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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는 동로마제국의 국교였으며, 가톨릭과 함께 기독교에서 가장 오래된 종파 중 하나이다. 동서 대분열 전까지 가톨릭과 함께 보편교회를 이루었던 종교이며, 동서 대분열이 명목상으로 종결된 현재는 정교회 자신과 가톨릭 서로만을 정통 교회로 인식하고 있다. 현재는 러시아를 포함한 동슬라브권 및 발칸 반도에서 가장 강한 교세를 지닌 종교이다. 정교회는 세계 각 지역의 독립·자치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교회라는 명칭을 직역하면 '올바른 교회'이다. 영어 'Orthodox'는 '정통의, 정통파'라는 뜻을 지닌 말로 정교회를 지칭하는 말 중 하나이다. 11세기의 동서 대분열과 그 후 종교개혁 등으로 가톨릭, 개신교 등의 서방교회가 많은 변화를 겪자 이들에 비해 자신들은 변하지 않은 정통성을 지키고 있다는 뜻으로 정교회라 한다.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 Church)라고도 하며, 그리스어로는 ‘에큐메니컬(Ecumenical Church'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에큐메니컬은 단순히 '세계의, 세계적인'이란 뜻 외에도 상당히 복잡한 개념인데, 교회, 즉 에클레시아(Ecclesia)가 본디 어떤 뜻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에클레시아는 '불러내어 만나다'란 의미, 나아가 하느님 앞에 불러 모여진 신자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에큐메니컬은 '세계적인, 하나 된 공동체'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정교회는 초대교회의 교회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말 그대로 '세상 만국의, 불러 모인 신자들의 공동체', 즉 교회이다.
정교회는 가톨릭과 달리 독립교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교회는 이 여러 교회들의 집합체이고,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진 교회는 각 나라별로 독립된 교회로 위치가 승격하게 되어 있다. 이는 옛날 초대 교회의 구조를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지금은 문화권을 따라서 독립교회들이 있는 경향이 크지만, 옛날에는 아예 나라마다 교회가 따로따로 있었다. 따라서 각 지역들이 가톨릭에 비하면 훨씬 적은 통제하에 알아서 교회를 꾸려 나가기 때문에 각 지역의 문화 그 자체가 되어온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문화 그 자체이며, 그리스 정교회도 그리스 문화 그 자체이다. 이는 오리엔트 정교회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정교회는 각 독립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들로 운영된다. 총대주교는 그리스어로 ‘파트리아르히스’라고 하며 '아버지와 같은 지도자'를 뜻한다. 가톨릭의 교황(Papa)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란 뜻이며, 고대 로마에 있었던 파트로누스 개념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총대주교는 가톨릭의 주교와는 달리, 초대교회에서 생성된 개념을 그대로 달아 두었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하면 뜻이 좀 많이 빠져 버린다. 마찬가지로 세계 총대주교도 에큐메니컬의 다소 모호한 뜻이 빠져 버리기 때문에 완전하게 번역할 수는 없다. 세계 총대주교는 대략 세상 만국에서 불러 모인 신자들의 아버지인 것이다.
정교회가 각 국가별로 독립교회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동서 대분열 당시의 정치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온 유럽이 기독교화되기 시작한 로마제국 시기, 로마 총대주교(후일의 교황)가 주교단의 수위를 차지했다. 문제는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로 천도하고 나서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제국 수도의 총대주교가 되고, 주교단의 수위인 로마 총대주교좌가 위치한 로마 시는 제국의 영향력 바깥으로 이탈했다. 이 상황에서 로마 총대주교는 자신이 주교단의 수장이므로 다른 총대주교들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음을 주장하며 다른 총대주교들은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의회를 통해 결정된 수석 주교가 로마의 총대주교임은 사실이었으나 다른 총대주교들은 주교단의 서열은 동등한 총대주교 간의 명예적 서열이지 상하 관계가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
서로마제국 상실 이전의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의 교세는 제국의 동부에서 훨씬 더 컸고, 이 때문에 동부 지역에 4개의 총대주교좌가 설치된 데 비해 상대적으로 교세가 작았던 서유럽 지역은 그냥 로마 총대교구 하나에서 모두 관리하게 되었는데, 이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교회의 동서 대분열이 일어나면서 서유럽의 사령탑 역할을 하게 된 로마 총대주교의 입장에서는 굳이 전례에도 없는 각 국가별 총대주교좌를 신설해서 가톨릭의 통합성을 저해하고 자신의 권력을 저해할 필요가 없었다.
