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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미해병대의 인천 상륙작전
1.서론
북한 공산주의자가 한국을 침공하기 118년전에 크라우제비츠는
"민첩하고 강력한 공세이전은 번쩍이는 복수의 칼날로서 방자에게 최선의 기회를 제공한다"
라고 역설하였다.
1950년 9월15일에 결행된 인천 상륙작전은 전쟁사를 통해 볼 때,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한 그와같은 가장 극적인 사례였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맥아더 장군의 전략적 혜안과 담대한 용기는 물론 군사력 사용에 있어서
지략과 전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걸작품이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정확하게 말해서 20세기에 있어서 미국의 해상세력만이
성취할 수 있는 불퇴전의 승전이었던 것이다.
적의 측방을 해상으로부터 강타하는것보다 더 치명적인 피해를 줄수있는
다른 공격방법은 없다고 하겠다,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에 선행하여 많은 유질동형의 작전을
경험한바 있으나, 단지 하나의 기계적인 작전으로 치부하였으며,
수륙양용작전의 진가와 그 작전능력보유의 효용성을 잘 깨닫지 못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훨씬전인 1949년 가을 어느날오후에,
당시 미 합참의장이던 브레드리 장군은
일단의 해군고위급 장교들에게 훈시를 한다음, 하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본인의 생각으로는
가까운 장래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수행할 사태는 결코 오지 않을것으로 본다"
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못되어 미 해병제1사단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9년 가을
당시에 워싱턴 당국에서는 아무도 인천에 대하여 관심조차 가진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미국의 방위태세는 별로 건전하지 못하였다.
감군과 복원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심각한 당시 상황을 웨드마이어 장군은 이렇게 표현했다,
"미국은 제2차 세게대전이란 축구시합에서 이기고는 경기장을 떠나면서 축배를 덜고 있다."
군축과 더불어 군종간 생존을 위한 전략적 논쟁과 갈등이 고조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원자탄이 재래형 폭탄을 무용지물로 만덜었고,
전략공군의 중요성이 급부상 하면서 절대전 내지 총력전이될 장차 전쟁은
항공작전 일변도로 바뀔것이란 주장에 무게가 실리기도 했다.
필연적으로 그동안 미국의 역사상 방패와 창의몫을 해온 해상세력이 종말을 고하게된다는 것이었다.
1949년 당시 미 해군전쟁대학 교장이던
코놀리 제독에게 육군 참모총장출신의 존슨 국방장관은 다음과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졸업식에서 전함으로서 해군과 해병대를 크게 실망시켰던 것이다.
"이제 해군의 전성기는 끝나간다. 더이상 해군과 해병대를 보유할필요가 없게되었다.
합참의장이 본인에게 말한바에 의하면,상륙작전은 과거지사가 되고말았다.
우리는 결코 더 이상은 상륙작전을 수행하지는 않을것이다.
오늘날은 해군이 할수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던지 공군이 다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해군은 별로 볼일이 없게 되고있다."
2. 미 해병대의 약화와 한국전선의 위기
태평양전쟁의 주역이었던 미해병대가 격감되면서
수륙양용작전이 해군에서조차 서자취급을 당하게되었다.
해군장교들은 상륙작전 관련보직을 회피하게 되었고 진급이 누락되기 일수였기때문이다.
한때 38명의 제독과 335명의 대령으로 구성되었던 해군참모총장의 상륙작전 보좌진이 축소되어
대령이 그 책임자가 된상황이었다.
뿐만아니라 1945년에 610척의 상륙함정을 가졌던 미해군이
4년후엔 배가 91척으로 줄어들었고,
1948년에는 510척의 상륙주정을 폐품처리 하면서 단1척을 신규건조 하였을뿐이다.
한편
미 해병대도 포레스탤 국방장관 시절엔 병력이 35만 여명이나 되었지만,
1949년에 존슨 장관이 들어서자 23만명으로 격감되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에와서는 미해병대를 전면개편하여
함대해병대(FMF)를 6개 보병대대와 1개비행대대(aviation squadron)로 축소시킴과 동시에,
미 해군항공세력 역시 전후에 첫 신형항모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이것마저 국방장관이
취소시켜 버림으로서 해상기지를 잃게되었다.
아무튼 미해병대는 6개대대로 명맥만 유지하느냐, 아니면 욱군으로 전군하느냐하는
기로에 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국내상황과는 달리 극동지역에 있어서 맥아더장군이 지휘하는
미 극동군사령부는 미국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 시킬수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었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독일처럼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체제의 두정부로 나누어 젔으며,
1948년이후 한반도 역시 두개의 국가로 분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대만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않았으며
1949년초에는 주한미군마저 소수의 고문단만 남한에 남겨둔체 전원 철수해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이때 맥아더사령부가 위치한 일본에는 상당규모의 주일미군이 존속해 있었다.
