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天路)를 걷는 삶(9/17)
-과연 내가 복음적인가-
많은 성도들은, ‘나 자신은 복음적인 사람이야’라고 하는 기준을, 복음을 읽고 듣고 열심히 배워서 그러한 것들로 말 잘하는 것으로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난 복음적인 성도야~’ 라고 할 수가 없다.
사도 바울은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비판을 받은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복음서의 12사도가 아니며 또한 사도라고 하면서도 사도가 누릴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거센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4~6)
바울은 사도이면서도, 사도의 권리를 저들과 함께 누릴 수 있으면서도 포기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자신의 권리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니라”(고전9:12)
사도 바울이 사도직으로 비판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마저도 주의 복음을 위해 포기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일이라 해도 복음에 장애가 된다면 그 유리함마저 버린 것이다.
그는 일반 인간들이 생각하는 외형적 ‘사도다움’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사도는 이래야 한다는 데서 벗어나 활동했기에 ‘왜 저래’라는 비판을 받은 것이다. 오직 주의 복음과 이방인을 향한 소명 때문이었다.
결국 복음적이다 복음적이지 않다는 것은, 성경의 지식을 갖춰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 예수님과 한 몸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즐겨 쫓아가느냐 하는 여부에 있다는 것이다.
나의 고상함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십자가의 흔적을 참 자유로 알고 그것을 기뻐하며 내 몸에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복음을 말하는 우리의 사고와 정신이, 십자가보다는 세상의 관습을 따라 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주여 주여 하면서도 결국 자신을 위하며 자기의 육체적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이 그랬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다시피 하면서도 정작 주의 십자가를 쫓는 그 길에서는 슬금슬금 발걸음을 뒤로 한다.
그러고서도 ‘난 복음의 사람이야’라고 큰소리는 가장 먼저 쳐대고 의식적이며 겉으로 치장하고 보이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자칭 의인이라 했으나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자들이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구제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지만 저들은 동네방네 자랑한다.
더군다나 작은 일을 해놓고서도 큰 일을 한 것처럼 무덤에 회칠하는 것이 저들의 삶이다.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바울의 고백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흔적을 지녔다는 의미이다.
십자가는, 보며 노래하고 감상하라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와 죽으심을 몸에 가져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