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군과 적군은 같은 붉은 색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였다.
마오쩌뚱의 홍군, 트로츠키의 적군은 인민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1934년, 중국 공산당 紅軍은 장제스와의 국공합작에 실패하여 장시성 루이진을 떠나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군은 70만 대군을 동원해 홍군을 공격하여 홍군을 궤멸직전까지 몰아서, 결국 홍군으로 하여금 대장정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홍군은 10만 여명을 모아 포위망이 허술한 남서쪽을 뚫고 18개의 산맥을 넘과 24개의 강을 건너 11개의 성을 지나 대장정을 마치게 되었다.
쉬지 않고 하루 130키로를 걸어 불뿌리와 눈 덮힌 산을 맨발로 걸으면서 1년 반 만에 드디어 1935 년 10월 20일날 대장정의 마지막 날 남은 병력은 겨우 8000명이었다.
그 결과, 모택동은 홍군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중국 북서부는 공산당의 요새가 되어 국민당과의 내전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장정을 거치면서 홍군은 중국 오지 농민들의 마음을 안을 수 있었으며, 그들 오지 부족들을의 마음을 끌어안아 소비에트를 조직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중국 공산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고, 그것이 러시아 혁명과 다른 점이었다.
赤軍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당 정부가 만든 소련군을 말한다.
적군이라는 이름은 1946년에 없어졌다. 러시아 제국의 육군과 해군은 제정 러시아의 다른 조직들과 함께 1917년 혁명이 일어난 뒤 해체되었다.
1918년 1월 28일 법령에 의해 인민위원회는 노동자와 농민 지원자를 바탕으로 적군을 만들었다.
혁명의 열정에 불타는 최초의 적군부대는 1918년 2월 23일 나르바와 프스코프에서 독일군과 싸워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날은 소련 국군의 날이 되었다.
1918년 4월 22일 소련 정부는 다른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노동자와 농민들은 반드시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는 법령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적군의 공식 출범이었다.
적군을 창설한 사람은 1918년 3월부터 1924년 11월 해임될 때까지 국방인민위원을 지낸 레온 트로츠키였다.
적군은 전적으로 노동자와 농민만을 대상으로 소집했기 때문에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장교단을 창설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전직 제국군 장교를 동원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1921년까지 5만 여 명의 전직 장교들이 적군에 복무했으며, 이 가운데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련 정권에 충성했다.
장교들의 신뢰도를 감시하고 군대 내에서 정치선전을 실시하기 위해 모든 적군 부대에는 정치고문이 배속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계속되자 단기 장교양성학교에서 젊은 장교들이 배출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정치적으로 더욱 신뢰를 받게 되었다.
적군 병사들 가운데 공산당원의 수는 1925~33년 동안 19%에서 49%로 증가했고 장교들 사이에서 증가율은 더욱 높았다.
제국군 출신의 장교는 불과 몇 사람만이 계속해서 현역으로 남아 있었다. 더구나 사령관은 전부 공산당의 추천을 받아야만 입학할 수 있는 소련 육군사관학교나 장교양성학교의 졸업생들이었다.
1937년 5월 스탈린의 통치에 반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숙청작업이 시작되어 장교수가 줄어들고 적군의 사기와 능률은 떨어졌다.
러시아 혁명의 赤軍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겠다는 거짓말을 했지만, 중국의 紅軍은 철저히 진심으로 농민들 편에 섰던 것이다.
중국의 소비에트는 중국 오지의 소수 부족의 고유의 삶의 형태와 자치를 인정해 주는 형태였다.
어쩌면, 당시 중국 공산당의 권력은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 중앙집권과 자본력과 군사력에 성공한 중국 공산당의 행태에서 보면 명확히 알 수가 있다.
그때 홍군은 자신들의 삶을 도모하기 위해 농민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택동이 장악을 하고 농촌 정책에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대약진 운동에도 실패하고, 그 후 모택동 자신의 실패를 권력의 힘으로 덮으려는 시도가 어린 홍위병을 만들어 개혁파 정적들을 숙청한데서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 공산당의 집권 과정에서 농민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하게 차이가 있었으나, 근본적인 면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권력유지가 목적이었다는 공통점이었다.