한국에대한 전략적 평가절하는
당시 브레드리 미합참의장의 비밀등급이 표시된 비망록에는 다음과같은 내용이 적혀있을 정도였다.
"미국의 군사안보적 관점에서 볼때, 한국에 군사력을 유지하고 군사기지를 존속시킬만한
하등의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본다.
그리고 한국에 군사원조를 계속한다는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나 다름없다고 생각된다."
같은 맥락에서 에치슨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이 제외되어 있음을 외신기자회견에서 공식발표한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국군은 사실상
중화기나 기동장비가 전혀없는, 경무장한 몇개의 보병사단밖에는 더 가질수가 없었다.
미국이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을 부정하여 현대무기나 장비획득을 억제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북한군은 소련의 장비지원과 중공의 병력지원으로 잘무장된 막강한 인민군 14개
사단을 중심으로 다수의 전투기와 함정이 갖추어져 남침작전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하에서 드디어 1950년 6월 25일새벽에
북한군이 소련과 중공의 배후지원 및 조종아래 남침을 개시한것이다.
그 당시의 사태를 맥아더 사령관은
"아프리카의 독사 코브라에게 갑자기 물린것같았다"고 후일 술회한 적이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에 못당하여 한국군과 급거 투입된 미 육군과 미해병대
그리고 영국 해병대는 남으로 후퇴하지 않을수 없었다. 부산을 둘러싼 조그만한영토를
제외하고는 남한의 전국토가 적에게 점령당한 처절한상황이 1950년 8월중반이었다.
이때 북한군은 총전력을 집중투입하여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집요한 공세를 폈던것이다.
문자그대로 백척간두의 위급한 상황이었다.
미 해군 제7함대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기는해도, 적의 육상병참선은 서울을 통하여 남쪽으로
완강하게 중단없이 유지되어 왔으며
코브라의 주둥이 같은 적 전선부대들의 돌파추진력은 날카롭고도 강력하였다.
그러나 적의 측방과 후방은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이보다앞서 같은해 7월 4일,
맥아더는 트루만 대통령의 참전결정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우선 1개대대의 전투부대를 급조하여
준비 안된상태에서 한국전선에 최초의 지상군 전투부대로 투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오산부근에서 북한군에게 박살당하여 일시에 전투력이 상실되는
심한피해를 입고말았으니, 이 부대가 유명한 쓰미쓰 특수기동부대 였던것이다.
바로 이날 동경의 제일생명회사 빌딩에있는 맥아더의 사무실에서는
북한군의 지상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한 해상공격작전을 실시하려고 회의가 열리었다.
맥아더는 일본에있던 육군 제1기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하고
적의 병참선을 차단함으로서 그가 늘말했듯이 북한군을 망치로 때려부수는
(hammer and slash) 작전을 하려는 복안을 발표하였다.
물론이때 인천외에 진남포, 주문진, 군산등도 상륙지점으로 고려되었다.
그는 이 작전을위한 상륙군을 포함한 요구사항을 워싱턴 당국에 타전하였다.
실은이때
맥아더 휘하에는 소규모의 상륙작전 부대와 가용자원밖에 배속된것이 없었다.
미육군 고급지휘관들 중에서 유일하게 상륙작전에 대한 신념을 갖고있는 그는
미해군 태평양함대로부터 AGC,APA,AKA,LST 등 상륙함 각1척씩을 배속받아 소규모의
상륙훈련단을 만들고,
57명의 해군해병기간요원을 코로나도에 있는 태평양 상륙군훈련단과 전술항공통재전단
그리고 제1수륙양용단의 참모들로부터 차출하여 충당하였다.
제1수륙양용단 사령관인 도일제독은 태평양전쟁시에 동태평양에서 지휘관과 참모를
역임한 상륙작전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깊은 전문성을 가진 몇안되는 해군장성중의
한사람이었다.
도일제독은 당시 동경만에서 상륙작전 연습을 실시하고 있던중 맥아더의 요청에 의해
제7함대의 수륙양용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됨으로서 맥아더의 핵심 예하부대장이 된것이다.
도일제독을 중심으로한 해군해병의 핵심요원들은 그들이 가진경험과 전문지식으로 맥아더가
시급히 필요로 하는바를 충족시켜주어야 했던것이다. 이리하여 불확실한 계획지침을 갖고서
7월부터 상륙작전계획이 착수된 것이다.
3.인천상륙작전 계획의 진전과정
이미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어있던 미육군 제1기갑사단을 상륙작전에 전환 투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것을 맥아더가 이해했으나,
인천외에 군산을 상륙지점의 대안으로 주위에서 꾸준히 권고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렇다면 맥아더는 왜 인천을 고집하였는가 하는 것은 자명하다.
