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131
■ 1부 황하의 영웅 (131)
제2권 내일을 향해 달려라
제 19장 춤추는 천하 (1)
제나라 북쪽으로 연(燕)나라가 있고, 또 그 동쪽으로 산융(山戎)이라는 오랑캐 부족이 있었다.
산융의 영토는 지금의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로서, 발해만 북쪽 일대이다.
천진(天津)에서 동북쪽으로 약 150km 더 올라가면 천안(遷安)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바로 그곳이 산융의 도읍지였다.당시에는 그곳을 영지(令支)라고 하였다.
산융을 일컬어 영지국(令支國)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의 유명한 관문인 산해관(山海關)과 매우 가깝게 위치한 곳이다.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해서 험지(險地)라고 할 수 없지만, 당시 그곳은 산과 강으로 가로막힌
험지 중의 험지였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 그래서 중원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는 무풍지대였다.
주 왕조가 강성했던 주무왕, 주성왕 시절에도 그 곳에만은 힘이 미치지 못해 그대로 방치할 정도였다.
이렇듯 멀고 험한 지리적 요건을 이용하여 영지국(令支國)은 주왕실에 조공을 바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틈만 나면 중원을 침범하여 곡식과 가축과 백성들을 약탈해가곤 하였다.
특히 그들은 이웃 나라이자 국력이 약한 연(燕)나라를 자주 침공하는 바람에 연나라로서는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다.지난날 연(燕)나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남쪽인 제나라를 침략하였다가
정나라 세자 홀(忽)에게 혼쭐이 난 오랑캐가 바로 이 산융, 즉 영지국(令支國)이었던 것이다.
이 무렵, 영지국의 임금은 밀로(密盧)였다.
임금이라고 하니까 상당히 거창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그렇지도 않다.
이 당시만 해도 산융을 비롯한 소수 민족들은 부족국가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여러 부족장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자 정도로 생각하면 적당할 것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그냥 임금이라고 하겠다.
그는 제환공(齊桓公)이 패공이 되어 중원의 여러나라를 규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은근히 걱정을 하였다.
"듣자하니 중원에서는 바야흐로 제나라가 패업을 이루어 여러 제후국을 통합하여 주왕실에 대한
충성을 도모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제환공의 힘이 이 곳 북쪽까지는 닿지 않고 있으나,
만일 그의 영향력이 북방까지 미치게 되어 연나라가 국경을 굳게 방비한다면 우리는 대관절 어디서
곡식을 충당할 것인가?"
이때 영지국의 모신(謨臣)이자 장수인 속매(涑買)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큰소리쳤다.
"주공께서는 근심하실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제환공(齊桓公)이 비록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방의 초(楚)나라를 제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결코 이 곳 북쪽까지 신경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연(燕)나라가 제환공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주공께서 정히 근심이 되신다면 이번 기회에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와 제나라의 통로를 끊어버립시오.
그리하면 연나라는 중원에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청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 생각이다.“
이리하여 영지국 임금 밀로(密盧)는 융병 1만 군을 이끌고 연나라를 향해 쳐들어갔다.
연(燕)나라는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공이 큰 소공(召公) 석(奭)에게 분봉한 제후국으로
지금의 북경(北京) 일대를 영토로 하고 있었다.
땅은 넓었으나 워낙 척박하고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어 문화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게다가 동쪽과 북쪽으로 이족들이 둘러싸고 있어 늘 그들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이 무렵, 연나라 임금은 연장공(燕莊公)이었다.
연장공은 군대를 동원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물밀듯 쳐들어오는 융병의 기세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에 그는 사자를 샛길로 보내 중원의 패자로 부상한 제환공(齊桓公)에게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제환공 22년의 일이었다.
132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132
■ 1부 황하의 영웅 (132)
제2권 내일을 향해 달려라
제 19장 춤추는 천하 (2)
그 무렵,
제환공(齊桓公)은 중원 진출을 노리는 초(楚)나라의 움직임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을 뿐
북쪽 오랑캐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그는 특히 주혜왕으로부터 방백의 직위를
제수받은 후로는 명실공히 중원의 패자로서 천자 부럽지 않은 생활을 영위해나가고 있었다.
날마다 술과 여자와 사냥으로 세월을 보낼 뿐 나라 안팎의 일은 모두 관중(管仲)에게 맡겨 두었다.
그런 중에 느닷없이 연장공(燕莊公)으로부터 원군 요청을 받게 되자
제환공은 얼굴에 은근히 귀찮은 표정을 드러냈다.
"남쪽의 초(楚)나라만도 상대하기 벅찬데, 언제 또 북쪽 오랑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겠소?
이번 일은 연나라 스스로 해결케 하는 것이 나을 듯 싶소.“
관중(管仲)이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주공께서 비록 패업(覇業)을 이루셨다고는 하지만,이것은 어디까지나 낙양 일대의 제후국들을
상대로 한 패업일 뿐입니다.남쪽에는 초나라가 남해(南海)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산융(山戎)이 있으며, 서쪽에는 적(狄)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다 우리의 우환입니다.
만일 주공께서 진정한 패공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바로 이 우환거리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
"천하는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이번에 산융(山戎)이 연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먼저 그들을 응징해야 할 판이거늘,
연나라가 침공을 받고 있는 마당에 어찌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있습니까?
이는 결코 패공으로서 취할 행동이 아닙니다.더욱이 산융(山戎)의 형세는 중원의 등을 겨냥하고 있는
창끝과도 같은 존재입니다.당연히 그들을 정벌하여 배후를 안전하게 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놓고 초(楚)나라와 대결할 수가 없습니다."
