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삼국 중에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이면서 발전이 가장 늦은 이유가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으로 가로막힌 지역적 한계와 골품제라는 신분제 때문으로 보는 학자가 다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을 통일한 배경에는 ‘교육과 외교‘정책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21세기 대선 주자의 키워드는 교육과 외교로 맞춰질 것이라는 강 철수의 마인드에 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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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표를 보태겠습니다. 4차 산업혁명은 IT와 관련한 문화진흥이 될 것으로 예고되는
이때 문화의 꽃을 피운 신라의 역사에서 한 수 배워야겠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열은 유태인을
능가합니다만 문제는 지적인 곳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지덕체를 포함한 교육 정책이
되도록 제 교육마인드부터 조정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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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4대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 점령하의 한강유역 요지를 획득하여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죽였습니다. 이어 대가야를 평정하고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웁니다.
화랑제도를 창시하는 등 군사적·문화적으로 실력을 길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왕입니다.
성은 김(金),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입니다. 우리 김 씨가 과거에 왕을 다 해먹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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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은 지증 왕의 손자이며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지요. 어머니는 법흥 왕의 딸 지소부인
이며 법흥 왕의 뒤를 이어 7세에 즉위할 때 태후, 즉 법흥 왕비가 섭정하였습니다.
541년 ‘이사부’를 병부령에 임명, 백제에 대해 화친정책을 썼으며 551년(진흥왕 12)
개국이라고 연호를 변경하였습니다. 그해 3월에는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을 불러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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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연주를 듣고 역시 같은 해에 ‘팔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553년 백제가 점령했던 한강유역의 요지를 공취하여 거기에 신주를 설치하였습니다.
554년 백제 성왕의 군사를 격퇴하고 성왕을 사로잡아 죽였습니다. 561년 이사부의
공으로 대가야를 평정하고, 이어 주위의 침입에 대비, 한강유역에 주군과 강력한 군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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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하고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의 비가
지금까지 전해져 옵니다. 북한산·창녕·황초령·마운령에서 발견된 순수비는 진흥왕의
업적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로 한반도 동남부에 있는 약소국 신라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강원도, 함경도에 이르는 큰 나라로 성장시킨 것은 이십 대의 이 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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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한 왕이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라는 강대국 틈에서 눈치를 보던 신라는 진흥 왕
이후로 삼국통일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김 유신과 김 춘추가 진흥왕 순수비 앞에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다짐했다지요. 551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의 성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 정벌에 나섭니다. 4~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 전성기를 지낸 고구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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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내부의 권력투쟁과 북방 돌궐의 침입 등으로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공격하여 승리함으로써 장수 왕에게 빼앗겼던 한강
유역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점령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구려에 맞서기 위한 백제와 신라의 동맹, 나제동맹이 성공적으로 유지되는 듯 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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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 진흥왕은 가야의 왕자 출신인 김 무력을 시켜 백제군을 급습했습니다.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를 빼앗은 진흥왕은 여기에 새로운 주를 설치했습니다.
100여 년이 넘도록 유지된 나제동맹을 깨트리고 공격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한
진흥왕의 나이는 당시 스무 살에 불과했다니 조금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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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신라 공격을 결정하고 총사령관으로 태자 여창을 임명했고
여창은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관산성은 신라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또 한강 하류 지역에 머무는 신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554년 신라와 백제의 운명을 건 관산성 전투는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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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국가 간의 전쟁에서 가장 처절한 싸움으로 기억됩니다. 치열한 전투 결과 관산성은
백제군에게 함락되었고, 여창은 구천이라는 곳에 본진을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는데 관산성 전투의 승리를 보고받은 성왕은 태자를 격려하기 위해 구천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너무 방심했던 것일까. 성왕은 친위군대 50명만 이끌고 적진으로 달려가는 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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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정보를 입수한 진흥왕은 성왕을 급습해 목을 베고,
그 여세를 몰아 관산성을 되찾습니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해 좌평 4인과
2만 9,600명에 이르는 군사가 모조리 죽음을 당했습니다. 삼국사기에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다.”고 기록했을 만큼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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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년 법흥 왕이 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죽자, 일곱 살의 삼맥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아마 아버지인 갈문왕도 이미 사망했던 듯합니다. 대신 왕 태후가 섭정을
맡았습니다. 이때 왕 태후는 삼맥종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법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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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자신의 외손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딸에게 실질적인 정치를 맡긴 것입니다.