가톨릭에서는 주교를 교황이 임명하지만 정교회에서는 시노도스(대의원회의)에서 선출한다.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선출은 엔디무사 시노도스(영구 대의원회의)에서 이루어지고 해당 시노도스는 터키 교구들을 이끌거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섬기는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되지만, 가톨릭의 교황 선출(콘클라베)은 세계 교회의 추기경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상대적으로 가톨릭은 로마지역 교회와 세계의 지역 교회들이 서로 영향을 강하게 주고받는 반면, 정교회는 지역 교회들의 독립성이 더 강조되어 있다.
정교회를 그리스 정교회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정교회의 중심지가 그리스 지역이기에 과거에 '그리스인'이라는 명칭이 정교회의 신자와 사실상 동의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옛 문서에서도 정교회 신자를 '그리스인'이라고 칭했다. 때문에 그리스 정교회라는 말이 좁게는 정교회 소속의 그리스 지역 교회의 명칭으로 쓰이고, 넓게는 정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된 것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이 가톨릭의 로마지역 교회를 넘어 가톨릭교회 전체를 지칭하는데 쓰이듯, 그리스 정교회라는 명칭 역시도 크게 오류 있는 이름은 아니다. 또한 비슷한 원리로 '동방 정교회'라는 명칭 역시도 쓰인다.
정교회란 정확히는 각 지역들의 독립된 교회들을 세계만민의 하나된 공동체로 묶어 둔 것이며, 이러한 구조를 개별 교회(Autocephaly)라고 한다.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처럼 독립교회별로 교회가 분리되어 있으며, 이 모든 교회들을 묶은 에큐메니컬 교회(Ecumenical Church)가 바로 정교회이다. 각 교회들은 기본적으로 스스로 교회를 꾸려 나가야 한다. 그리고 옛날엔 각 나라마다 총대주교를 두고, 5개의 옛 교회들을 제외하면 각국이 알아서 총대주교를 선출해야 했으며 군주가 해야 할 일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교회들은 그냥 Ecumenical Church라고 하지만, 개별 정교회에 소속된 신자들을 위해 해외에 설립된 교회의 경우에는 지역명을 정교회 앞에 붙여서 표현하기도 한다.
정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이 서구의 가톨릭이나 개신교보다 이슬람과 맞서 싸우거나, 이슬람 지배 아래에 있었으면서도 신앙을 지켰다는 자부심이 있고, 서방교회는 동방교회가 자신들을 이슬람의 칼날로부터 막아 준 것을 인정한다. 옛 교회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폴리스나 다른 총대교구들은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에 멸망하면서 전부 이슬람권에 넘어갔다. 정교회의 총 신자 수는 약 2억 5천만명. 가톨릭의 1/5. 개신교의 한 교파에 비해서는 큰 편에 속한다. 개신교 교단을 모두 합치면 정교회보다 신자 수는 압도적으로 많으나 교단이 여러 개여서 실제로는 정교회의 종교적 동질성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정교회 신자들은 주로 동유럽의 정교회 문화권 지역에 많이 분포해 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와 다르게 정교회는 해당 사회 내에서의 종교적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
정교회가 이토록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강한 이유는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며 시작된 개신교와의 분쟁 등 서방의 가톨릭교회에 비하여 정교회권에선 교회에 대한 비판이 적고, 정치적으로 세속 군주와 다툴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정교회 역사의 상당한 기간을 차지하는 오스만제국 시대에는 아예 세속 군주가 이교도였고, 교회와 세속 군주가 다툴 일이 없었다. 러시아 제국의 경우 압도적으로 강해진 황제에 의해 아예 총대주교가 공석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제정 러시아가 망할 때까지 무려 200년 넘게 이어졌다.
