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 오야마(최영의(혹은 오오야마 마스다스 - 앞으로는 최영의라 번역하겠음), 진정한 무도가였던 그는 1994년 70세의 나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하루도 가라데 수련을 거른 적이 없었다.
비록 중국무술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지라도 극진의 역사는 우리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많은 사람들은 극진 가라데의 창시자 최영의가 1954년 방콕의 룸피니 스타디움에서 어떻게 "무적의 무에타이 챔피언" 블랙코브라와 싸워 그를 패배시켰는지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룸피니에서 무에타이 챔피언이 패배한 건 이때가 처음이라고 함)
그는 블랙코브라를 팔꿈치 치기와 삼각차기로 패배시켰다. 그러나 그는 훗날 그 싸움이 상당한 접전이었음을 시인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1964년, 최영의의 수제자 쿠로사키 켄지가 또 다시 세명의 극진 가라데인들을 이끌고 룸피니 스타디움에서 무에타이에 도전했다. 비록 극진은 3 판의 시합 중 2판을 승리해 2-1로 승리했지만 주장이었던 쿠로사키가 미들급 챔피언 리이와이의 팔꿈치 치기에 의해 2분 35초만에 KO 당하고 말았다. 그 싸움은 쿠로사키의 인생을 바꿨다. 그는 가라데를 포기하고 무에타이를 수련하기 시작해 일본 킥복싱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메지로 도장은 오늘 날까지도 여전히 강성하다. 그러나 오래된 일본 무술 만화 "공수바보열전"에서 일본 가라데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 에피소드는 중요하게 묘사되지 않았다. 그 만화는 극진의 승리는 영광화하고 과장했지만 패배는 크게 취급하지 않았다.
공수바보열전에서 그려진 극진 가라데의 또 하나의 전설 소에노 요시지와 "어둠의 무에타이 군주" 레이바. 소에노는 최영의 이후 태국 최강의 무에타이 전사를 향해 도전장을 던질 만큼 무모한 유일한 가라데가였다. 위의 두 사람들은 20년 뒤 스트리트 파이터의 "류"와 "사카트"의 모델이 되었다. 두 그림들의 비슷한 점을 찾아보아라. 이 게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겠지만, 그 뒷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1974년, 제 5회 전일본대회가 끝난 직후 "극진의 호랑이" 소에노 요시지("극진의 용"이라 불린 야마자키 테루토모와 쌍벽을 이루었던)는 최영의의 발자취를 뒤쫓기로 결심한다. 최영의의 축복아래, 그는 무엇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궁극의 입식격투인지 다시 한번 결정하기 위해 단신으로 태국행 비행기를 탄다. 그것은 극진 가라데인가 무에타이인가?
소에노 요시지의 실제 모습. 그는 세이도칸 가라데(극진 가라데의 분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세이도칸은 킥복싱과 그래플링을 혼합한 가라데로 미국에서 이름이 높다. 어쩌면 세이토칸이야말로 극진의 이상에 부합한 단체일지도 모른다.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소에노는 당장 랏차담넨 스타디움으로 향해 프로듀서인 "하삿"을 만나 시합을 신청한다. 하삿은 소에노의 무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에노는 무에타이 선수 한 명을 상대로 시험을 통과함으로서 그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삿은 소에노에게 방콕에서 경기를 치르기 전에 태국 북부의 치앙메이에서 좀더 명성을 쌓을 것을 요구한다.소에노는 치앙메이로 날아갔다. 그곳의 프로듀서 오스만은 소에노가 날아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소에노를 매일 밤 시합에 참가시켰다.
소에노는 첫 번째 싸움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무에타이 선수의 기습적인 플라잉 니에 다운당했다. 하지만 두 번째 라운드부터 그는 반격을 시작하여 회축으로 상대를 KO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시합 이후 질투심을 느낀 오스만은 소에노로 하여금 라이트 급으로 감량하도록 요구한 뒤, 미들급 선수를 그의 상대로 붙인다.
이 불공정한 시합에서 소에노는 거의 죽음을 당할 뻔 한다. 그를 구한 것은 그의 유도 기술(그는 상대를 링 밖으로 던져 위험에서 구원되었다)과 극진 가라데에 대한 초인적인 믿음이었다. 그것은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그의 상대가 그의 목을 붙잡고 무릎차기를 날리려는 순간, 그는 수테미 와자를 사용해 상대를 비틀거리게 한 뒤 상대의 목에 하이킥을 날려 승리한다.
이 싸움은 당시 태국에서 최강자라 여겨진, "어둠의 무에타이 군주"라 불린 레이바의 관심을 끌게 된다. 그는 어쩌면 과거의 블랙 코브라에조차 필적하는, 혹은 그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평가받는 무에타이 챔피언이었다.
소에노 또한 레이바의 강력함을 두려워했다. 그는 20년 전 벌어진 최영의와 블랙 코브라 사이의 시합을 보았으며, 그때 최영의가 사용한 삼각차기를 보고 익힌바 있었다. 오스만은 소에노와 레이바의 제자인 "흑전사" 몽컷 칼롭과의 시합을 주선했다.
