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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 士 學 位 論 文
예술의욕의 관점에서 본 謙齋의 진경산수화 연구
― 고유섭(高裕燮)의 견해를 바탕으로―
指導敎授 金 仁 煥
慶熙大學校 敎育大學院
美術敎育專攻
崔 在 希
2000年 2月 日
예술의욕의 관점에서 본 謙齋의 진경산수화 연구
― 고유섭(高裕燮)의 견해를 바탕으로―
指導敎授 金 仁 煥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2000年 2月 日
慶熙大學校 敎育大學院
美術敎育專攻
崔 在 希
崔在希의 碩士學位 論文을 認准함
主審敎授 ㊞
副審敎授 ㊞
副審敎授 ㊞
2000年 2月 日
慶熙大學校 敎育大學院
목 차
1. 서 론 1
1) 연구목적 및 연구범위 1
2) 연구내용 및 연구방법 3
2. 예술의욕(Kunstwollen)의 일반개념 4
1) 예술의욕의 일반개념 5
2) 동양예술에 있어 표현근원으로서의 입의(立意) 10
3) 예술의욕(Kunstwollen)과 입의(立意) 16
3. 겸재(謙齋) 진경산수화의 예술의욕 18
1) 동양회화 일반의 예술의욕: 자연관 18
2) 겸재(謙齋) 진경산수화의 예술의욕 28
(1) ‘진경(眞景)’의 의미 29
(2) 겸재 진경산수화의 예술의욕 32
3) 예술의욕으로 본 한국회화의 정체성 44
4. 예술의욕으로 본 겸재 진경산수화의 시양식(Sehform) 49
1) 동양회화 일반의 시양식 49
(1) 운동태의 출발로서의 선(線) 49
(2) 확대지향적 공간으로서의 삼원법(三遠法) 54
(3) 또 다른 운동태 양식으로서 담채(淡彩)와 태점(苔點) 58
2) 겸재 진경산수화의 시양식(Sehform) 62
(1) 중묵필세(重墨筆勢)의 표현 64
(2) 축약된 공간 구성 69
3) 겸재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한국회화의 정체성 74
5. 결 론 77
참고문헌 80
참고 도판 목차 85
ABSTRACT 94
1. 서 론
1) 연구목적 및 연구범위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은 조형예술을 중심으로 한국전통예술의 미적 특질을 규명하고자 함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한국미학을 정초한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이자 미학자이다. 그는 서구의 일반 미학과 함께 동양철학에 있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졌었는데, 그 결과 방법론적인 기초에 있어선 서구의 일반미학을, 그리고 본질적인 학문적 연구 바탕에 있어서는 동양철학을 적용함으로써, 나름의 독자적인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전통 동양화[수묵화]와 서양화[유화]의 차이와 구별을 기술해 놓은 고유섭의 〈동양화와 서양화와의 구별〉이라는 글에서도 발견해 낼 수 있다.
그는 전통 동양화와 서양화를 일차적인 재료나 매재적(媒材的) 측면이 아닌 예술의욕(Kunstwollen)과 그에 따른 시양식(視樣式, Sehform)으로 구별하고 있다. 즉 동양화는 생성․변화로서의 운동의 경향태로 보는 자연관에서, 서양화는 존재의 완성태로 보는 인간관에서 각각 예술의욕의 근본을 찾았으며, 예술 표현에 있어서는 전자는 운동태의 근본양식인 선(線)에서, 후자는 존재태의 원리인 면(面)에서 각기 그 출발을 달리한다고 본다. 또한 원근법에 적용해서 동양화에 있어서는 나와 대상을 이동시키는 삼원법(三遠法)을, 서양화에서는 나와 대상이 한 점에서 일치되는 투시법을 대표적인 시양식으로 들었다.
고유섭의 이와 같은 시각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를 극도로 양극화시킨 점도 없지는 않다. 또한 오늘날 많은 예술작품들이 보여 주듯이, 조형예술에 있어 각 영역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에 굳이 동양화와 서양화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까지 보인다. 하지만 고유섭 자신도 언급했듯이, 두 예술의 구별과 비교를 통해 최종적으로 양자의 융합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는 이것은 누구나 면치 못할 필연적 방법이었으며, 무엇보다 예술의욕과 시양식을 통해 동․서양화의 본질적인 특성을 밝히는 그의 접근태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고유섭이 전통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별 짓는 방법은 ꡐ예술의욕(Kunstwollen)ꡑ이라는 예술표현의 근원에서 출발하여 작품에 표현된 시양식(Sehform)을 예술의욕에 적용시킴으로써, 정신적인 면과 형식적인 면을 모두 포괄한다. 서구 일반미학을 방법적 기초로 하고 동양철학에서 사고의 바탕을 구하는 이러한 고유섭의 관점은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친 편향된 시각이 아니라, 충분한 객관성과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본 논문은 동․서양화의 양식 구별을 예술의욕의 관점으로 본 고유섭의 시각을 확대 해석하여 한국 전통회화에 적용시켜 보고자 한다. 특히 본 연구의 범위를 독특한 한국적 화풍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겸재(謙齋)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에 한정하여 그 예술의욕과 시양식(視樣式)을 고찰해 봄으로써, 그 안에 내포된 한국성을 찾고자 한다. 또한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한국회화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적 가능성의 단초를 제시하는데 본 연구의 목적이 있다.
2) 연구내용 및 연구방법
본 논문의 2장에서는 우선 예술의욕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리글(Allois Riegl)과 보링거(Wihelm Worringer)를 중심으로 서구 미술 비평사에 나타난 예술의욕의 일반개념을 살펴보고, 동양예술론에 나타난 표현 근원으로서의 ‘입의(立意)’개념 고찰과 함께 예술의욕과의 상통점을 찾아보았다.
3장에서는 고유섭이 동양화 일반에 있어 예술의욕의 근본으로 지적한 운동의 경향태로서의 자연관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겸재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고유한 예술의욕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술의욕의 관점에서 한국회화의 정체성을 제시할 수 있는 방법적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4장에서는 예술의욕의 관점에서 본 동양회화 일반의 시양식(Sehform)을 고유섭의 관점을 근거로 살펴보고, 그것과 비교해 겸재(謙齋) 진경산수화의 독특한 시양식을 표현기법과 구성 면에서 찾아 그 의미를 고찰하였다.
본 논문의 연구방법에 있어서는 우선 고유섭의 〈동양화와 서양화와의 구별〉이라는 글을 논지(論旨)의 주된 자료로 삼았으며, 논제와 관련된 미학․예술론 일반 관련 개념들과 동양의 전적들은 본 논문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이미 발표된 문헌이나 연구 논문들에 게재된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그 출처를 확인하는 방법을 통하여 고찰하였다.
2. 예술의욕(Kunstwollen)의 일반개념
고유섭을 위시해서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조형예술을 통해 한국의 미(美)를 탐구하고 각각의 양식적 특색을 규명해 오면서, 거기에 투영된 미의식(美意識)이나 예술정신을 파헤치려는 노력은 조금씩 있어 왔다. 즉 한국인의 독자적인 미의식을 통해 전체 혹은 부분적인 예술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미의식은 미적인 것을 수용하고 또 산출할 때 작용하는 의식으로서, 미적 관조와 예술 창작의 측면을 모두 포괄한다. 따라서 미의식 속에 이미 예술의욕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양화와 서양화와의 구별〉에서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이 회화양식에 있어 동․서양의 차별성을 제시한 본질적인 근거는 예술의욕(Kunstwollen)이었다. 그리고 고유섭의 관점에 따라 본 논문에서는 회화양식의 의미해석에 대한 근거로서 예술의욕을 적용하였다. 그것은 양식의 기초개념으로서의 예술의욕이 일반미학에서 이미 체계적으로 개진되어 왔으며, 미의식에 비해 보다 표현에 가까운 능동적이고 작용 동기적 개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의욕을 한국회화에 적용하기 앞서, 본 장에서는 서구 미술비평사에서 제시된 예술의욕의 일반개념을 크게 리글(A. Riegl)과 보링거(W. Worringer)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동양예술론에 나타난 표현 근원으로서의 ‘입의(立意)’개념을 통해 예술의욕과의 상통점과 상이점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예술의욕의 일반개념
ꡐ예술의욕(Kunstwollen)ꡑ은 예술의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ꡐ빈(wien) 학파ꡑ계열의 중심 개념으로서, 예술의 시대양식과 그것의 목적론적 발전의 내적 통일성을 해명하기 위하여 리글(Allois Riegl, 1858-1905)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리글은 각 시대․민족의 상이한 예술양식 유형을 재료와 기법 및 사용목적으로 소급했던 젬퍼(Semper)학파의 기계적, 유물론적 해석에 반대하고 양식원리의 새로운 개념인 ‘예술의욕’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였다. 리글이 언급한 예술의욕은 미적충동(Ästhetische Drang), 성향(Trieb), 경향(Tendenz), 욕구(Bedürfnis)등과 같은 다양한 표현의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예술의욕에 대한 의미 해석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파노프스키(E. Panofsky)가 제시한 신칸트학파적 해석으로, 형이상학적 실재로서의 개념을 부정하고 예술작품의 내용이나 객관적으로 내재하는 의미로 예술의욕을 해석한다. 또 다른 해석은 제들마이어(M. Sedlmayer)가 제시한 헤겔적 해석으로, 예술의욕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용인하고 이를 예술작품의 근원으로 보는 견해로서, 제들마이어는 예술의욕을 가리켜 개인적 의지를 초월해 예술을 변화시키는 ꡐ실제적 힘(reale Kraft)ꡑ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상반된 해석은 리글의 양면적 입장에서 기인한다. 즉 리글은 미술사에 있어서 어떠한 형이상학적 물음도 배제하는 실증주의적 입장을 취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작품의 본질에 관한 기계론적 파악에 맞서 내면의 목적론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야기되는 예술의욕 개념의 이중성은 리글이 예술에 대한 형식주의적이고 실증적인 방식을 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사를 정신사․보편사로서의 학(學)으로서 확립하고 미술사의 자율성을 규정하고자 한데서 생겨난 것으로 설명된다.
리글이 제시한 예술의욕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크게 양식발생의 근원, 세계관의 표현, 민족의지 표현으로 각각 구분 지어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리글은 양식의 발생근원을 사용목적․재료․기술보다는 인간의 순수한 예술의욕으로 설명한다. 그에게 있어 예술의욕은 예술작품의 다양한 양식 특성들을 내면에서 규정하는 중심적인 형성원리가 된다. 이것은 역사를 인간의 내재적인 창조 충동에 의해 생겨난 단일한 발전의 의미에서 파악하고자한 것이며, 이와 같은 역사적 연속성에 따라 리글은 미술사에 있어서 한 천재 화가에 의한 우연을 부정한다. 또한 모든 양식은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필수적으로 변화하며, 양식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예술의욕의 변화라고 보았다. 따라서 양식발생의 근원을 예술의욕에서 찾은 리글의 주장은 양식의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였는데, 즉 이제껏 예술의 미적 흐름을 구분해 주는 단순한 표현 특징으로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인 이념을 나타내는 새로운 개념을 획득하게 된다.
리글은 또한 미적 충동을 ‘인간과 그 환경과의 조화로운 시각에 대한 욕구’라고 규정함으로써, 예술의욕은 필연적으로 그 시대인이 세계를 보는 눈, 말하자면 세계관과 관계한다고 보았다. 리글은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각 시대․민족마다 다른 근본태도가 있다고 보고, 이것을 예술의욕 변화의 기초에 적용하였다. 그 결과 각 작품의 예술형식도 그 시대의 사회적․종교적․학문적 조건들과 관계 지워지는데, 그러한 조건들이 창조 원리로서 추구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예술의욕이며 이것은 동시에 창조적 예술가의 의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리글은 오늘날의 비평관점에서 볼 때 과거 무의미한 예술 작품도 그 역사적인 상황으로부터 이해해야 하며, 무의미한 것, 즉 규범에서 이탈된 것 역시 역사의 일부라고 보았다. 예술의욕이라는 개념 자체가 미술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것이 ꡐ의도되었음(gewollt)ꡑ을 뜻하기 때문에, 미술의 표면적인 퇴보로 보이는 것조차 의도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편 리글은 개별 예술가의 예술적 의도와 보편적인 양식경향과의 관계문제를 제시하면서, 예술가는 결국 ‘그의 민족과 시대 예술의욕의 대행자(Exekutor)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한다. 즉 작품 속에는 그것이 생겨난 사회․역사적 배경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그 민족이 갖고 있는 예술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술가의 개인의지를 초월한 것으로 그 시대인의 문제해결로 나아간다. 결국 리글은 예술에 그 사회, 즉 민족의지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의욕이 투영됨을 규정하고자 한 것이다.
리글의 ‘예술의욕’개념은 미술사적으로 결코 완벽한 개념은 아니었다. 후에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의욕은 미술사 서술에 있어서 분명히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종래의 형식적인 미적 규범에 의거해 단순히 주관적․전기적(傳記的) 기록에 그친 미술사를 최초로 양식의 기초개념으로 기술한 연구방법에 있어서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다. 양식사적 과정의 끊임없는 지속성과 내면적인 일관성을 증명하고 그 발전의 지배적인 법칙들을 이끌기 위해 제시된 예술의욕은 결국 예술의 구체적인 변화발전 속에서 예술의 보편적인 원리를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예술의욕을 통해 양식의 발전 동인(動因)과 내재적 의미를 탐구한 방법은 그 후 서구의 미술발전을 그 근본적인 특징, 다시 말해 보편적인 양식법칙과 그 형성원리에서 포착하려는 보편사로서의 미술사를 발전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인간이 그의 정신과 세계를 조화시키려는 세계관의 표현이자 민족의지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의욕’ 개념은 결국 형식적 형상 내에서 심리적인 근본 태도를 보려는 것이다. 즉 작품의 본질을 외적인 형식에서가 아닌 예술의욕을 통해 형상으로 나타난 그 시대의 정신적인 상황과 관계시켜 파악하고자 함으로써, 정신사로서의 미술사(Kunstgeschichte als Geistesgeschichte)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예술의욕이 그 기초를 이루었다.
리글에 뒤이어 보링거(W. Worringer, 1881-1965)는 리글의 ‘예술의욕’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예술의욕을 각기 다른 인간유형에 상응하는 세계관과 결부시켜 그 심리학적 근거를 추구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세계관을 달리하는 특정한 민족성이나 인간성의 유형들을 설정하고 각각 그것들에 고유한 예술의욕을 귀속시켰다.
보링거는 세계관의 유형에 따라 예술의욕의 내용을 두 가지 충동(Drang), 즉 감정이입충동(Einfühlungsdrang)과 추상충동(Abstraktionsdrang)으로 대별했다. 그는 예술의욕을 ‘창작의 대상과 수단과는 완전히 독립해 스스로 존재하고, 형식에의 의지로서 일어나는 잠재적인 내적 요구’라고 해석하고, 모든 예술창조의 일차적 계기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모든 예술작품은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서 이러한 생득적이고 절대적이며 또한 필연적인 예술의욕의 객관화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감정이입충동은 인간과 외부세계와의 현상사이의 행복스러운 범신론적 친화관계를 조건으로 하는데 반하여, 추상충동은 바깥 현상에 의해서 일어나는 인간의 내적 불안에서 생기는 결과라고 말한다. 감정입충동에서 나온 예술의욕의 산품(産品)이 곧 자연주의 내지 사실주의 미술이며, 그에 대립하여 추상충동에서 나온 예술의욕의 산품이 추상미술이라는 것이다. 즉 보링거는 예술의욕을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인간의 상이한 표현입장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보다 심리학적 색조를 가한 인간 내적 체험의 측면에서 예술의욕의 내용을 규명하였다.