가톨릭과 달리 완전한 중앙 통제가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식으로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원래 독립 교구는 서열상으로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다섯 총대교구뿐이었으나 이후 다른 교구들이 독립적인 위치를 획득하면서 몇몇 교구가 총대주교좌로 격상되었다. 이 중 대표적인 경우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이다. 현재 정교회의 각 나라별 독립적 위치는 동로마제국 시대에서 유래하였다. 슬라브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 정부가 불가리아, 러시아 등의 슬라브족 교구들에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해 준 것이 독립수장교회의 시초이다. 이후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정교회 각 교구들은 각각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되었다.
로마제국 초대 교회에는 로마 주교좌, 알렉산드리아 주교좌, 안티오키아 주교좌 이 세 주교좌가 있었는데,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와 예루살렘 주교좌를 추가해 5대 총대주교좌가 탄생하였다. 그중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로마 다음 가는 서열 2위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알렉산드리아의 반발을 샀고 로마가 사도 베드로에 연결되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따라서 동방에서 새로 부상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의 기존 1위인 알렉산드리아 및 로마와는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세계 총대주교를 자칭했고, 그것을 본 로마 교황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을 자처했다. 이 두 총대주교들이 관할하는 교회들이 지금의 정교회와 가톨릭의 시초다.
10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와 교황사절들의 상호 파문으로 최종적으로 교회가 둘로 분열되었다. 이는 동로마제국의 특이한 상황과 남부 이탈리아의 엇갈리는 이권에서 기인하였다. 전통적으로 동로마 황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한 자국의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항상 로마와 제휴했다. 11세기 동로마제국은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고, 황제의 권력 또한 매우 약해져 총대주교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할 정도로 강해져 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였던 미하일7세는 로마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찍어 눌러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당시의 교황 레오3세는 즉각 로마 교회에서 가장 완고하며 호전적인 세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총대주교였던 미카일 케룰라리오스 또한 만만치 않은 인물로, 황제를 구워삶아 황제로 하여금 교황 사절로 온 추기경들을 오히려 적대하게 했다. 11세기에 노르만인들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이곳의 정교 교구를 강제로 교황에게 복속시켰는데, 이를 구실로 삼아 오히려 교황을 비난하게 한 것이다. 결국 열이 단단히 뻗친 3명의 추기경들은 어느 날 밤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 위에 총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올려놓고 로마로 떠나 버렸다. 다음날 아침 이것을 보고 격노한 총대주교는 그 세 명을 파문하고 로마 교황의 이름을 딥티코스에서 지워 버렸다. 당시 동서 교회 간의 파문 사건들은 빈번했지만, 이번 사건은 양측이 격노할 만한 일이었기에 학자들은 이날 이후로 동서 교회가 최종적으로 분열되었다고 본다. 재미있는 점은, 당대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동서교회 간의 불화와 분리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 교회 분열은 십자군전쟁 시기에 더욱 심화되었다. 동로마제국은 제1차 십자군 원정 때부터 십자군과 갈등을 빚었다. 1차 십자군은 약탈을 벌이는 집단이었으며, 수복한 지역의 영유권 문제 등으로 십자군 지도자들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물론 동로마 황제와 십자군 지도자들과는 충성 서약을 맺는 등 적대 관계는 아니었지만, 동로마제국은 십자군이 기대했던 전폭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 결국 제국군이 위기에 빠진 십자군을 돕지 않고, 십자군이 제국에 반환하기로 한 영토를 반환하지 않으면서 양측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 불신은 제4차 십자군전쟁 중 일어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이어졌고, 이후 동방과 서방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스의 한 역사가는 서방에서 온 십자가 든 악마보다는 차라리 동방에서 온 초승달 괴물이 훨씬 낫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십자군 이후로도 많은 신학적 차이들이 발생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4세기의 수도자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가 주창한 헤시카즘(Hesychasm)이다. 헤시카즘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느님을 이해하자는 골자의 당시 서방 신학 주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론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 인간의 인지능력으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 논리적인 생각을 거부하고, 단순한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평신도들에게는 호응을 얻었으나, 당대의 지식인들과 신학자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헤시카즘은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진 학문적 전통상 받아들이기에 매우 불쾌한 것이었고, 결국 팔라마스는 교회에 의해 파문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당시 동로마제국 내부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되었고, 결국에는 세력의 방향추가 돌아가 교회가 팔라마스의 파문을 철회하고 헤시카즘을 정식 교리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삼위일체론 이외에도 서방과 동방의 신학에 큰 괴리가 생겨났다.