등소평이 다시 정권을 잡아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여 중국의 자본주의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제반 사회적 문제가 벌어져 급기야는 천안문 사태가 벌어져 등소평은 탱크로 수만명의 인민들을 살상했다.
그후 중국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명실상부 미국과 대적할 유일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이었던 紅軍을 도와주었던 농민들의 삶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그리고, 홍군이 조직한 자치조직 소비에트는 인민해방군에 의해 다시 철저하게 무너졌다.
자본과 군대로 무장하여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중국 공산당은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여 중국 오지까지 군대를 파견하여 그들의 자치 정치 조직을 무력으로 진압했던 것이다.
이것은, 애초의 공산당의 가치와는 상반되는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20세기 초, 중국 공산당과 일본군이 오기 전의 중국 오지의 농촌은 [붉은 수수밭]에서 처럼 스스로의 조직으로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었다.
비록, 가난하고 남녀에 대한 지독한 차별은 있었지만, 여주인공 공리가 보여주었던 삶에 대한 치열한 자세는 그 당시 농민들의 일반적 모습이었다.
그러한, 농민들의 삶을 일본군은 적나라하게 파괴했고, 중국 공산당은 도와주는 척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망쳐놓았다.
오히려, 남의 나라 일본군이 한 짓에 비하면 공산당이 한 짓이 조금은 인도적으로 보일 지도 모르나, 근본적인 삶의 근거지를 박살내는 점과 공동체 자체를 파괴하는 점에서는 심각한 일이다.
일본군에 대항해서는 마을 전체가 협력하여 공동체 자체는 무너지지 않았지만, 공산당의 권력과 자본주의의 자본 앞에서는 중국 오지의 아름다운 농촌의 공동체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民工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 농촌에서 쫒겨나와 도시에서 일용직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 날 화려한 중국의 이면에는 공산당 홍군을 도와준 그들의 희생이 숨어 있다.
민공들의 삶은 절망적이다. 모든 자본주의의 과실들은 공산당 조직과 그들과 관련된 일부만이 즐기고 있다.
민공들이 살았던 그들의 고향은 현대화 산업화로 철저하게 부서져 자본의 품안으로 사라지고 있으며, 그들 고유의 삶의 형태는 관광객들의 눈요기꺼리나 되어 그들이 던져주는 냄새나는 돈으로 연명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공산주의 혁명이나 자본주의의 폭력성은 같은 뿌리를 가진다.
산업화를 사회진화론적 근대화로 인정한 점이나, 자본주의 역시 시장이 발달한 형태라는 점에서는 맑스나 아담 스미스나 같았다.
그들은 전통 사회에 대한 아무런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농촌에 대한 어떠한 발전적인 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산업화가 몰고온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대한 고민만이 있었을 뿐이다.
산업화가 몰고 온 인류 사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산업사회가 파괴한 전통사회에 대한 어떠한 애정도 없었을 뿐이다.
맑스나 아담 스미스나 전통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 가치에 대해서는 눈여겨보려고 하지 않았고, 반대로 전통사회의 왕권과 가부장적 제도만을 비웃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삶의 가치를 물질적인 면에서만 국한 시켜 바라보았으며, 정신적 가치에 대해서는 외면하였다.
공동체가 가지는 경제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는 富의 가치가 아니라, 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순환의 가치인 것이다.
그것을 깨뜨린 점에서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나 같다.
따라서, 오늘 날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행의 죄값은 둘이서 똑 같이 받아야 마땅하다.
현재,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좌/우의 개념은 그래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당장은 눈앞의 부조리를 해결한 듯 보이는 노동운동 조차도 이 난국을 해결하는 아무런 해답이 될 수가 없다.
특히,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일부 얼빠진 좌파들의 태도이다. 자신들의 눈앞에 버티고 있는 테제만으로서 자신들을 영웅시하는 모습은,오히려 우파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