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삶
[말씀]
■ 제1독서(2사무 7,4-5ㄴ.12-14ㄱ.16)
힘 있는 임금이 되어 다윗은 새로 정복한 수도 예루살렘에 주님의 성전을 세울 계획을 세우나, 예언자 나탄은 그에게 하느님의 뜻, 곧 하느님은 사람의 손으로 세운 집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느님은 다윗의 집안을 견고하게 하실 것이며 자손을 번성케 하여 그의 왕위를 영원히 보장하실 것입니다. 이 약속은 선택된 백성의 메시아적 희망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이 약속은 요셉의 협조로 다윗의 후손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완성됩니다.
■ 제2독서(로마 4,13.16-18.22)
사도 바오로는 율법에 대한 성실성을 통해 하느님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을 거슬러 저항합니다. 사도는 아직 모세 율법을 알지 못한 상태의 아브라함이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되었음을 상기시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을 향한 마음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서 성조의 참된 후손들은 육에 따른 후손들이 아니라, 영에 의한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온전히 순종하며, 세속적인 모든 희망을 거슬러 희망하면서 하느님 백성 탄생의 길을 이어갑니다.
■ 복음(마태 1,16.18-21.24ㄱ)
요셉을 통하여 하느님의 약속은 실현됩니다. 예수님은 요셉을 통해 다윗의 혈통 안에 자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제 펼쳐질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온전히 잊히기를 수용합니다. 완성되어 나가는 것은 인간의 사정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유보되어 있던 아기의 이름 선택 역시 요셉을 벗어나 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오로지 하느님의 계획에 순종하며 그대로 따라 사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새김]
다소 보수적이며 배타적이었던 유다교 공동체 안에서 의(義)라는 개념은 우선 율법 준수로 좌우되는 개념이었으며, 따라서 의인은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이(루카 1,6)를 가리켰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의인으로 자처했던 것은 스스로 율법 준수에 충실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아마도 이러한 의미의 의인이었다면,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 응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했을 것입니다(신명 22,23-24 참조).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요셉에게서 우리는 완전한 의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율법 준수에 매몰되어 있던 의 개념, 단죄하고 응징하는 개념을 뛰어넘어, 생명을 위한, 구원을 위한 의 개념을 보여주고 실천에 옮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완전하고 적극적인 의인 요셉에게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하달되며, 요셉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마리아의 수용에 이어 요셉이 하느님의 계획을 수용함으로써,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 영원히 머무시게 된 것입니다(마태 28,20).
요셉이 마음에 품었던, 그리고 그대로 실천했던 이 의(義) 개념은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의로우신 하느님이시지만, 자비로움과 너그러움이 늘 함께하는 하느님이시기에, 비로소 우리는 구원에 대해 말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바리사이들과 달리, 구원은 하느님 자비의 결과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3) 하고 읊었던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말씀과 행적, 끝내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신 주님의 파스카 대축제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서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너그러움을 잃지 않는 여유 있는 하루,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아 실천에 옮기는 가운데 구원의 세계를 미리 맛보는 은혜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