다면 그 대상이 "바로 '내'" 자신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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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바나나 우유 하나랑 작은 편지 한 통
제가 여탕을 청소하면서 언제 한번 보니 파우더룸 거울 밑 헤어드라이기 옆에 작은 쇼핑백에 메모지 한 장이 붙어 있는 걸 봤습니다. '청소하시는분! 감사합니다. 나중에 이거 하나 드세요.' 이 메모를 보고 이게 뭐지 하고 안을 보니 빙그레 바나나 우유 하나랑 작은 편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편지를 열어봤습니다. 편지에는 짧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목욕탕 회원인 어떤 아주머니이시고 또 전혀 모르는 분이 왜 이런 편지를 했을까 하고 약간 황당하기도 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주머니는 제가 청소를 하는 그 사우나를 12년 동안 다녔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최근에 사우나를 이용하면서 획기적인 변화를 느낀 게 있었고 그것 때문에 편지를 하나 남긴다는 것입니다. 아주머니도 이런 행동이 조금 이상한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뭔가 많은 걸 느낀 게 있었다고 말하시더군요. 이 편지를 통해서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저는 이모가 원래 그때 탕을 청소하시는 중이었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알았는데 원래는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이모가 청소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 그만두셨는데 작년에 제가 할 그때 청소하시는 여자분이 계셨지만 그분이 그만 중요한 급한 일이 있어서 갑자기 그만두게 됐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급히 구할 수 없어서 주인 아주머니가 이모한테 부탁을 해서 사람 구할 때까지만 임시로 해 주기로 했는데 마침 하시려고 하는 무렵에 그만 이모도 병원 치료를 해야 될 사정이 생겼고 약속을 이미 한 상태라 아주 난감한 상태가 된 것이었던 것입니다. 약속을 안 했으면 모르는데 그러다가 고민하시는 중에 제가 안부 전화 한번 드리다가 그런 이야기를 하셔서 그땐 저는 단순히 이모가 생계 때문에 일을 하시는 줄 알고 그런 사정이 마음이 아파 제가 그럼 대신 해드리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일을 한 달 한 후에 이모가 며칠 하셨는데 이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주인 아주머니가 청소할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제가 청소를 깔끔하게 해 주니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냥 사람을 안 구한 것입니다. 이모는 아직 사람이 쉽게 구해지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하셨던 것이고요. 제가 그만둔 후 이모가 며칠 하시다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채용해 지금은 이모가 하시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더라면 제가 그런 걸 하지 않았을 텐데 저딴에는 이모가 마음에 걸려 그렇게 했는데 아무튼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제 앞에 그만두신 여자분은 얼마나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꽤 오래 하셨는 모양입니다. 다른 건 잘 모릅니다. 저한테 간단하게 편지를 남기신 분의 편지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청소를 임시로 했던 그 앞에 어떤 분이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사우나를 하시면서 불만 아닌 불만을 가지고 계신 게 있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목욕을 할 때 사용하는 의자였던 것입니다. 이건 다 아실 것입니다. 대한민국 어느 사우나를 가도 다 비슷한 모양의 목욕 의자 말입니다.
보통 보면 대부분 이게 청소를 하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대개 보면 앉는 부위를 중심으로 겉을 주로 대개 청소하는 모양입니다. 저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꼼꼼히 하지 않으면 이럴 때 어떤 문제점이 발생하느냐 하면 의자랑 목욕탕 바닥과 맞닿는 부위 밑부분 주위에 약간 휘어진 굴국이 있고 그 사이에 생각보다 물때가 엄청 쌓여 지저분하고 더럽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보통 탕에 들어가면 그런 의자는 포개져서 있습니다. 각자 그걸 빼서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놓고 사용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근데 문제는 그걸 뺄 때 사람들이 기분이 대개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게 실제 그 더러운 부분은 그 의자를 사용해도 몸에 닿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물때가 너무 지저분하기 때문에 기분상 찝찝하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 차례 그런 걸 주인 아주머니한테 이야기하고 클레임을 제기했지만 그게 생각보다 잘 안 된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냥 그런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우나를 이용하는 분들이 포기를 했던 것이죠. 근데 어느 날 보니 더러운 게 완전히 없어진 걸 알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한 달 동안 청소하면서 사실 그 의자 전부 물떼를 완전히 제거를 했던 것입니다. 처음엔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근데 하다 보니 마지막에 정리를 할 때 보면 이게 영 찜찜한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자꾸 제 눈에는 그 더러운 부분에 계속 눈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일을 뭐 전문적으로 해 본 적도 없고 해서 그럼 이걸 사람들이 보면 청소를 깨끗하게 하지 않고 그냥 슬렁슬렁하게 한다고 할까 싶어 신경이 엄청 쓰였습니다. 저는 또 그때 부탁하신 이모 생각도 하고 이모께도 누를 끼치면 안 될 것 같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사우나 휴무하는 날 전 날 그 부분을 청소하기 위해 마트에 미리 가 적당한 솔을 구입했습니다. 일반 수세미밖에 없었고 또 수세미로는 그런 틈새를 깔끔하게 청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 솔로도 잘 안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잘 청소할 수 있는 솔을 어렵게 보고 구입해 거의 날밤을 세워 깨끗하게 청소를 했던 것입니다.