동로마 시절에는 평신도인 황제가 교회에 대해 최고의 지배권을 가지며 교의(敎義)처럼 보통 교권으로 보류된 문제에까지도 이를 행사하였는데, 이를 ‘케사로파피즘(Caesaropapism)'이라 하며 '황제교황주의'라고 번역한다. 번역어 때문에 오해가 참 많지만, '황제=교황'이 아니라 '황제가 교권에 개입한다'라는 뜻이다. 이 개념은 고대 로마 황제의 ‘최고의 제관’(pontifex maximus)의 기능이 동로마 황제에게 이식된 것이다. 황제가 곧 교황이라기보다는, 훗날 개신교권 국가들의 국가교회주의를, 특히 근대 초 성공회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로마 주교와 황제의 관계가 대등한 파트너에 가깝던 서방에 비해 동방에서는 황제가 교권과 속권의 두 영역에서 독점적인 지배권을 추구하여 신정정치(Theocratia) 체제를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15세기 초반에는 동로마제국의 황제들이 멸망 직전의 국가를 구하기 위해 교황에 굴복하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피렌체 공의회 이후로 교황의 수위권을 따를 것을 선언하였으나, 전체 정교회 세계에서 극심한 반발이 있었고 이를 인정하는 국가는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한 동로마제국뿐이었다. 하지만 동방교회 내에서도 반발이 대단해서 황제를 따라간 통합 찬성파 일부는 돌아가면 맞아 죽을까봐 이탈리아에 눌러앉았다. 이들 성직자들과 학자들은 르네상스의 촉진제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컨대 그리스 출신의 베사리온 추기경이 베네치아에 기증한 장서가 교황청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장서의 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동로마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외교적 목적으로 다시 교회 통합을 선언했지만 교회 통합은 말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제국을 친통합파와 반통합파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에 동유럽의 정교권이 반발하여 정교 측에서도 각 교회 간 연결이 크게 약해지게 되었다. 어쨌든 결국 당시의 총대주교는 사임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메흐메트 2세의 지원하에 새로 즉위한 총대주교 옌나디오스 2세 스홀라리오스가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자국 내 교구들이 로마 교황의 영향을 받으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도 하거니와 막 형성된 제국의 틀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정교회의 도움이 필요했고, 정교회에서도 오스만제국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실제로 오스만제국 시대 내내 그리스정교회는 그간 전란으로 무너진 성당, 수도원에 대한 재건을 지원받았고, 셀림 1세로부터 "천재지변으로 인해 무너진 성당, 수도원이라도 반드시 복구되어야 하며, 파괴행위를 엄격히 금한다."라는 칙령을 받아냈으며 이는 이후 민족주의의 시대에 들어 각 민족들이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어 독립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오스만의 통치하에 그리스와 발칸 반도에서는 제한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제3의 로마'를 자처하였으며, 1589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동의를 받아 루스 차르국에서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설립되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설립된 이후부터 러시아 정교회의 독립성과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러시아 정교회는 투르크의 압제를 받아 자유롭지 못한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해 정교회의 수장으로 군림하려 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서방과 타협한 과거가 있는 콘스탄티노플은 순수성을 잃었고 동로마제국의 멸망 역시 그러한 순수성 상실과 타락 때문에 멸망했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으며 투르크 파디샤의 통제하에 놓인 콘스탄티노플의 어려운 상황을 논하며 자유로운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플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교회는 현재 딥티코스(Diptych, 聖像畵)와 자치 독립교회 문제들을 둘러싸고 교회들 간에 입장 차이가 워낙 커서 ‘하나 되는 길’이 멀고도 험난하다. 같은 정교회로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자치 독립권을 부여하는 합리적인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문제는 합의를 이루어내는 방식과 자치 독립교회를 선언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모스크바 간 기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은 모스크바의 제3의 로마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모스크바 총대교구청이 아메리카 정교회와 중국 정교회, 일본 정교회 등에 부여한 자치 독립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에서 사용하는 딥티코스에서는 이들 교회를 언급하지 않는다. 2018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독립된 자치교회로 인정하자 러시아 정교회의 갈등이 깊어졌다.
