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 에제 16,1-15.60.63
복 음 : 마태 19,3-12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
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
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
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
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
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
들여라.”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에제 16,1)
말씀지기
에제키엘 예언자는 실로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는 매 자아다 이런 대담한 말로 예언을 시작하니까요.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정말로 자신에게 말씀하신다고
확신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참된 예언과 풍부한 자기 상상의 산물을 구별하는 법을
분명히 터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확신에 우리 역시 이를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는 길게 답할 수도 있고 짧게 달할 수도 있습니다.
길게 답하자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과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 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듣는 말, 함께 나누는 말이
위안과 희망을 주고 믿음을 더욱 굳게 다지도록 북돋는다면,
언제고 그 이면에는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께서 자리하고 계신다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우리로서는 그런 것을 계속 추구해 나가는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든 상관없이
지금도 흘러나오고 있음을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짧게 답하자면, 연습하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자면 기도 중에 들었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당신이 시험해볼 필요가,
즉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자면 믿음으로 당당히 나아가 이 말씀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면서,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 알아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에제키엘은 자신의 영적 체험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자 하면서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자신의 능력을 자신하든 못 미더워하든 간에,
더없이 중요한 것은 속도를 늦추고 귀담아 듣는 시간을 보내는 일입니다.
기도 중에 성경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든 교회의 가르침을 묵상하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불어넣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도록 노력하십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되어
이를 당신의 삶에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법을 배워가려면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말로나 베푸는 친절로나
아니면 겸손과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느님께서 당신을,
그렇습니다, 바로 당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제 귀를 열어 주십시오.
제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귀를 기울임으로써,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심부름꾼이 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Lord, open my ears so that I can hear you.
Help me to be still and listen, so that I can become a bearer of your word."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바닷가에 놀러 온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바다에서 수영해도 돼요?”
“물이 너무 깊어서 안 돼.”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습니다.
“아빠는 저기서 수영하고 있잖아요?”
그러자 엄마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얘는~ 아빠는 보험을 들었잖니!”
정말로 이런 관계가 부부관계라면 어떨까요?
즉, 사랑의 관계가 아닌 물질적인 이해관계가 더 우선시된다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이러한 관계가 점점 더 눈에 보이는 것은 왜 일까요?
그래서 그냥 유머로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지’라면서 당연한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왜 일까요?
하긴 국내의 한 연구기관의 발표에 의하면 부부가 하루에 서로의 눈을 보며
감정을 나누는 대화시간이 고작 2분 37초라고 합니다.
이렇게 감정을 나누는 대화가 부족하다보니
마음이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쉽게 이혼이라는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나의 일을 도와주는 일꾼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는 동반자로서 배우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찾아가 이혼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즉, ‘이유만 있다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가?’ 라는 것이지요.
이는 당시 혼인을 마치 매매 계약처럼 생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실 당시의 여인들은 혼인하면 남자의 소유물이 되어서,
부부라면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재산권이나 상속권 같은 것도 행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남편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쉽게 버렸던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해 이야기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나의 배우자는 단순한 소유물이 아닌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나의 또 다른 몸이라는 것입니다.
내 몸 중에서 어디 한 군데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버리지 않지요.
마찬가지로 나의 배우자에 대해서도
어디 한 군데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버리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혹시 어떤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만나고 대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부부는 한 몸이라는 사실처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질 때
하느님의 뜻은 더욱 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라
김광태 신부
중학교 때부터 매우 절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싸움도 잘하고, 인간성도 좋고, 또 요즘 식으로 말하면
얼짱이라서 여자아이들이 줄줄 따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하겠다고 내게 소개한 여자는 여러모로 시원찮았습니다.
우려스런 느낌은 곧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여자가 원치 않아 홀어머니와 따로 살았고, 봉
급이 적다고 불평하는 통에 퇴근하자마자 또 다른 일을 찾아갔다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자 역시 돈 번다고 야식집에서 밤새도록 일하는 바람에
둘은 거의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수년이 지나도 자식이 없어서 그 이유를 물으니,
여자가 돈 벌려고 남편 몰래 여러 차례 낙태를 하는 바람에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여자가 기계를 다루다가
손가락이 잘려 한 손을 못 쓰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날 함께 있던 다른 동창 하나가 술기운을 빌려
그 친구에게 이혼을 종용했습니다.
‘착한 네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홀어머니가 불쌍하지 않느냐.’
‘너도 이제 사람답게 좀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나 눈물을 흘리면서 묵묵히 듣고 있던 친구는 너무도 뜻밖의 얘길 했습니다.
‘정말 못났고 또 미웠지만, 이젠 병신이 된 여자를 내가 아니면 누가 돌보겠는가.’
그날, 난 신자도 아닌 그 친구의 얼굴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더 힘들게 하려고 교회가 이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했으니 결혼한 거 아닌가요?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좀 더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거룩하고 아름다운 부부들에게
상지종 신부
모든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거룩한 부르심,
곧 성소聖召를 받았고,
각자의 성소에 따라 자신의 한생을 살게 됩니다.
결혼 성소든 독신 성소든, 모든 성소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굳은 믿음과
갈림 없는 사랑이라는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결혼 성소에 응답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랑하는 배우자를 자신에게 주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배우자에 대한 사랑으로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부부들은 자신의 결혼 생활 안에,
아니 결혼하기까지 과정 안에 함께하신 하느님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것이 사람의 감정입니다.
이 감정은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에 따라 변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처럼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들이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지켜감으로써,
부부간의 사랑이 메말라 가는 이 세상을 촉촉이 적시는 단비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사랑은언제나오래참고(최성욱,최안순).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