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꽃 피는 계절
내가 근무하는 여학교 교정엔 여러 수목들이 자란다. 본관 앞뜰은 물론 뒤뜰엔 분수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수목이 우거졌다. 전정이 되어 잘 관리되는 조경수들은 어느 재벌이 수려한 풍광에 지은 별장으로 여겨도 좋을만하다. 봄철이면 유실수에서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어나면 공부에 지친 학생들의 정서 순화에도 큰 도움이 될 듯하다. 봄 한철 교정에 핀 꽃들은 내 글의 소재였다.
교정에서 가장 이르게 핀 유실수는 매화였다. 우리 학교 매화는 청매와 백매와 분홍매 세 가지였다. 이월 말부터 삼월 초순까지 보름 정도였다. 매화가 필 무렵 같은 시기 산수유나무에서 노란 꽃이 피어났다. 매실나무는 여러 그루인데 산수유나무는 딱 한 그루였다. 매화와 산수유꽃은 봄의 전령사답게 제 직분에 충실하였다. 다른 수목들에선 봄기운이 퍼질 기미가 전혀 없을 때였다.
매화와 산수유꽃이 저물고 나니 연분홍 꽃이 피어 꽃 대궐을 이루었다. 아름드리 벚나무가 화사한 꽃을 피울 때 교정의 다른 유실수에서도 꽃이 피었다. 여러 그루 살구나무에서 꽃이 피면 벚꽃만큼이나 화사했다. 교정 여기저기엔 살구나무가 많았다. 뒤뜰 구석진 자리엔 좀 야위긴 해도 복숭아나무도 한 그루 있었다. 꽃이 유난히 붉게 피는 홍도화였다. 선홍색 꽃이 예쁘게 피었다.
유실수로는 앞서 언급한 것 말고도 또 있었다. 꽃사과가 두 그루 있는데 연분홍 꽃이 무더기로 피어나면 아주 아름다웠다. 꽃사과 말고도 유실수는 또 있었다. 자두나무가 몇 그루와 보리수나무에서도 하얀 튀밥처럼 자잘한 꽃들이 피었다. 자두꽃이 저물면 정원의 유실수들이 펼치는 꽃의 향연은 잠시 숨고르기에 들었다. 그러다가 석류나무에서 붉디붉은 꽃망울이 조랑조랑 달렸다.
이렇게 펼친 꽃 잔치는 두어 달 뒤 결실이 되었다. 산수유는 가을이 되어야 빨간 열매를 볼 수 있으나 다른 유실수들은 초여름에 과실이 여물었다. 매실과 살구를 비롯해 자두까지 풍성했다. 우리 학생들로 시큼한 맛을 음미하고 교무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심에 위치한 학교 교정에서 아름다운 꽃을 보고 열매까지 맛본다는 것이 쉽지 않을 테다. 계절감은 절로 느낄 수 있다.
우리 학교 본관 앞뜰에는 비자나무도 몇 그루 있었다. 비자나무는 남해나 거제의 따뜻한 지역에 자생하는 난대림이었다. 우리 학교 교정에 관상용 조경수로 심겨져 있었다. 비자나무에서 꽃이 언제 피었는지는 나도 모르는 새 지나갔다. 살구가 익어 떨어질 때 우리 학생들이 비자열매를 주워 맛보고 있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비자나무 꽃의 색깔과 향기는 놓치고 말았다.
앞서 우리 학교 교정에 자라는 유실수들을 소개했다. 지금껏 언급한 유실수에서 하나가 빠진 게 있다. 그것은 대추나무다. 대추나무 역시 뒤뜰 화단과 사택 주변 언덕에 여러 그루였다. 대추나무는 추위에 약해 잎이 가장 늦게 돋아났다. 석류나무도 잎이 늦게 피었지만 대추나무는 더 늦게 돋았다. 잎과 꽃이 가장 늦게 피어도 추석 차례 상에는 대추가 제일 먼저 오른다는 얘기가 있다
교정 유실수들은 거름주기와 자지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결실이 썩 좋지는 않았다. 지난해 본 바로는 대추나무가 높게 자랐으나나 가을에 달리는 대추 열매는 부실했다. 대추나무는 오월에 들어서야 가시가 돋은 가지에서 잎이 피는 낌새를 보여주었다. 봄 가뭄이 심한 속에 장마마저 늦게 찾아온 유월 하순이다. 대추나무에선 이제야 여린 새순에서 좁쌀 같은 꽃이 피기 시작했다.
내가 수업에 드는 교실은 본관 뒤 별관이다. 본관과 별관 사이 2층은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주말을 보낸 유월 마지막 월요일이었다. 별관 3학년 교실 수업에 들려고 구름다리를 지났다. 오락가락하는 장맛비에 대추나무 잎사귀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여린 새순에는 자잘한 꽃들이 달려 있었다. 저 나무에서도 수분이 끝나면 핵과가 자랄 테다. 두어 달 뒤 대추 볼이 붉을 것이다. 17.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