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화 기자
1897년 출시, 1910년에 첫 특허 등록된 활명수
국내 최초의 의약품 브랜드인 활명수는 지금까지 81억 병이 팔렸다. 팔린 병을 나열하면 지구 24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다. 출시 후, 한 세기가 지나면서 활명수의 병 디자인은 조금씩 달라졌고 청량감을 주기 위해 탄산을 첨가한 ‘까스활명수’가 나오기도 했다.
1897년 출시된 활명수는 우리나라 특허국에 처음으로(1910년) 등록된 상품이다. 구한말 궁중에서 임금을 보필하는 무관(선전관)이던 민병호 선생이 궁에서 쓰던 전통 한약재와 서양 약재를 섞어 만들었다. 물약 형태인 활명수는 한약처럼 달여 먹지 않아도 돼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소화제’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동화약품 초대 사장이었던 민강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와 비밀연락을 주고받는 연통부의 책임자였다. 활명수를 판 돈의 일부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고, 민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르다 별세했다. 이후 일제의 압박으로 동화약품은 파산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국내 최초로 특허 등록된 상품인 만큼 유사 제품도 쏟아졌다. 동화약품은 1919년 ‘부채표’라는 브랜드 마크를 활명수에 달았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원조 마케팅이 시작된 배경이다.
녹색의 동그란 철재 용기는 가정상비약으로 꼽히던 안티푸라민의 대표적인 이미지다. 1933년 유한양행의 창립자 유일한 박사가 의사 출신인 중국인 부인의 도움을 받아 개발했다. 안티푸라민은 근육통·관절통과 같은 통증에 효과적인 진통소염제다. 반대를 의미하는 안티(anti)와 염증을 일으킨다는 인플레임(inflame)을 합해 이름지었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당시 사람들은 아픈 곳이면 어디든지 파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약을 발랐다. 졸음을 쫓기 위해 눈 밑에 바르거나, 복통이 있을 때 배꼽 주변에 안티푸라민을 바르기도 했다. 유 박사는 안티푸라민이 민간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쓰이는 것을 경계해 “사용 전, 의사와 상의하라”는 문구를 넣어 신문 광고를 하기도 했다.
유한양행이 1963년에 출시한 삐콤씨는 한국인 맞춤형 영양제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사람들은 살갗이 하얗게 일어나는 마름버짐으로 골치가 아팠다. 먹을 것이 없는 데다 곡물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통에 비타민B 섭취량이 부족했다. 이에 유일한 박사는 비타민B를 공급할 수 있는, 한국인 특화 영양제를 개발하는 데 주력했고, 삐콤정(삐콤씨)이 만들어졌다. 이후 삐콤정은 비타민C·엽산·철분과 같은 영양성분을 더해 삐콤씨·삐콤씨에프 등으로 출시되고 있다.
국내 종합비타민제 중 판매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아로나민골드도 삐콤씨와 비슷한 시기에 출시됐다. 처음에는 ‘아로나민정’이라는 이름으로 삐콤씨와 같은 비타민B 영양제로 알려졌다. 하지만 둘의 운명은 1970년 비타민C와 비타민E를 보강한 아로나민골드가 나오면서 달라진다. 아로나민골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비타민제 중 판매율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마케팅’이 있었다. 일동제약은 아로나민 발매 초기인 1966년 김기수 권투 선수의 세계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매치에서 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라운드 보드 뒤에 아로나민 광고를 했다. 김 선수의 승리 덕에 아로나민의 슬로건은 ‘체력은 국력’이 됐다. 이는 스포츠 마케팅의 최초 사례이기도 하다. 아로나민골드는 1970년대 초 ‘의지의 한국인’ 시리즈로 대한민국 대표 비타민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파일럿·프로그래머·엔지니어·도예가 등 12명에 달하는 대표 한국인이 등장해 ‘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광고였다. 이 시리즈 광고는 당시 영부인이었던 고(故) 육영수 여사로부터 “광고의 공익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액상 감기약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판피린(동아제약)은 1961년 생산됐다. 강신호 회장이 통증(pain)과 열(pyrexia)이라는 단어를 조합해 직접 이름 지은 이 약은 캐릭터 마케팅으로 유명하다. 약 캐릭터로 내세운 ‘판피린 걸’ 덕이다. 스카프를 두른 큰 눈망울의 소녀가 외치는 “감기 조심하세요”라는 말은 금세 유행어가 됐다. 판피린 걸의 전체 생김새는 변하지 않았지만, 젊은 세대의 기호에 맞게 의상을 바꾸기도 했다.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는 대신 두건을 쓰고, 가벼운 니트를 입는 등 옷차림을 바꿨다. 30~50대 중심의 주 소비층을 20대로 넓히기 위한 전략이었다. 판피린은 처음 알약 형태로만 출시되다 현재 시럽·내복액 등 다양한 형태로 나오고 있다.