사실은 만약 나중에 이모가 하시게 되면 이모님의 수고를 제가 덜어드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한 것도 그렇게 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모가 청소를 하셨던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면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청소를 했던 것입니다. 제가 그 사우나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몇몇 분만 제가 사우나 마치는 시간에 그때 사우나를 마치고 가시는 분 정도만 알뿐입니다. 그렇게 하고 난 후에 사우나에서 사람들이 항상 더럽게 보인 부분이 어느 날부터 이게 아주 깨끗하게 되어 있으니 놀라웠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한 사람 두 사람 주인 아주머니께 이야기를 했나 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도 주인 아주머니께서 이런 걸 잘 못 보셨나 봅니다. 주인 아주머니도 이 사실을 알고 너무나도 놀라워하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말씀하셨는데 사실 주인 아주머니도 자기가 주인이고 자신이 해도 그렇게 청소하긴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엄청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렇게 청소를 하는 걸 보고 주인 아주머니는 마음속에는 급여를 좀 더 많이 지급하더라도 살살 구슬려 꼬실려고 했나 봅니다. 나중에는 이런 사실을 사우나 회원들이 대부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 사실을 알고 뭔가 많은 걸 느꼈던 모양입니다.
첫 째는 청소하는 사람이 남자였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그렇게 오랜 세월 사우나를 이용했는데 그렇게 청소를 한 사람은 제가 유일했던 사실 이 두 사실 때문에 개인적으로 감동이라고까지는 그렇지만 뭔가 울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자기는 청소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이런 걸 보고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넘어 실제 생각하지도 못한 걸 생각하고 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그분은 놀라웠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분은 제가 왜 그렇게 했는지 그 내부 사정은 모른 상태에서 그렇게 좋게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냥 그렇게 알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사우나를 사용하면서 사우나를 한 후에는 누구나 기분이 상쾌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때 그분이 느낀 감정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좋았고 덕분에 사우나를 한 후에 전과 다른 상쾌한 기분을 느끼기 때문에 그래서 좀 우끼다는 생각은 들지만 약소하나마 우유 하나랑 쪽지에 고마움을 전하면 청소를 하는 분도 청소를 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라 작은 편지를 남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때 많은 걸 느꼈습니다. 사실 그분들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려고 한 것도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이모를 생각하고 했던 것인데 이유야 어찌됐든 결과만 놓고 봤을 때 할 땐 조금 힘들었는데 물론 그분들이 뭐 하느님을 믿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뭔가 남을 잠시나마 행복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알게 된 게 있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피부로 이렇게 느낀 건 처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자신은 그냥 조금 누군가를 생각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한 행동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런 혜택을 누리는 사람도 단순히 미미한 영향이 아니라 엄청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물론 신앙 밖의 일이지만 이게 만약 신앙 안에서 이와 같은 유사한 일이 있다면 그건 실로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자명함에 틀림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이걸 피부로 절실하게 느낀 좋은 인생 체험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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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29-3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서 관광버스를 운전하던 기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관광객들을 태우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내리막길에서 갑자기 버스의 속력이 빨라졌습니다. 운전기사는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것입니다. 얼른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버스가 산 아래로 추락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법을 떠올렸습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자기 집 앞에 있는 언덕길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곳으로 가면 되겠구나! 거기라면 안전하게 버스를 멈출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차를 몰았는데 언덕 입구에서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운전기사는 큰 소리로 경적을 울렸고, 놀란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만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두 팔을 벌린 채 버스를 보고 웃고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저 아이를 치고 관광객들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을 다치고 죽게 할 것인가?’ 둘 다 살리고 싶었지만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핸들을 꼭 움켜쥐고 그대로 아이를 치고 언덕길로 올라갔습니다. 얼마 후 속도가 줄어든 버스가 멈추자 그는 황급히 버스에서 내려 아이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버스에 치여 수십 미터를 끌려간 아이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그는 아이를 안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운전기사에게 “살인자!”라고 손가락질을 하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끌어안은 채 한참동안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 당신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외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큰 사랑과 자비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그 증언의 내용은 이것이지요.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구절의 가장 끝에 나오는 ‘어린 양’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하여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봅니다. 성경에 ‘어린 양’이 등장하는 부분은 크게 두 군데입니다. 첫번째 부분인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올라가지요. 그런데 장작만 잔뜩 준비하고 정작 번제물로 바칠 짐승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사악이 그 이유를 묻자, 아브라함은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라고 돌려 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에 따르기 위해 늘그막에 겨우 얻은 외아들마저 아낌없이 바치려 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사악을 희생시키는 대신 당신께서 직접 제사에 쓸 숫양 한 마리를 마련하시어 아브라함에게 보내 주십니다. 둘째 부분인 탈출기 12장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아들을 죽이는 재앙을 내리셨을 때,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시합니다. 그렇게 어린 양이 대신 희생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맞아들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지요.