이와 같이 예술의욕을 통해 양식의 보편적 법칙성을 구하여 그 의미해석을 내리고자 한 노력은 비로소 미술사를 정신사로서 발전시키게 되며, 또 미술사의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문화영역들의 발전과의 병행 속에 정리시킬 수 있었다. 고유섭이 동․서양화의 각각 다른 양식적 차이를 ꡐ예술의욕ꡑ이라는 의미해석의 잣대로서 본 것도 그러한 정신사로서의 보편적 양식사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동양예술에 있어 표현근원으로서의 입의(立意)
고유섭이 〈동양화와 서양화와의 구별〉에서 동양의 전통회화[수묵화]와 서양의 전통회화[유화]를 구별하고, 각각의 양식을 비교․고찰한 근거는 예술의욕이었다. 예술의욕은 서구 미술비평사에서 언급된 개념으로, 리글이 예술작품에 있어서 양식의 원리이며 창조의 근원으로서 제시함에 따라 이전의 형식적․유물론적 서구미술사를 보편사․정신사로서의 미술사로 전환시키는데 공헌한 사실은 앞서 주지한 바이다.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겸재의 진경산수화는 당연히 서양이 아닌 동양예술론을 그 뿌리로 한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예술의욕을 적용하기 앞서 동양예술론 일반에서의 ‘입의(立意)’개념이 예술 표현의 근원이라는 의미에서 예술의욕과 상통하다고 보고, 입의를 통해 표현양식의 보다 근원적인 내재적 동인(動因)에 근접코자 한다.
동양의 예술은 처음부터 그 바탕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나타내려고 하는’데서 출발한다. 즉 사물의 외형적인 형사(形似)에 집착하기보다는 유가, 도가, 선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관념적 사고를 통해 미적 판단을 하는 정신적 분위기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동양의 예술론에서도 일찍부터 표현의 근원에 관한 문제에 깊이 사유했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장언원(張彦遠, 815-875)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사물을 그리는 것은 반드시 형사(形似)에 있고, 형사는 모름지기 그 골기(骨氣)를 완전히 해야 하는데, 골기와 형사는 모두 입의(立意)에 근본을 두고 용필(用筆)로 돌아간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필연적으로 형상의 묘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그에 앞서 골기를 터득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입의가 이루어진 용필로 나타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선입의(先立意)․후용필(後用筆) 또는 선골기(先骨氣)․후형사(後形似)의 순서로 귀결되는 회화의 제작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동양예술론에서 언급된 골기와 형사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정신과 물질, 내용과 형식의 관계로서 예술전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장언원은 이러한 골기형사(骨氣形似)가 바로 입의에 있고, 그 표현수단인 용필로 관철된 그림이라야만 진정한 가치를 이룬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입의는 곧 예술표현에 있어서 가장 근원이자 본질적 요소가 된다.
‘의(意)’에 대한 사유는 왕필(王弼, 226-249)의 ‘득의망상(得意忘象)’에서 그 토대를 이룬다.
무릇 상(象)이란 것은 의(意)에서 나온 것이고, 언(言)이란 것은 상(象)을 밝히는 것이다. 의(意)를 극진히 함에는 상(象)만한 것이 없고, 상(象)을 극진히 함에는 언(言)만한 것이 없다. 언(言)은 상(象)에서 오는 것이므로, 언(言)을 자세히 탐구하게 되면 상(象)을 알 수 있게 된다. 의(意)는 상(象)으로 극진하게 하고, 상(象)은 언(言)으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언(言)이란 상(象)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상(象)을 얻게 되면 언(言)은 잊어야 한다. 상(象)이란 의(意)를 담아 놓는 수단이므로 의(意)를 얻게 되면 상(象)은 잊어야 한다. … 그러므로 언(言)에 집착하면 상(象)을 알 수 없고, 상(象)에 집착하면 의(意)를 알 수 없게 된다.
왕필은 언(言)․상(象)․의(意) 삼자관계를 규정하고 언→상→의로 연결되는 목적과 과정을 분류하고 그것을 체계화함으로써, 주역과 노장학이 내포하는 심오한 심미경(審美境)을 구체화한다. 즉 이를 통해 언과 상, 다시 말해서 언어와 형상은 어디까지나 정신세계의 궁극적인 득의(得意)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구체적인 예술론은 아니지만 여기서 중심이 되는 ‘상생어의(象生於意, 상은 의에서 생긴다)’를 회화적 사고로 확대 해석해 보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대상의 형상만을 나타내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사상을 내재시키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왕필에 의해 제기된 득의망상은 그 후 회화론 전반에 걸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사혁(謝赫, 500-535년경 활동)은 《고화품록(古畵品錄)》에서 장묵(張墨)과 순욱(荀勖)의 화품을 평하는 가운데,
만일 물체에 구속되면 그 정수를 보지 못하지만, 형상 밖에서 높은 뜻을 취하게 되면 그 미묘함이라 하겠다.
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혁은 구체적으로 ‘의(意)’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ꡐ만일 물체에 구속되면 정수를 보지 못한다(若拘以體物則未見精粹)ꡑ는 것은 왕필의 ‘존상자비득의야(存象者, 非得意也)’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이것은 궁극적으로 ‘뜻이 붓보다 먼저 있어야 한다’는 의재필선(意在筆先)․의존필선(意存筆先)을 뜻한다.
그렇다면 ‘법도가 있는 그림은 의(意)를 그린다(古畵畵意)’와 같이 고도의 정신세계를 전제로 하는 이 ‘의(意)’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는 일반적으로 행위관념으로서 하려고 하는 계획(intention), 생각과 뜻(mind), 마음의 능동적 취향, 사물 중심의 뜻, 특수 의지 활동과 같은 정신활동의 의미로 쓰인다. 즉 의는 대상이 그처럼 생기고 자라며 변화해 가는 자연 현상의 진행 방향을 개개인의 시각에서 보는 관조 형식에 따라 의미 지우는 것을 뜻한다. 사물이 사리의 정당한 이치에 따라 변천해 가는 취향을 ‘이취(理趣)’라 하는데, 사물의 그러한 자연적 취향성을 자연 입장에서 말할 때는 ‘천취(天趣)’라 하고, 관조자의 감정 중심으로 말할 때는 ‘의취(意趣)’라 한다. 따라서 의는 대상의 자생원리를 관조자의 시각에 따라 포착하고 인식한 주체 정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의(意)는 하나의 심리작용이기 때문에 항상 같은 모습일 수 없으며, 대상에 따라 관조자에 따라 혹은 내․외적 상황요소에 따라 각각 달라질 것이다.
그림에서의 의는 ‘모든 내용을 통일시키는 장수와 같다(意猶帥也)’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품의 주제이자, 작가의 심의나 의향이며, 곧 화면 전체의 의미를 뜻한다. 그러나 작품주제로서의 의는 서구 미술사조 중 표현주의에서 볼 수 있는 단순히 주관적인 내적 감정 표출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천하의 어떠한 사물도 예(禮)와 악(樂)이 없는 것이 없다’고 말한 그 ‘예’와 ‘악’에 의한 현상을 전제로 한다. ‘예는 다만 하나의 질서이며, 악은 하나의 조화’라 하였으니, 대상에 내재된 질서〔禮〕와 조화〔樂〕, 이것이 관조자의 시각을 통해 드러난 것이 주제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예와 악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 범주 내에서의 주관적 관념에 따른 관조자의 시각이 바로 그림에서의 주제이며, 의(意)인 것이다.
‘골기와 형사는 모두 입의에 근본을 둔다(骨氣形似, 皆本於立意)’는 장언원의 선입의(先立意)사상은 고개지의 용필(用筆)을 논하는 가운데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뜻이 필에 앞서 있으며, 그림이 다해도 그 뜻은 남아 있다. 그러므로 신기가 온전하다.
붓을 들기 앞서서 먼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섭리인 예〔질서〕와 악〔조화〕를 깨우치고 난 후 그림을 그리게 되면, 그림 속의 형상이 다하여도 작가가 그 형상 속에 함축하고자 했던 본래의 정신은 여전히 내재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입의에 기초한 형상이 용필의 결과, 즉 필선에 의해 가시화 되는 것은 곧 무형의 정신작용이 물화(物化)됨을 의미한다.
고개지(顧愷之, 345-406)는 ‘천상묘득(遷想妙得, 생각을 옮겨서 묘를 얻는다)’을 통해 예술 표현에 있어 대상의 정신을 얻는 과정을 제시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묘사할 대상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대상에 담긴 내재정신, 즉 사상과 감정을 깊이 이해하고 체득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각을 옮기는 것〔遷想〕’이며, 화가가 대상의 정신적인 특징을 점차 이해하고 파악하는 가운데 이를 분석하고 정련(精煉)하는 과정을 거쳐 예술적인 구상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묘를 얻는 것〔妙得〕’이다. 천상묘득의 과정은 곧 사유활동을 형상화하는 과정으로 화가와 묘사대상 사이, 즉 주관과 객관의 관계를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천상묘득의 결과가 곧 입의이며, 입의에 이르는 방법적 수단이 천상묘득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천상묘득을 통해 세워진 의(意)는 구체적인 형상을 이루는데 기초가 되고 표현의 근원이 되므로, 결국 입의는 그림의 가치를 좌우하는 바탕이 된다.
3) 예술의욕(Kunstwollen)과 입의(立意)
이상으로 서구 예술 비평사에 나타난 예술의욕(Kunstwollen)개념과 동양 예술론에서의 입의(立意)개념을 각각 고찰해 보았다. 표현의 일차적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또한 궁극적으로 예술작품은 그것의 형상화라는 의미에서 입의는 양식 발생근원으로서의 ‘예술의욕’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시적인 형상을 이루는 그 내재적 동인(動因)을 비가시적인 인간 내면에서 구하고 있음도 또한 공통된다 하겠다.
고유섭은 〈동양화와 서양화와의 구별〉에서 동․서양화의 양식 구별을 위한 근거를 예술의욕에서 찾았으며, 필자 역시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겸재(謙齋)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의 양식적 특색도 일차적으로 예술의욕의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동양예술론에 그 바탕을 두기에, 예술의욕보다는 오히려 입의로서 양식고찰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고유섭의 접근 방법을 따른다는 본래의 의도도 있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예술의욕과 입의는 그 인식범주에 있어서 개념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개념 모두 외적 표현의 형이상학적 전제로서 갖는 의미는 일치하지만, 리글은 예술의욕을 양식 개념의 기초에 적용시켜 보다 역사적․민족적인 범주로 인식한 반면, 입의개념은 초점을 화가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에 맞춘 다분히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이라 하겠다. 또한 예술의욕은 항상 양식이라는 실증적 사실문제와 관계 맺지만 입의는 상외(象外), 즉 표현 이전의 고차원적인 정신세계에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예술의욕은 실증적이고 실재적인 개념인데 반해, 입의는 보다 사변적(思辨的)이고 형이상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겸재 진경산수화의 양식적 특색을 고찰함에 있어서, 각각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 그 심오한 정신적 바탕과 구체적 형상과의 규명은 ‘입의’로서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겸재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예술정신과 그에 따른 표현 양식을 전체적으로 조명하여 궁극적으로 한국회화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보다 시대적인 범주로 실증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양식의 특수성을 구하여 그 의미해석을 내리는데 있어서 근거를 예술의욕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3. 겸재(謙齋) 진경산수화의 예술의욕
고유섭은 〈동양화와 서양화와의 구별〉에서 서양회화와 구별되는 동양회화의 본질적 특성을 규명함에 있어서 예술표현의 근원인 예술의욕에서부터 출발하며, 그 근본을 동양인의 자연관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예술의욕의 일반개념에서 살펴보았듯이, 리글이 예술의욕을 세계관의 표현과 관련해서 ‘인간과 그 환경과의 조화로운 시각에 대한 욕구’라고 규정한 것과 상통한다. 인간의 욕구는 대부분 인간과 세계와의 일정한 질서형성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조형예술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즉 조형예술의 과제 또한 외부 현상의 감성적 표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결정짓는데 귀착한다. 따라서 예술의욕은 넓은 의미에서 세계관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본 장에서는 우선 고유섭이 동양회화 일반의 예술의욕으로 지적한 운동의 경향태로서의 자연관을 살펴보고, 그것이 겸재의 진경산수화에서 어떻게 지양(止揚)되고 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겸재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독자적인 예술의욕에 대해 논의해 봄으로써, 궁극적으로 예술의욕을 통해 본 한국회화의 특수성과 정체성에 대한 방법적 가능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동양회화 일반의 예술의욕: 자연관
‘아름다움’이 갖는 원초적인 의미는 인간역사의 끊임없는 진화과정을 통해 섬세화․복잡화를 거쳐 질적 상승되어 온 현상들 안에 들어 있는 근본이며, 동시에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삶, 생명, 살아있음이 모든 예술의 핵심이며, 삶과 더불어 있었고 삶의 현장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미(美)는 쉼이 없는 작용의 원리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아름다움이 갖는 근원적인 의미를 여기서는 접어두고라도, 고유섭은 동양에 있어서 모든 사상의 근간을 자연이라는 카테고리로 묶고 있으며, 또한 예술에 있어도 미적 가치판단의 준거이자 관조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예술 표현의 작용원리로서 이해하고자 했다.
동양미술 즉 중국예술은 일반이 다 아는 바와 같이 황하와 양자강 중간의 비옥한 천지와 온화한 자연의 혜택 속에서 자라난 문명의 소산이요, … 그러므로 … 자연의 은총을 찬미하고 그와 일체 되기를 욕구하나니 무위이화(無爲而化)하려는 선가(仙家)의 사상이나 희로애락의 미발(未發) 상태 즉 <중(中)>과 일치되려는 유가의 사상이나 양자가 요컨대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데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연을 볼 때 항상 존재된 형태로서 보려 하지 않고 운동의 경향태(傾向態)로서 본다. <天行健 君子是以 自彊不息〉이라 함이 그들의 자연관인 동시에 동양화의 예술 의욕의 근본이다.
고유섭은 동양미술의 대표격으로 중국미술을 중심에 놓는데, 이것은 20세기 이전의 일반 서양미술사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구한 역사와 함께 이어온 그 사상적 고찰을 위한 필연적인 출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결론적으로 자연을 존재태가 아닌 운동의 경향태로서 보려는 자연관이 동양회화 예술의욕의 근본이라 지적한다. 전통적으로 동양인들은 자연을 영원한 존재가치로서 숭배하고 이에 조화․합일하고자 하는 의식이 강하였다. 서양에서는 이상적인 삶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연을 모방하고 자연의 이상적인 완전성을 기하고자 한 것에 반해, 동양에서는 자연 사물이 그처럼 생기고 자라며 변화하는 현상의 그 근본 이치에 단지 순응하고자 했다. 즉 자연은 생명을 지닌 인간과 같이 살아 생동하는 존재였으며, 자연과 더불어 생(生)을 영위하고, 자연의 섭리를 관조하면서 이에 따르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노자(老子)가 “감히 자연보다 먼저 하지 않겠다(不敢爲天下先)”고 말한 부분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지칭하는 ꡐ자연ꡑ은 서양인에게는 정복해야할 개척의 대상이었지만, 동양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닌 감사의 대상이고 경외의 대상이었으며, 아름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따라서 일찍이 동양에서는 서양의 풍경화와는 사뭇 다른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정신적 매개체 내지 통로’로서의 산수화라는 회화양식이 발달하였다.
장언원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장조(張璪)〉조에
사람들이 장조에게 가르침 받은 바를 물으니, 장조가 대답하기를 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스승삼고 안으로는 심원의 가름침을 터득했다.
고 하였다. 장조(張璪, 8세기중-8세기말경 활동)는 왕유(王維)와 함께 수묵산수화를 창시한 대표적 인물로서, 그가 남긴 ‘외사조화(外師造化)’와 ‘중득심원(中得心源)’은 위대한 예술가의 근저를 밝힌 것이다. 이는 창작과정 중에 반영되는 객관적 사물과 주관적 사상감정과의 연계작용을 개괄하고 있다. 장조 자신이 산수화를 즐겨 그렸으므로, 객관적 표현대상으로서의 외(外)는 바로 자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연 속에서 발견한 그 기묘한 생명조화의 원리를 통해 예술가 자신의 내부에서 요구하는 바에 힘입어 보다 승화된 정신경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자연에 대한 심취는 일종의 수양적인 일면을 갖는다.