따라서 진흥 왕 초기 10여 년간 신라를 다스린 것은 왕 태후, 곧 지소부인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왕 태후는 진흥 왕 즉위 첫해 죄수들을 사면하고 관리들의 벼슬을 한
등급씩 올려주었고 이듬해 이사부를 병부령, 지금의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여 국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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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군사적인 일을 맡겼습니다. 귀족들의 협의체인 화백 제도를 통해 정책을 결정
해왔던 신라에서 병권을 전담하는 벼슬이 생기고, 왕이 이 벼슬을 임명했다는 것은,
왕에게 권력이 그만큼 집중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한편, 이사부는 지증 왕 대에 우산국을 점령한 바 있는 장군으로 어린 왕과 군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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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견이 부족한 왕 태후를 도와 진흥 왕 초기 군사와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신라 최고의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하자고 건의한 사람도 이사부입니다.
왕 태후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했습니다.
또한 왕태후는 국가적 차원에서 지은 최초의 절 흥륜사를 완성하고, 일반 백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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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는 등 불교를 장려했으며, 이후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는 화랑제도를 만들었습니다. 551년 열여덟 살이 된 진흥왕은 연호를 개국으로 고치고
친정이 시작됐음을 알렸습니다. 이해에 진흥왕은 지방을 시찰하며 영토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영토는 진흥 왕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젊고 패기만만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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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신라가 더는 변방의 작은 나라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친정을 시작한 그 해, 거칠 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의 변경을 침략, 지금의 충주와 단양
등 남한강변에 있는 10개 군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3년 뒤 관산성 전투를 통해 한반도
중부를 점령한 것이다. 젊은 왕의 걸음에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555년에는 가야연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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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해 있던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에 하주를 설치했고, 이듬해에는 함경남도까지 영역을
넓혀 안변에 비열홀주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6년 뒤에는 고령의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가야의 영토를 완전히 신라에 편입시켰습니다. 그 결과 신라의 영토는 한반도 땅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습니다.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였지요. 이러한 영토 확장은 삼국통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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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물적, 인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568년 진흥왕은 연호를 ‘크게 번창하다’는 의미인
‘태창’으로 다시 바꾸었습니다. 그동안 이룬 영토 확장과 신라의 번영을 자축하는 의미로
읽힙니다. 이해 진흥왕은 서울을 거쳐 함경남도 함흥의 황초령, 이원군에까지 자신이
개척한 영토를 직접 순수하면서 백성을 위로하고 포상했습니다. 또한 이를 기념하고 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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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을 드러내고자 비 들을 세웠는데 이것이 진흥왕 순수비입니다.
572년 진흥왕은 또 한 번 연호를 바꾸는데, 백성을 크게 구제한다는 홍제로 지었으니
연호에서 마흔 살이 된 진흥왕이 한층 깊어졌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해
진흥왕은 큰 아픔을 겪습니다. 태자 동륜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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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 왕을 불교로 더 깊게 이끌었습니다. 진흥왕은 크기가 5m에 이르는 황룡사 장륙
존상을 조성하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은 뒤 승복을 입고 살았다고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진흥 왕이 보인 음악적 관심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방을 시찰하던 중에 가야 출신인 우륵에 대한 소문을 들은 진흥왕은 우륵을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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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을 연주하게 했고, 552년 계고·법지·만덕 세 사람을 시켜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습니다. 우륵은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치고 나서 왕 앞에서 연주하게 하니, 왕이 기뻐하며 크게 포상했다고 전합니다.
문화적인 안목까지 갖추었던 영웅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5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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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세 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쩌다 어른‘ 김 민석은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자‘라고 합디다. 김 민석은 약자이었던 신라의 신의
한수는 ‘외교술‘이었다고 하면서 대립과 공존의 남북국시대의 세 명의 성군을 무열 왕
(김 춘추)-문무 왕(통일전쟁 완수)-신문 왕(왕권강화)을 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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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입장은 외교술로 인한 삼국통일과 찬란한 예술 문화를 꽃피운 순 기능과 함께 나당
연합으로 인한 영토 손실의 역기능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인상 깊었던 내용은 신라의
세종대왕이 신문 왕이었는데 그와 관련한 ‘화왕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무슨 신기한 이야기를 하라는 신문왕의 명을 받고 설 총이 꽃을 의인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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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간신)와 할미꽃(충신)으로 임금을 충고한 내용입니다. 또 하나는 신라시대 신문 왕
(682년) 어느 날 동해바다에서 감은사 앞으로 섬이 떠내려 오면서 두 개로 갈라졌다
합했다 했답니다. 신문 왕이 그 섬에 올라 용과 만났는데 용이 흑 옥대를 바치고 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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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국가의 안녕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해서 왕이 그 말을 따라
만파식적 피리를 만들어 내란과 외란을 날 때마다 피리를 불어 국난을 지키고 왕권을 강화
했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설화입니다. 선덕여왕 관련한 모란꽃 이야기나 신문 왕
설화는 우리시대 교과서에 수록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2017.2.8.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