이 두 가지 경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어린 양이 죽음으로써 다른 이의 생명을 구한다는 점입니다. 어린 양의 죽음에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한 희생이라는 의미가 더해져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성경적 근거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가죽옷”입니다.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큰 죄를 저지르고서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만 했던 아담과 하와는 그 벌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그런데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그들이 ‘죄’라는 낙인 때문에 해코지를 당하게 될까봐 염려하셔서 손수 가죽옷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혀 주십니다. 나뭇잎을 대충 엮어 만든 옷으로는 그들이 죄를 저질러 생긴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죽옷은 동물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얻을 수 없기에 인간은 다른 생명을 희생시킴으로써만 자기가 죄를 지어 생긴 부끄러움을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겁니다. 그래서 매년 7월 10일 ‘대속죄일’이 되면 태어난 지 일 년 정도 된 어린 양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하느님께 번제물로 불살라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 자신과 온 민족이 저지른 죄를 상세히 적은 양피지 종이를 그 몸에 묶어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면 그 양은 광야를 헤매다 굶어 죽거나 맹수에게 잡아 먹히게 되는데, 그러면 그들이 죄를 지어 생긴 부끄러움이 사라진다고 여긴 겁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 손수 제물을 마련하신 것처럼, 완전한 희생제물을 직접 마련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거라고 믿었지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개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그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며, ‘세상의 죄를 없애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거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없애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airein"의 원래 뜻은 ‘짊어지다’ 혹은 ‘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적 권능으로 우리가 저지른 죄들을 소멸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 죄들을 모두 당신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실행해야 할 보속을 당신 어깨에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벌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풀어주신다는 겁니다. 네번째 동방박사인 알타반이 한 젊은이 대신 노예선에 팔려감으로써 그를 구해낸 것처럼 말이지요. 주님께서 우리 죄를 끌어안으셨기에 우리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인간이 되셨기에 부족하고 약한 우리가 들어높여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자격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가난해지셨기에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가득히 받아 풍요로워졌습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순명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셨기에 우리가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는 주님께서 용서해주신다고 해도, 잘못을 뉘우치고 바른 길로 돌아서는 ‘회개’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보속해주신만큼, 우리도 사랑과 희생 그리고 자비의 실천을 통해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소명이 성찬의 전례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영성체 예식을 시작하기 전 사제는 성체와 성혈을 신자들에게 높이 들어보이며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그러면 신자분들은 이렇게 응답하지요.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이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시어 우리 죄를 없애주신 주님의 사랑과 희생에 ‘무임승차’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하여 나를 위한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헛되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지요. 그 점을 생각하며 바오로 사도의 권고대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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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집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없애는 집이 많아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책 읽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텔레비전 없애는 예전의 유행이 다시 반복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함께 모여 텔레비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과 같이 전 국민의 관심을 끄는 경기에서나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몇 년에 한 번 거실에서 보기 위해 굳이 거실에 텔레비전을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 쟁탈전으로 서로 싸웠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 알아서 스마트폰으로 보면 됩니다.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 가졌던 거실은 이제 텅 빈 곳이 되었습니다. 예전의 채널 쟁탈전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는 ‘함께’하는 것보다 ‘혼자’가 익숙합니다. 친구나 가족보다도 스마트폰이 더 가깝고, 때로는 나의 전부이고 심지어 마치 배우자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 또 자극적인 것 등을 모두 이 스마트폰에서 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스마트폰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사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편하고 쉬운 것, 자극적인 것을 가까이하다 보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어렵고 힘들어집니다. ‘주님도 스마트폰으로 만나면 안 되나?’, ‘성체도 그냥 스마트폰으로 보면 안 될까?’, ‘굳이 고해소에 들어가 고해성사 보는 것보다 스마트폰으로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등등…. 인격적인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하는데, 편하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도 얻기 힘들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사제는 미사 때 성체를 들어 올리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이 바로 오늘 복음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석에 앉아 있는 신자들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여기에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해결해 주실 진짜 구원자가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벅찬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귀찮다고, 지루하다고, 힘들다고, 믿지 못하겠다고 등의 이유를 들어서 그 결정적인 순간에 함께하기보다 피하는 것을 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중심이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없으며, 주님 안에서 은총과 평화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노래’ 중 두 번째 노래로. 하느님께서 선택된 종의 사명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경계를 넘어 땅끝까지 뻗어 나가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서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인류를 비추는 ‘민족들의 빛’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 1,3)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의 조종사가 실수로, 북쪽으로 1도 다르게 설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행기는 어디로 갈까요? 비행기가 60마일을 날아갈 때 1도가 틀어지면 1마일을 벗어난다는 60:1의 법칙이 있습니다. 파리에서 인천까지 8,800km, 그래서 148km의 오차가 생깁니다. 인천 기준으로 북쪽 150km이면 평양에 도착하게 됩니다. 겨울 1도라 해도 목적지가 아예 바뀌게 됩니다.
우리 삶의 항로도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요? 편하고 쉬운 길,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딱 1도만 바꾸면 충분합니다. 매일 1도쯤 더 기도하고, 매 순간 1도쯤 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 순간 이루어지는 1도의 방향 전환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고난의 극복으로도 가득하다(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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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키엣 대주교님.
구세주의 소명
아득한 옛날, 인간이 죄를 짓고 하느님과의 친교를 잃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이미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계획은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실현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응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제물과 예물을 좋아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제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소서, 제가 왔습니다… 주님 뜻을 즐겨 이루며 주님의 가르침을 제 마음 깊이에 간직하였습니다.’ (시편 40,7–9)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인간 세상에 내려오셔서, 성부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계획을 성령의 인도 안에서 온전히 수행하셨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소명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와 머무르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 그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는 사람에게 내리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곧 하느님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소명
이사야는 메시야가 오시면 백성들이 해방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해방의 사명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칭호 속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며 외쳤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은 파스카 어린양의 피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새 파스카의 어린양으로서 우리를 죄와 악의 세력에서 해방시키시고,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한 백성으로 모으셨습니다.
모든 민족을 하나로 모으는 소명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민족도, 하나의 나라도 아니었습니다. 해방을 통해 민족이 되고, 약속의 땅을 차지함으로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끄시는 새로운 백성입니다. 죄와 세상, 욕망은 새로운 ‘이집트’이며, 우리는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백성으로 모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의 어린양, 희생’입니다.