인천은 한국의 역사적인 도읍지이며 최대의 도시인 서울에 이르는항구이고,
또한 서울은 가장 중요한교통의 중심지로서 과거 일본이 부설한 철도망이 서울을 중심으로
남북한을 연결하고있으며, 잘 포장되지는 않았지만 고속도로가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에 연결되어
있고, 국가 전신전화망도 서울에서 발원한다는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한국 최대의 공항이 인천과 서울사이에 놓여있어,
인천은 실상 서울과의 관계가 Piaeus와 Athens 관계나 다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략적 이점이 있다할지라도, 상륙작전을위한 전술적 조건은 이와 정반대였었다.
몇 가지 수로조건을 보면,
간만의차이가 32피트나되고 접근수로의 조류속도가 7내지 8놋트로서 상륙주정( LCVP)의 속력을
능가할 정도이고, 협수로는 함정과 주정의선회나 기동을위한 공간이 불충분하여 막다른 골목길이나
다름없는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러곳에서 파손되거나 좌초되는 함정과 주정들이 통로를 가로막게 될것인바,
적의 해안포나 지상포화의 표적이되고 말것이란 우려도 제기되었다.
뿐만아니라 상륙지점도 상륙군이 전개할수있는 공간이 불충분한것은 물론이고,
내륙진출에 장애가되는 밀집된 건조물이 해안선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상륙함정과 상륙주정이 접안할수있는 경사도의 수심인데,
LST는29피트, LCVP는 23피트가 요망되는데 이러한 조건을 갖출수있는 경우는
월3회나 4회에 불과하였다.
알몬드 장군은 상륙돌격을 실시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을가진 상륙장소라고 하면서도,
맥아더의 뜻을헤아려 "그러나 최악의 상륙가능 해안이지만,다른 의미에서는 최선의 해안이
될수도있다. 중국의 옛격언에 현명한 장수는 불리한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꿔 놓을수 있는자란
말이 있지않으냐"고 말하였다.
앞에서말한 여러가지 물리적인 장애외에도, 인천상륙과 관련하여 다른 두가지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는 맥아더장군이나 도일제독도 마음대로 할수없는 문제였다.
첫번째문제는 이러한 대역사를 감당할만한 유능한 상륙군과 상륙기동함대를 획득하는일이고,
두번째는 상륙작전의 후속위협으로서 중공의 한반도개입이나 소련의 동구침입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반격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유능한 자격있는 수륙양용군은 역시 미해병대밖에 없다는것이
중론이었으며, 미국시민들은 물론 백악관이나 국방성에서도 해병대의 승전보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해병대는 축구시합을 끝낸 경기장처럼 팀을 해체한 상황이었던바 정예상륙사단을 재건하기가
쉽지않았던 것이다. 왜이렇게 되었는지는 존슨 국방장관이 잘알것이다.
맥아더는 제1기갑사단을 사용하려던 인천상륙작전계획인 BLUE HEART계획이 취소됨에따라
고육지책으로 미육군 제1기갑사단 대신 낙동강방어선 서측방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있던
미해병 제1여단을뽑아 상륙군의 주력인 미해병제1사단의 기간연대가 되도록 한 새로운 상륙작전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병사단 신편을위해 대통령의 재가를받아 약7천명의 예비역을 동원보충하기로 하였던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타필요한 요소부대를 창설하기 위하여 대서양 함대해병대의 대부분 요원을 태평양으로
전환배치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이같은 어려운일을 단시간내에 완수할수 있도록 뒷받침한 것은 당시의 케이트 해병대사령관과
셰퍼드 태평양함대 해병대사령관이었다. 그들의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노력과함께 하원 군사위원회의
입법 및 예산승인이 맥아더의 아이디어를 실천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7월19일 동원령이 선포되었으며,
신편된 미해병제1사단이 드디어 8월12일 센디에고를 출항하였다. 그런데 지중해의 제6함대에
배속되어있던 1개대대는 스에즈 운하에서 출발하여 해상 합류토록되고 준비가 아직안된 제5연대는
인천에 후속상륙토록 하되 부산에서 탑재하게될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었던 제7연대는 인천외항에서
합류하도록 계획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부족한 D일 상륙돌격부대로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역시
낙동강전선에서 차출되어 미해병제1여단과 함께 부산에서 탑재하여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지난날의 역사를 되돌아볼때,
인천상륙작전만큼 격열한 반대에 부딧친 작전이 성공한 사례는 거의없다.
특히 그당시 육군과해군이 상륙작전은 한물갔다고 공공연히 비난하는 상황하에서,
미국의 군사력은 축소약화 분산되어있었고, 한국전쟁을 위한 해상병참선은 길게 태평양상에 신장되어
있었던바, 소련군이 라인강을 건너온다던가,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도록 구실을 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맥아더는 극동에 배치된 군사력만으로 싸우라는 충고까지 나왔던 것이다.