고유섭은 동양의 자연관을 ‘하늘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건강하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쉼없이 노력한다(天行健 君子是以 自彊不息)’로 함축하면서, 그것이 동양 예술의욕의 근본이라 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자연을 대함에 “스스로 저절로 되는 바가 있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그렇게 되는 바가 있는 것을 자연이라 한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을 존재하는 실재로서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작용하는 운동의 원리로 지각한다.
청(淸)대의 심종건(沈宗騫, 1750-1830년경 활동)은 《개주학화편(芥舟學畫編)》에서
천하의 모든 사물은 기(氣)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인데, 즉 산등성이가 쌓이고 쌓여서 산봉우리를 이루는 것에서부터 한 그루의 나무나 한 덩이의 돌까지 그 어느 것도 이러한 기(氣)에 의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번잡하지만 문란하지 않고, 적지만 말라죽지 않으며, 다양한 것들을 통합하면 서로 상관성을 가지고 있으나, 분리시키면 각각 그 나름대로의 모양을 지닌다.
고 했다. 자연만물이 어떻게 하여 생기고 자라며 변화하는지 그 생성원리를 심종건은 기(氣)로써 이해하고 있다. 기가 있다는 것은 곧 생명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며, 한 곳에 머무르는 법이 없고 끝없이 그 존재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유기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은 말이 없으나 사계절은 변함없이 철따라 바뀌고, 그것의 결과물로서 만물은 낳고 낳는다.(生生) 봄에는 싹을 틔우고(生), 여름에는 자라나게 하고(長), 가을에는 열매를 수확하여 씨앗을 확보하고(收), 겨울에는 봄의 생을 위하여 씨앗을 땅 속에 묻는다(藏)는 자연의 도리는 그침이 없고(生生不息), 어김이 없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도가와 유가에서는 모든 만물의 생의 근원인 도(道)로서 이해한다.
대만대학의 팡동메이(方東美)교수는 《주역(周易)》에 나타난 도의 포괄적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상리(常理)로서의 도(道)를 세상 어디에나 스며있는 생명의 흐름으로 보라. 이 생명은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리가 아는 지식의 영역을 넘어선 일종의 신비에 속하는 문제이다. 생명과 그 자체는 무한하다. 그래서 무한자로부터 무한한 생명이 오고 또 무한자에게 유한한 생명이 연속되어 뻗어 있다. 만물은 커다란 변화의 흐름 속에서 변천하는데, 그 과정은 다함이 없는 우주의 기원을 받아서 생생불식 운전불의(生生不息 運轉不義 :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자라나고, 움직여 돌아감으로써 의리에 어긋남이 없음)한 것이다.
이 끊임없는 창조적 진보의 과정이 바로 도(道)이다. 도(道)는 따지고 보면 선(善)의 본질인데, 모든 원초적 자연과 생명이란 모두 여기에서 유출되어 나온다. … 곧 만물 중에 조물주의 창조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뜻에서 도(道)는 만물내재적(萬物內在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초적 자연과 완성된 자연 사이는 분명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곧, 도(道)는 창조(創造)의 연쇄라는 우주적 질서를 말한다
자연만물이 도(道)에서 생성되고 그 끊임없는 변화과정 또한 도라고 할 수 있으니, 도는 곧 모든 만물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원초적 자연〔원천적 규범으로서의 능산적 자연〕과 완성된 자연〔규범의 산물로서의 소산적 자연〕과는 이 도로서 연결되어 있어 하나의 우주적 질서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도(道)’를 우주의 근원원리로서 내세우면서 천지만물이 모두 도에서 생기며, 그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였다. 또한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안으며, 충기(沖氣)로서 화한다.
고 하였다. 요컨대 도는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어머니, 천하의 어머니인 것이다. 유가의 경우 《주역》〈계사전(繫辭傳)〉의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一陰一陽之謂道)’고 했으니, 노자의 ‘일생이(一生二)’에서 이(二)는 일(一)인 기(氣)로부터 분리된 음기(陰氣)과 양기(陽氣)이므로, 그 뜻하는 바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은 모든 생성변화의 소유법칙으로서의 최고 개념인 도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중용(中庸)》에서는 천도(天道)가 쉬지 않고 끊임없이 낳고 낳는 작용력을 진실무망(眞實無忘)한 성(誠)과 관련 짓는다. 성은 우주본체이며 천지만물을 생산하는 소이연(所以然)으로서, 우주 자체의 유구불이(悠久不已)한 살아있음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노자》․《주역》․《중용》에 나타난 우주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 혹은 ‘성’은 그 자체로 무한한 초감성적인 생명체인 것이다.
자연을 천(天)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도의 끊임없는 창조과정 속에 있으며, 언제나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대미(大美)를 가진다. 그러므로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천지의 도를 본받아 궁극적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추구하고자 했다. 즉 자연과 더불어 생(生)을 영위하고, 그 속에 담긴 자연의 섭리를 관조하면서 이에 순응하고 동화되고자 하였다.
이러한 도를 바탕으로 유기적 생명의 원리에 입각한 동양의 자연관은 예술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위대한 예술가는 존재와 생성의 법칙으로서의 도, 천지자연의 생의(生意), 천지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화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연이 품고 있는 모든 유기적 생명체와의 합치를 통해 진정한 자아의 조화로운 내적 통합을 도모했다. 따라서 천지만물을 생성하고 운동․변화케 하는 총원리로서의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의 총체로서의 자연을 표현하는 동양의 예술이 본질적으로 생명력과 운동성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고유섭이 지적했듯이 ‘자연을 볼 때 항상 존재된 형태로서 보려 하지 않고 운동의 경향태로서 보려는’ 이것이 바로 동양의 자연관이며, 예술의욕의 근본인 것이다.
사실 예술에서 표현되어지는 자연에 대한 애착은 비단 동양에서만 보여지는 특색은 아니다. 예술과 자연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예술을 자연과 인간의 영역을 포괄하는 매개항 내지 중간자로 보는 관점은 동서가 공통된다. 단지 자연을 대하는 관조태도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양에서 인식되어온 자연은 항상 인간의 경험 틀 안에 있었다. 다시 말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그 중심은 언제나 인간이었으며, 그러한 주인의식속에서 자연을 향유하고 자연에 심취한 것이다. 그에 반해 동양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둘이 아닌 하나로 본다. 인간의 마음으로 자연에 대한 해석을 내리지 않고, 오직 자연 그 자체의 범주 안에서 이해를 구했다. 앞서 장조가 언급한 ‘밖으로는 자연의 조화를 스승삼고 안으로는 심원의 가르침을 터득했다’처럼 인간의 뜻에 따라 자연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 속에 동화되어 승화된 정신경계, 즉 참다운 진리를 얻고자 한 것이다. 자연은 완전한 자족(自足)의 상태이며, 인간의 마음도 하나의 자연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양에서는 자연관을 비롯해 모든 사고의 중심을 인간에게 두었고, 동양에서는 만물을 생성하고 운동․변화케 하는 총원리로서의 자연이 그 중심이 되었다. 고유섭은 예술에 있어서 이러한 동서양의 상이점이 예술의욕과 시양식(視樣式)의 차이를 낳는다고 보았다.
고유섭은 인간과 인간과의 교섭, 자연에 대한 항쟁에서 출발한 서양문명에 있어 인간 중심의 사고는 물(物) 그 자체의 본질을 찾고자 함을 전제한다.물은 그 스스로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으므로, 완성태(完成態)이며 존재태(存在態)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양에서의 예술의욕은 존재의 완성태로서의 인간관을 근본으로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운동의 경향태로 보는 자연관을 예술의욕으로 하는 동양화와 존재의 완성태로서의 인간관을 예술의욕으로 하는 서양화와는 그 내면의 출발부터가 다르며, 표현적인 양식상의 차이도 여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한편 동양에 있어서 운동의 경향태로서의 자연관이 어떠한 과정에 의해 예술의욕으로 발양되는지는 곽희(郭熙, 11세기초-11세기말)의 《임천고치(林泉高致)》〈산수훈(山水訓)〉에서 그 이해가 가능하다.
숭산은 아름다운 시내가 많고 화산은 아름다운 봉우리가 많다.… 기이하게 우뚝 솟고 영묘하게 빼어났으니 그 절묘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 조화를 터득하고자 한다면 산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극진한 것이 없으며 부지런히 실컷 유력하고, 실컷 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렇게 되면 산수의 모양이 마음속에 또렷하게 늘어서서 눈앞에 흰 명주가 보이지 않고 손은 필묵이 잡혀 있는지 알지 못하니, 산수의 뚜렷하면서도 넓고 아득하게 아롱아롱한 광경이 눈과 마음속에 거침없이 떠올라서 내 그림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
곽희는 ‘호(好)’와 ‘근(勤)’을 통해 자연의 조화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호’와 ‘근’은 세속의 여러 가지 희구로부터 해탈․초월하여 정신을 산수 위에 집중시킴으로써 얻어진다. 이를 통해 산수자연의 기묘함과 영묘함을 통찰해 내어 궁극적으로 그 예술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호’와 ‘근’은 자연에 대한 미적 관조가 성립될 수 있는 정신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즉 ‘호’와 ‘근’을 통해 미적 관조를 하는 가운데, 주관적 예술 정신을 통하여 객관적 예술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발견된 객관적 예술성을 통하여 주관적 예술정신을 구현시키고 발양시킴으로써, 저절로 주관과 객관의 융합, 즉 주객합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산수의 모양이 마음속에 또렷하게 늘어설’뿐만 아니라, ‘산수의 뚜렷하면서도 넓고 아득한 광경이 눈과 마음속에 저절로 떠올라서 그림으로 그려지게 되는 경지’ 이것이 바로 화가와 산수자연이 하나가 된 상태이다. 이때 화가의 마음속에 산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 화가의 표현적 충동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술의욕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겸재(謙齋) 진경산수화의 예술의욕
고유섭이 전통 동양화에 나타난 예술의욕의 근본으로 지적했던 운동의 경향태로서의 자연관은 중국은 물론 같은 문화권에 속한 한국과 일본회화에도 공통적으로 담겨있다. 또한 그에 따른 시양식(Sehform)으로 지적한 선(線)의 표현이나 삼원법(三遠法) 역시 기본적으로 함께 한다. 이것은 서양회화와 대별되는 동양회화 일반의 성격과 양식 고찰에 따른 당연한 공통점이며,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동양회화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에 한국회화, 일본회화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각각의 고유한 민족성과 독자성을 무시한 사대주의(事大主義)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고유섭의 논지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진일보해 동양회화의 예술의욕과 접속된 우리 한국회화에 나타난 고유한 예술의욕과 그 양식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간단 명료하게 규명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특히 미술의 제(諸) 분야 중 ‘회화는 평면미술이기 때문에 입체성을 띤 조각이나 공예에 비해 어떤 시대적인 또는 민족적인 특색의 표현이나 포착의 강도가 덜 느껴질지도 모른다.’ 사실 고유섭을 비롯해서 한국미술에 나타난 고유한 한국적 미의식을 탐구한 학자들 대부분이 불상이나 석탑, 도자공예 분야에 집중되어 왔다. 반면 한국회화에 관해서는 단순히 작가와 작품의 시대별적 열거에 그치거나 중국화풍의 영향관계를 따질 뿐, 그 기저(基底)에 깔린 미의식, 구체적으로 예술의욕과 그것이 작품상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에 관해서는 심도 있게 연구가 되지 못 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본 논문은 한국 전통회화의 각 분야를 막론한 통시대적인 접근을 시도했으나, 배움의 깊이가 얕은 관계로 부득이 그 범위를 한국적 화풍의 구현체라고 평가받는 겸재(謙齋)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로 한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앞서 고유섭에 의해 논의된 동양예술의욕의 근본인 운동의 경향태로서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겸재 진경산수화가 갖는 독자적인 예술의욕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진경’의 의미를 개진해 보고, 이것을 진경산수화로 구체화시킨 조선 후기의 예술정신을 바탕으로 겸재 진경산수화의 독자적인 예술의욕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한국회화 일반의 정체성을 위한 하나의 방법적 가능성의 단초를 찾고자 한다.
(1) ‘진경(眞景)’의 의미
겸재(謙齋)가 산수표현의 대상을 우리 땅에서 찾고, 그것을 독자적인 양식으로 창출한 화풍을 우리는 흔히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라고 칭한다. 앞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서양의 풍경화가 인간 소유물 중의 하나로서 자연을 향유하고자 한 것에서 비롯된 반면, 동양의 산수화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정신적 매개체 내지 통로’로서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보다 승화된 정신세계, 즉 진리를 터득하고자 한 일종의 수양 도구였다. 이러한 산수화에 특별히 덧붙여진 ‘진경’이 갖는 의미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진(眞)’에 대한 그 사전적인 정의를 찾아보면, 첫 번째, 실(實) 또는 불허가(不虛假), 순(淳)과 정(精)이 있고, 두 번째로 정성지지(精誠之至), 불변(不變)과 상주(常住), 자연, 자연의 도(道)와 묘리(妙理), 천성(天性), 본질, 물(物)의 자(資)와 초상(肖像), 천(天)과 도가(道家)의 이상적인 경지(境地)등으로 되어 있다. 전자의 진(眞)이 구체적인 실재로서의 의미라면, 후자는 이상적인 경지를 일컫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진경’이라는 말속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즉 실재하는 경치를 뜻하기도 하며, 또 한편 어떤 대상이 가진 가장 본질적이며 지극한 경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도 함께 가진다.
형호(荊浩, 870년경-930년경)는 그림에 있어서의 여섯 가지 요체〔六要〕 중 ‘경(景)’에 대해
경이란 법도를 세우는 데 때에 의거하고, 묘(妙)를 찾아 진(眞)을 창조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자연 경물을 그릴 때는 계절과 시간 및 환경조건의 변화에 근거하여 묘사해야 하는데(制度時因), 그 궁극적인 목적은 진(眞)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형호는 ‘진(眞)이란 기(氣)와 질(質)이 모두 성(盛)한 것이다’라고 하여, ꡐ진ꡑ이 지닌 두 가지 의미 중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다. 곽희(郭熙)는 산수에 있어서의 ‘진’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진경산수에 있어서 냇물이 흐르는 골짜기는 멀리서 바라보아 그 세(勢)를 취하고, 가까이에서는 그 질(質)을 취해야 한다. 진경산수의 공중을 향해 떠오르는 구름이나 하늘의 기운(雲氣)은 사계절에 따라 다르다. 봄에는 부드럽게 조화되고, 여름에는 자욱하며, 가을에는 성글고, 겨울에는 암담하다.… 진경산수의 기운(氣運)도 사계절에 따라 다르다. 봄 산은 담박하게 단장하여 마치 웃는 것 같고, 여름 산은 싱싱하고 푸르러 물방울 같으며, 가을 산은 맑고 깨끗하여 화장한 것 같고, 겨울 산은 참담하여 졸고 있는 것 같다.… 진경산수의 비바람은 멀리서 보면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희롱하는 것 같아 비바람의 진행과정을 알 수가 없다. 진경산수의 밝고 어둠은 멀리서 보면 다함이 있으나 가까이 보며 협착하게 되어 밝고 어둠과 가려지고 드러남의 흔적을 볼 수가 없다.
곽희는 진경산수화에 있어서 그 세(勢)와 질(質)을 함께 취해야 한다고 봄으로써, 형호의 ‘기질구성(氣質俱盛)’에서 한 걸음 나아가 대상의 실재성을 함께 강조한다. 요컨대 곽희는 진경을 대상의 내면적 진실성뿐만 아니라 외형적 사실성까지 포괄해서 이해한 것이다.
한편 장유(長襦, 1587-1638)는 진을 ‘천기(天機)’와 연관 짓는다.