정교회와 가톨릭은 서로 간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로 인정하는데, 정교회는 정통성을 더 강조하고 가톨릭은 보편성을 더 강조할 뿐이다. 본디 가톨릭과 정교회는 한 몸이었고, 동서 대분열 이전에는 세계에 단 하나의 교회만이 있었다. 동서 대분열이 없었다면 굳이 스스로를 정통이라고 밝힐 필요가 없으므로 정교회란 말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삼성직(三聖職)의 성직 체계를 갖춘 보편교회와 달리 만인사제설을 주장하여 사도전승의 주교제와 그에 딸린 하위 2성직을 거부하는 개신교는 교회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단,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개신교에 대해 '열교(裂敎)'라는 명칭을 자제하고 '갈라진 형제'라는 표현으로 포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가톨릭에서 부제(Deacon)라고 하는 직위를 정교회에서는 보제라고 한다. '받들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디아코노스(Diakonos)'에서 나온 말이다. 결혼한 이가 사제가 되는 건 가능하나 주교는 결혼하지 않은 이에서만 뽑고, 서품 뒤의 사제는 결혼, 재혼이 불가능하다. 성체성사는 성체(빵)만을 주로 모시는 가톨릭과 달리 양형 영성체(빵+포도주)를 주로 한다. 가톨릭의 양형 영성체는 빵을 포도주에 적셔 입에 넣어주지만, 정교회의 양형 영성체는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 빵을 넣어 수저로 떠먹이는 방식을 취한다. 성찬예배의 예식은 가톨릭의 미사와 비교해도 무척 화려하다. 정교회의 여성 신자는 가톨릭처럼 미사보를 쓰는 대신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수염을 기른다. 서방교회는 세상을 버린다는 의미로 삭발과 면도를 한데 반해 동방교회는 구약성경의 판관기에 나오는 나지르인의 사상 속에서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기른다. 서로마는 라틴 문화의 영향으로 수염을 자르는 것이 풍습이었고, 동로마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수염을 기르는 것이 풍습이었다. 러시아의 경우 몽골-타타르의 침략 이후로는 몽골의 영향을 받아 수염을 기르는 문화가 강했다.
20세기 후반,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동방교회와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의 양대 보편교회인 가톨릭과 정교회의 관계 개선이 크게 진전되었다. 1965년에 교회분열 이후 911년 만에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1세가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이루었으며 1054년의 동서 대분열에 의한 상호 파문을 9백여 년 만에 철회하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후 바오로 6세는 1967년 7월 터키를 방문, 이스탄불에서 아테나고라스와 다시 만났고, 그해 12월에는 아테나고라스가 처음으로 바티칸을 방문했다.
성상 파괴파는 사실 동방 교회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비주류의 분파였으나, 이것이 동로마제국 황제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동로마판 문화대혁명 꼴이 났을 뿐이며, 동서방 교회가 성상 공경과 성상 파괴로 입장이 나뉘어 대립한 것도 이렇게 동방 교회가 성상 파괴파 황제의 영향 아래 있었던 일시적인 기간뿐이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이것이 동서 대분열로 직결된 바도 없다. 단지 서방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잘 써오던 성상을 놓고 갑자기 동방 교회의 일부가 괜한 시비를 건 것이며, 이 때문에 서방 교회가 동방과 사이가 멀어진 원인 중 하나이긴 하다.
이슬람교에서는 성상 공경과 관련하여 우상 숭배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성상을 우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싹텄다. 이후 8세기에 권력을 잡은 소아시아 출신의 레온3세가 성상을 거부하면서 성상 파괴주의가 시작되었고, 그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이에 가세했으나 주류에선 이런 과격한 주장에 거부감이 강했다. 이러한 성상 파괴주의 황제들은 성상 파괴에 저항하는 기존의 총대주교들을 쫓아내고, 성상 파괴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는 결국 한 세기 반에 걸친 내전으로 치달았으며, 대외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 및 동로마 황제와 알력관계에 있던 로마 교황의 세력까지도 논쟁에 합세하였다.