일본 다이코신약이 러일전쟁에서 배탈·설사로 고생하는 일본 군인을 위해 정로환을 개발했다. 동성제약의 창업주 고(故) 이선규 명예회장이 정로환의 국산화를 위해 일본 정로환의 성분 표시표에 따라 약을 만들었으나 실패했다. 이에 일본인 공장장을 찾아가 공장장의 평생 소원이라는 도쿄 유람을 시켜주고 원료와 배합 비율을 건네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 회장은 제품의 효능을 알리기 위해 전국 피서지 공중화장실을 돌아다녔다. 여행 중에 배탈·설사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정로환을 건네기 위해서였다. 약을 먹은 사람들이 효과를 보자 ‘여행 중 물이나 음식을 갈아먹고 생기는 배탈·설사에 정로환이 좋습니다’라는 홍보 문구를 쓰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 덕에 정로환은 1972년 출시 첫해에 5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2003년에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기도 했다.
보령제약이 국산화한 기관지 약인 용각산도 원래는 일본 약이다. 1960년대 들어 농업에서 공업으로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기관지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용각산의 인기는 솟구쳤다. 보령제약은 1년간 용각산 제조사인 일본의 류카쿠산을 설득해 기술제휴에 성공했다. 이에 용각산은 1967년 보령제약의 상표를 달고 정식으로 출시됐다. 하지만 일본산과 달리 국산은 인기가 없었다. 일본 제품보다 품질이 떨어질 것이라는 오해 탓이다. 열악한 포장도 문제였다. 이에 김승호 회장은 이미 출고한 용각산 5만 갑을 모두 거둬들여 새로운 용기와 포장으로 바꾼 후 다시 유통하기도 했다. 한국산 품질의 우수함을 알리기 위해 전체 매출의 30%를 마케팅 비용으로 쓰기도 했다. 다른 제약사 광고비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
우리나라에서 수액(링거액)을 최초로 사용한 기록은 고종황제 때로 남아 있다. 당시 황제의 주치의였던 독일 외과의사 리하르트 분쉬가 만삭인 임산부의 임신중독 증세에 링거액을 투여한 사진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하지만 수액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다. 콜레라가 퍼지면서 수액의 수요가 늘어났다. 설사를 많이 하는 콜레라 환자가 수분 부족으로 사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혈관으로 직접 수분을 공급하는 링거액의 인기는 치솟았다.
이에 JW중외제약은 1954년 국내 제약사 중 처음으로 주사제 생산에 들어갔다. 생산 초기에는 “수액 때문에 환자가 죽었다”는 항의가 쇄도했다. 유가족들이 사망한 환자들의 팔마다 꽂혀 있는 링거 주사를 보고, 수액 때문에 환자가 사망했다는 오해를 했기 때문이다. 제품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임직원이 모두 나서 병원을 찾아다니며 의사와 환자 가족이 보는 앞에서 직접 주사를 맞았다. 이후 수액은 수분 보충제에서 나아가 영양제로까지 인식될 정도로 대중화됐다. 병원에 입원하면 꼭 맞아야 할 필수 의약품으로 꼽힐 정도였다. 수액은 처음에는 병에 담아 출시됐다. 주사약 병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 미국 부대에서 나오는 헌 병을 살균해 썼기 때문이다. 현재는 제약사가 자체 개발한 친환경 팩에 담겨 보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