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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야 쓴다.
은혜공동체 두 번째 방문
11월 23일. 토요일.
두 번째 가는 은혜공동체는 첫 번째 방문 때 처럼 회의하는 시간이 아니라 잔치였다. 먹는 잔치, 말 잔치. 놀이와 예술 잔치, 어울림 잔치.
자나키지, 바와니지, 란지따지. 같이 갔다.(란지따지는 몸이 불편해 근처에서 회군!) 다들 바쁜 시간을 내어 왔겠지만 나는 아침 8시에 집을 나서고 서 너번씩 차를 바꿔 타며 올라갔고 밤 11시 10분에 출발하는 심야로 내려와 다음날에야 귀가했다.
AM과 자그리티. 보다 밀도 있는 관계성을 떠올리며 쓴다. (등이 보이는 분, 누굴까? 설명은 생략한다.) (옥상에 이르렀다. 지하에서 부터.....) 1. 환호, 신명, 하나 됨.
소감이 각기 다를 것이다. 나는 과감하게(?)도 은혜공동체의 운영방식이나 재정 운용, 철학, 다툼 해결 방식, 자급도 등을 팽개치고(!) 그들이 보유한 신명 남, 하나 됨, 환대의 기운을 꼽고자 한다.
진행 순서가 다 그랬다. 인사 소개. 공동체 공간 안내. 저녁밥, 공연, 이야기 마당 등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흥이 넘쳤다. 끼를 마음껏 발산하는 시간이었다. 한 개체는 물론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신명이지 않을까 싶다. (많은 사람들을 모셔 본 솜씨였다. 은혜공동체 식구들이 편안한 식사를 위해 열심히 움직여 주었다. 먹는 다는 것. 중요한 부분이다. 샤브샤브 식 요리였다. 고기가 많아서 좀 그랬다.)
(온 건물에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생명의 실상을 보는 듯. 모든 순서에 아이들이 함께 했다.) 은혜공동체는 도시 주거공동체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정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였다. 90여 명의 구성원이 이 정도의 신명과 하나됨에 도달했느니 만큼 이를 원동력으로 뭐든 해 나갈 수 있으리라 본다. 사회적 역할, 에너지와 물과 식량 등의 자립과 자급 영역 등 뭐든 시도해도 될 수 있는 기반이 튼튼해 보였다.
노래와 춤은 기본이었다. 신명과 어우러짐이 중요한 요소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 (이들이 만들어 낸 ‘몸 윷놀이’는 가히 혁명적인 놀이였다. 흥겹고 신명 난 인간들은 뭐든 창조하는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2. 종교를 버림으로 참 신앙인으로 거듭남.
'은혜공동체'는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모태였으나, 완벽하게 종교를 넘어서고 있었다. 예배도 없고 십자가도 없다. 대표인 박민수 님은 이 공동체를 만들고 이끌어 온 목사다. 예배도 의례도 철거(!) 한 뒤로 호칭들도 철거했다. 아무도 그를 목사님으로 부르지 않는다. 삼촌이고 형이다.
제도화된 종교의 폐해를 걷어 냈다고 보인다. 그 어떤 종교인보다 그 어떤 성직자 입네 하는 사람들보다 신앙적으로, 영성적으로 사는 것으로 보였다. 영성의 핵심은 기쁨, 사랑, 배려, 헌신이라면 말이다.