시는 천기(天機)이다. 성에서 울리고 색에서 빛나며 청탁이나 아속을 윤택하게 하고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과 색은 만들 수 있으나 천기의 묘는 만들 수 없다. 왜 그런가. 진(眞)이 없기 때문이다. 진을 어찌 천기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유가 진과 동일시한 천기는 ‘하늘의 비밀이며 조화의 신비를 뜻하다’이것은 질서와 조화를 통한 천지자연의 이치를 말하는데, 이를 또한 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천기론적 입장에서 진경을 말하자면, 어떤 사물이 생기면 그것이 어떻게 생겨서, 그러한 모습으로, 어떻게 변하며,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모든 것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그것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 사물이 지닌 이․기․상․수(理氣象數)의 이치가 그대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이상으로 논의된 ‘진’과 ‘진경’의 의미를 산수화에 적용시켜 보면, 진경산수의 진경은 산수에 그 질(質)과 세(勢)가 겸비된 하나의 참됨을 의미한다. 실재하는 경치를 가리키면서도 대상의 참된 본질과 속성을 드러내는, 다시 말해 내외의 사실성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산수가 외적인 사실성을 갖춘다는 것은 단순히 사진을 찍은 듯한 모사적(模寫的) 사실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산수의 형상이 본질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조화이치가 전제된 산수풍경을 말한다. 따라서 사물에 내재한 그와 같은 이치를 먼저 터득해야만 비로소 참된 진경을 묘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겸재 진경산수화의 예술의욕
한국에서 넓은 의미에서의 산수화가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순수한 감상을 위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산수화가 그려진 것은 고려시대이후이다. 그러나 사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화보를 중심으로 한 형식적 화풍에 얽매임에 따라 우리 산천의 진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중국 산수화풍의 영향아래에 있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 역시 명대(明代)의 남종화풍을 토대로 발전한 것이기는 하나, 그 이전과 같은 형식적 모사에 안주하지 않고 우리 한국의 자연을 새로운 양식으로 재창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이제 겸재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예술의욕, 즉 이전의 관념화된 산수화풍에서 벗어나 진경산수화라는 고유한 화풍을 창출하게 된 그 내적인 원동력을 고찰함에 있어서, 그것은 단순히 겸재라는 개인적 차원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보여진다. 보다 시대적․민족적 예술의욕으로 접근해야할 것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시대사조와 관계된다. 따라서 겸재가 산수화에서 ꡐ진경ꡑ을 구체화시키게 된 바탕으로서의 시대 예술정신을 통해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독자적인 예술의욕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출현한 17, 18세기는 중세 조선 봉건사회의 후반기로 임진왜란 후 봉건정부의 복구 정책과 경제변화에 따라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던 때였다. 즉 어느 시기보다도 경제가 성장하여 나라 전체로 보면 상당히 넉넉한 시대였다. 이제는 봉건적 특권이나 신분에 의해서 경제적 처지가 결정되지 않게 되면서, 각 신분마다 빈부의 계층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봉건적인 신분구조와 계급구조는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그 동안 소외되었던 서민의식과 민족의식을 조금씩 싹트게 했다. 역사․예술․음식․의복․지리․의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조선의 고유색을 표현하게 되었는데, 그 밑바탕에 깔린 근본 사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학계에 따라 입장을 달리한다.
하나는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반대하고, 현실주의와 사실주의를 표방한 실학사상이 피지배층을 대변하면서 실용적이고 독자적인 고유문화를 창출했다고 보는 견해이고, 또 다른 입장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주자성리학을 바탕으로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심화시킨 조선성리학에 입각해 조선의 고유 문화가 꽃을 피웠다고 보는 관점이다. 단지 그 기반이 되는 사상이 다를 뿐, 두 가지 상반된 입장 모두 우리의 고유색이 발현된 시기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고유색의 발현은 곧 우리 것에 대한 자각정신이며, 사실정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성에 입각한 시대 정신은 자연관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앞서 동양의 자연 개념에서 고찰한 바에 의하면,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자연을 영원한 존재가치로서 숭배하며, 존재와 생성의 법칙을 소유한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고 고유섭은 이처럼 자연을 작용과 운동으로 보려는 태도, 즉 운동의 경향태로서의 자연관이 동양회화에 있어 예술의욕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자연을 어디까지나 인간의 사유를 통해 인식된 사변적이고 원리의 규범적인 존재로 보고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사실정신은 그러한 전통적인 자연관을 변화시켰다. 즉 자연을 관념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순수존재로 보려는 새로운 자연관이 형성된 것이다.
고유섭의 견해에 따르면 동양의 자연관은 예술의욕의 근본이 되므로, 자연관이 변화하면 곧 예술의욕도 그에 따라 변화한다고 볼 수 있겠다. 조선후기에 들어서 새롭게 인식된 객관적인 자연관은 그림에 있어 주제가 지닌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대상 자체의 객관성과 현실성을 중시하게 되었고, 이것은 그대로 예술의욕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된 예술의욕이 산수화에 구현된 것이 바로 겸재의 진경산수화이다.
유홍준(兪弘濬)교수는 《조선시대 화론 연구》에서 진경산수화가 출현한 18․19세기 중반의 화론을 지배한 것은 사실주의라고 보고, 조선후기의 사실론을 크게 ‘전신론적(傳神論的) 사실론’과 ‘사진론적(寫眞論的) 사실론’으로 대별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사실론은 중국화론의 전신론을 수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보완하는 조선의 사진론으로 발전한 새로운 예술론이었다
동양 예술론 일반에 있어 창작과 비평의 관점에서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많이 논의된 것은 형(形)과 신(神)의 문제였다. 형사(形似)는 형체의 묘사를, 신사(神似)는 대상에 내재되어 있는 정신성을 표현해 내는 것으로 결국 외형과 내면의 문제를 의미한다. 동양회화에 있어 내면의 정신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고개지(顧愷之, 345-406)가 전신사조론(傳神寫照論)을 주장하면서부터이다. 고개지가 제시한 전신(傳神)적 가치는 어디까지나 정확한 사실에 기초를 둔 것을 전제로 하며, 그 방법론으로 ꡐ형상으로서 정신을 그린다ꡑ는 이형사신론(以形寫神論)을 제시하였다. ‘형’과 ‘신’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정신을 객관사물의 형상 가운데 존재하고 형상을 통해 표현되는 것으로 보고, 형상이 없으면 정신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형상과 정신은 모순의 통일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화가는 정확한 사실에 기초를 두면서도 단지 형사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모름지기 신운(神韻)을 담아내야 한다는 고개지의 화론은 한 마디로 형신겸비론(形神兼備論)이라 할 수 있다. 형상에 기초하면서 전신(傳神)한다는, 즉 외형적 사실뿐만 아니라 내면적 사실성까지를 다 포괄한 것이다. 앞서 살펴본 표현 근원으로서의 입의(立意)개념이 선입의(先立意), 후용필(後用筆)인 선신후형론(先神後形論)으로 귀결되는 이른바 중신론(重神論)적 입장인데 반해, 고개지의 ‘이형사신론’은 형과 신에 같은 가치무게를 둔다는데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동양 예술론 일반으로 대변되는 중국화론 전체를 들여다보았을 때, ꡐ신ꡑ은 항상 ꡐ형ꡑ의 우위에 놓여졌다. 즉 내면적 사실에 치중한 전신론․기운론․사의론이 예술론 전체를 지배하다시피 하여, 형사론에 입각한 묘사적 사실론 자체가 적극 개진되지 못 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은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바탕으로 한 문인화 숭상에 따라 더욱 심화되었다.
요컨대 비록 실제 그림에 임하는데 있어서 묘사적 사실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화론에서 만큼은 형사론 내지 사실론이 전신론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은 예가 드물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이러한 성향이 조선후기 이전까지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이제까지 상대적 관계에 놓여 왔던 전신과 형사, 사의와 사실개념을 상호보완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차원의 사실론을 전개하게 되었다.
유홍준 교수가 조선후기 화론에 나타난 두 가지 사실론으로 제시한 전신론적 사실론과 사진론적 사실론 중, 전자는 전신론의 가치를 지키는 가운데 사실성 구현을 강조하고, 후자는 종래의 관념적이고 정형적인 창작태도에서 벗어나 대상의 참 모습을 박진감있게 그려내려는데 역점을 둔 사실론을 말한다. 외적인 사실성을 바탕으로 대상의 ꡐ참된 모습〔眞〕ꡑ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겸재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예술의욕의 사고 바탕은 전신론적 사실론 보다는 사진론적 사실론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조선후기 회화에 대한 사진론적 사실론을 적극적으로 피력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을 들 수 있다. 그는 《겸재화첩(謙齋畵帖)》에 부친 발문에서 사진론적 사실성에 입각해 겸재의 뛰어남을 언급한다.
정선의 이 화권(畫卷)은 비록 분방한 필체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는 법도와 의태가 여러 가지로 갖추어져 한치의 차질이 없다. 정선을 따라가지 못하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나라의 그림은 먹빛이 얕다는 병폐가 있는데, 정선은 진한 먹으로 큰 고개와 겹겹이 쌓인 봉우리에 긴 숲과 고목을 그리니 기상이 자연 심원하다. 정선의 뜻은 비록 우리 나라 사람(東人)의 병폐를 바로잡으려고 한 것이나 여기에 바로 정선이 화가의 삼매처(三昧處)를 얻은 바가 있다.
이하곤이 지적한 ‘먹빛이 얕다는 병폐’는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화본에 얽매여 그것을 답습하여 그리는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것은 외형적인 사실성뿐만 아니라 그 정신성까지 결여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겸재의 화풍은 보다 실재에 가까운 화풍으로 내면의 진실까지 드러냄으로써, 그러한 병폐에서 탈피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광문(李光文, 1778-1838)은 〈해산도첩(海山圖帖)〉의 서문에서 구체적으로 진경(眞景)과 진화(眞畫)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사실적인 형사관을 피력한다.
그림이란 그 모습을 같게 하려는 것이다. 세상의 그림그리는 사람들은 뜻을 그리는 것(畵意)을 묘한 것으로 여기나, 그것은 다만 그린 사람이 알 뿐 보는 사림이 꼭 기이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가지가지의 경물이) 때로는 있고 때로는 없으면서 진실로 진경(眞景)을 보조하게 되면 모두 남김없이 그려 낸 것이며, 진화(眞畫)가 그 온전함을 이룬 것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의(意)만을 취한다면, 모든 사람에게서 공감을 얻지 못 하며, 진정한 그림으로서의 가치는 진경을 그려내는데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형(形)을 취하는 구체적인 표현방법에 대한 언급이다. 즉 ‘때로는 있고 때로는 없는’ 적절한 가감(加減)을 통해 진경을 표현하면 그대로 그림으로서의 완전함을 갖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경을 중시한 사진론적 사실론은 사진을 찍은 듯한 있는 그대로의 단순한 묘사적 사실론이 아니라, 내면의 참된 본질을 담아내기 위한 변형이 가능하다는 융통성 있고 차원 높은 사실정신이라 하겠다.
겸재의 진경산수화는 이와 같은 새로운 사실정신에 입각한 객관적 자연관으로서의 진경을 산수화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진경은 대상의 속성과 본질이 드러난 구체적인 실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조선후기 이전만 하더라고 진경은 마치 신선이 사는 것 같이 기이하고 절묘한 풍광(風光)을 지닌 지역을 가리켰다. 즉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이상향으로서의 추상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 후 현실에 실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상황을 의미하게 된 것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다. 그러한 의미 변화는 바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정신과 자연에 대한 순수한 객관적 관조태도에서 비롯되며, 궁극적으로는 현실 지향의 사실정신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실경을 그린 예는 겸재 이전, 즉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초․중기에도 이미 존재했었다. 그러나 ‘진경’이라는 차원으로서의 실경은 겸재로부터 발전하고 확립되었으므로, 이 점이 겸재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된다. 이제 조선후기의 예술론, 그 중에서 사진론적 사실론에서 언급된 진경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고찰을 통해 겸재 진경산수화의 예술의욕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그의 그림에 부친 〈도산도발(陶山圖跋)〉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림은 산수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크기 때문이다. 또 (실지의)진경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닮게 그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 실경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실제와 다른 것을 숨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직접 보지 못한 지역(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억측으로 닮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강희언(姜熙彦)의 〈인왕산도(仁王山圖)〉에 부친 화평(畵評)에서는
진경을 그리는 사람은 항시 지도를 닮을까 염려하는데, 이 그림은 실경에 심분 핍진하고 또한 화가의 제법(諸法)을 잃지 않았다.
이라고 했다. 전문에서는 진경을 그리기 어려운 까닭은 닮게 그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후문에서는 진경을 그림에 있어 마치 지도와 같이 사진을 찍은 듯한 그림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여기서 ‘닮게 그린다〔似〕’는 의미는 뒷 문장으로 미루어 외형의 닮음뿐만 아니라 정신의 닮음까지 포함됨을 알 수 있다. 즉 진경산수화에 있어서 외형의 닮음은 곧 실경을 뜻하며, 정신의 닮음이란 그 자연이 품고 있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의 구현을 말한다. 이것은 결국 ‘진경’이 가리키는 본질적인 의미이며, 외형뿐만 아니라 내면의 진실성까지 구하는 조선후기 사진론적(寫眞論的) 사실론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실경을 토대로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성 자체를 꾸밈없이 순수하게 드러내고자한 것이 바로 진경산수화를 창출한 내적 원동력이며, 예술의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겸재 자신은 진경을 ‘천취(天趣)’로서 이해하였다.
명화(名畵)로 일컬어지던 사람이 있었는데, 겸재(謙齋)가 그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그림은 참으로 잘 그렸다. 다만 천취(天趣)가 부족할 뿐이다. 마땅히 먼저 허물어진 담장을 구하여 비단 바탕을 펼쳐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그것을 관찰하면, 높고 낮음, 구부러지고 꺾인 자연스러운 형상을 보게 되며, 모든 산수의 형세(形勢)를 이룰 것이다. 정신으로 깨닫고 뜻으로 만들어 내되 황홀한 가운데 사람과 새, 풀과 나무가 날아 움직이며 오가는 모습이 보이거든 곧 마음이 내키는 대로 붓에 맡겨라, 자연히 경치(景)가 모두 천취(天趣)가 되어 인위(人爲)를 닮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활필(活筆)인 것이다.
겸재는 표현하려는 대상을 면밀히 관찰하여 그 특징을 포착한 다음에 붓을 들 것을 권한다. 여기서 겸재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긴 것이 바로 대상의 ‘천취’이다. 천취는 사물에 내재된 질(質)과 세(勢)를 가리키는 것으로, 질은 본질 또는 특성을 뜻하며 세는 형세를 의미한다. 사물을 가장 그것답게 만드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겸재가 대상의 천취를 ꡒ정신으로 깨닫고 뜻으로 만들어 낸 후, 마음이 내키는 대로 붓에 맡겨라ꡓ고 언급한 부분은 형사보다 전신(傳神)을 더 중시하는 견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효과적인 전신을 위해서는 형사로부터의 자유도 취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겸재의 이러한 천취에 대한 강조는 앞서 이광문이 ꡒ그림이란 그 모습을 같게 하려는 것이다ꡓ라고 전제한 것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형사에 바탕을 둔다. 이것은 대상의 형상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가운데 천취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면서도 겸재는 다른 한편 형상에 얽매인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형상을 강조한다. 즉 실재하는 경물을 표현대상으로 하되, 겸재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대상의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 그 내면의 본질〔天趣〕을 표출하는데 있었다. 여기서 내면의 본질을 표출한다는 것은 겸재 이전까지 산수화의 주류였던 화가의 사유를 통한 관념적 상징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천취는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바로 대상이 주체가 된다. 화가는 다만 정확한 관찰과 미적 관조를 통해 얻어진 대상의 본성을 꾸밈없이 드러낼 뿐이다. 겸재 또한 그러한 태도를 취했을 것이며, 《금강전도(金剛全圖)》의 화면 우측 상단에 쓰여진 시문(詩文)을 통해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일만이천봉의 개골산(萬二千峰皆骨山)
누가 그 진면목을 그릴 수 있을까(何人用意寫眞顔)
산에서 나는 뭇 향기는 동해 밖에 떠오르고(衆香浮動扶桑外)
그 쌓인 기운은 온누리에 서리었네(積氣雄蟠世界間)
몇 떨기 연꽃은 해맑은 자태를 드러내고(幾朶芙蓉揚素彩)
송백 숲은 선사(禪寺) 문을 가리었네(半林松栢隱玄關)
비록 걸어서 이제 꼭 찾아간다고 해도(慫令脚踏須今遍)
그려서 벽에 걸어 놓고 실컷 보느니만 못하겠네(爭似枕邊着不慳)
겸재가 《금강전도》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한 바는 금강산의 진면목을 표현하는데 있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해 금강산의 질(質)과 세(勢), 즉 천취를 파악하고자 하는 겸재의 관조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창출한 내적 원동력은 대상의 외형적 실재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 포괄한 새로운 사실정신으로서의 사진론적 사실론과 자연을 대함에 있어 인간이 아닌 자연이 주체가 된 객관적 자연관으로서의 관조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바로 겸재 진경산수화를 이룬 예술의욕의 바탕이 된다고 하겠다.