관중(管仲)의 이 같은 말에 제환공은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패업의 길이 멀고도 멀거늘, 내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소. 중보(仲父)의 말씀대로 산융(山戎)을 치고
초나라를 제압해야 우리 제나라가 진정한 패자국으로 행세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고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친히 중군이 되어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제수(濟水)를 건너갔다.
관중은 물론 포숙, 공손습붕, 성보, 빈수무 등 대부분의 중신들도 종군했다.
영척만이 임치에 남아 내정을 살피기로 했다.제환공(齊桓公)이 대군을 이끌고 북상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영지국 임금 밀로(密盧)는 재빨리 군사를 돌려 자기 나라로 달아났다.
그는 예상과 달리 제나라가 원군을 보내오자 분풀이라도 하듯
닥치는 대로 연나라 백성들과 가축들을 약탈하여 영지국(令支國)으로 끌고 갔다.
이 때문에 연나라 땅에서는 10리를 가도 개 짖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들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행군을 하는 동안 폐허가 되다시피 한 연(燕)나라 영토를 보고 제환공은 연신 혀를 찼다.
"오랑캐의 폐해가 이렇듯 심한 줄은 몰랐구나."
제나라 군대가 연나라 땅인 계문관에 이르렀을 때 연장공이 병차를 몰고 나와 제환공을 영접했다.
계문관은 지금의 하북성 계현 일대로, 구수 상류에 위치해 있다.
연장공(燕莊公)의 영접은 극진했다.크게 잔치를 베풀고 연신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먼 곳까지 구원해주러 오시니 은혜가 망극합니다."
"부지런히 달려온다고 왔는데, 산융(山戎)이 모두 달아나고 없으니 귀후(貴侯)를 대할 면목이 없구려."
제환공이 무안하여 얼굴만 붉히고 있는데, 관중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산융(山戎)이 지금은 달아나고 없습니다만,
그동안의 수법으로 보아 우리가 물러가면 또 연나라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 기회에 아예 북쪽의 우환을 없애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산융(山戎)의 소굴을 뿌리째 뽑아버리자는 말씀이오?""그렇습니다."
"산융의 소굴인 영지는 지세가 매우 험할텐데, 그들을 뿌리뽑을 수 있겠소?"
"지형이 아무리 험하다 한들 사람 사는 곳 아니겠습니까?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산융(山戎)을 토벌할 기회가 없습니다."제환공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좋소. 영지로 쳐들어갑시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장공(燕莊公)은 감격했다.군사를 일으켜 이 먼 곳까지
달려온 것만도 고마운 판에 산융의 근거지인 영지를 소탕해주겠다고 하니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는 천자 대하듯 다시 한번 제환공에게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제군이 산융 정벌에 나서겠다고 하니 저는 감읍할 따름입니다.바라옵건대, 우리 연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선봉을 서게 해주십시오.“제환공이 호기롭게 고개를 흔들며 대답한다.
"연(燕)나라는 지금까지 오랑캐와 싸우느라 무척 피곤해 있을 터인데, 어찌 앞장서게 할 수 있으리오.
선봉은 우리 제나라가 맡을 터이니, 군후께서는 아무 염려 마시고 후군(後軍)이 되어 우리를 도와주시오,"
"알겠습니다. 다만, 영지(令支)에 이르는 길은 무척 험하고 길이 복잡합니다.
마침 이곳에서 동쪽으로 80리 떨어진 곳에 무종(无終)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비록 오랑캐 종족이긴 하지만, 산융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늘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을 데려와 길잡이를 삼으면 어렵지 않게 산융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외다."앞일에 대한 회의를 마치자 제환공(齊桓公)은 공손습붕을 불러 황금과 비단을
내주며 말했다."영지국을 정벌하면 그 영토의 일부를 무종국(无終國)에게 내주겠다고 하여라."
공손습붕으로부터 제환공의 말을 전해 들은 무종국(无終國) 임금은 크게 기뻐했다.
무종국은 대대로 영지국과는 원수지간이었다.그동안 그들에게 약탈당한 여자들과 곡식만도 얼마인가.
영토의 일부를 떼어주겠다는 조건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도와야 할 판이었다.
"땅은 필요 없습니다.그저 영지국(令支國)만 토벌해주십시오."
무종국 임금은 그 자리에서 장수 호아반(虎兒班)과 기병 2천명을 공손습붕에게 내주었다.
이로써 제환공(齊桓公)의 산융 정벌은 그 막이 올랐다.향도 겸 선봉에 무종국 장수 호아반(虎兒班)을
임명한 제환공은 다시 대군의 열을 지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계문관을 출발하여 2백 리쯤 행군했을 때였다.
갑자기 길이 좁아지고 양편으로 험한 산이 첩첩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제(齊)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드리나무와 기암괴석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땅과 햇살도 여실히 달랐다.제환공이 호아반(虎兒班)을 불러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가?""이 땅은 규자(葵玆)라는 곳입니다.바로 산융들이 드나드는 길목입니다."
제환공은 관중과 의논하여 군량을 비롯한 군수 물자를 규자(葵玆)에 두기로 했다.
군사를 시켜 나무를 베고 흙을 쌓아 그곳에다 관(關)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일 처리가 꼼꼼하고 치밀한 포숙(鮑叔)을 그곳 책임자로 임명하여
수비하게 하는 한편 필요한 군량을 보급하게 하였다.
3일간의 휴식 끝에 제환공(齊桓公)은 병이 없고 씩씩한 군사만 골라 다시 정벌의 길을 떠났다.
13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