(박민수님의 발표는 비록 시간이 짧았지만 그들의 노력, 정성, 하나 되기, 공부, 아픔 등이 눈에 선했다. 장하다.) (이야기 마당 시간) 박민수 님은 자신을 목사로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200가구에 달하는 ‘밝은누리’를 이끌고 있는 젊은 목사인 최철호 님도 그렇다. 형과 삼촌이다. 종교의 외피를 쓰고 얻고자 하는 부질없는 권위와 권세를 넘어선 사람이다.(여담이지만 내가 20대 초반부터 함께 한 선배이자 스승인 고 허병섭 님 경우는 목사직을 공식적으로 반납 한 경우다. 청계천 등 가장 낮은 곳에서 빈민선교를 하다가 몽땅 경찰서에 잡혀갔는데 목사라는 걸 안 경찰에서 갑자기 그 분만 특별대우를 하자 그렇게 했다. 예수처럼 더 낮은 곳, 더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참 행복이라며 기독교는 단지 그 수단일 뿐이라는 그들의 명확한 정신. 도그마에 빠진 한국의 종교들을 볼 때, 습관화되어 영혼과 정성은 없고 자동기계처럼 주문과 개념들을 되뇌는 관계자들을 볼 때 은혜공동체는 집단적 영성체로 보였다. 그 집단 분위기, 집체 의지가 개인의 에고와 미망을 융해하는 용광로가 되어 있는 둣 했다.
3.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20대부터 내가 접한 공동체들은 적지 않다. 고 허병섭 선배와 가장 낮은 위치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막노동 공동체’가 처음이지 않나 싶다. 목사인 그와 누수 주택에서 시멘트를 비비던 기억이 새롭다. 국내 공동체는 거의 다 경험 한 편이다. 해외 공동체도 여럿 가 봤고 공부했다. 이를 정리하자면, 공동체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여 자연 발생적 성숙(성장이 아니라 성숙) 과정을 거치거나 계획적인 설계에 의한 경우로 나뉜다. 두 측면이 상보 작용하기도 한다. 은혜공동체는 전자에 해당 한다고 하겠다.
20여 년 전에 시작했고, 공동육아, 공동 밥상, 작은 연합 가정 등 여러 실험을 거쳐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박민수 님이 이번 행사 때 발표한 순서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었다. ‘안 싸우고 다정하게 사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서 한 발 한 발 성숙해 온 발자취가 보였다. 싸우더라도 용기 있게 맞대면하여 진심을 주고받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같이’ 하고자 하는 바람과 함께 같이 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이 양가감정은 당연하다. 경험과 상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고비는 한 번 넘어서면 체력이 생겨난다. 되풀이되지 않는 힘을 기르게 된다. 공동체의 성장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은혜공동체는 이를 위해 가치 공유, 생활 공유, 예술, 여행, 재화 공유의 경험을 쌓아갔고 이를 토대로 시스템을 하나씩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은혜 공동체는 의료비 지원, 등록금 지원, 실업급여 지급, 차등적 평등 실현(소득의 몇 %를 내는 식의 재정 부담 방식), 멘토-멘티 구성, 창업 지원 등등... 거의 작은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데까지 와 있다.
최근에는 연대와 협력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달 27일 청년 모임이 그렇다. 이 모임은 내가 후원자로 있는 청년 자율모임인 ‘넥스트젠’. 그리고 한 번은 강의, 또 한 번은 회의하러 두 차례 방문했던 ‘밝은누리’. 내가 실행위원인 ‘한국생태마을 공동체’와 공동으로 하는 행사다.
이렇게 20여 년간 서로 신뢰를 쌓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쳐 진화된 신뢰와 사랑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겉으로 보이는 이런 하드웨어가 잘 작동할 수 있겠다고 여겨진다. 소프트웨어의 수준은 낮은데 큰 예산만 덜컥 받아서 구축한 하드웨어가 무명 무실, 흐지부지되는 사례들을 우리는 참 많이 보아왔다.
내가 올 초에 강연 갔던 곳인데 서울 은평구에 있는 세계 최초의 '도서관 마을'이 떠오른다. 정식 이름은 ‘은평구 구립 구산동 도서관 마을‘이다. 여기는 기존의 건물 8개를 하나로 이어 도서관을 만든 건데, 그 시작은 건물이 전혀 없을 때부터 마을 주민들 간에 책과 관련한 여러 동아리와 활동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던 것. 그런 힘 그 감동을 바탕으로 더 많은 주민들을 움직이고 예산을 끌어와 꿈을 현실화시킨 것이다.