겸재는 그러한 예술의욕을 통해 분명한 자기 인식의 근거를 가진 가운데, 형사에만 얽매이지 않고 경물을 때로는 과감히 생략하거나 교묘하게 재구성함으로써, 겸재 특유의 개성적인 표현과 독자적인 양식을 창출할 수 있었다. 또한 그에 따라 겸재의 산수화는 실경을 기초로 한 내면의 진실성, 즉 한국의 자연이 담고있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을 꾸밈없이 드러낸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경산수를 이루게 된 것이다.
3) 예술의욕으로 본 한국회화의 정체성
지금까지 2장에서는 시대양식과 그것의 목적론적 발전에 있어서 내적 원리로서의 ꡐ예술의욕(Kunstwollen)ꡑ을 고찰하고, 그것과 상응하여 동양예술에 있어 표현 근원으로서의 ꡐ입의(立意)ꡑ를 개진하였다. 그리고 3장에서는 고유섭이 제시한 동양화 일반 예술의욕과의 연계 속에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독자적인 예술의욕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앞서 서론에서도 밝혔듯이 본 논문의 궁극적인 연구 목적은 겸재 진경산수화를 통해 한국회화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적 가능성의 단초를 제시하는데 있다.
ꡐ정체성(Identity)ꡑ이란 간단히 말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갖게 되는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적절한 위치와 역할을 알고 자신을 사회적․역사적 맥락에 적절히 배치시킴으로써 갖게 되는 지속적인 안정감과 통합감을 뜻한다. 이러한 감각은 사회적 산물이며 곧 사회적 행위의 동기로 작용한다. 정체성은 비단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개념은 아니며 사회나 민족으로 확대되어 개인과 집단과의 내적 연대감을 제공하게 된다.
정체성은 시간의 흐름 속에 과거역사의 전승과 현재의 상관관계에 의해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되며, 스스로가 거울을 비추어보듯이 주체적인 자아의지를 통해 자기중심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한국적 특수성, 이른바 ‘한국성’이라는 의미도 정체성에서 거론되는 지역적 특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한반도라는 지역의 민족문화와 결합한다. 민족문화는 그 민족공동체가 공유하는 특정한 양식이다. 그러한 양식은 역사와 사회제도, 도덕적 인습, 민족적 사유형식, 지역적 가치관 등이 하나로 통합된 형태이며, 그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이 문화적 정체성을 이루고 지배적인 한 사고방식으로서 국가와의 자기동일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체성으로서의 한국적 특수성을 밝히는 일은 먼저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과 역사적 사유의식의 상호 매개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미술에 있어서 ‘우리의 것’에 대한 관심은 이질적인 서구 예술사조와 그 이론적 의식이 한국의 근대문화로 수용되면서 문화권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한계의식의 자각으로 인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현대미술에 있어서 정체성에 관한 담론들은 시각예술 및 시각문화 전반의 전환기였던 80년대 들어 주요 이슈로 부각되었다. ‘우리’, ‘고유’, ‘한국적’, ‘전통성’ 등과 같은 용어들이 주제화되면서, 전통중심 사고나 전통소재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미술의 독자성 회복을 위한 담론들은 1970년대 말에 제기된 ‘자생성’과 80년대의 ‘정체성’, 90년대의 ‘한국성’ 등 유사한 의식의 띠가 3단계에 걸쳐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들이 각기 한국미술의 자주성 획득을 위한 많은 주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구심력과 같은 총체적 지배 이념은 창출되지 못 하였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한국미술의 특수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전통이나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문화적 차별성을 도구로 분별없이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민족주의나 배타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물론 한 지역의 미술은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으로 인한 상대적 정체성을 지니게 됨으로써, 그 가치를 보다 명확하게 확인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비교점의 방법적 좌표가 분명치 않음으로써 생기는 애매함은 자칫 위험한 편견을 갖게 되는 수가 있다. 바로 여기에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근거로서의 사유방법과 체계가 요구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이 독자적인 한국미술의 특성을 밝히는데 있어서, 그 인식근거를 미적 체험형식으로서의 미의식에서 찾고자 하였다. 한국인의 미의식에 관한 문제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을 위시해서 고유섭, 김원용(金元龍, 1922-1993)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 의한 미의식의 특성분석들은 ‘대체로 그 표현들이 너무 주관적, 취미본위, 추상적, 신비적, 감상적’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정체성이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과 역사적 사유의식의 상호매개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특성들은 본격적인 역사적 천착에 앞선 범례(凡例)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예술에 있어서 어떤 정신적 의미내용을 구하는 해석이 가능하자면, 먼저 양식의 유형적 특색이 가려져야겠고, 그러자면 우선 기초개념으로서의 양식의 체험형성과정에 대한 이론적 바탕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건축양식발전의 합법칙성을 찾아 그 의미 해석을 시도한 정인국(鄭寅國)의 《한국건축 양식론》(일지사, 1974)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양식문제에 대한 방법적 처리수단을 ‘예술의욕’에서 찾아, 양식의 변천과정 가운데서의 일관된 법칙성을 보려 하였다. 그에게 있어 예술의욕은 그 사회나 시대의 양식을 결정짓는 내적 요인이었다.
예술의욕은 앞장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양식의 특수성을 분석․기술하고 그 법칙성을 구하여 의미해석을 내린 정신사로서의 보편적 양식사의 확립에 기여한 중심개념이다. 그것은 예술 양식의 근거가 되며, 또한 세계관과 관련해서, 인간과 외부세계간의 화해 및 질서욕구이기도 하다. 정체성이란 것이 개인이나 민족이 속한 사회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자기동일화 의식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필자의 견해로는 예술의욕과 그 예술의 정체성과는 어떤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즉 예술형식에 있어서 근원과 현존을 관계 맺는 도구로서의 예술의욕을 통해 예술의 전통성,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접근 방법은 한국회화의 정체성을 찾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사실 한국미술의 제 영역 중 회화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평면미술이라는 장르의 특성 탓에 입체성을 띤 조각이나 공예에 비해 어떤 시대적인 또는 민족적인 특색의 표현이나 포착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회화는 결코 일부의 시각처럼 중국회화의 아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분명한 한국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이것은 안드레아스 에카르트(Andreas Eckardt, 1884-1971)의 《조선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한국의 회화는 중국의 대담한 화풍과 일본의 지나치게 세련된 수법의 중간쯤에 자리잡았다. 한국은 … 미에 대한 자연적이고 비인위적 취미를 간직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제 남겨진 과제는 이러한 한국회화의 특색을 전통 속에서 구체적인 양식을 통해 발견하고, 양식의 내적 동인(動因)으로서의 예술의욕을 규명하는 것이다. 한국미술 연구의 효시로 추앙 받는 고유섭은 전통을 ‘자아’와 ‘자각’의 철학적 사색으로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특색이라는 것은 결국 전통이란 것의 극한개념이다. 그러므로 자의식(자아의식)의 자각, 자의식의 확충을 위하여는 부단히 이 전통을 찾아야 하며, 부단히 이 전통을 찾자면 부단히 그 특색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래 이 전통을 돌보지 아니하였고, 너무나 오래 이 특색을 찾지 않고 있었다. 이는 결국에 있어 자아의식의 몰각이며 자주의식의 몰각이다. 자아의식이 몰각된 생활, 자주의식이 몰각된 생활, 그것은 실로 산 생활이 아니며 문화인의 생활이 아니다. 이 뜻에서 우리는 조선미술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
고유섭은 전통을 단순히 손에서 손으로 전승되어지는 것이 아닌, 현시점에서 사유하는 ‘자각’, ‘자주’의식의 확대로 보았다. ‘자의식의 자각’, ‘자의식의 확충’을 다르게 표현하면, 정체성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겠다. 고유섭도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회화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규명하는 일은 한국회화에 나타난 여러 특색들 속에서 자아의식의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한 전통을 발견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양식의 특수성을 분석하고, 그 형성원리로서의 예술의욕을 통해 한국회화의 전통성에 대한 의미해석을 내림으로써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이 때의 예술의욕은 언어, 역사, 종교, 문학 등 한국인의 삶 구조 속에서 폭넓게 다루어진 미적 현상의 본질적인 근거가 되므로, 조각, 공예, 건축 등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좁게는 우리의 미술문화, 넓게는 문화 전반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4. 예술의욕으로 본 겸재 진경산수화의 시양식(Sehform)
〈동양화와 서양화와의 구별〉에서 고유섭은 동양 예술의욕의 근본을 운동의 경향태로서의 자연관으로 보고, 이를 겉으로 드러난 회화양식, 엄밀히 말해 수묵산수화의 시양식(視樣式, Sehform)에 적용하였다. 우선 묘화작용의 출발로서 선(線)을 서양화의 면(面)과 대립시키고, 공간구성에 있어서는 삼원법(三遠法)을 투시원근법과 구별하였다. 고유섭은 선과 삼원법 모두 예술의욕으로서의 자연관으로 파악하였다.
본 장에서는 고유섭이 동양회화 일반의 시양식으로 제시한 선과 삼원법에 대해 개진해보고, 그것이 겸재 진경산수화에서 어떻게 지양(止揚)되고 있으며, 그 독자적인 양식은 무엇인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한국회화의 정체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동양회화 일반의 시양식
(1) 운동태의 출발로서의 선(線)
고유섭은 운동태(運動態)와 경향태(傾向態)를 예술의욕의 근본으로 하는 동양의 예술표현은 그 묘화작용이 선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예술 의욕이 서로 다른 그들〔동양화와 서양화〕은 예술적 활동의 출발도 달리한다. 즉 운동태(運動態)를 근본으로 하는 전자〔동양화〕는 묘화작용의 제1보가 선(線)을 하나 긋는 데서 시작되고, 존재태(存在態)를 근본으로 하는 후자는 면(面)의 표현에서 출발한다. … 그러면 경향태를 표현하려는 동양화는 어떻게 선을 채용하느냐? 대개 선의 성질을 살펴보면 상식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또는 기하학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선은 점에서 출발한다」한다. 점이 발전하여 선이 되고 선이 발전하여 면이 되고 면이 발전하여 괴체(塊體)가 된다. 즉 점은 무목적적 지향성을 가진 한 개의 혼돈체 즉 Chaos이니 고과화상(苦瓜和尙)이 말한바 태고요 태박(太朴)이다. 그것은 한 개의 무법체(無法體)요, 부산체(不散體)이니 환언하면 한 개의 <중>이다. 이러한 점은 어떠한 방향으로든지 자유로이 연장될 수 있는 가능태라고 우리는 직관한다. 그러므로 이 가능태의 운동태는 선에 있다.
일반적으로 동양화를 가리켜 선의 예술이라 한다. 특히 붓과 묵을 사용하는 수묵회화에 있어서 필선(筆線)이 작품전체의 가치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면 동양화에서 나타나는 선의 의미는 무엇이고, 화면에서는 어떠한 과정으로 선을 취하게 되는가?
고유섭에 의하면 자연을 끊임없는 작용의 원리, 즉 경향태와 운동태로 보는 데에 예술의욕이 근거한 동양화는 선에서 그 표현의 출발을 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갖는다고 했다. 그것은 선이 지니는 본질적 특성과 관계한다. 기본적으로 ‘선은 점에서 출발하니’, 무목적적 지향성을 가진 혼돈체로서의 점이 전개․발전되는 운동태는 바로 선에 있다는 것이다. 점이 발전하여 면이 되고 괴(塊)가 되는 것도 운동태라 할 수 있지만, 화면위에 나타난 면과 괴는 전개가 완성된 형태이므로 선과 같은 발전과정은 없는 형태요소이다. 그러나 선은 ‘형성중에서 미(未)형성을 표시하고, 경과중에서 완결을 표시한다. 즉 형성의 미완성이요 경과의 완결’인 것이다. 여기에 선의 운동태 원리가 있다. 이러한 선의 운동성․시간성에 대한 지적은 서구 비구상회화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예술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점 외부에서 생겨나는 어떤 힘은 화면 속으로 박혀 들어가 있는 점에 의지하여 점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화면 위에서 그것을 어느 방향으로인지 밀어내고 있다. 이를 통해 점의 집중적인 긴장은 곧장 소멸되며, … 이 점으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자립적인 생명을 가진, 다시 말해 그 고유한 법칙에 따르는 하나의 새로운 본질이 생겨난다. 이것이 선(線)이다. … 선은 점이 움직여 나간 흔적, 다시 말해 점이 만들어낸 소산이며 … 여기서 정적(靜的)인 것이 역동적인 것으로 비약하게 된다.
고유섭은 운동태의 근본양식이 선에 있으므로 그 운동태를 예술의욕의 근본으로 하는 동양화는 획선을 본능적으로 취한다고 보았다. 여기서의 선은 단순한 선(line)의 의미는 아니며, 생동감‧생명력이 있는 살아있는 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같은 곳에 두 번의 선은 허용되지 않는다. 고유섭이 인용한 석도(石濤, 1641-1717)의 일획론(一畫論)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까마득한 옛날에는 법이라는게 없었다. 그리고 거대한 통나무〔즉 모든 가능성의 혼돈〕는 원래 흩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단 흩어지게 되면 법이라는게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때 그 법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한번그음〔一畫〕’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한번그음’이라고 하는 것은 뭇 존재의 뿌리요, 온 모습의 근본이다.
석도는 화법이 형성되는 시초에 대해 태고 적, 즉 만물이 아직 그 형상을 갖추지 못 한 때에는 무릇 법이라는 것이 없었지만, 천지자연이 각각의 모습을 드러낸 후에 그것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형태 부여의 수단이 되는 것이 ‘일획(一畫)’이라고 하였다. 이 때의 일획은 단순히 형태표현의 수단이 아닌 우주의 생성원리를 담아내는 최초의 작용․운동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동양예술에 있어 선의 중요성은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글씨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고유섭은 “한획을 중요시하는 동양화는 글씨와 그 정신을 같이한다.”고 하면서 서화 일치의 정신을 언급했다. 그에 관해서 석도는
글씨와 그림은 그것이 구체화되는 모습으로는 다른 양극에 매달려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공능으로 말하자면 한 몸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일획이라는 것은 글씨나 그림이 있기 이전의 근본적 뿌리가 되는 혼돈의 경지며 자연의 경지다. 글씨와 그림은 그 일획이 생겨나고 나서 전개된, 인간에 있어서의 하늘의 지속과 변화다.
라고 하였다. 석도는 글씨를 또 하나의 선의 예술로 보며, 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변화원리 및 그 내재적 생명력을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림과 글씨 모두 그 출발은 일획으로부터 전개되니, 일획은 본체요, 서화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운동태의 출발양식으로서의 선을 근본으로 하는 동양회화와 글씨〔서예술〕는 대부분이 제한된 흑색을 띈다. 동양에서는 묵색을 현색(玄色)이라 하는데, 이는 만물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이 되는 색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고유섭은 묵선〔흑선〕을 또한 운동태의 원리로서 이해했다. 말하자면 선의 운동태를 표현하기 위한 필연적인 색이 흑색이라는 것이다.
선을 표현하려면 색으로서 할 수 없다. 면과 면이 줄어들어 형성되는 선을 색이 표현할 수 없다. 이러한 선의 운동태를 표현하자면 필연적으로 흑선이 그 표현 수단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심리학은 우리에게 ‘흑은 무색감각에 속하는 것’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흑은 선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재료이다. 흑으로 그린 획은 순전히 운동태를 상징할 수가 있다.