이제 새로운 백성은 더 이상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을 포함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이들, 곧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과, 그리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즉, 하느님의 백성은 이제 전 세계 모든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 구원의 역사에 아무런 공로도 없는 우리 까지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값비싸게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지고한 존엄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 존엄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성부의 뜻을 사랑으로 따르고, 성령을 따라 살며, 육의 욕망이 아닌 영의 자유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세상 끝까지 확장되는 하느님 나라의 사명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예”라고 응답하신 예수님처럼, 나는 오늘 어떤 작은 순종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2.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살기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할 두려움, 습관, 집착은 무엇이며 성령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고 계신 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3.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오늘 내 삶 안에서 치유하고 자유롭게 하기를 원하시는 상처나 죄, 혹은 내가 그분께 맡겨드려야 할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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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우리는 오늘 요한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도 전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해 성령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세례 때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요한은 자기를 파견하신 분께 들었습니다.
그는 전에 들은 것을 이제 눈으로 직접 보았고
그렇게 눈으로 본 것을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증언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보통 법정에서 사용합니다.
즉 심판을 염두에 두는 표현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한 첫 마디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세상을 대신해서 죄인으로 심판을 받고
피를 흘리며 죽어갈 파스카 어린양이시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파스카 양이 이 세상에 왔다고 요한은 증언하며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요한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들은 것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도 함께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게 보이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께서는 그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비록 지금 우리는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 머무십니다.
성체의 모습으로, 성경의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십니다.
그것을 믿을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 나아가 우리 각자도 사랑하신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매번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심을
느끼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오늘 요한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사랑 안에서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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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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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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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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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연중 제2주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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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 중 위없는 글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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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473
1월18일 [연중 제2주일(일치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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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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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인천교구 이홍일 토마스(박촌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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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작 어린양이라니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너무나 두렵고 경외로운 이름, 절대 신성시되는 이름, 그래서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이 하느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공개적으로 외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29)
변방 나자렛 출신, 목수 요셉의 아들을 향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외쳤으니, 유다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분노와 혼돈이 일어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한마디로 목숨을 건 증언이자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 간략한 증언 한 마디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운명에 대해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놀랍지 않습니까?
광대무변한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느님, 그분으로부터 이 세상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부여받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세례자 요한은 그분을 향한 표지이자 상징으로 ‘어린양’이란 호칭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 사가들의 상징조차 사자, 독수리, 황소 등으로 표상되는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위해 붙인 칭호가, 공룡이나 호랑이가 아니라, 고작 어린양이라니요!
양은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초식동물입니다. 힘없고 나약한 동물, 그래서 틈만 나면 맹수들에게 쉽사리 잡혀 먹히는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그런 양들 가운데서도 갓 태어난 어린 양에다 예수님을 갖다 붙이니, 참으로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생각하니, 어린양보다 더 잘 들어맞는 호칭은 다시 또 없는 듯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여정을 쭉 따라 가보니, 단 한마디로 표현해서, 더도 덜도 말고, 딱! 어린양의 삶을 철저히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생에 걸쳐 철저하게도 고수하셨던 기본 노선은 비폭력 평화주의였습니다.
한 마리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모두를 향해 외치고 계십니다. 올라서지 말고 내려서라고, 움켜쥐지 말고 손을 펴라고, 이기려고 기를 쓰지 말고 한번 져보라고, 살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한번 죽어 보라고...완전히 죽는 순간,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고, 참삶의 길이 시작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크게 환대하기는커녕 철저하게 냉대하고 무시했습니다. 냉대와 무시를 넘어 올가미를 씌우려고 모의하고 죽이려고 몰아세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철저하게도 무지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을 배척하는 일생일대 가장 큰 반역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그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과 천지차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멋지게 잘 닦은 선구자였던 그는 이제나저제나 노심초사하며 그분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시선을 오로지 자기 뒤에 오실 만물의 주인이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깨어 기도하면서 그분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할 순간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그 순간이 도래했습니다. 그분임을 확신한 세례자 요한의 가슴은 기쁨과 설렘으로 벅차올랐습니다. 이제 평생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에 더 이상 여한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세례자 요한은 천둥 같은 목소리로 크게 외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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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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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이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게!>
찬미 예수님!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아주 놀라운 증언을 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당시 요르단 강가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오직 세례자 요한만이 예수님 위에 내린 성령을 보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냥 지나가는 청년 예수, 혹은 목수 아들 예수를 보았을 뿐입니다. 왜 요한의 눈에만 보였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한 안에 이미 성령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태중에 있던 요한은 성령으로 가득 차 기뻐 뛰놀았지요. 내 안에 있는 것이 밖에서도 보이는 법입니다.
성령이란 무엇일까요? 신학적으로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늘 아주 직관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은 바로 ‘하느님의 피’입니다. 피는 생명이고, 사랑이며, 희생의 결정체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피를 물려받기에 부모를 알아보고, 부모의 사랑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이 ‘피의 알아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레인맨』입니다.
주인공 찰리는 빚에 쪼들리는 자동차 딜러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한 자폐증 형 레이먼드를 납치해 돈을 뜯어내려 합니다. 찰리에게 형은 그저 돈줄이자 짐짝, 말도 안 통하는 고장 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도중, 호텔에서 찰리가 욕조에 뜨거운 물을 틀자 형 레이먼드가 발작을 일으키며 소리칩니다. “뜨거운 물은 안 돼! 아기 찰리가 데어! 앗 뜨거, 앗 뜨거!” 찰리는 그 순간 얼어붙습니다. 어릴 적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뜨거운 물에 데지 않도록 지켜주었던 상상 속의 친구 ‘레인맨’이 바로 이 형 레이먼드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형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기억 속에 묻혀있던 나의 수호천사였고, 나를 지켜준 핏줄이었습니다. 찰리가 형의 내면에서 ‘부모의 사랑’과 ‘형제의 피’를 발견한 순간, 그의 눈빛이 변합니다. 이제 형은 이용할 도구가 아니라, 내가 지켜줘야 할 소중한 형제가 됩니다. 형의 웅얼거림은 소음이 아니라 사랑의 언어가 됩니다.