이 논쟁은 서기 787년 레온4세의 부인으로서 아들의 눈알을 뽑고 여황제가 된 이리니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파괴파를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이후 레온5세가 성상 파괴주의를 부흥시켜 제2차 성상파괴가 일어났으나, 서기 843년 섭정 황후 테오도라에 의해 논쟁이 종식되고 성상이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성상 파괴파에 대한 양보로 정교회에서는 되도록이면 성상 중 이콘(Icon, 聖畵)만을 사용하도록 권고하였고, 이날을 '정교주일'이라는 축일로 기념하였다. 이 시기 동안 많은 성유물과 이콘 화가들이 박해를 피해 동로마제국을 떠나 서유럽으로 옮겨왔으며, 이들은 중세 초기 서유럽 종교 미술의 수준을 제고하였다.
589년 톨레도 교회회의에서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수정을 가했다. 기존에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발현한다고 되어 있었으나, 톨레도 교회회의에서는 성자의 위격 또한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래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니'라고 되어 있던 것을 '성령께서는 성부와 또한 성자에게서 발하시니'라고 수정하였다. 라틴어 신경에서 '또한 성자에게서'를 뜻하는 것이 필리오케(filioque, and the Son)라는 단어이기 때문에, 이것을 필리오케 문제라고도 부른다. 레오3세 때는 교의적으로는 찬성하나 신경 수정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이었고, 11세기에는 교의적 차원과 신경 수정에 둘 다 찬성했다. 동방 교회에서는 이 수정을 서방 교회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여겨 크게 분노했다.
현재는 화해 일치의 시도를 보이고 있다. 교회일치적 관점에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같이 외우기도 하는데, 이 경우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니'라는 신경을 기준으로 한다. 왜냐하면 가톨릭이 반대하는 것은 성부에게서만 발한다는 명제이지, 성부에게서 발한다는 명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가톨릭에서 본래의 공의회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학적인 당연한 결론으로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는 신앙고백 역시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은 정교회와 화해하였고, 상호파문을 철회하면서 성사교류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각 교파의 신자들이 서로의 교회에서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위급상황에서만 한정된다. 가톨릭 신자의 경우 주일과 겹쳐 외딴 섬으로 여행 갔는데 그 섬에 가톨릭 성당은 없고 정교회 성당만 있는 경우에만 정교회 영성체가 허락된다. 또한 긴급한 경우에 주위에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가톨릭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정교회 사제가 있을 경우 정교회 사제에게 병자성사를 요청하여 받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런 조건이 아닐 때 정교회 성사를 무단으로 참여하거나 요청하는 것은 가톨릭 교회법상 불법행위다.
정교회와 성공회와의 관계는 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매우 복잡하다. 우선 과거 정교회와 가톨릭 양측 일각에서 성공회를 사도전승 교회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지를 논의하고 검토한 바가 있었는데, 당시 성공회가 여성 사제직을 허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유야무야 됐던 일이 있었다. 양측 모두 사회적 종교적 여성의 지위와는 상관없이 사도전승 교회에는 여성 사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톨릭과 정교회 양측 일각에서는 여성에게도 사제직의 길이 열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교회와 개신교 관계도 멀기만 하다. 가톨릭과 더불어 전례와 7성사 중에서도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한 전례와 신앙적 공동체를 중요시 여기는 정교회는 개신교 신학의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접근법 자체를 좋게 보지 않는다. 또한 사도전승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도전승이 이어지지 않은 개신교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미국에서는 개신교가 정교회로 개종하는 사례가 있었다. 1979년 사도전승의 필요성을 느낀 복음주의 정통교회 신도 2천 명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청 산하의 북미 대교구로 교적을 옮겼다.
한국정교회는 한동안 다른 나라 정교회에 속했었다. 1956년에서 1970년까지는 미국 대교구, 1970년부터 2004년까지는 뉴질랜드 대교구 소속으로 뉴질랜드 정교회를 통해야만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소통할 수 있었다. 그나마 대교구로 지위가 격상이 된 것도 1993년의 일이다. 하지만 교회 규모의 확대를 인정받아 2004년 6월 20일부로 세계 총대주교청 직속의 대교구가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직접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정교회 한국대교구의 초대 대주교로 그리스 출신 소티리오스 대주교가 착좌하였다. 현재 한국 내의 신자 수는 대략 2~3천 명 정도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한국정교회 대교구의 본산인 성 니콜라스 성당은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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