고유섭에 의하면 표현의 출발을 면에서 하는 서양화는 도색(桃色)을 그 필연적 방식으로 취하게 되는데, 그것은 색의 본질이 확장됨 즉, 면화(面化)를 존재충동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선이 순수한 운동의 성질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색감각으로서의 흑선이 가장 적합한 재료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다분히 조형심리학적 관점이라 하겠다.
요컨대 고유섭은 운동의 경향태를 예술의욕으로 하는 동양화의 표현출발이 선에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을 선의 내재적 존재충동과 관련지어 고찰하고 있다. 선은 본질적으로 무목적적 지향성을 가진 혼돈체로서의 점에서 발전된 것이므로, 형성 중의 미형성인 운동의 경향태적 요소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감각적인 운동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성을 내포한다. 전통적으로 동양회화에서 일획을 강조하는 이유도 일차적으로는 형태부여의 수단이 되지만, 근본적으로는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 혼돈 속의 질서를 주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의 변화․작용원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동양화에서 취하는 선은 천지만물의 생성원리로서의 운동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2) 확대지향적 공간으로서의 삼원법(三遠法)
고유섭은 예술의욕의 관점에서 구별되는 동․서양화의 또 다른 양식적 차이를 공간구성에서 찾고 있다. 자연을 포함한 모든 대상을 존재의 완성태로 보려는 서양화는 화면을 중심으로 보는 이의 눈과 대상이 화면 속의 한 점에서 일치한다. 소위 투시법이라는 서양화에서의 원근법은 소실점을 중심으로 모든 대상이 한 곳에 집중되며, 이것은 전체 화면에 있어 축소지향적 공간을 만든다. 이에 반해 동양화의 화면은 나와 대상을 자유로이 이동시킬 수 있는 보다 확대된 공간을 이룬다. 고유섭은 이것 역시 자연을 운동의 경향태로 보려는 예술의욕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대상을 운동태에서 보고 경향태에서 보려는 동양화는 대상을 이동시키든지 또는 보는 나의 위치를 이동시킨다. 즉 서양화에서의 관물(觀物) 태도를 ‘보고 있다’로 형용한다면 동양화에서의 관물 태도는 ‘보아 간다’로 형용할 수 있다. 즉 앞산을 보고 그 위에 올라 다시 뒷산을 보고 또다시 그 위에 올라 그 뒷산을 보아 간다. 또는 앞산을 보고 눈을 돌려 그 옆산을 보고 또 눈을 돌려 그 옆산을 본다. 여기에 서양화에 없는 삼원법(三遠法)이라는 것이 생기나니 고원법(高遠法), 심원법(深遠法), 평원법(平遠法)이 그것이다. 이것을 비유하면 서양화는 창에 두 눈구멍을 뚫고 외계를 보는 것이라면, 동양화는 산에 올라 내려다보고 바라보고 훑어보고 걸어본 것을 모두 표현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전자의 화면은 실체경적(實體鏡的)이라 하면 후자의 화면은 조감도 식이요 파노라마 식이라 할 수 있다.
동양 예술론 일반에 있어서 원근법에 대한 사유는 남조(南朝) 송(宋)의 종병(宗炳, 375-443)이 가까운 것은 크고 먼 것은 작다는 원근법의 기본원리를 제시한데서 비롯되어, 삼원법을 제시한 곽희(郭熙)에 의해 체계적으로 확립되었으며, 이로 인해 동양화 특히 산수화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곽희는 〈산수훈(山水訓)〉《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먼저 원(遠)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지각한다.
산수는 커다란 물체이므로 이것을 감상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멀리서 이를 바라보아야만 하고, 또 그렇게 보아야만 하나로 펼쳐진 산천의 형세와 기상을 보아낼 수 있다
어떠한 사물이든지 그것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감상자 사이에 일정한 거리와 간격을 두어야 그 정확한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산수와 같은 거대한 대상은 마땅히 멀리서, 즉 원(遠)의 위치에서 보아야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 곽희는 산수에 대한 관조방법을 원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원은 본래 정신적 자율성을 뜻하는 장자의 소요유(消遙遊)정신에서 비롯된다. 세속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무한의 자유와 해방을 맛보고자 하는 ꡐ소요유ꡑ정신은 위진현학시대에 이미 여러 가지 용어로 사용되어 왔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ꡐ원(遠)ꡑ의 개념이다. 현실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의식은 자연스럽게 은둔적 생활공간으로서의 산수자연으로 향하게 했고, 산수를 접함으로써 잠시 현실을 초월해 정신적 해탈과 해방을 누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산수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형상을 띈 한정된 것이며, 정신은 국한된 상태에서는 완전한 자유로움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산수에 어떤 정신성과 영혼성을 부여함으로써, 형상의 제한성을 벗어나 무한한 정신적 해탈으로서의 원(遠)을 얻고자 하였다. 이것은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원리와 규범으로서의 도(道)를 체득한다는 의미도 된다. 이러한 원(遠)개념이 산수화의 표현의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곽희에 의해서이며, 이를 화면에 나타난 구체적인 공간의식의 반성적 성찰로서 전개한 것이 바로 삼원(三遠)이다.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를 올려다보는 것을 일러 고원(高遠)이라 하고, 산 앞에서 산 뒤를 넘겨다보는 것을 일러 심원(深遠)이라 하며,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을 일러 평원(平遠)이라 한다. 고원의 색은 맑고 밝으며, 심원의 색은 무겁고 어두우며, 평원의 색은 밝은 것도 있고 어두운 것도 있다. 고원의 세(勢)는 높이 솟아 있고, 심원의 뜻은 중첩되어 있으며, 평원의 뜻은 온화하고 아득하다.
이것은 대상을 보는 위치에 따라 변화되는 공간을 의식하여 종합한 것으로서, 즉 관찰 각도의 변화에 따라 관조자의 시각 경험이 달라짐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삼원은 산수자연과 그것을 표현하려는 화면 사이의 거리감과 깊이감을 전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곽희는 산수의 색 역시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음을 파악하였는데, 그것은 특정한 색명(色名)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색의 근원이자 통일체로서의 현색(玄色)인 묵색의 표현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화면의 대부분이 수묵으로 이루어진 산수화는 채색산수화에 비해 보다 깊고 그윽한 맛을 자아내므로 원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앞서 고유섭이 동양회화의 시양식으로 선을 언급할 때, 선의 운동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흑선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삼원법은 화가가 자연경물을 관찰하는데 있어 충분한 자유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동양회화는 다원시각(多元視覺)에 의거하여 한 화면에 삼원을 종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화폭이 긴 두루말이일 경우, 경물이 일어서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며,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며, 분산되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게 함으로써 어떤 때는 웅장한 산봉우리가 눈앞에 치솟기도 하고, 어떤 때는 뭇 산들이 눈 아래 다 깔려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평평한 논밭이 끝없이 펼쳐져 아득히 희미하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곧 고유섭이 언급한 운동태와 경향태로서의 ꡐ보아가는ꡑ 동양화의 관물(觀物)태도로서, 자연의 무한한 공간을 끝없이 유람하듯 나와 대상을 화면 안에서 이동시킨다. 그럼으로써 비록 눈앞에 펼쳐진 실경은 아닐지언정, 그 안에서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탈, 즉 소요유(消遙遊)와 원(遠)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3) 또 다른 운동태 양식으로서 담채(淡彩)와 태점(苔點)
회화에 있어 기본 요소 중 형(形)과 구도 이외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색이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 산수화는 묵색을 제외하고는 거의 색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는 고유섭이 앞서 지적한 대로 동양의 예술의욕을 표현하기 위한 근본 양식이 선에 있으므로, 색은 선의 운동태를 표현하기 위한 필연적인 색 즉, 흑색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흑(黑)은 면적도(面積度)가 넓어질수록 면의 존재태(存在態)를 은폐시키고 색은 면적도가 좁아질수록 면의 존재태를 감소시킨다. 전자는 운동의 성질을 잃는 동시에 면의 성질을 발휘시키지 못하고 후자는 면의 성질을 잃는 동시에 운동의 성질도 발휘치 못한다.
고유섭은 ꡐ색은 원래 확장됨을 그 존재충동으로 함으로ꡑ 일정한 면적을 지녀야 색 자신의 본질을 현현시킬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선의 운동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흑선이, 면의 존재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색이 각각의 필연적인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고유섭은 동․서양의 회화를 비교하기 위해 극단적인 이분법적 논리 구조를 취한 면이 다분히 있지만, 이것은 비교 대상의 차별성을 나타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전개과정으로 보여진다. 킴바라세이코(金原省吾)는 고유섭과 같은 관점에서 이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색은 운동의 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색은 형태를 운동 상태로 나타내지 않고, 존재 상태로 나타내는 것이다. 색도 물론 선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지만 색이 색 자체로서 만족하게 표현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면이다. 색은 면으로 쓰임으로써 비로소 개차(個差)와 더불어 열과 광택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색은 필연적으로 자기의 성정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선으로서 쓰이지 않고 면으로서 쓰이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색이 면으로서 쓰인다는 것은 존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데에는 편리하지만, 운동의 상태를 나타내는 데에는 불편하다. 그러므로 운동상태를 주로 하는 동양화가 색보다도 한층 순수하고 또한 운동을 나타내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유섭과 킴바라세이코의 관점에 따르면 동양화에 있어 색 자체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로 치부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들은 조선시대의 민화나 인물화와 같은 다양한 채색화는 처음부터 배제한 채, 수묵산수화만을 논제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지의 근본적인 제약성을 차치하더라도, 전통산수화에 있어 색은 자연을 운동의 경향태로 보는 동양의 예술의욕과 전혀 무관한 것일까?
사실 우리의 전통 산수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약하게나마 채색이 되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꼭 필요한 정도의 청색이나 녹색을 먹에 섞어 특정 현상에 구애됨이 없이 전체적으로 넓게 보일 듯 말 듯 사용한 담채(淡彩)는 고유섭이 우려한 것과 같은 색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산재한 묵선들을 조화․ 통일시키고 화면에 깊이를 더하는 일종의 보조 역할을 한다. 킴바라세이코는 다음과 같이 색의 운동성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 색도 순수하면 그 색은 진출성(進出性)을 가져온다. 진출성이란 색이 싱싱하여, 사람에게 작용을 하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색이 신선하고 투명하고, 넓게 칠해질수록 진출성을 성(盛)하게 한다.
그가 말하는 순수한 색은 아마도 모든 색의 근원으로서의 현색(玄色)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담채에 적용해 보았다. 이 욕심없고 조촐한 담채는 색의 본성인 존재의 미를 나타내기보다는 묵선의 표현들을 더욱 확장시키는 분명 또 다른 운동태를 지닌다. 산수화에서 보여지는 담채는 일정한 면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수림(樹林)이나 산의 줄기를 따라 엷게 퍼져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각각에 미세하게나마 원근의 거리감과 공간의 깊이감을 부분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한편 점태(點苔)라고도 칭하는 태점(苔點)은 동양에 있어서 수묵산수화를 그릴 때, 바위나 나무줄기 및 가지에 생긴 이끼나 작은 식물의 생략된 표현으로서 점을 찍는 기법의 한 가지이다. 이것은 화면 전체의 조화를 잡고 분위기를 정비하거나, 악센트를 가하는 효과를 낸다. 앞서 석도가 언급한 것처럼 점은 무목목적 지향성을 지닌 혼돈체이다. 그 안에 생성의 근원체가 내재되어 있으며, 또한 모든 형성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바위나 나무에 가해지는 태점은 단순히 악센트로서의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시점에서는 외부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언젠가 생성되어질 또 다른 형성원리의 상징체라고 볼 수 있겠다. 즉 ꡐ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자라나고, 움직여 돌아감으로써 의에 어긋남이 없다(生生不息, 運轉不義)ꡑ는 만물의 변화흐름 가운데 자리한다.
이와 같이 산수화에 있어서 담채와 태점은 선이나 삼원법과 같은 강한 운동의 경향성를 나타내지는 않지만, 분명 화면 속의 작은 공간감과 운동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운동태․경향태적 요소로서의 시양식(視樣式)이라고 보여 진다. 비록 그러한 관점이 동양 예술론 일반에서 사유된 바는 없지만, 필자가 동양화를 전공한 입장에서 단지 우견(愚見)으로서 제시해 보았다.
2) 겸재 진경산수화의 시양식(Sehform)
고유섭은 동양회화에 있어서 운동태의 자연관을 예술의욕으로 하는 그 시양식으로 선과 삼원법을 들었다. 선과 삼원법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비롯해 지(紙)․필(筆)․묵(墨)을 통해 표현한 동양의 전통회화 대부분이 갖고 있는 양식적 특색이다. 특히 산수화 장르에서 더욱 잘 드러나며, 진경산수화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과거 중국풍의 관념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 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표현기법으로 한국 산수화의 신기원을 이루었다고는 해도, 일차적인 것은 동양의 일반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끊임없이 변화하고 작용하는 생명체로서의 자연에 대한 관조는 겸재 진경산수화에서도 예외 없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욕으로 본 겸재 진경산수화의 독자적인 시양식을 고찰하기 앞서서 우선 겸재 진경산수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인 〈금강전도(金剛全圖)〉(그림 1)를 통해 고유섭이 지적한 동양회화일반의 시양식, 즉 선(線는)과 삼원법이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금강전도〉에서 다른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무수한 암산(岩山)의 골짜기를 그려 내려간 필선과 전체 화면을 이루고 있는 구도이다. 금강산 내외경의 높고 험한 암산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예리한 필선을 수직으로 죽죽 그어 내린 이 필법은 일명 수직준(垂直皴)이라 불리는 정선이 창안한 준법이다. 겸재와 동시대를 살았던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구학첩발(丘壑帖跋)〉《관아재고(觀我齋稿)》를 통해 겸재의 독특한 준법을 난시준(亂柴皴: 땔나무를 짜갠 듯한 주름)이라 칭하면서, 조선적인 산수화법이 비로소 겸재로부터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음을 언급한다.
