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가
박재삼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 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 올 따름, 그 옆에 순순한 그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 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산과 언덕들의 만 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 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시집 『춘향이 마음』, 1962)
[작품해설]
이 시 역시 춘항전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연작시 「춘향이 마음 초(抄)」의 하나로, 춘향의 마음으로 상정된 그리움과 한(恨)의 정서를 애틋한 어저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1연에서는 춘향의 그리움을 밝은 이미지의 사물들을 통해 형상화함으로써 이도령을 향한 춘향의 사랑이 지순하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2연에서는 평범한 일상어와 의문형의 영탄적 어법을 통해 비애의 감정을 철저히 절제시키고 있다.
이 시는 산문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동일한 시구의 반복과 변용을 통해 음악적 효과를 얻는 것은 물론, 감정이 확신되는 것을 적절히 절제하고 있다. 아울러 시어 선택의 세심한 배려와 종결 어미의 반복적인 배치, 그리고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미지 들으로 이 도령에 대한 그리움을 스스로 절제하고 있다. 특히 1연의 ‘우물집이었을레’ · ‘그런 집이었을레’ · ‘아니었을레’ 같은 의미 유보의 어투는 감정을 절제하는 시적 장치로 기능하며, 2연의 ‘보았을까나’ · ‘하였을까나’ · ‘아니었을까나’ 같은 의문형의 영탄 화법 또한 감정 표현을 제어하는 형식적 특성으로 작용한다.
1연에서 춘향의 맑고 순수한 마음을 ‘정화수’ · ‘아침’ · ‘물방울’ · ‘우물집’ · ‘마루’ · ‘평상’ 등의 밝은 이미지의 시어들과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 · ‘물 냄새 창창한 그런 집’ 같은 시구를 통해 형상화한다. 춘향을 집으로 친다며, 정화구 잔잔한 위 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고, 물 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 것으로 서술한다. 반면에 이 도령은 바람 같은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그는 바람같은 존재여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만, 화자는 그가 바람 같기에 언제라도 올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닌다. 따라서 화자는 자신이 그러한 바람을 맞아 순순히 스러져도 좋을 그런 ‘물방울’이 되기를 원한다. 이러한 춘향의 한결같은 그리움이야말로 ‘순순한 물방울’이요, 무색투명한 ‘수정’이다.
2연에서는 춘향의 비애의 감정을 평범한 일상어를 통해 담담하게 서술한다. 이 도령이 돌아올까 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푸른 산언덕들을 쳐다보고, 그 때마다 일어나는 그리움에 얼마나 흐느꼈을 거냐고 질문한다. 그렇지만 춘향은 자신의 슬픔을 절제할 줄 아는 슬기로운 사람이기에 바람에 어울린 수정 같은 존재임이 틀임없다고 서술한다. 시인은 특히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 · ‘물살 짓는 어깨’ · ‘만 리 같은 물살’과 같은 동적이면서도 시가적인 이미지의 표현을 이용하여 이 도령에 대한 춘향의 애틋한 그리움을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1연에서는 ‘바람에 순순한 스러지는 물방울’이던 춘향의 모습은 2연에 와서 ‘바람에 어울린 수정 빛 임자’로 변모한다. 이는 맑고 깨끗하지만 사라질 수밖에 없는 물방울과 같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존재에서 바람과 조화를 이루며 수정처럼 빛나는 존재로 발전하는 실제 춘향과 부합됨을 알 수 있다. 결국 시인은 춘향을 허구적 인물로 재창조하지 않고 작품의 모태인 춘향전 속의 춘향과 같이 사랑의 감정과 이별의 정한 속에서 기뻐하고 애태우는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의 공감을 더욱 크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작가소개]
박재삼(朴在森)
1933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하여 경상남도 삼천포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국문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물에서」가 추천되어 등단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정적(靜寂)」, 시조 「섭리(攝理)」가 추천되어 등단
1956년 제2회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1967년 문교부 문예상 수상
1977년 제9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82년 제7회 노산문학상 수상
1983년 제10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6년 중앙일보 시조대상 수상
1997년 사망
시집 : 『춘향이 마음』(1962),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밤』(1975), 『어린것들 옆에서』(1976), 『뜨거운 달』(1979), 『비듣는 가을나무』(1980), 『추억에서』(1983), 『아득하면 되리라』(1984), 『거기 누가 부르는가』(1984), 『간절한 소망』(1985), 『대관령 근처』(1985), 『찬란한 미지수』(1986), 『박재삼시집』(1987), 『사랑이여』(1987), 『가을 바다』(1987), 『바다위 별들이 하는 짓』(1987),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7), 『햇볕에 실린 곡조』(1989), 『해와 달의 궤적』(1990), 『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1991), 『허무에 갇혀』(1993), 『나는 아직도』(1994), 『다시 그리움으로』(1996),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1997), 『박재삼시선집』(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