부모의 피가 내 안에 흐르고 있음을 자각해야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 당신 아버지의 피, 곧 성령을 쏟으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옛이야기 중에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농담을 던집니다. “오늘 대사를 보니 꼭 뚱뚱한 돼지 같소.”그러자 무학대사는 웃으며 답합니다. “제 눈에 임금님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 이성계가 의아해하자 대사가 말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입니다.”
내 안에 부처의 마음이 있으면 세상이 부처로 보이고, 내 안에 욕심이 가득하면 세상이 돼지우리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피’인 성령이 흐르면, 세상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이집트 탈출 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린 집은 죽음의 천사도 건드리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주인의 피가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그분의 피가 우리 안에 흐르면, 우리는 서로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 이마에 묻은 하느님의 피를 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사랑과 피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크라이나의 ‘옥사나 말라야’ 사례를 봅시다. 1991년 발견 당시 8살이었던 옥사나는 알코올 중독자 부모에게 버림받아 3살 때부터 개집에서 개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추운 겨울밤, 그녀를 안아준 것은 부모가 아니라 떠돌이 개들이었습니다. 그녀는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짖었고, 혀로 물을 마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시선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개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의 피(사랑)’를 받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개라고 믿는 존재가 인간의 아기를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그저 밥그릇을 두고 싸워야 할 서열 경쟁자로만 봅니다. 인간 본성의 피, 인간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타인에게서 존엄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피인 성령을 수혈받지 못하면, 우리 눈에 세상 사람들은 그저 나를 밟고 올라서려는 경쟁자나 귀찮은 존재로만 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을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의 피를 받은 이들은 인간은 물론이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구겨진 지폐도 돈이듯, 죄로 구겨진 인간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가장 절절하게 보여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린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천민 아이’ 이야기입니다. 어느 천민 아이가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영주의 성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의 괴롭힘과 고된 훈련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그 화려한 성은 감옥일 뿐이었습니다. 그때 늙은 시종이 아이를 붙잡고 충격적인 비밀을 말해줍니다.
“이 성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네 어머니가 너를 사무라이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이 성의 기둥 속에 묻히는 ‘인주(人柱)’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이의 눈에 비친 성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차가운 기둥과 벽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뼈요, 어머니의 살이었습니다. 아이는 그 기둥을 부여잡고 통곡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어머니의 피가 서린 이곳을 버리고 도망칠 수 없다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괴롭히던 귀족 아이들까지도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내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피가 묻은 성 안에 사는 모든 존재를 품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 와서 십자가를 볼 때, 이웃을 볼 때, 그저 나무 조각이나 남으로 보인다면 아직 내 안에 성령의 감각이 무딘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보려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욕망에 의해 성령을 많이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간절히 보려고 하는 이들에게 내리십니다.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님이 씻지 않은 노숙자를 껴안았을 때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셨던 것,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냄새나는 거지에게서 예수님의 목마름을 보셨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끊임없이 기도하며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피’를 발견하려 치열하게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 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데, 그때 오시는 것이 성령이십니다. ㅏ성령으로만 성령을 볼 수 있습니다. 피로만 피를 볼 수 있습니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에게 가족을 잃은 고정원 씨가 그 살인마를 양아들로 삼으려 했던 그 피눈물 나는 노력은, 그 괴물 같은 인간 안에서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피, 성령이 흐를 때만 가능한 시선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고 기도했기에 성령이 주어졌고, 그래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느님의 눈’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피, 곧 성령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개 안에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본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성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죄 안에는 거룩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성령의 안약을 넣고 세상을 보십시오. 나를 괴롭히는 이웃 안에서, 부족해 보이는 가족 안에서 상처 입은 나의 ‘레인맨’을 발견하십시오. 그들 안에 묻어있는 하느님의 땀과 피를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저 사람 안에 하느님의 피가 묻어있음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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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직접 보고 들은 것에서 비롯된 참된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고 다시 태어납니다. 그때 우리는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따라서 ‘물’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 가운데 물을 붓는 이 예식은, 물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씻어 내는 ‘정화’를 상징함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로써 죄에서 벗어나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공생활을 시작하셨듯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도 세상 속에서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공생활에서 보여 주신 수많은 행위와 기적을 되새기며,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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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9-34: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1. 하느님의 어린양: 순명과 희생의 신비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가장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게 드러낸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증언한다. 이 한마디는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와 예언,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부른 것은, 그분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셨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4,8) 그리스도는 단순히 죄를 ‘용서’하신 분이 아니라, 죄 그 자체를 없애시는 분이시다. 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인류 전체의 죄를 없애셨고,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히브 9,26-28)
2. 어린양의 의미: 구약의 성취
‘어린양’의 표상은 구약성경 전반을 관통한다. 과월절 어린양(탈출 12장):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인류는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 해방된다. 매일의 희생 제사로 봉헌되던 어린양처럼(탈출 29,38-46), 그리스도는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영원한 제사를 이루셨다.(히브 10,10) 고통받는 야훼의 종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12)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의 순명과 고난 속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희생제사의 그림자들을 하나로 모으시어, 단 한 번의 제사로 모든 제사를 완성하셨다.”(Homiliae in Ioannem 17,1) 즉, 과월절의 희생, 매일의 제사, 고난받는 종의 순명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것이다.