이 싸움은 치앙메이에 있는 무에타이 팬들의 큰 관심을 끌게 된다. 소에노는 1 라운드가 시작하자마자 몽컷의 살인적인 발차기의 위력 앞에 몰리게 된다. 그러나 관중들에게 충격적이게도, 로프의 반동을 이용한 소에노의 몸에서 삼각차기가 뿜어져 나온다. 삼각차기는 단 한 방에 몽컷의 머리를 걷어차 거꾸러뜨린다. 이 장면에 충격을 받은 레이바는 소에노에게 체급을 미들급으로 올릴 것을 요청한다. 레이바는 그 자신이 직접 소에노를 쓰러뜨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레이바의 동생이자 갱단의 두목(사실임!)이었던 "다야"가 끼어 들어 자신이 소에노를 박살내겠다고 말한다. 시합은 성사되고, 이번에는 태국 국립방송에까지 두 사람의 시합이 중개되기에 이른다. 이 시합은 당시 전 태국으로 방송되었던 것이다. 다야는 와이크루 춤(무에타이 선수들이 시합 전에 추는 춤)을 반정도 추다말고 갑자기 소에노를 공격한다. 종이 울리기도 전의 일이었다. 다야는 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짐승과도 같은 파후유트 싸움법(사용 가능한 몸의 모든 부위를 이용한 공격)을 이용해 소에노를 공격했다. 그것은 피투성이의 시합이었다. 두 파이터 모두 가진바 모든 힘과 기술을 사용해 겨루었다. 마침내 4 라운드에, 두 사람 모두 탈진 상태가 됐을 때, 소에노는 다야의 정수리에 팔꿈치를 찍음으로서 승리를 거둔다.
분노한 레이바는 자기를 제외하고는 어떤 무에타이 선수도 이 가라데가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 둘 간의 시합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합 4일 전, 레이바는 도박조직에 의해 운영되는 태국 갱이 쏜 총에 맞아 숨진다. 무기를 가진 수많은 갱들도 레이바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레이바는 그가 놓아준 한 갱에 의해 총에 맞았다. 거대한 장례식이 있었고, 위대한 어둠의 무에타이 군주는 영면 속에 빠져들었다. 소에노는 얼마 후 방콕에 돌아와 룸피니 스타디움의 최고 파이터들을 상대로 승리했지만 기뻐하지 않았다. 레이바의 죽음은 그의 가슴에 공허를 남겼는지도 모른다.
마쓰이 쇼케이. 4회 극진 세계대회의 우승자이자 최영의로부터 선택된 후계자. 그는 IKO1 극진회를 이끈다. 하지만 최영의의 죽음 후 극진회는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최영의가 살아있을 당시부터 분리되어 나온 분파들에 더하여.
이듬해 1975년은 제 1회 극진세계대회가 있은 해였다. 아마도 극진회에 있어 가장 영광스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전세계에서 몰려온 타 류파의 수많은 도전자들은 극진 가라데의 손앞에 무참히 쓰러졌다. 최후의 챔피언은 사토였고, 두 번째는 로야마, 세 번째는 훗날 에신 가라데의 창시자가 된 니노미야였다. 이 시기 최영의의 1대 제자들은 무에타이, 킥복싱, 쿵푸를 포함한 모든 무술들의 최강자들만을 찾아다녀 도전했으며,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시기의 극진 가라데는 의심의 여지없이 세계 최강의 가라데였으며, 궁극의 입식타격기였다.
"변화의 책"은 말한다: 교만한 용은 후회하며, 무엇이든 한계에 이르면 오래가지 못한다, 라고. 80년대에 들어 극진은 더 이상의 도전자들을 받지 않으며, 도전자들을 보내지도 않기 시작한다. 극진의 후대 가라데가들은 그들의 용맹한 선배들이 이룩한 성공과 지배의 열매(공인된 세계최강의 격투기라는)를 따먹는데 만족하기 시작했다.
극진은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스로만의 룰과 토너먼트에 집착했고, 토너먼트를 위한 기술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소룡의 말에 따르면 "패턴에 맞춰진"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극진에서는 확실한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시하라, 세이토칸, 다이도주쿠와 같은 분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차이점은 격투법 뿐 아니라 정치적 문제와 금융적 문제가 혼합된 것이었다.
마쓰이와 같이 뛰어난 가라데가들 또한 극진의 기술적 약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3회 세계대회에서 그는 룰을 무시하기 시작한 인도 파이터의 펀치에 의해 안면을 수도 없이 두들겨 맞았다. 마쓰이는 그 반칙 펀치에 의해 여러 차례 쓰러졌다. 그 인도 파이터는 물론 실격 당했지만 여기서 우리는 최영의와 그의 1대 제자들과는 달리 극진의 후인들은 뛰어난 복서의 주먹에서 안면을 보호하는 법을 알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토너먼트 룰을 통해 야기된 극진의 약점 중 하나는 안면가격 금지이다. 여러 종류의 타무술의 도전을 받고, 또 그들에게 도전해야만 했던 극진의 1대 제자들에게 있어 안면가격/방어가 필수였던데 반해, 극진의 후대들은 그들 스스로만의 토너먼트에 집착해 타격의 정수를 무시했다. 현재의 극진 토너먼트에서 그들은 상대방에게 극도로 접근하여 안면 가격에 대한 우려라곤 전혀 없이 계속해서 로우킥을 날릴 수 있다.