〈금강전도〉에서 뿐만 아니라 〈혈망봉(穴望峯)〉(그림 2)이나 〈만폭동(萬瀑洞)〉(그림 3)에서도 잘 나타난 겸재의 필선은 강약이 함께 있어 리듬감이 있고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기운생동(氣韻生動)한 선은 예로부터 동양회화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표현 요소이다. 그것은 고유섭이 언급한 대로라면 자연이 품고 있는 그 내재적 생명력, 즉 자연의 운동태와 경향태를 묘사하는 출발이 바로 선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금강산 전경을 한 눈에 담아낸 조감도식 구도는 운동의 경향태로서의 자연관을 근본으로 하는 예술의욕의 또 다른 시양식이다. 고유섭은 곽희의 삼원법을 ꡐ보고 있다ꡑ가 아닌 ꡐ보아가는ꡑ 구도로서 자연의 변화․작용원리에 합치된다고 보았다. 〈금강전도〉가 취하고 있는 산상(山上)에서 내려다 보는 부감법(俯瞰法)은 곽희의 삼원 중 심원법(深遠法)에 속한다. 심원의 형세는 그 위도가 화면 하단에 집중되어 대상이 오밀조밀하게 중첩된 세밀감이 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화면 하나에 담아내기에 적합한 구도라 할 수 있다. 비록 경물들 사이에 확 트인 여백은 없지만, 그렇다고 전통 서양화의 투시법과 같이 나와 대상이 한 점에 정지해 있지도 않다. 화면 하단에 위치한 장안사(長安寺)의 비홍교(飛弘橋)로부터 중앙의 만폭동(萬瀑洞)을 지나 윗부분에 우뚝 서 있는 비로봉(毘盧峰)까지 화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느 한 곳에서의 멈춤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금강전도〉는 그 필선과 구도에서 동양회화 일반의 예술의욕을 충분히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한국적 화풍으로 새롭게 재창출했다는 점에 〈금강전도〉를 위시한 겸재 진경산수화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금강전도〉를 두고 어떤 학자는 그 표현기법과 구도 등이 매우 세련되고 수준이 높은 것으로 미루어 이 그림이 그려진 1734년 이전에 이미 그 전형(典型)이 존재했다고 보기도 한다. 또 아무리 높은 곳에 오른다 해도 어느 한 시점에서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므로, 겸재가 실제로 금강산을 보고 그렸다는 것을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겸재가 전해 내려온 조본(祖本)에 의거해 그렸는지, 아니면 직접 금강산을 유람하며 사생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화면에 나타난 전체 화풍은 중국의 화보에서 찾을 수 없는 오직 금강산이 지니는 참모습, 즉 진경(眞景)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동양회화 일반의 예술의욕과 시양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우리의 산수자연이 지닌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어떠한 구체적인 양식을 통해 독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중묵필세(重墨筆勢)의 표현
전통적으로 동양회화에서 사용되는 표현기법은 크게 필법(筆法)과 묵법(墨法), 그리고 채법(彩法)으로 구성된다. 필법은 묘선에 해당하는 구(鉤)․륵(勒)․준(皴)․찰(擦)․점(點) 등이 속하며, 묵법은 홍(烘)․염(染)․파(破)․발(潑)․적(積) 등으로 대상의 가볍고 무거움, 향하고 등짐 및 음양을 나타낸다. 북송(北宋)의 한졸(韓拙, 11세기말-12세기초경 활동)은 《산수순전집(山水純全集)》에서 ꡒ필로써 형질(形質)을 세우고, 묵으로써 음양을 나눈다ꡓ고 하여 필묵의 관계를 양분하였다. 일반적으로 동양화론에서나 실제 그림에 임할 때, 묵법보다는 필법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필선의 강조는 고유섭이 선을 동양의 예술의욕을 표현하는 제 1의 묘화작용으로 본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필법이 운동태와 경향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묵법은 일정한 면을 가져야 그 상(象)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존재태와 완성태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 논문에서는 겸재 진경산수화에 있어서 고유한 예술의욕을 바탕으로 나타난 그 독자적인 시양식(視樣式)으로 먼저 ꡐ중묵필세(重墨筆勢)ꡑ를 다루고자 한다. ꡐ중묵(重墨)ꡑ이라 함은 ꡐ먹을 무겁게 한다ꡑ는 것으로 묵법에 해당하며, ꡐ필세(筆勢)ꡑ는 ꡐ붓에 기운을 싣는다ꡑ는 필법을 말한다. 즉 묵법과 필법을 공유한 의미인 것이다. 겸재는 이러한 중묵과 필세로서의 묵법과 필법을 그의 진경산수화에서 효과적으로 잘 조화시켰다.
진경산수의 또 다른 걸작인 겸재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그림 4)는 묵법으로서의 중묵이 잘 드러나 있다. 〈금강전도〉에서 수직준의 필선으로 암산을 묘사한 것과는 달리, 〈인왕제색도〉의 암산과 암벽은 농묵의 찰필(擦筆)로 표현함에 따라 대조를 이룬다. 주로 종(慫)의 한 방향으로 덧칠한 이 적묵의 묘법은 형태의 음영과 함께 괴체감(塊體感)을 강조하는데, 산의 암면(岩面)뿐만 아니라 화면 오른쪽의 수림(樹林) 묘사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이 수림을 처리할 때 미처 먹이 마르기도 전에 덧칠하여 물크러진 듯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비온 뒤의 습윤한 수목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기법이 되었다.
겸재는 인왕산의 백색 암봉(岩峯)을 진한 묵색으로 대담하게 처리한 반면에, 거무스름한 토산(土山)은 흰빛으로 남겨 놓고 있다. 그러나 보는 이로 하여금 전혀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러한 역색(逆色)의 묘리(妙理)는 겸재가 그 곳에 살면서 무수한 관찰과 사생을 통해 터득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한 덩어리인 듯 솟구친 백색 화감암봉들의 견고한 석질은 이러한 진한 묵색의 쇄찰법(刷擦法)으로 힘있게 쓸어내야만 그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여기서의 ꡐ그 맛ꡑ이란 인왕산에 내재된 질(質)과 세(勢)이며, 바로 천취(天趣)이자 진경(眞景)인 것이다.
이러한 중묵(重墨)의 표현은 〈청풍계(淸風溪)〉(그림 5,6)에서도 뚜렷이 나타나며, 겸재의 영향을 받은 담졸(澹拙) 강희언(姜熙彦, 1710-1764)이 그린 〈인왕산도(仁王山圖)〉(그림 7), 초원(蕉園) 김석신(金碩臣, 1758-?)의 〈도봉도(道峯圖)〉(그림 8)에서도 부분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인왕제색도〉는 화면을 전체적으로 중묵이 지배하면서 일부 토산과 운무(雲霧)를 희게 남김에 따라 흑백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그 가운데서 필선은 몇몇 산등성과 수목, 가옥의 표현에서만 보일 뿐, 큰 비중은 차지하지 않고 있다. 사실 중첩된 농묵의 편필(偏筆)도 넓은 의미에서 필선으로 볼 수 있지만, 전통 동양회화에서의 선의 의미, 즉 고유섭이 운동태를 예술의욕으로 하는 표현 양식의 출발로 본 그 선과는 거리가 있는 듯 하다. 우주의 생성원리를 담아내는 최초의 운동작용, 자연의 변화원리 및 그 내재적 생명력을 표현한 운동태의 근본양식으로서의 선은 아닌 것이다. 우선 눈에 먼저 띄는 묵법중심의 괴량감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고유섭이 지적한 바에 의하면, 면에서 출발하는 존재태의 요소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은 전통 서양회화의 예술의욕에 따른 시양식이며, 그렇다면 〈인왕제색도〉는 동양회화 일반의 예술의욕과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인왕제색도〉를 마주 대하고 있으면, 마치 운무(雲霧)가 인왕산을 끼고 조금씩 움직이는 듯하고, 수목의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하다. 이것은 화면에 분명히 생동성으로서의 운동태적 요소가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필자가 보기에 바로 중묵(重墨)안에 필세(筆勢)가 곁들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즉 정신을 집중하여 빠른 필치로 신속하게 그려낸 그 속에 기운〔勢〕이 발산되고, 운동태와 경향태를 띄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왕제색도〉는 중묵으로써 인왕산의 진경을 실재감으로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필세로써 동양회화 일반의 예술의욕까지 구현해 내고 있다.
고유섭은 조영석, 심재(沈Ɪ, 1722-1784), 신위(申緯, 1769-1847) 등이 정선에 대해 언급한 예찬에 관해 조금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으나, 〈인왕제색도〉만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대단한 칭예(稱譽)가 전(傳)하여 있는데 필자의 경험으로선, 아무래도 지나친, 말하자면 성과기실(聲過其實)의 찬사로만 보이었을 뿐이다. … 고인(古人)의 기사란 한문 그 자체의 성질상 본대가 과장적인 점에 흐르기 쉬운데다가 대개는 운문적 기록이어서 더구나 그 폐(廢)가 심하다. … 소위 (겸재에게) ‘동인(東人)의 습기(習氣)’라는 것이 약점으로 대개는 드러나 있다. 이것이 예술적으로 잘 승화되면 ‘조선적 특수성격’으로 추앙할 만하고 그렇지 않으면 논할 건덕지가 못되는 것이다. 이러한 습기가 제법 예술적 묘양(昴揚)을 얻은 것이 이 〈인왕제색도〉라는 것이다.… 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원백의 본색이라 할 창윤(蒼潤)한 맛과 장건(壯健)한 맛과 웅혼(雄渾)한 맛과 호한(浩汗)한 맛과 임리(淋漓)한 맛 등 겸재에 있어서 적극적 일면(一面)의 맛이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는 득의작(得意作)인 듯하다.
고유섭은 겸재에 대한 당대의 화평이 조금 과장되었음을 전제하지만, 〈인왕제색도〉만큼은 ꡐ조선적 특수성격ꡑ으로서의 ꡐ동인(東人)의 습기(習氣)ꡑ를 예술적으로 잘 승화시켰다고 평가한다. 고유섭의 이러한 평가는 한국적 화풍의 구현이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겸재의 중묵과 필세의 표현은 〈청풍계〉(그림 5)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가옥 뒤로 보이는 깎아 자른 듯한 수직절벽과 마당에 우람하게 우뚝 솟은 전나무에서 중묵필세를 대표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인왕제색도〉와 같이 바위벼랑은 묵찰법(墨擦法)으로 대담하게 쓸어 내려져 있으며, 수목의 표현도 일체의 기교와 세밀한 표현을 배제한 채, 둥치와 잎새를 거친 붓으로 속도감 있게 처리함으로써, 우람하고 장대한 기품을 표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토산과 계곡을 희게 남김으로써 흑백의 대조 또한 두드러진다.
청풍계(淸風溪)의 본래 이름은 청풍계(靑楓溪)이며, 지금의 청운동(淸雲洞) 52번지 일대이다. 영조 42년(1766)에 지은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안동김씨문헌록(安東金氏文獻錄)》에 의하면,
청풍계(淸風溪)는 우리 선세〔선원의 고조부인 영수永銖〕의 옛 터전인데 근래에는 선원(仙源)선생의 후손이 주인이 되었다. 경성 장의동(壯義洞) 서북쪽에 있으니 순화방(順化坊) 인왕산 기슭이다. 일명 청풍계(靑楓溪)라고도 하는데 … 대체 백악산이 그 북쪽으로 웅장하게 솟아 있고 인왕산이 그 서쪽으로 둘러 쌓았다. … 서리서리 굼틀거려 내려온 언덕을 혹은 와룡강(臥龍岡)이라 일컫는데, 실은 집 뒤 주산(主山)이 되고 그 앞이 곧 창옥봉(蒼玉峯)이다. 창옥봉 서쪽 수십 보에는 작은 정자가 날아 갈 듯이 시내 위에 올라앉아 있다. … 마당 남쪽에는 수백 길 되는 큰 전나무가 있으니 나이가 수 백년은 됨직한데 한 가지도 마르지 않아서 보기 좋다.
이 글에서 서술된 백악산과 인왕산, 그리고 와룡강이라는 언덕, 정자와 큰 전나무 등은 모두 겸재의 〈청풍계〉에서 그대로 확인이 된다. 비록 겸재가 궁극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은 대상의 천취, 곧 진경이었지만, 단순히 정형화된 형상속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이와 같이 철저한 실재 사생을 바탕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진경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역색(逆色)과 같은 대상의 변화와 중묵필세(重墨筆勢)와 같은 독창적인 기법으로 화면을 재구성하였다. 그것이 겸재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경화풍을, 또한 독자적인 한국적 화풍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점이다.
(2) 축약된 공간 구성
실경을 토대로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성 자체를 순수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겸재의 예술의욕은 중묵필세의 기법뿐만 아니라,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새로운 양식적 특색을 보여 준다. 앞서 동양회화 일반의 시양식으로 살펴본 삼원법은 산수를 멀리 바라봄으로써 정신적 해탈을 추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천지의 도(道)를 체득한다는 의미로서의 확대 지향적 공간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삼원법을 근간으로 중국의 전통 화보에서는 산수를 심산유곡(深山幽谷)․중봉연만(重峯連巒)․평원운산(平遠雲山) 등으로 형식화해 왔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영석은 겸재의 《구학첩(丘壑帖)》에 부친 발문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포치(布置)를 보면 이따금 너무 빽빽하여 언덕과 골짜기가 화면에 꽉 차서 하늘빛이 조금도 보이지 않으니, 원백(元伯)의 그림이 공간(落笳)의 경영(수법)에 있어서 미진한 바가 있는 듯하다고 생각되는데, 원백 당신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조영석도 지적하듯이 겸재의 화면은 전통적인 동양회화에 비해 ‘하늘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 다분히 공간이 축소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동양회화에 있어 기(氣)의 표상으로 여기는 여백(餘白)을 의미한다. 즉 여백은 단순히 비어있는 공백이 아니라, 무한한 공간으로의 확대를 창출한다. 겸재의 진경산수화에는 이러한 여백이 종종 희생된다. 물론 〈우화등강(羽化登舡)〉(그림 9)이나 〈웅연계람(熊淵繫纜)〉(그림 10)과 같이 확 트인 공간을 남겨 놓기도 한다.
겸재는 표현하고자하는 실경의 미감과 그 특징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의 화면 구성을 하고 있다. 〈우화등강〉이나 〈웅연계람〉과 같이 물가에 위치한 명승명소(名勝名所)이거나 범위가 넓은 공간을 그린 경우가 첫 번째 유형이며, 두 번째 유형은 특정한 경물을 크게 부각시켜서 화면이 꽉 차도록 구성하는 경우이다. 세 번째 유형은 첫 번째 유형과 두 번째 유형의 중간적인 특징을 가진 경우로 산과 물이 함께 하는 한정된 공간을 다루는 작품들에 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유형은 전통적인 실경산수화에 나타난 화면 구성으로 정신적 자유해방으로서의 소요유(消遙遊)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다. 이 때 그 공간은 사람이 실제 한 지점에서 볼 수 있는 시력의 한계를 훨씬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하나의 풍경을 그렸지만, 그것이 포괄하는 이상향의 모습까지 그리고자 한 이미 도식화된 구도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두 번째 유형의 화면은 공간이 거의 사라지고 화면 전체가 경물로 채워져 있다. 〈인왕제색도〉,〈청풍계〉,〈만폭동〉과 같이 겸재 특유의 표현을 통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룬 그림에서 주로 나타나는 구성이다. 앞서 조영석이 공간 경영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바로 이러한 류의 화면을 가리킨 듯 하다.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은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종합시킨 것으로 주로 바닷가 또는 물가의 경관을 그린 그림에서 볼 수 있다. 〈총석정(叢石亭)〉(그림 11)이나〈연광정(練光亭)〉(그림 12)과 같이 주가 되는 경물을 강하게 부각시키면서도 또한 적당한 공간감을 표현하고 있는 구성이다.
이와 같이 겸재가 택한 구도의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살펴보았는데, 이중 겸재의 개성이 드러난 독특한 양식은 두 번째 유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당대의 일반적인 성향이 경물과 화가 자신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린 것에 반해, 겸재는 그러한 거리를 과감히 밀착시켰다. 주된 대상들이 너무나 확고하게 화면을 차지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기세에 압도당하게 한다. 겸재는 더 나아가 진한 묵색의 중묵(重墨)과 힘있는 필세(筆勢)로 그러한 인상을 한층 강화시킨다. 이처럼 겸재가 특정한 소재를 집중적으로 표현하거나 혹은 경물들을 화면 가득 채움에 따른 축약된 공간구성은 바로 대상의 실체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화가 자신의 내면성을 보다 강하게 표출할 수 있었던 시양식이었다.
〈화강백전도(花江栢田圖)〉(그림 13)와 〈불정대도(佛頂臺圖)〉(그림 14)에는 겸재의 그러한 개성적인 공간구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그림에서 보이는 여백은 하늘을 가리키는 화면 상단의 공간뿐이며, 경물들 사이에는 거의 공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있다. 특히 〈화강백전도〉에 나타난 원경(遠景)의 수림은 실제로 그 안에 서면 정말 ‘하늘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화면을 가로지르며 빽빽이 들어서 있다. 거기다 겸재는 〈인왕제색도〉에서와 같은 큰 미점(米點)의 수지법(樹枝法)을 강한 중묵으로 가득 채워 화면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불정대도〉는 마치 전체 그림의 일부분을 잘라 놓은 듯이 겸재 특유의 골산(骨山)을 화면 전면에 가까이 배치시키고 있다. 그에 따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 눈앞에 있는 듯이 그 장중하고 험한 산세를 느끼게 한다.
고유섭이 화면 구성에 있어서 동양회화 일반의 시양식으로 든 것은 확대 지향적 공간으로서의 삼원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운동의 경향태로서의 자연에 대한 인식의 표출이었다. 겸재 진경산수화에도 삼원은 존재한다. 〈화강백전도〉는 수평시(水平視)의 평원(平遠)이, 〈불정대도〉는 앙시(仰視)의 고원(高遠)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삼원(三遠)은 단순히 화가의 눈 높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탈 세속으로서의 원(遠)을 자각하는 무한한 공간을 내포하며, 감상자는 그 안에서 자신과 대상을 이동시켜가며 자연을 관조하게 된다.