3.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 사랑의 봉헌
요한복음에서 “없애다.”는 단순히 제거한다는 뜻을 넘어, ‘짊어지다.’, ‘감당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그것을 없애셨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 신비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분은 나의 죄를 당신의 몸에 옮기셨다. 나의 불순함을 당신의 순수함으로 삼키셨다. 그리고 나를 새롭게 창조하셨다.”(Oratio 45,22) 이 희생의 절정은 요한복음 19장에 나타난다. “그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34절) 이는 교회의 성사, 특히 세례와 성체의 근원을 상징합니다. 피와 물은 하느님의 은총이 세상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통로이며, 어린양의 죽음이 생명의 샘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4. 성령의 세례: 어린양의 선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요한 1,33)으로 소개한다. 이 말씀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에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완성된 약속입니다.(요한 20,22 참조)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성령은 어린양의 피로부터 나온다. 그 피로 씻겨진 자는 다시는 죄의 종이 아니다. 그는 자유인의 영을 받는다.”(De Spiritu Sancto II,5,41) 성령은 어린양의 희생을 현재 안에 실현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이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하나로 결합된다.
5. 그리스도의 모상으로 살아가는 삶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모범을 우리에게 남기셨다. 그분을 닮는다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본받음이 아니라, 그분의 희생적 사랑과 순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에게 사랑의 완전한 법을 가르쳐 주셨다. 우리도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 향하는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한다.”(S.Th. III, q.48, a.2 ad 3) ‘어린양’의 표상은 단순히 경건한 상징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형식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구원은 자기 봉헌을 통한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6. 결론: 세상의 빛이 되신 어린양
야훼의 종이 “땅끝까지 구원이 미치게 하리라”(이사 49,6)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빛이 되셨다. 그리고 이제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그 빛을 비추어 세상 속에서 증언하라고 부르신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어린양은 세상에 평화를 주시는 분이다. 그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이는, 세상 안에서 평화를 짓는 사람으로 변화된다.”(Ecclesia de Eucharistia, 19) 우리는 이 어린양의 희생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의 죄와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드러내는 빛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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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이러한 까닭>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나 이러한 까닭>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31ㄴ)
나
홀로라도
불신의
늪을 헤쳐 끝내
믿음으로써
나에게 오신
믿음께서
마침내
온 누리 모두의
믿음이 되시기를
나
홀로라도
절망의
벽을 넘어 끝내
희망함으로써
나에게 오신
희망께서
마침내
온 누리 모두의
희망이 되시기를
나
홀로라도
미움의
덫을 거둬 끝내
사랑함으로써
나에게 오신
사랑께서
마침내
온 누리 모두의
사랑이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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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29-34)
1)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33절)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사실상 하느님의 선포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구원 활동도, 십자가 수난과 죽음도, 부활과 승천도 못 보았습니다. 그는 성령이 어떤 분 위에 머무르실 텐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뿐이고,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예수님 위에 머무르시는 것만 직접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믿고, 자신의 믿음을 증언한 것은, 하느님의 계시를 믿었기 때문이고, 또 하느님께서 그렇게 증언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2)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과월절의 어린양과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어린양이 합해져 있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은 레위기의 ‘속죄 제물’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 숫염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주님 앞, 만남의 천막 어귀에 세워 놓는다. 아론은 그 숫염소 두 마리를 놓고 제비를 뽑는데, 제비 하나는 주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제비는 아자젤을 위한 것이다. 아론은 주님을 위한 제비가 뽑힌 숫염소를 속죄 제물로 바친다."(레위 16,7-9)
“아론은 살려 둔 그 숫염소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 곧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고백하여 그것들을 그 염소 머리에 씌우고서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맡겨 광야로 내보낸다. 그러면 그 염소는 그들의 모든 죄를 불모지로 날라 간다. 이렇게 그 숫염소를 광야로 내보낸다."(레위 16,21-22)
속죄 제물로 바쳐지는 염소 입장에서는 정말로 억울한 일인데,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예수님께서는 억울해 하시지 않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로 ‘기꺼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3-14)
3)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서도 속죄 제물만 바치면 죄가 없어지고 용서를 받게 될까?”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아도 십자가의 은총이 내릴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용서와 구원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은, 용서와 구원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용서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또 “우리가 구원받는 일에, 도대체 속죄 제물이 왜 필요할까?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그냥 구원하실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구원은 우리의 모든 부채를 탕감해 주시는 일인데, 그냥 ‘탕감’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대신 빚을 갚아 주심으로써, 그 빚을 없애 주신 일입니다. 채권자이신 분이, 스스로 우리 대신 채무자가 되셔서, 우리의 빚을 대신 갚아 주신 일...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입니다.
어떻게 설명하든지 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신앙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게 된 과정을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과정은 잘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일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전까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속죄 제물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예수님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어렴풋이’ 느낄 뿐이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믿고, 회개하면서, 사랑 실천으로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생활을 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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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어린양>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시다. 그분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났다. 사랑은 희생이다. 진실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안다. 예수님의 희생에 관해 생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길 바란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하고 말하였다.
어린양은 첫째,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사 때 제물로 사용된 동물이다. 제물로서의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제단에 올려졌고, 그때 제물의 피는 속죄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죄의 용서를 청한 것이다.
