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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일어난다예레미야 31장 10절 ~ 13절
위에 곧일어난다는 문장은 제가 쓰지 않았는데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웠다가 다시 그대로 두려합니다.
O 오 너희 민족들아, 주의 말을 듣고 먼 섬들에서 그것을 선포하여 말하라. 이스라엘을 흩으셨던 이가 그를 모으시고 지키시리니 마치 목자가 양떼에게 하는 것같이 하시리라. 10)
Hear the word of the LORD, O ye nations, and declare it in the isles afar off, and say, He that scattered Israel will gather him, and keep him, as a shepherd doth his flock. 10)
민족들과 먼 섬들에게 주께서 이스라엘의 회복하심을 선포하시고 그것을 전하라 하심은 곧 이스라엘의 회복의 목적이 곧 모든 민족들과 먼 섬들의 회복까지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민족의 회복의 약속이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당신의 회복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위 말씀에 keep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휴거를 주장하며 개역개정의 keep(면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지켜주심은 휴거라는 도피의 방식이 아닙니다. 위 예레미야서 쓰일 당시부터 나타나는 keep(지켜주심)은 그때부터 오늘 하루에 까지 이어져 주께서 오늘도 세상속에서 저와 당신을 지켜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힘듬도 이스라엘이 겪는 지켜주심(keep)의 과정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침공으로 시드키야 왕이 도망치다가 그의 두 아들을 눈앞에서 잃고 그의 두 눈마져 뽑히는 비극을 겪음도 주안에서 지켜주심인 것입니다. 주의 질서가 곧 우리를 보호하심인 입니다. 왕이 도망가지 않았으면 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조는 짐승의 표를 받음으로 고통받는 것과 같음입니다. 바빌론의 왕 느부캇넷살에게 항복하라는 수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한 결과가 시드키야왕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구조가 keep, 지켜주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받으면 우리도 시드키야왕의 고통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에 대한 정답은 항상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고난에서 도피하겠다는 마음은 시드키야왕과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고난을 회피하기 위하여 휴거를 소망하는 것은 순종이 없이 고난의 상황에 놓이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고난이 없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속에서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시드키야왕처럼 고난에서 도피하는 자에게는 보호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일어나는 것은 주의 보호하심(keep)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의 예시입니다. 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계속 유지될 약속이며, 이러한 말씀의 현실로 드러나는 것은 백신패스로도 확인되는 것입니다.
백신이라는 환난은 접종대상에서 우리가 예외적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확신으로 보호(keep)되었기 때문입니다.
백신이라는 환난에서 예외적용을 받은 자들은 가장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도피는 사탄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읽는 자는 깨달으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들에 있는 사람은 자기 옷을 가지러 돌아가지 말라.
그 날들에는 아이를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라!
너희는 피난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태복음 24장 15절 ~ 20절
산으로 도망하는 것, 집안으로 내려가지 않는 것, 출산이나 출산직후의 고난의 모습등을 보면 도피가 아니라 대응이자 결과로 느껴집니다. 휴거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위 마태복음의 말씀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자신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도록 도피함을 받는 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두 여인이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O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떤 시간에 너희 주께서 오실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마태복음 24장 40절 41절 42절
한 사람은 남고 한 사람은 데려감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환란이 마지막때에야 처음으로 시작된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는 상태라면 깨어서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때의 환난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순서와 기간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너희는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에 의해서 배반당할 것이며, 그들은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죽이리라.
누가복음 21장 16절
위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환란의 모습은 사람에 의한 것입니다. 마지막때의 환란은 사람에 의한 것도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구분해서 봐야하는 것입니다.
위 누가복음에 나타난 종교재판은 중세에도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중세에 일어난 종교재판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몇 사람을 사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길거리에 불태워 가로등으로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몇 사람 즉 한 자리수의 사람이 죽인다고 기록된 위의 말씀은 앞으로 일어날 종교재판의 모습입니다. 이는 사형이 판결되지 않는 현대 재판의 관행이 미래에 등장할 종교재판에도 관행으로 적용됨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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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겠다고 유인한뒤 7만명을 학살한 바돌로매 대학살의 삽화입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이 1517년이었으니 로마 카톨릭이 종교개혁에 이를 갈고 반격에 나선 모습인 것입니다.
바돌로매 대학살 20년뒤인 1592년에 천주교는 일본을 동원하여 잔인한 학살을 조선에서도 일으킵니다.
이는 사탄의 품성으로 보이며, 사탄과 엮이는 자들은 잔인한 가해자가되고 또 버려지는 과정이 지금도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때에 대환란이 있으리니, 그와 같은 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었으며, 또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
만일 그 날들이 단축되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택함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날들이 단축될 것이라.
마태복음 24장 21절 22절
앞으로 일어날 환란은 바돌로매 대학살보다도 더 큰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백신 사기극이 더 오래 지속이 되었다면 백신을 거부한 사람들의 숫자는 더 적었을 것입니다. 백신의 기간도 남은 우리를 위하여 단축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었던 대환란은 짐승의 표를 강제하는 사탄의 종들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 환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신과 짐승의 표처럼 사탄의 종들이 주는 환란에는 예외 도피가 없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대 환란에는 그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치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사탄의 종들을 쓰시고, 하나님께서 사탄의 종들을 진멸하실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시험과 심판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때의 환란을 인지하지 못하고 견디어내지만 마지막의 들려올라감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면 육체의 구원이 언급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육체의 구원은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 16절 17절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우리가 먼저 올라가지 못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들려올라가는데 죽은 자들이 먼저 올라가고 나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 주께로 들려올라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그들이 그 위에 앉았는데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더라. 또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한 사람들의 혼들도 보았는데, 그들은 그 짐승에게나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표를 그들의 이마 위에나 손에도 받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므로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을 통치하더라.