화면 전체를 경물로 채우는 겸재 진경산수화에는 이러한 원이 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금강전도〉나 〈만폭동〉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금강전도〉에서는 무수한 봉골(峯骨)과 토산(土山)이 화면 가득 채워져 있지만, 거센 필선으로 그어 내려간 그 안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원함이 분명 느껴진다. 또 〈만폭동〉에서는 조금 산만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만폭동 골짜기 안에 들어서서 가질 수 있는 시감(視感)을 그대로 화폭에 옮길 때 생기는 구도라고 볼 수 있겠다. 화면 속의 선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겨가며 감상하는 중에 바로 원을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경물들을 화면 전체에 가득 채우거나, 아니면 특정한 경물을 부각시키는 겸재의 화면 구성은 중묵필세와 함께 분명 또 다른 독자성을 띤다. 즉 축약된 공간구성을 통해 대상중심의 표현을 함으로써, 마치 직접 대하는 듯한 실재감을 가지게 할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지닌 질(質)과 세(勢)를 강하게 표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외․내적 사실성을 의미한다. 이하곤 또한 겸재의 그림이 전신(傳神)과 형사(形似)를 모두 겸비한다고 보았다.
그림이란 정신을 전하는 것이 어렵다네, 칠팔분만 비슷해도 그 역시 고수라네. 원백의 해악도들 묘한 곳은 거의 전신을 이루고, 평범한 곳에서는 모두 비슷함(形似)을 이루네.
한편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히 필요없는 부분은 적당히 생략되고 강조할 부분은 더욱 부각된다. 겸재는 대담하게 대상을 생략하고 과장 또는 조절하여 대상의 요체(要諦)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처럼 표현에 있어 적절한 가감(加減)을 통해 대상을 부각시킨 겸재의 화면은 사실성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더 뛰어난 사실, 즉 대상의 질(質)과 세(勢)까지 표현해냄으로써, 마침내 고유한 진경(眞景)의 경지를 구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3) 겸재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한국회화의 정체성
고유섭은 〈동양화와 서양화와의 구별〉에서 운동의 경향태로서의 자연관을 예술의욕으로 하는 동양회화 일반의 시양식(視樣式, Sehform)으로 선과 삼원법을 들었다. 선은 운동태를 표현하는 묘화작용의 출발로서, 삼원법은 화면에 나와 대상을 이동시키는 공간 추구의 한 방법으로서, 전통적인 동양회화에 있어서 오랫동안 정형화된 법칙과도 같았다. 고유섭이 제시한 전통 동양화, 엄밀히 말해 수묵산수화에 나타난 예술의욕과 시양식은 서양의 전통회화〔유화〕에 대한 지역적 특수성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상대적 차별성을 통해 밝힌 그 지역적․문화적 특수성은 이른바 정체성이란 말로 대치시킬 수 있겠다. 따라서 필자가 보기에 고유섭은 동양회화 일반의 정체성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겸재 진경산수화가 독자적인 한국적 화풍을 이루었다고 평가함은 곧 한국적 특수성과 정체성을 성취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동양회화 일반의 특수성과 차별화된 예술의욕과 시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앞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한국회화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일은 한국회화에 나타난 여러 특색들 속에서 자아의식의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고유한 전통을 발견하는 것인데, 그것은 양식의 특수성을 분석하고, 그 형성원리로서의 예술의욕을 통해 한국회화 양식의 보편적 법칙성에 대한 의미해석을 내림으로써 가능하다고 하였다.
겸재는 고유색의 발현이라는 새로운 시대사조로서의 사실정신에 입각해 한국적인 진경산수화를 창출하였다. 자연을 사변적이고 원리의 규범적 존재로 파악하려는 전통적 자연관이 있는 그대로의 실재 모습으로 보려는 객관적 자연관으로 변화함에 따라, 예술양식에 있어서 그 형성원리인 예술의욕이 변화되었다. 대상자체의 객관성과 현실성을 중시하고 그 내면의 본질까지 취하고자 한 시대 예술정신은 예술의욕으로 작용하였고, 겸재 진경산수화의 출발도 여기에 있었다. 겸재는 대상의 질(質)과 세(勢), 즉 천취(天趣)로서의 진경을 실재하는 우리의 산수자연에 적용하여 그 참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였고, 우리는 그것을 진경산수화라 칭한다.
겸재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고유한 예술의욕은 또한 그에 적합한 시양식을 낳는데, 중묵필세(重墨筆勢)의 표현과 축약된 공간구성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정형화된 형상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철저한 실재 사생을 바탕으로 하였던 겸재는 진경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기법에 있어서는 중묵필세를, 그리고 화면구성에 있어서는 축약된 공간구성으로 재창조하였다. 그것은 중국 전통회화답습의 일변도에서 벗어나 우리의 시감(視感)에 합(合)하려는 자각정신이며 자아의식의 발로였다.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동시대의 다른 어떤 화가와도 차별되는 독특한 주제와 양식, 표현력을 성취했다는 점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위대함은 외적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데 있다. 출발은 전통 동양회화의 예술의욕과 형식을 바탕으로 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바로 우리자연에 대한 깊은 관조와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표현법으로 창출함으로써, 한국성을 획득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겸재 진경산수화는 산수화뿐만 아니라 회화 전반에 걸쳐 한국적 특수성과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화풍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와 같은 예를 조선후기의 풍속화나 민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풍속화와 민화는 모두 민족적 자아의식에 토대를 둔 민중문화 예술이며 서민의 생활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또 다른 한국적 화풍의 구현체이다. 고유섭은 한국미술의 특색은 신앙과 생활이 결코 분리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조선의 미술은 민예적(民藝的)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조선의 미술은 순전히 감상만을 위한 근대적 의미에서의 미술이 아니다. 그것은 미술이자 곧 종교요, 미술이자, 곧 생활이다. 말하자면 상품화된 미술이 아니므로 정치(精緻)한 맛, 정돈된 맛에서는 항상 부족하다. 그러나 그 대신 질박한 맛과 둔후(鈍厚))한 맛과 순진(純眞)한 맛에 있어서는 우승(優勝)하다.
생활은 곧 현실체험을 말한다. 비록 겸재 진경산수화가 명대(明代) 남종화풍을 토대로 한 것이기는 하나, 단순히 그 모방에 머무르지 않고 사실정신으로서의 현실체험을 통해 새롭게 재창조한 면이 독자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겸재 진경산수화와 더불어 풍속화와 민화, 또 근․현대의 몇몇 작가에게서 보이는 우리의 현실을 주체적으로 체험한 한국회화에 대한 연구이다. 거기에는 막연히 소재와 표현형식에 의거한 피상적․주관적․감상적 접근이 아닌, 미적 현상의 본질적인 근거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보다 체계적 인식이 요구된다. 그럼으로써 한국회화는 중국회화의 아류로써가 아닌 당당한 정체성을 획득할 것이며, 또한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더 이상 변방으로 밀려나 있지 않고 오히려 주도적인 잣대를 제공할 것으로 믿는다.
5. 결 론
이상으로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이 예술의욕(Kunstwollen)과 그것의 시양식(Sheform, 視樣式)을 통해 동양 회화의 본질적 특성을 고찰해 본 방법을 빌어 필자는 한국 전통회화, 특히 겸재(謙齋)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에 적용해 보았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유섭에 의하면 전통 동양 회화 일반의 예술의욕은 자연관에 근거하며, 동양에서의 자연은 실재하는 물적 존재가 아니라 만물을 생성․운동․변화케 하는 총원리이며, 살아있는 유기체의 총체를 의미한다. 이를 고유섭은 운동태와 경향태로서의 자연관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또한, 고유섭은 양식의 내적 동인(動因)으로서의 예술의욕에 근거해, 그 시양식으로써 선(線)과 삼원법(三遠法)을 제시하였다.
요컨대, 선은 운동태의 표현 출발이 되며, 삼원법은 확대 지향적 공간을 제공하는 화면 구성방법이다. 이에 덧붙여 필자는 담채(淡彩)와 태점(苔點) 도 일종의 운동의 경향태적 요소가 된다고 보았다.
겸재의 진경 산수화는 기본적으로 동양 회화 일반의 예술의욕과 시양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예술의욕과 시양식을 통해 겸재 진경산수화만이 갖는 특수성을 재창출하였다.
조선 후기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난 새로운 시대사조로서의 사실정신은 정신뿐만 아니라, 외형의 참됨까지 중시하는 ꡐ진(眞)ꡑ을 강조하게 된다. 또한, 관념적 사유에 바탕을 둔 전통적 자연관을 순수한 미적 관조대상으로서의 객관적 자연관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필자는 바로 이점을 예술의욕의 변화로 보았다. 곧 예술에 있어서도 표현 대상 자체의 객관성과 현실성이 중시되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 내면의 본질까지 취하고자 하는 예술정신이 고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술정신을 화풍으로 가장 잘 구현해 낸 것이 바로 겸재의 진경산수화이다. 겸재는 실재하는 우리 산수 자연의 외․내적인 참된 모습을 표현하여 그 본연지성(本然之性)을 그대로 현현시키고자 하였던 바, 그러한 예술의욕을 바탕으로 겸재는 또한 적합한 시양식(視樣式)을 창조해 내었다.
요컨대, 철저한 사생을 바탕으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겸재는 중묵필세(重墨筆勢)와 축약된 공간구성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뿐만 아니라 대상의 질(質)과 세(勢)까지 드러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사실성을 이루어 내었다 하겠다. 위와 같은 겸재의 화풍은 전통적인 화보(畵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자적인 화풍이었으며, 그 시대의 예술정신에 입각한 자기 인식을 통해 창출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이 겸재 진경 산수화는 우리 자연에 대한 색다른 관조 태도와 재해석을 바탕으로 새로운 양식을 재창조 해냄으로써 고유한 특수성을 획득하였다. 필자가 겸재의 진경 산수화를 가리켜 한국적 특수성과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화풍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한 시대의 독특한 양식의 특수성을 분석․기술하고, 그 법칙성을 구함으로써 그 결과 양식의 보편성에 대한 규정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또한, 그 보편적 양식에 대한 의미해석을 규정할 수 있는 가능한 근거는 양식의 형성 원리로서의 예술정신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제 필자에게 남은 과제는 진경 산수화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회화 일반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양식의 유형적 특성이 가려져야겠고, 그에 앞서 양식의 체험 형성 과정에 대한 이론적 바탕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한국 회화 일반에 대한 정체성 고찰은 단순히 다른 것과의 차별을 통한 상대적 정체성이거나, 더욱이 획일적인 전통 소재주의나 전통 중심사고에 근거한 정체성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미적 현상의 본질적인 근거에 대한 물음과 보다 체계적인 성찰에 의해 검토된 정체성의 모색이 요구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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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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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鄭敾, 〈穴望峯〉, 비단에 담채, 33.3×21.9㎝,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그림 3. 鄭敾, 〈萬瀑洞〉, 비단에 담채, 33.2×22.0㎝,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그림 4. 鄭敾, 〈仁王霽色圖〉, 종이에 수묵, 79.0×138.0㎝, 호암미술관 소장.
그림 5. 鄭敾, 〈淸風溪〉, 비단에 담채, 133.4×59.0㎝,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 6. 鄭敾, 〈淸風溪〉《壯洞八景》, 종이에 담채, 32.9×29.4㎝, 국립박물관 소장.
그림 7. 姜熙彦, 〈仁王山圖〉, 종이에 담채, 24.6×42.6㎝ 개인 소장.
그림 8. 金碩臣, 〈道峯圖〉, 종이에 담채, 36.6×53.7㎝, 개인 소장.
그림 9. 鄭敾, 〈羽化登舡〉《蓮江壬戌帖》, 비단에 담채, 33.5×94.2㎝, 개인 소장.
그림 10. 鄭敾, 〈熊淵繫纜〉《蓮江壬戌帖》, 비단에 수묵, 33.5×116.5㎝, 개인 소장.
그림 11. 鄭敾, 〈叢石亭〉, 비단에 담채, 18.0×12.8㎝,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림 12. 鄭敾, 〈練光亭〉, 비단에 담채, 29.5×23.5㎝, 독일: 성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그림 13. 鄭敾, 〈花江栢田圖〉《海嶽傳神帖》, 종이에 담채, 32.0 × 24.8 ㎝,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 14. 鄭敾, 〈佛頂臺圖〉《海嶽傳神帖》, 종이에 담채, 간송미술관 소장.
ABSTRACT
A Study of Qiꐀn zhꐀi(謙齋)'s True Landscape in the Point of the volition of Art―On the Basis of the Viewpoint of Ko, Yoo-seup(高裕燮)
by Jae-Hee, Choi
Major in Art Education
The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Kyung Hee University
Seoul, Korea.
Ko,Yoo-seup based the distinction of style revealed in Chinese and Western painting on the volition of art(Kunstwollen) as an origin of style creation. The Volition of art(Kunstwollen) gets to be a primary momentum of art representation. And also, in the end, the works of art, in the meaning of making figuration of the volition of art, are in accord with consideration(立意, ì yì) in the whole theory of Chinese art.
The volition of art exposed in the ink painting landscape(水墨山水畵, shuǐ mò shꐀn shuǐ huꐃ) presented by Ko, Yoo-seup and form of seeing(Sehform, 視形式) threw light on the Oriental peculiarity against the original Western painting(oil painting). This kind of viewpoint of Ko,Yoo-seup seems to be a try in order to make clear the identity of Chinese art in large. In other words, it seeks the universal rule in the style and defines the interpretation of meaning about the style through the volition of art. We regard this method of approach by Ko, Yoo-seup as a methodological possibility to verify the identity of Korean painting in large.
According to Ko, Yoo-seup, the volition of art in the whole Chinese art provides a basis for the viewpoint of nature. Nature in Orient has been recognized as a principle by which nature generates, moves and changes and furthermore, as the whole of living organism. They think nature in itself moves, changes and acts incessantly. Ko, Yoo-seup considered this viewpoint of nature as that of the state of tendency of movement and he made examples lines and three rules of perspective as a form of seeing revealed by it. Lines become the starting point of the expression! of the state of movement and three rules of perspective give the space of enlargement on the art screen and we can see light Chinese ink(淡彩) and dark point(苔點) in the Chinese art as another form of seeing including elements of the state of tendency of small movement.
In my opinion, the true landscape drawn by Qiꐀn zhꐀi in the latter part of Lee Dynasty who is estimated to establish a unique style of Korean painting includes the volition of art in the whole Chinese art and form of seeing. In addition to that, his painting seems to recreate the unique peculiarity which we can see only in his own works of true landscape. At the outset of the latter part of Lee Dynasty, the spirit of reality as a new trend of the times comes to emphasize not only the spirit but also the genuineness(眞) which lays stress on the essence of the external form. The spirit of reality of this sort transforms the traditional viewpoint of nature based on ideological thought into objective viewpoint of nature as a pure object of aesthetic contemplation. We come to see it as a change of the volition of art. In the case of art, concrete reality which emphasized the objectivity and actuality of the object in itself and grasped the essence of the inner world got to be embossed. As the basis of such spirit of art, Qiꐀn zhꐀi, through true landscape, tried to show the essential characteristic by way of true expression! of the outer and inner figures of existed mountains, rivers and many other things in the nature of Korea.
Qiꐀn zhꐀi created his own peculiar form of seeing(Sehform) which is proper to his true landscape. Although he practised and practised making a sketch of the nature completely, he reached the stage of ꡐreal sceneryꡑ in the true sense through the appropriate modulations of laying stress on the Chinese ink and brush strokes(重墨筆勢) and space composition and the expression! of the original material[質] and peculiar force[勢] of an object.
Like this, Qiꐀn zhꐀi in his true landscape, recreated the new form of seeing on the basis of an attitude of different contemplation and new interpretation of Korean nature. He attained the unique style of painting which we could see in the traditional Chinese painting and it was created through the ground of evident self recognition. At this point in Qiꐀn zhꐀi's true landscape, we can find out the foundation of peculiarity and identity of Korean painting. Furthermore, within this system of thought, it seems to be possible that we examine closely the identity of the whole Korean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