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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 灘 文 學 散 策
( 월 탄 문 학 산 책 )
- 금삼의 피에 대하여 -
박종화 (1901년 10월 29일 -1981년 1월 13일)
박종화 <석굴암 大佛>
천년을 지키신 침묵
만겁도 무양쿠나
태연히 앉으신 자세
배움직함 많사이다
동해바다 물결 드높아
허옇게 부서져 사나우니
미소하시어 누르시다
신라의 큰 공덕이
님 때문이 시니라
아침해 붉게 바다에 소용두리쳐 솟으니
서기, 굴속에 서리고
달빛 휘영청히 떠오르니
향연 님 앞에 조용하다
일대 명공 크나큰 솜씨에
고개 숙여 눈물겨워 지옵네.
空 ___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또한 그러하니라.
본관: 밀양 호: 월탄 <月灘> 諱휘 (鍾和)
한성부(서울) 출생으로 경성휘문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문학 동인지 <문우>를 발간, 문학에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함. 후에 詩 전문지 <장마촌> <오뇌의 청춘> <우유빛 거리> 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24년 처녀시집 <흑방비곡>을 발간한 이후 詩를 쓰면서
小說(소설)로 전향.
1935년 장편 <錦衫의 피>를 매일 신보에 연재하면서 역사 소설을 발표했다.
월탄이 지은 역사 소설은 다수가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로 극화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대략 아래와 같다.
-금삼의 피(1938) 다정불심(1942) 세종대왕(1969)
여인천하(1959) 자고 가는 저 구름아(조선일보연재 1962) 임진왜란(조선일보연재 1962) 월탄삼국지(한국일보연재 1968) 양녕대군(부산일보연재 1966) 대춘부(1939) 등이 있음.
월탄은 어느 누구 보다도 달(月)을 좋아해서 문학에 투신했으며 지난날 한국의 수많은 작가들이 조로하고 단명했던 것과 달리, 문학에만 집념한 작가로서는 월탄 박종화가 기록된다고 말하고 있다.
* 월탄 박종화 : 1981년 1월 13일 80세에 생을 마침.
“나는 역사 소설의 형태를 빌어서 문학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서 나는 현대 인간들과 대화를 하면서 이 땅에 조국을 아름답게 건설 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30 이후에 시와 평론에서 소설을 쓰게 하고 소설 중에서도 신변 잡사의 소설을 떠나서 역사소설을 쓰게 하고,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나의 관(棺) 뚜껑을 덮을 때까지 역사 소설을 쓰겠다는 결심을 갖는 동기가 된다. <월탄 박종화 대표집 선집>
그를 아끼는 다른 분들의 말을 인용해보면,
* 이 땅의 역사 소설은 월탄에 의해 비롯되고 다져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누군가 그를 톨스토이와 비교 했듯, 그는 大河(대하) 소설로서 가장 많은 작품을 썼고, 가장 폭 넓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한 월탄은 17세에 그 보다 한 살 위인 김창남씨와 결혼, 20세에 외아들 돈수씨를 낳았다. (현진건 씨 외동딸과 결혼)
1947년 성균관 대학교 교수. 서울시 예술 위원장
1949년 한국 문학가 협회장. 서울신문 사장. 서울시 문화 위 원장. 1954년 예술원 회원 (이듬해 예술원장)
1957년 성균관 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1964년 문인협회 이사장. 통일원 고문.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문화훈장 대통령장. 국민훈장 받음.
1966년 제1회 5.16 민족상 수상, 그 상금으로 본인의 號 (호)를 딴 “월탄 문학상” 제정
“ 錦衫(금삼) 의 피” 서사
나로 하여금 월탄 문학에 심취하게 만들고 책을 읽을 때에는 침식을 잊게 한 명 문장이다.
<만 백성을 울리고 육충혼의 피를 뿌려 천고의 긴 한을 머금은 채 영월 청랭포에서 외로웁게 이슬과 같이 스러지신
단종대왕의 험악한 풍파도 이제는 한 마당 꿈,
해와 달이 동편 하늘과 서편 산마루로 숨바꼭질 하는 동안에 세월은 흘러서 사십년이다.
한번 가신 왕손은 다시 돌아올 기약이 묘연하건만 염량세태에 흔들리는 사람들의 마음이야 다시 누가 있어
옛 일을 생각이나 하랴.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이란 진국명산 만장봉에 청천이 삭출 금부용이라 하던 높고 높은 왕궁의 진산 북악이 우줄 우줄 옛 모습 그대로요. 노돌 남쪽 조그마한 언덕에 임자 없는 육충신 여섯 개 무덤이 천추에 억울한 한을 호소할 길이 없으매, 밤마다 밤마다 꿈틀거려 흐르는 강물을 향하여 啾啾(추추)한 외마디 곡성을 애처롭게 부르짖어 강변 어부한이의 가슴을 선뜻 선뜻하게 할 뿐이다.>
- 이하 생략-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허암 정희량 - 폐서인 윤씨 사주풀이
청룡 서리운 곳에 황룡이 날아드니
바람비 이는 중에 해와 달이 분명하다.
