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배울점이 많아서 올립니다.
이러한 분들이 많아지셔서
우리에게 장보고와 이순신의 신화가 재연되길 기대하면서......
대보해운 김창중씨
[경향신문 2002-11-24 19:07]
쌀쌀한 겨울 날씨에도 현해탄의 바닷바람은 푸근했다. 검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파도…. 힘차게 항로를 헤쳐가며 이따금씩 울어대는 페리호의 고동소리가 상쾌하다. 지난날 민족의 애환과 눈물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 뱃길이련만, 세월은 많이도 변했다. 그동안 일본 국적선들이 독점하던 이 노선에 국내 해운사로는 처음으로 쾌속선을 띄워 경쟁에 나선 대보해운 김창중(金昌中·50) 사장. 부산에서 일본 후쿠오카(福岡)까지 배를 타고가며 사업 구상과 항로에 얽힌 갖가지 사연에 대해 들어보았다.
“해양대학을 졸업한 이래 지난 30년 동안 오로지 배에만 매달려 살았지요. 기왕 뛰어든 이상 무엇인가 보여드리겠습니다”. 계열사인 미래고속을 차려 ‘코비 1호’를 취항시킨 것이 불과 10개월 전인 지난 2월. 연이어 지난 9월에 ‘코비 3호’를 추가 투입했으니 이만저만한 추진력이 아니다. 아무렴, 스스로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다지 않는가. 부산 국제여객부두를 떠난 코비 1호는 어느새 오륙도와 태종대를 저 뒤로 남긴 채 탁트인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배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흰 포말이 눈부시다.
그는 “아직은 규슈 지역 일본인들이 주요 고객”이라며 얘기를 풀어나갔다. 손가방만 달랑 들고 와서는 자갈치 시장을 찾거나 목욕탕에 들러 마사지를 즐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아침 첫배로 건너와 쇼핑을 즐기고 오후 마지막 배로 돌아가기도 한다. 물가를 감안하면 뱃삯(왕복 17만원)을 따지더라도 도쿄(東京)나 오사카(大阪)에 다녀오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란다. 마침 옆자리에서는 일본인 승객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여흥담을 나누고 있었다. 김, 소주, 컵라면 박스 등의 자잘한 귀국 보따리들이 눈에 띄었다.
일본을 찾는 우리 관광객도 부쩍 늘었다. “후쿠오카 중심가에 포장마차 라면집이 줄지어 들어섰으며, 대부분 식당에서 김치·파전 등을 메뉴에 올리게 된 것도 그런 결과”라고 했다. 적어도 이 뱃길로 오가는 승객들을 살펴보면 한·일 양국이 ‘가까운 이웃’임을 실감한다는 얘기다. 요즘 들어서는 여행사를 통해 송년모임 문의까지 들어올 정도라는 귀띔이다. 일본항공(JAL)이 페리호에 승객을 놓치고 있는 경쟁 항로를 폐쇄했을 정도라니, 그야말로 ‘황금노선’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잠깐 사이에 배는 벌써 대마도를 오른쪽으로 비켜가고 있었다. 희미하게 비치는 크고 작은 섬들을 바라보며 지난날 부산~시모노세키(下關)를 오가던 관부연락선으로 화제가 옮아갔다. 막대한 물자가 수탈됐으며, 우리 젊은이들이 맥없이 끌려갔던 눈물과 한숨의 뱃길. ‘사(死)의 찬미’로 널리 알려진 윤심덕이 연인을 끌어안고 바다에 몸을 던진 곳도 바로 이 뱃길 어디쯤일 것이다. “그때로서는 양국 철도를 연결함으로써 서울~도쿄를 60시간 거리로 좁혔던 획기적인 교통수단”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타고가는 쾌속선의 성능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마치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겉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보통 배가 아니다”라며 자랑이 이어졌다. 평균 속력 43노트(시속 80㎞). 210㎞의 구간을 2시간50분만에 주파한다. 비슷한 구간을 일반 페리호들이 10시간도 넘어 도착한다는 설명이고 보면 얼마나 빠른지 대략 짐작이 간다. 더욱이 웬만한 태풍이 불어도 견뎌낸다니, 척당 가격이 자그마치 1백70억원이나 하는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비행기’라고 불린다며 엔진 자체가 보잉사에서 만든 것임을 은근히 강조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린 것만은 아니었다. 기계 고장으로 갑자기 바다 위에 멈춰서는 황당한 경우도 겪었다. 엔진이 까다롭기 때문에 기름에 먼지가 섞이지 않도록 오일필터를 개발하느라 끙끙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한번 작정하면 기어이 끝을 보는 독한 놈”이라는 것이 스스로의 자부심이다. 제풀에 쓰러질 것이라며 비웃어대던 일본사측에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코비(Kobee)’란 이름 자체가 ‘한국의 벌’이라는 뜻이니, 경쟁을 피하지 않겠다는 뜻임은 물론이다.