둘째, 파스카의 어린양(탈출 12,3-13)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할 때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 이때 이집트 왕 파라오가 완고하게 말을 듣지 않자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는데 마지막 재앙이 이집트에 있는 모든 맏이의 죽음이었다.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맏아들부터 맺돌 앞에 앉은 여종의 맏아들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들이 모조리 죽을 것이다.”(탈출 11,5).
이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새끼 양을 잡아 제사 지내고, 그 피를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도록 하여 이스라엘이 죽음의 재앙이라는 심판을 면하고 노예 생활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해 주셨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에게 어린양은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지금도 “건너뛰다.”라는 의미의 파스카 축제가 지속되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희생양을 ‘파스카의 어린양’이라고 한다.
셋째. 어린양은 ‘주님의 종’을 말한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음으로써 그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줄 주님의 종이 어린 양의 모습으로 비유된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3.
넷째,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의 양이자 파스카의 양, 곧 희생양이 되셨다. 인간의 죄를 없애시는 참된 어린양이다. 예수님은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의 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분이다(1요한4,10). 사실 “과거 없는 성인도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 덕분이다.
미사 때도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찾는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사제가 축성된 빵을 나누는 동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하며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절한 청원과 평화를 갈망하는 기도를 한다. 그리고 성체를 영하기 직전 사제는 성체를 높이 들어 외친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우리는 응답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 말씀 안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죄의 용서와 평화의 선물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영성체해야 한다.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신심을 가지고 모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희생의 삶을 오늘 여기서 살아야 한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속죄와 희생양이 되신 어린양을 모시는 우리의 행위에는 우리도 어린양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우리를 위해 밥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웃의 밥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는 내 밥이야!’ 하면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며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한다. 그러나 내가 “네 밥이 되어줄께!” 한다면 더없이 좋은 세상이다. 이웃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지금이야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는 삶이 필요하다. 이웃을 향한 희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길 희망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길만이 세상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음을 믿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편 40,8)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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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일두 베드로 신부님]
<본래의 약함 그리고 성령(요한 1,29-34)>
자연계의 생존 법칙인 ‘약육강식’과 대비하여 ‘강자 앞에서 약하게, 약자 앞에서 강하게’ 처신하는 자세를 비꼬는 ‘강약약강’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우리 사회는 재산·권한·능력·건강 등의 한시적 척도로 강자와 약자를 분류한다. 대부분 사람은 강자로의 진입을 인생의 최종 목표, 행복의 필수 요건으로 간주한다.
강자는 자신이 선점한 지위를 고수하려고, 약자는 강자 대열에 합류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한다.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부동의 이분법 구도로 고착되어 약자에서 강자로 변환할 수 없다는 체념은 다수의 약자에게 적지 않은 피해의식을 남긴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본래 약자라는 사실을 부각할 필요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보호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고통으로 번민하며 살아가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약자로 생을 마감한다. 강자는 ‘본래의 약함’을 해소한 초인(超人)이 아니라, 본래의 약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시대와 문화가 설정해 놓은 상대적 척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신론자는 본래의 약함을 단호히 부정하거나 한시적 지표의 우세가 본래의 약함을 보완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유신론자의 첫째 관문은 본래의 약함에 대한 긍정과 원초적인 보호의 필요성에 대한 수용이다.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는 ‘약함’을 대표하는 어린양은 구약성경에서 속죄 예식의 번제물(탈출 29,39; 민수 28,9 참조)과 파스카 축제의 잔치 음식(탈출 12,5 참조)으로 사용되었다. 이 약한 어린양을 하느님께서 ‘목자가 팔로 모아 품에 안듯이’(이사 40,11 참조) 극진히 보살핀다. 곧 어린양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지다. 어린양 개념을 도입하는 요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발언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1베드 1,19)가 세상을 구원하였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권능’(강함)과 ‘어린양’(약함)의 연결은 모순처럼 다가온다. 그런데 이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역설(逆說)은 하느님의 자기 현현 양식이다.
‘전능한’(강한)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똑같은’(약한) 인간으로 태어나고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셨다. 어둠 속에 빛으로 오신 성자 그리스도와 같이, 하느님의 전능성은 절대 강자의 권력 행사 방식이 아니라 ‘상호 대립’(강함-약함; 첫째-꼴찌; 높음-낮음)이 ‘상호 일치’(약함 안에 강함; 꼴찌 안에 첫째; 낮음 안에 높음)를 이루는 방식으로 발휘된다.
요한 복음은 ‘요한의 세례’와 ‘주님의 세례’를 ‘물의 세례’(본래의 약함에 대한 긍정)와 ‘성령의 세례’(보호·강화하는 하느님에 대한 확증)로 구분한다. 물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를 준비하고, 성령의 세례는 물의 세례를 완성한다. 성령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지닌 본래의 약함 안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며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령의 보호하고 강화하는 은사를 ‘생명’과 연결한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의 세례는 본래의 약함을 긍정하는 이에게 생명(강함)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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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진윤기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신앙의 일치로 부름 받은 교회>
가톨릭교회는 매년 1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지냅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요한 17장)는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며, 서로 다른 전통과 표현 속에 살아가는 교회들이 같은 말씀을 듣고, 같은 희망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일치 주간은 우리가 이미 완전한 일치에 도달했음을 선언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도록 부름 받은 여정 위에 있음을 고백하는 때입니다.