무리한 외형이나 과도한 꿈을 허황 되게 꾸지 않고 하나씩 실천하며 커 온 은혜공동체가 참 지혜로워 보였다.
4. 개인의 최소화, 공유의 최대치
요즘 ‘미니멀라이프’가 대세다. ‘소유보다는 삶’을 추구한다.
개인 침실까지 다 개방해 놓고 사는 그들. 내밀한 그들의 내실까지 다 들여다볼 수 있는 순서가 있었다. 지하에서 옥상까지 우리 안내를 맡은 분이 그렇게 했다.
개인 공간은 참으로 소박하고 작았다. 더블 침대가 놓인 방은 침대 크기만큼의 빈 공간으로 이루어진 단칸방. (밖에서 본 건물) (이 공간이 사람을 담고 사람이 공간에서 소통과 정과 나눔을 이루었다. 80명 공동체가. 50명 한 식구가 사는 집이 이렇게 구성되었고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부족'으로 구성된다. '원시부족'?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원래 '원시부족'은 생존공동체다. 공동체가 깨지는 순간, 공동체에서 방출되는 순간 살 수 없다. 공간 하나의 성격을 정하는 것에는 그들의 철학과 헌신과 양보. 영성이 담겼으리라 본다.)
어느 집이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법한 수 십 켤레의 신발, 여러 개의 우산,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책장, 냉장고나 큰 티브이. 그리고 수십 벌의 옷이 걸린 옷장 등등. 이런 게 하나도 없었다. 책상과 컴퓨터도 누구 집이나 작은방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것마저 이들의 개인 공간에 없었다.
대신에 공유 공간은 현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구현했고 생활의 편리와 함께 어우러짐의 용이함을 실현하고 있었다. 특히 공간의 중요성을 잘 구획했다고 보인다.
이 건물에서 4부족 50여 명이 사는데,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설계를 할 때 이런 기능과 용도를 먼저 설정한 것인지, 아니면 공유 주택을 지어 놓고 이렇게 배치했는지 궁금했다. 질문할 시간이 없었는데 귀가하여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아봤는데 건축가와 은혜공동체가 같이 토론하며 그림을 그려 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공유 주택의 발전된 기본 틀에다 이들의 바람과 꿈을 담은 셈이다.
미니멀리즘을 살아 냄으로 해서 그들은 절약 한 돈으로도 최상의 삶을 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 돕기에 나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최소화되는 ‘개인’에는 소유뿐 아니라 ‘에고’도 있을 것이다. 근대의 자의식과 개체 의식의 발달은 차라리 소유보다 에고가 더 큰 과제가 되어 있다. 에고의 극복은 공동체의 성숙과 궤를 같이 한다. 은혜공동체가 개인을 최소화하고 공유를 최대치로 해 간 것에 성공한 것은 작은 성취들을 잘 보존하고 키워 온 것이라 여겨진다.
5. 꿈꾸는 오늘.
천국. 이것은 하늘에 있지도 죽은 뒤에 있지도 어느 특정한 곳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일상의 먹고 자고 말하고 보고 걷고 쉬고 떠들고 맞서고 하는
내 가슴 속에. 내 눈초리 하나 내 마음 한 자락. 내 글 한 자에 담겨날 것이다. (우리는 반 시간에 다 둘러봤지만, 그들 역시 반 시간여에 걸쳐 설명 했지만 총 길이는 20년이었다. 설명하는 이는 한 사람이었고 다들 그 말을 들었지만 참석자들의 머리속에는 각기 다양한 꿈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번 방문에서 큰 감동을 받은 다른 분의 느낌도 포함하고 있으며 사진은 제가 찍은 것과 다른 분이 찍은 것, 그리고 방송에 나온 화면을 갈무리 하여 편집한 것도 포홤 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