대한해운·삼미해운·범양상선 등에서 근무하던 초년병 시절의 경험담이 뒤따랐다. 용선 업무를 맡아 밤새 쏟아져 들어오는 텔렉스를 처리하느라 늦새벽까지 시달린데다 영어가 서툰 마당에 저쪽에서 “5분 안에 답변을 달라”는 식으로 독촉이 들어오는 통에 곤욕을 치른 것이 한두번이 아니며, 순식간의 판단 잘못으로 수만달러를 날리고는 남몰래 울었으며…. “그러면서도 일에 빠진 나머지 걸핏하면 사무실에서 먹고자고 지내다가 집사람에게 쫓겨날 뻔하기까지 했다”며 시원하게 웃어댔다.
중동 건설붐 때는 시멘트·석탄을 실어나를 배를 대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연간 5백만t 안팎의 물량을 처리하느라 4만t짜리로 쳐도 120척 이상을 잡아야 했으니, 적어도 사흘에 한척꼴이었다. “이처럼 업무 자체가 커다란 노름판이므로 잔돈푼 놓고 신경써야 하는 포커 게임이나 화투판에 흥미가 없다”는 얘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설령 자기 배가 없더라도 재주껏 남의 배를 빌려 움직여서라도 벌어들일 수 있다면서 “해운업은 버스표나 비행기표 파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장사”라고 거듭 강조했다.
“지난 90년 걸프전 당시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우리 정부에 대한 전비 분담으로 군수물자 수송을 요청해 왔을 때가 그랬지요. 다른 해운사들이 꺼리는 틈을 타서 그 일을 덥석 떠맡았거든요”. 그때도 모험은 필요했다. 보험을 들지 않은 것이었다. 패트리엇 미사일 등을 나르므로 잠수함이 따라붙어 철저히 호위해 주는 상황에서 구태여 보험에 들 필요도 없었다. 가뜩이나 보험료가 턱없이 비쌀 때였다. 그 결과 16개월 만에 1백억원 이상의 순이익을 올리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 ‘대박’이 사표를 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평소 ‘내 봉급은 내가 정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말투로 월급쟁이로서 뼈저린 한계를 느꼈음을 내비쳤다. 그래서 퇴직금을 밑천으로 회사를 차렸는데 또 하나의 기회가 찾아왔다. 러시아 곳곳을 헤집다가 아무르강을 떠다니는 배들이 얼어붙은 강바닥에 매여 한겨울을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겨울에 배를 빌려주면 수익금의 절반을 주겠다”고 제의한 끝에 10척을 빌려 한국·중국·일본을 오가며 6백억원을 벌었다. “남들 들으면 봉이 김선달 같은 얘기라고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인천공항 건설자재를 실어나른 것도 그의 배였다. 여기에도 남다른 아이디어가 발휘됐다. 운반선을 만들면서 차량이 꽁무니로 들어가 앞으로 나오는 대신 앞으로만 다닐 수 있도록 양쪽을 텄다. 그 결과 다른 배들이 왕복 1시간30분 걸리던 것을 40분으로 줄일 수 있었다. 대보해운은 현재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곡물·시멘트·원목·석탄 등을 실어나르고 있다. 우리 정부가 지난 95년 북한에 쌀과 비료를 보낼 때도 이 회사 화물선이 이용되기도 했다.
우리 해운업 환경이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걱정이다. “한때 세계 8위까지 올랐으나 지금은 15위로 내려앉았다”며 “수출입 물량의 99%를 실어나르는데도 인식이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홍콩을 쫓아가기에 너무 역부족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가 주목하는 나라는 선박왕 오나시스의 모국 그리스. “해운업의 성패는 결국 조세와 금융에 달렸다”며 그리스가 지중해와 5대양을 제패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했다. “하이테크는 아니지만 밑바닥부터 꼼꼼하게 터득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해운업 종사자들의 자세도 아울러 꼬집었다.
“한때 1년의 절반은 해외에서 보낼 만큼 바빴지요. 그러나 베이징(北京)의 경우 서른번을 넘게 갔어도 아직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은 구경 한번 못했어요”. 그런데도 매주 한번씩 열리는 산업정책연구원 경영자 독서과정을 8년간 거의 거르지 않고 있으며 인간개발연구원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그는 모처럼의 한가한 여행이 정말로 신나는 모양이었다. 오후의 눈부신 태양이 대한해협 항로를 가득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