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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8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요한 16,16-20
세상이 비웃는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지 않으면 성령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하시며 떠나는 것은 잠시지만
그 근심은 “조금 있으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하십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이 근심할 때는 세상이 기뻐할 때이고 세상이 근심으로 바뀔 때 우리는 기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려는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려고 결심했을 때 주시려는 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려고 결심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주님은 성령의 도우심을 주십니다.
우리 힘으로는 용서도 사랑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정원 씨가 유영철을 용서할 마음이 생긴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 때문이었고 그 마음을 채워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물론 고정원 씨는 성령을 받는 시간인 기도 시간을 꼭 가졌습니다.
고정원 씨가 고통을 받을 때는 세상은 ‘그것 봐, 용서가 안 되지?’라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세상은 고통 속에 잠겼습니다.
유영철을 양자로 삼고 용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고정원 씨는 용서가 되는 신기함에 기뻐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믿음과 사랑이 희망 속에서 성장합니다.
윌마 루돌프는 1940년 6월 23일 테네시 주 세인트 베들레헴에서, 그리고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정에서 22명의 자녀를 둔 가정에서 갓 1kg이 넘는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루돌프는 네 살 때 왼쪽 다리와 발이 마비된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의사는 그녀의 가족에게 그녀가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가족은 매우 종교적이었고 그들의 신앙은 이 어려운 시기에 힘과 희망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는 기적과 기도의 힘을 믿었고 자신이 직접 집에서 정기적인 물리 치료를 하였습니다.
딸의 삶을 장애로 정의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그녀의 믿음에 대한 증거였으며, 그녀는 이러한 믿음을 윌마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처음엔 어머니의 믿음을 비웃던 의사들은 아홉 살 때 루돌프가 다리 보조기 없이 걷는 법을 배운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농구와 육상 경기에 대한 사랑을 키웠습니다.
그녀는 걸을 수도 없었지만,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루돌프는 엄청난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루돌프가 16세의 나이에 1956년 멜버른에서 열린 첫 올림픽에 출전하여 4x1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4년 후인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그녀는 100m, 200m, 4x100m 계주에서 단일 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 되었습니다.
트랙에서 은퇴한 후 루돌프는 교사와 코치가 되었고 자선단체를 설립하여 아프리카 여성들의 인권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플랫폼을 사용하여 젊은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믿음을 공유하고
그들도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무언가 하려면 비웃습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참아내게 합니다.
사랑은 믿음을 낳고 그 믿음은 인내를 낳습니다.
그 인내 뒤에 반드시 기쁨이 온다는 믿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무하마드 유누스’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그도 믿음으로 세상의 비웃음과 맞서 결국 기쁨을 쟁취한 인물입니다.
1940년 6월 28일 방글라데시 치타공 항구 도시에서 태어난 무하마드 유누스는 사회적 기업가, 경제학자, 시민사회 지도자로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고 소액 신용대출 개념을 개척한 공로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유누스는 가족 중 아홉 자녀 중 세 번째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금세공인으로 항상 아들들에게 고등 교육을 받도록 격려했습니다.
유누스는 방글라데시 다카 대학교에 다녔고,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방글라데시 해방전쟁이 끝난 1972년 유누스는 치타공대학교 경제학과장이 됐습니다.
1974년 방글라데시의 기근은 유누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유누스는 경제에 대한 이해를
재고하고 경제 이론이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도울 방법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유누스는 학교를 나와 가난한 사람들과 머무는 실험을 계속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인력거를 17,000원에 비싼 이자로 빌려 허덕이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실험을 합니다.
그의 첫 번째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요브라 마을에서 대나무 가구 만드는 42명의 여성에게 주머니에서 총 27달러를 빌려준 것입니다.
이 소액 대출을 통해 원자재를 구입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비웃었습니다.
아무도 안 갚을 것이라고. 그러나 돈의 회수율은 98%였습니다. 세상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실험의 성공에 힘입어 유누스는 1983년에 Grameen Bank(Village Bank)를 설립했습니다.
이 은행은 상호 신뢰, 책임, 참여 및 창의성에 기반을 둔 은행 시스템인 신뢰와 연대의 원칙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그라민 은행은 생산적인 활동을 하거나 소규모 사업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액 대출로 알려진 소액 대출을 제공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라민 은행은 크게 성장했으며 전 세계의 다른 소액 대출 기관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2021년 9월을 기준으로 그라민 은행은 2,600개 이상의 지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방글라데시의 81,000개 이상의 마을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자금은 수조 원대로 늘었고 상환율은 90% 이상입니다.