어이한 노릇이냐 봄 꿈을 채 못깨어
쓸쓸타 새벽달 아래 피 눈물을 왜 뿌리노-
成宗(성종) - 조선 9대 임금 여색을 좋아했음, 이름; 이무
훗날에 娎(혈)로 개명
연산군 - 조선 10대임금 휘는 漋(융) 비는 영의정 신승선의 딸.
장녹수 - 연산군의 후궁 뛰어난 미색은 아니었다고 전함. 가 무를 비롯한 다방면 예술 분야에 천재적 재능을 겸비
윤기묘(尹起畝) - 폐비 윤씨의 친정 아버지. 함안 부원군, 의 정부 영의정. 증직
신씨 - 폐비 윤씨의 친정 어머니. 장흥 부부인
* 피 묻은 한삼 - 훗날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계기 가 된다.
* 鎭國名山 萬丈峰이요 靑天削出 金芙蓉이라 - 판소리 단가에서 찾을 수 있다.
(1932년 콜럼비아 레코드 유성기 음반, 송만갑, 장판개, 박녹주, 박초월, 박동진, 정전진, 박초선, 성우향 등이 녹 음한 <진국명산> 등이 남아있다.
금삼의 피 주요 줄거리
“ 이극균으로 전지를 받들게하고 대방 승지 이세좌로 형방승지를 대신하여 약사발을 들고 가게하라”
“어머니, 어머니, 내가 생죽음을 당하다니 -- 왜 나를 대궐 로 들여 보냈소 -- 부원군 댁 호강이 그리워 나를 대궐로 보냈단 말요.”
“내가 이 약을 먹고 죽거던 너희들은 상감마마께 들어가 내 말을 전해 다오, 나는 전생에 무슨 업원으로 상감마마의 배필이 되었다가 죄 없이 죽거니와 상감마마께서는 내내 동궁 데리고 만수무강 하옵시라고 여쭈어라, 그리고 내가 죽거던 건원릉 옆 길가에 묻어 주시면 죽은 고혼이라도 능행길에 다시한번 상감마마를 우러러 뵈옵기 소원이라고 여쭈어 다오.”
“어머니 나는 이제 가는 사람이오. 동궁이 무사히 자라나거던 부디 부디 이 한삼을 전해 주오. 지원극통한 이 말씀을 전해 주오.” 말씀을 마친 폐비는 눈을 딱 감고 약 그릇을 입에 대어 쭉 들이키셨다.”
<살아서 폐서인으로 중전을 떠났던 윤씨는 죽어서 열 여섯해 만에 흰 비단위에 점점이 물든 붉은 핏방울로 다시 중전에 오르게 되었다>
나갈 때에는 경복궁 중전이요. 두 서너 점 붉은 피가 되어 돌아 온 것은 창덕궁 중전이다.
나갈 때는 남편인 상감 성종에게 쫓겨 나갔고, 들어 올 때는 아들인 상감 연산을 향해 들어왔다.
연산군의 외모 ---- 키가 크고 눈이 충혈되어 있고 피부가 희고 수염이 적고 허리가 가늘다. -이덕형 죽창한화-
* 대신 윤필상은 한식경만에 폐비하시는 傳敎(전교)를 받아 외정으로 가지고 나왔다.
庚子十一年十月 廢王妃尹氏爲庶人 初尹妃誕元子 恃寵驕姿妬忌 諸媛(양가 엄씨 정씨) 於王 一日聖顔有瓜痕 王大妃(덕종비) 大怒 激成天威出示外庭 大臣尹弼商等 將順獻議 廢出私第.
경자 십일년 시월에 왕비 윤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다. 처음에 윤비 원자를 탄생하매 위에서 귀여워하심을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여 모든 후궁(양가 엄씨와 정씨)을 투기하고 왕에게 공손치 못하더니 하루는 거룩하신 얼굴에 손톱자국이 있거늘 왕대비(덕종비) 크게 노하시어 상감의 위엄을 격동하게 만드시고 외정신하에게 보이게 하시니 대신 윤필상의 무리가 순종하여 헌의함을 가져 사사집으로 폐하여 내보내다.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윤씨는 마침내 1479년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날 음력 6월 2일(양력6.21)에 왕비에서 폐위된다.
복위에 동참하지 않은 大臣(대신)은 무자비한 보복을 당한다. 그들은 한명회, 한치형, 윤필상 등이다.
* 결국 윤씨는 1482년 8월 29일(음 8,16)에 賜藥(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당시 윤씨의 나이 28세.
* 성종은 폐비윤씨의 묘를 “윤씨지묘”라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묘의 이름을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命(명)하였다.
후에 연산군이 즉위, 묘는- 회묘, 효사묘로 바뀌었다가 다시 懷陵으로 격상되었다.
서울에 있는 회기동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폐비 윤씨의 무덤이 지금의 경희의료원 자리였다고 전함.
⁜ 참고문헌 : 금삼의 피 외 다수 각종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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