이 룰은 파이터들에게 있어 잘못된 격투법을 가르쳤다. 최영의의 후계자인 마쓰이 쇼케이조차 1984년 3회 세계대회에서 안면 가격을 수도 없이 허용했던 것이다. 비록 마쓰이가 실격승을 거두었지만 만일 이것이 실전이었다면 어땠을 것인가? 결과가 여전히 같았을까?
제랄드 고르듀 VS 호이스 그레이시
극진의 또 하나의 약점은, 토너먼트에서 어떠한 종류의 그래플링도 배제했던 점이다. UFC 1에서 이를 깨달은 최초의 극진 가라데가는 제랄드 고르듀였다. 비록 UFC 프로듀서들이 그를 사바테 파이터라고 소개했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의 왼쪽 팔에는 극진의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극진 가라데를 통해 익힌 그의 가라데 기술은 그를 그보다 큰 상대들을 상대로 결승까지 진출하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의 연승행진은 당시 무적이었던 유술가 호이스 그레이시를 만나는 순간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제랄드가 단 한 번의 공격도 가하기 전에, 호이스는 테클을 걸어 그를 쓰러뜨린 후 몇 초 후에 리어 넥 쵸크를 걸었다. 제랄드는 살아남기 위해 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우리 모두는 유술의 힘에 경악했다.
극진의 또다른 약점은 어떠한 종류의 그래플링도, 심지어 입식상태에서의 테이크 다운까지도 토너먼트 룰에서 배제했다는 것이다. 최영의를 비롯한 극진의 1대 제자들은 가라데를 배우기 전에 유도에서 높은 경지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후대들은 그렇지 않다. 과거 일본에서 유도는 학교에서 반드시 들어야하는 과목이었고, 이것은 모든 일본인에게 그래플링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경험을 부여하였다. 더욱이 초기 극진 토너먼트에서는 그래플링에 대한 룰이 융통성 있었다. 초기 극진 토너먼트에서는 매치기와
테이크 다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거운 외국인들에 비해 그래플링에 약한 후대 일본인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룰은 그래플링을 완전히 배제하기에 이른다.
덕택에 일본인들은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이는 극진을 그래플러들을 상대로 약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어떠한 그래플링 경험도 없는 외국인들에게 있어 더욱 심했다. 이를 깨달은 최초의 외국인 극진 가라데가는 네덜란드의 가라데가 제랄드 고르듀였다. 그가 UFC 1에서 무적의 호이스 그레이시와 맞딱뜨렸을 때, 그는 경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제랄드가 다른 약한 그래플러들을 상대로 한 싸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해도 호이스를 상대로 그는 단 한 번의 공격도 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UFC는 무술계에 유술의 위력을 널리 알리게 됐다.
이치하라 미노키VS 호이스 그레이시
UFC2에서 우리는 같은 시나리오를 보게 된다. 다이도주쿠 가라데의 이치하라 미노키가 일본에서부터 날아와 호이스에게 도전했다. 다이도주쿠는 복싱과 매치기, 그리고 서브미션을 혼합한 극진의 분파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미노키는 호이스를 상대로 로우킥을 시도했다. 그러나 호이스는 쉽사리 이를 잡아 미노키를 넘어뜨렸다. 5분간의 발악 끝에 미노키는 암락으로 패배했다. 물론 호이스는 위대하지만 오늘 날 그의 무적성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의 그래플링 스타일에 익숙해졌고 호이스는 수 차례 패배를 맛보았다. 어떠한 스타일도 완벽할 수는 없다. 만일 어떤 스타일이 끊임없이 발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퇴보할 것이다.
극진회는 끊임없이 분열되고, 최고의 파이터들이 사라진 지금 극진은 황폐화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최영의는 그의 지배력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길 원했을까? 이것이 최영의로부터 마쓰이에게 전해진 거대 가라데 제국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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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짓수 도장에서는 종합격투기에 출전하는 선수가 아닌 이상 전문적인 타격 훈련은 시키지 않습니다. 물론 스탠딩 상태에서 낮은 옆차기로 상대방 무릎을 걷어차면서 접근하기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클린치나 태클을 위한 일종의 페인트 모션으로 봐야겠지요.
주짓수에서는 정권단련을 시키지 않습니다. 글러브를 사용하지 않던 초창기 발리투도 시합을 보면 유술가들이 손을 다치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상대의 머리를 가격할 때 주먹이 아니 손바닥을 이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입식 상태에서 유술가들이 사용하는 간단한 타격기는 상대방을 그라운드로 몰아넣기 위해 안전하기 거리를 좁히기 위한 예비동작으로 봐야합니다. 정확한 가격으로 데미지를 입히려는 목적이 아니죠.
좋은글이네용
만약 그래플링이 허용됐다면, 후계자는 마쓰이 쇼케이가 아니라, 어디서 굴러먹다왔는지도 모를 거구의 흑인/백인 선수가 됐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