레오 14세 교황님은 지난해 ‘온누리의 임금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교황교서 「신앙의 일치 안에서(In unitate fidei)」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조화롭게 걸어가며 자신들이 받은 선물을 사랑과 기쁨으로 지키고 전승하도록 부름받았다.”고 하십니다. 니케아 신앙 고백의 전통을 상기시키며,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같은 신앙 안에서 하나로 묶여 있음을 기억할 때 참된 일치의 길이 열린다고 가르치십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치는 이미 주어진 은총에 더욱 충실히 응답하는 삶의 태도에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그 ‘신앙의 일치’가 어디에서 비롯 되는지 를 보여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 는 하느님의 종에 대하여 “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이사 49,3)고 선포합니다. 그는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오는 빛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처음부터 보편적이었고, 일치는 모든 민족과 모든 이를 향한 계획 안에서 비롯되며, 그 중심에는 하느님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열을 겪고 있던 코린토 공동체에 먼저 이렇게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 … ) ,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1코린 1,2)
사도는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일치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부르심을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일치의 중심을 분명하게 가리켜 주지요 . “보라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 29)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중심에는 바로 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일치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그리스도의 구원을 향해 모두가 시선을 모을 때 가능해집니다.
일치 주간을 지내는 우리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황님께서 강조하시듯, 다양성 안에서의 참된 일치는 삼위일체의 신비와 같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지적하기보다, 내가 고백하는 신앙이 삶으로 증거되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작은 말과 행동에서부터 화해와 경청의 태도로, 공동의 기도 안에서 성령께 일치를 청할 때, 교회는 세상 안에서 신앙의 일치와 평화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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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성훈 빅토리노 신부님]
<확신에 찬 요한의 증언>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하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증언이라고 하면 어떤 사건에 대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증언하는 사람의 명예, 사회적인 평판과 사람들로부터의 신뢰가 걸려 있습니다. 때에 따라선 법의 처벌과 목숨까지 위협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중요한 증언을 제자들 앞에서 이야기하는데 내용이 이상합니다. 보통 증언이라 함은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믿는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오히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요한 1,31)라고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요한의 증언에 들어있는 이 자기부정은 증언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말 같지만, 오히려 증언을 듣는 사람들에게 요한의 확신을 더욱 잘 전해주는 장치가 됩니다.
요한의 증언이 단순히 요한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당신이 증언한 내용이 그저 당신의 착각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라는 반론에 부딪혔을 겁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의 증언에 하느님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자신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요한이 스스로 안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일러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한 겁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요한은 그저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요한은 그저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확신에 찬 증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셨을 때, 우리가 ‘아! 주님이시구나!’라고 외치며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갖는 것입니다.
틈나는 대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말씀을 묵상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사랑 가득한 삶을 우리가 기쁘게 살 수 있게 될 때,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우리도 요한처럼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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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다.'"(요한 1.29)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은 자신을 바쳐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은 자신보다 오로지 타인을 위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 타인은 우리들입니다.
어린양은 우리가 위대해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양의 희생으로 우리가 위대하게 되었습니다. 불완전한 우리 인간성이 어린양의 희생으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의 사슬에 묶여있지 않고 자유로운 인간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자신보다 위대하거나 잘난 사람들을 따르고 충성하며 목숨까지 버릴지도 모르지만, 자신보다 하찮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힘들어합니다.
자신보다 위대하지도 않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위한 희생적인 사랑은, 그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고, 그들을 위한 공간을 자신의 삶 안에 창조해 내고, 그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자신보다 이웃의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어린양의 지신의 목숨을 버리더라도 이웃을 구하는 태도입니다. 오로지 이웃만을 위하여 살기에 자신의 욕망은 거들떠보지도 못하는 삶입니다.
어린양을 따르고자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봉헌한 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나약함을 안고 사는 인간이기에 어린양을 온전히 따르려 할 때 늘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주님과 이웃만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싶은 유혹입니다. 어린양처럼 되려는 그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도 필요합니다
영성체 예식을 통하여 어린양을 따르라는 요한의 음성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 죄를 위하여 희생되신 어린양을 바라보며, 작은 희생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의 은총을 오늘 다시 청해 봅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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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우리도 예수님을 증언하자!>
오늘 복음(요한1,29-34)의 제목은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 ,29) 그리고 또 예수님을 두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요한 1,33ㄹ),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요한 1,34ㄴ) 증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도 증언합시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을 증언합시다! 우리가 믿고 있는 분, 따라가는 분은 이런 분이라고 세상을 향해 증언합시다!
이런 증언을 하려면, 그리고 나의 증언이 참되려면, 내가 먼저 나의 죄가 없애져야 합니다. 성령의 세례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힘으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증언의 시작'이며,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이며,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ㄴ)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 1,3)
일치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오늘(1.18)부터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1.25)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주간'입니다.
하나인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동방교회(1054년), 개신교(1517년), 영국성공회(1534년)' 신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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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겸손과
자기 내어줌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어린양이십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끝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어린양의
삶이십니다.
어린양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야 할
존재의 방향입니다.
하나를 낮추어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사람 사이의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시는
어린양이십니다.
죄를 벌하시기 위해
멀리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죄를 없애기 위해
우리 곁으로 오신
하느님의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어린양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일치를
이루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과의 일치는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처럼 사랑하는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악을 바깥으로
밀어낸 것이 아니라,
악을 사랑 안으로
끌어안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과의
일치는 끝까지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겸손의 삶입니다.
어린양의 겸손은
일치의 근원입니다.
겸손은 일치가
머무를 공간을
만듭니다.
겸손은 사람을
갈라놓지 않고
하나로 묶는 힘을
지닙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머무름을 통해
하느님과 우리의 일치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본질입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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