소액 금융 분야에서 유누스의 업적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2006년에 그와 그라민 은행은
“아래로부터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이렇듯 세상에는 세상의 비웃음을 오히려 비웃으며 꿈을 이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비웃는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고 세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18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요한 16,16-20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문다면 아무리 나이들어도 청춘을 살수 있습니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께서 택시를 탔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운전 기사분 연세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동년배끼리 만났는지라 반갑게 인사를 한후, 목적지 영등포역으로 잘 가고 있던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승객 어르신께서 운전 기사 어르신께 묻습니다.
'기사 양반! 내가 어디 가자 합디까?'
운전 기사 어르신의 반응이 더 웃깁니다.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습니다.
'아이고 깜짝이야! 대체 언제 타셨슈? '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는 극단적 노령화의 가속으로 인한 여파가 만만치 않습니다.
인구수가 급격히 줄어든 농촌 지역의 많은 지자체들은 존립 자체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더 이상 신자들이 오지 않는 관계로 대성전이 매물로 나오고 성전이 공연장이나 술집으로 바뀌는
유럽 교회의 현실이 우리에게 멀지 않습니다.
한때 공동체의 주역으로 왕성히 활동하던 나였는데, 이제 새파란 후배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물려주고 무대 뒤로 내려와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듭니다.
나이듦에 따른 노화와 질병, 죽음 앞에서 비참함을 느낍니다.
쪼글쪼글 얼굴에는 주름이 잡히고, 내 삶이 이토록 쪼그라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고통이요 슬픔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주님 손길 안에 지속적으로 머문다면, 우리는 영원히 청춘을 누릴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 매일 매순간을 살아갈때, 죽음 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인도자이신 성모님께서 탁월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모님은 평생토록 주님 뜻 안에 사셨기에, 영원한 젊음을 누리며 사셨고, 지금도 젊고 활기찬 어머니로서 우리를 동반하고 계십니다.
부끄럽지만 감사하게도 성모님의 달 5월에, 성모님을 주제로 한 제 세번째 책 '양승국 신부의 성모님 이야기'(성바오로출판사)가 오늘 출간되었습니다.
책 소개 글에 따르면 성모님의 생애에서부터 시작해서, 성모님 관련 4대교리까지, 총 열개의 강좌를 통해 성모님에 대한 모든 것을 질의응답식으로 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관심 가져주신다면, 힘겨운 교회 출판 시장 안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성바오로 수도회 신부님, 수사님들께 큰 힘이 될것입니다.
구입문의
02-945-2927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6주간 목요일>
(2023. 5. 18. 목)(요한 16,16-20)
<기쁨>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지금 상황은 최후의 만찬 후에 제자들에게 작별의 말씀을 하시는 상황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임박해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곧 닥친다는 뜻이고,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죽음 때문에 당신과 제자들이 떨어져 있는 시간은 짧다는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은 만 이틀 정도입니다.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 때문에 제자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곡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좋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복음 선포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했던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했다고 생각하고서 안도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의 죽음 때문에 너희는 ‘큰 슬픔’에 빠지겠지만, 그 슬픔은 곧 ‘큰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뜻이고, 이 말씀도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근심’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기뻐하거나 좋아했던 박해자들은 예수님 부활 후에 어떻게 바뀌었을까?
성경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들은 당혹감, 불안감 등을 느꼈던 것 같고(사도 2,43),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시작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분노했습니다(사도 4,2).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죽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부활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 믿음과 희망 속에서 기다려라.”>
앞의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3)”
또 베드로 사도에게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
이 말씀들은 당신의 십자가의 길은 온전히 당신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과 제자들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부활 신앙이 없는 제자들이 당신의 뒤를 따르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만일에 부활 신앙이 없는 제자들이 ‘죽음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자살행위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라는 말씀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지상에서의 인생은 짧은 십자가의 길과 같다.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라는 약속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석하더라도, 지상에서의 신앙여정을 슬픔과 고통만 있는 십자가의 길로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금’이라는 시간은 이천 년 전에 지나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부활하실 예수님’이 아니라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신앙인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기쁨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그 기쁨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힘든 일도 많고 슬픈 일도 많습니다.
‘영원한 기쁨’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불완전하고, 쉽게 깨지거나 잃을 때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충실한 신앙인들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시작되었고 이미 누리고 있는 영원한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요한 16,2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신 것에 대해서 늘 기뻐해야 하고, 또 그것을 감사드려야 하고, 그러면서도 지상에서의 인생을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