요한계시록 20장 4절
위 계시록의 말씀을 보면 목베임 당한 혼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을 통치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살아서의 의미는 부활이라는 그리스도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목격하지 못하였기에 죽음을 ending처럼 여기는데 마지막때는 부활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는 죽어도 살아있는 것과 같아집니다. 그러므로 여러가지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지켜봐야 할 것같습니다.
그런데 형상에 경배함과 짐승의 표가 거부함이 뿐만 아니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말씀보존학회에만 나오는 번역으로 자칫 짐승의 형상과 이미지에 경배함과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 분리될 수 있다는 어감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영어원문은 neither로 연결되는 반복문장일 뿐입니다. 다만 이마와 손은 or로 연결되어 있어서 두 곳중 한 군데만 받게 됨을 우리는 미리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짐승의 표 이후에 첫번째 부활과 천년 간의 통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표가 우리 눈앞에 등장하는 만큼 첫번째 부활과 천년왕국도 우리 눈앞에 실재하게 될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Yea,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thou art with me; thy rod and thy staff comfort me.
개역개정 / KJV 시편 23편 4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으며, 그럼에도불구하고 해(evil) 두려워하지 않음이 곧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입니다. 평안이란 상황이 평안해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평안하기 때문에 상황과 상관없이 평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란때에 주의 지켜주심을 기대하면서, 지금은 지켜주심이 없는 것처럼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환란 전 휴거라는 가설은 고난에서의 요행을 바라는 마음의 열매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환란때까지 믿음과 순종을 미루어 오늘은 타협하고, 내일을 각오하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을 각오하고 내일을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윗을 지켜주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지켜주신 하나님 그리고 지금 당신을 지켜주시는 하나님 또 앞으로 당신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순종에 대한 선택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 하루는 이어져 짐승의 표를 인내로 거부해야 하는 하루에 도달할 것입니다. 주의 지켜주심은 오늘에서부터 짐승의 표를 인내해야할 그 하루까지 이어져 동일하게 존재할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야곱을 구속하셨고 그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그를 속량하셨음이라. 11)
For the LORD hath redeemed Jacob, and ransomed him from the hand of him that was stronger than he. 11)
ransomed 1. saved from the bondage of sin (묶인 죄로부터 구하여짐) 2. reclaimed by payment of a ransom
위 말씀의 야곱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명칭을 번갈아 쓰심은 그들이 누구의 조상이고 어떻게 이어져 왔는 지를 확인시키시는 과정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말씀을 읽는 자에게는 큰 은혜이지만, 말씀을 읽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는 값없지만 받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주께서 야곱의 이름으로 구속하심은 과거에서부터 지금 그리고 앞으로 구속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속량이라는 단어가 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번역은 개역개정을 그대로 쓰고 있는 말씀보존학회의 열매가 참 빈약합니다. 킹제임스 흠정역은 강한 자에게서 구속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앞의 redeemed을 구속이라고 번역한 것으로 중복이 되지만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과 모호성이 없음으로 무난하다고 보여집니다.
"이는 주께서 야곱을 구속하셨고 그보다 강한자의 손에서 그를 구원하셨나이다."
저의 개인적인 의견은 구속이라는 단어가 이미 앞에 쓰였으므로 위의 ransomed의 영어 의미를 참조하면 구출, 구원도 나쁘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노래하며 주의 선하심으로 함께 흘러가리니 밀과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양떼와 어린 소떼를 위한 것이라. 그러면 그들의 혼은 물 댄 정원 같으리니 그들이 더 이상 슬퍼하지 아니하리라. 12)
Therefore they shall come and sing in the height of Zion, and shall flow together to the goodness of the LORD, for wheat, and for wine, and for oil, and for the young for the flock and of the herd: and their soul shall be as a watered garden; and they shall not sorrow any more at all. 12)
말씀보존학회의 킹제임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킹제임스 성경으로 시작한 저와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개역개정 성경을 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watered garden(물 댄 동산)은 고유명사처럼 기억하는 단어이며, 물 댄 동산이라는 가사가 들어간 찬송도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watered garden을 굳이 물 댄 정원으로 번역하는 것은 번역자의 의지, 곧 번역자의 의가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속량이라는 개역개정의 이해가 잘안되는 어려운 단어는 그대로 쓰고 굳이 동산을 정원으로 바꾼 것은 성실하지 못한 번역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물 댄 동산같은 것은 혼(soul)입니다. 주의 선하심의 은혜로 그들의 혼이 주의 말씀을 공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며, 평안인 것입니다. 세상이 전쟁이건, 기근이건, 학살이 일어나도 그러한 상황과 관계없이 평안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사울왕의 추격을 받고 살아가는 다윗의 삶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축복이 곧 우리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고 청년과 노인도 그러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비탄을 기쁨으로 돌이킬 것이며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슬픔으로부터 그들을 즐겁게 할 것임이라. 13)
Then shall the virgin rejoice in the dance, both young men and old together: for I will turn their mourning into joy, and will comfort them, and make them rejoice from their sorrow. 13)
인내함의 끝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모습입니다. 이는 계시록에 환난을 이겨낸 성도들에게 하신 위로와 닮았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굶주리지 아니하고 다시는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며, 태양이나 어떤 열기도 그들 위에 내리쬐지 못할 것이라.
이는 그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을 먹이시고 생수의 샘들로 인도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요한계시록 7절 16절 17절
마지막때의 환란에 인내함의 끝에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동일하게 짐승의 표를 인내로 거부한 사람들도 비탄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백신을 접종 거부한 사람들이 느끼는 안도감도 이런 구조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위 말씀의 생수의 샘은 곧 물 댄 동산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사람의 기쁨은 주의 말씀을 공급받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그를 살아있게 만드신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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