1950년 7월까지만 해도 맥아더가 합참에 5회에 걸쳐 작전게획의 승인요청을 한바 있으나,
최악의 성공가능성을 전제로한 세력투입을 유보하는 입장에서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내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집요한압력에 못이겨 가용부대의 획득요청을 승인해 주기는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사용할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않아 8월23일 맥아더에게
셔맨 해군참모총장과 코린스 육군참모총장 등 막료들을 동경으로 급파하여 맥아더와 만나 담판을
짖도록 하였다.
이들을위한 회의를 준비한 도일제독은 상륙목표인 인천에대한 세부적인 연구를 통하여 고무적인
작전성과를 예상할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려고 애썼으나,
맥아더장군의 참모장인 알몬드 장군은 워싱턴에서 오는분들에게 너무 구체적인 문제까지 언급하지말고
맥아더의 의중만 대략적으로 보고하면 본인이 그들에게 핵심문제를 납득시킬 준비가 되어있다는 귓띰을
해주었다. 회의당일 본회의에 앞서 제1수륙양용단의 참모회의에 참석한 맥아더는
80분간에 걸쳐 각 참모들이 정보,항공기상,해안조건,상륙주정,조수,조류, 수로,통신,부교,함안이동,
함포지원,그리고 항공지원에 대한 분야별 보고를 청취하고,
별다른 질문이나 지시가 없었으며, 도일 제독은 현재 할수있는말은 "인천 상륙작전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다"란 포괄적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합참의장이 보낸 대표단과의 회의에서 맥아더는 도일제독으로 하여금 간명한 브리핑을 먼저 하게한다음,
내방자들에게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도록 하고나서 조용히 일어서서 약 한시간동안 자기의전략을
즉흥적 해설로서 설득시켰다. 그는 결론을 다음과같이 엄숙하게 맺었다.
아무도 더이상 이에 반대하지 못하고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상륙작전은 가장 강력한 전쟁수단이다.... 나는 인천상륙작전이 5천대1의 도박이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도박에 익숙해있다....우리는 인천에 상륙할것이며 적을 박살낼 것이다.
합참의장의 대표단은 만족하여 돌아가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워싱턴에 돌아간다음에 맥아더의
제안이 가까스로 승인되었다는 메시지가 날라왔다. 이날 맥아더는 셔만제독과 코린스장군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이날 미해병제1사단의 전방지휘소요원이 항공편으로 동경에 도착함으로서
상륙군사령관 스미스 해병소장이 돋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술과담배를 삼가며, 온유하고 겸손하면서 자제력이강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육군보병학교 출신이며 제2차 대전시에 오키나와와 뉴브리태인의 상륙작전에서 전공을 세웠고,
최근까지 해병대사령관 보좌관으로 근무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8월12일 미극동군사령관(CINCFE) 작전계획 100-B로 익명 CHROMITE란 상륙작전계획이 이미
발표되어 있었는데, 상륙일은 9월15일이고 상륙장소는 인천이었다.
이때가 상륙군사령관이 동경에 도착하기 겨우 23일전으로서 정상적인 상륙작전 계획수립주기가
최소한도 90일이란것을 전제할때 너무도 급박한 일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작전계획이 하달될 당시엔 워싱턴 당국의 최종승인조차 얻지못한 상태였다.
문제는 이계획을 발전시키기위한 가용정보의 불충분이었다. 제2차대전이 끝난 다음 인천의 수로조건은
미육군에 의해 여러번 조사된바있으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자료인 조석표조차 구구각각이었다. 일본과 미국이 서로 다른 수치를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도일제독은 미해병대의 사진정찰기 F4U2대를 함재기에서 띠워 일일 13회의
출격임무를 부여하여 4일간에 걸쳐 인천항일대의 항공사진을 촬영 분석함으로서 D일의 정확한 만조와
간조시간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당일의 아침 만조시각은 일출후 45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만조시각은 일몰후 27분이었다.
만조시간은 2시간이므로 이 동안에 당시의 저마력에 단일 스크류의 APA와 AKA가 외항의 수송선
정박구역으로부터 협수로를 통하여 진입접안 및 이안 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며 왕래간 예상되는
일출전과 일몰후의 저시도 조건하에서 항행이 매우 위험할것으로 판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2개의 오전과오후 다른 시간대에 상륙군을 지정된 해안까지 함안이동 시킨다는것이
쉽지 않으며 상륙한 상륙군이 적의 저항이 어느 정도일지는 예상하지 못하지만 해안교두보를 확보하고
진지를 구축하기위한 시간이 오후 상륙하는 부대에게는 결정적으로 부족할것이 뻔했다.
또 다른문제가 다름아닌 인천항을 감제하는 월미도의 사전제압 또는 점령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1개대대가 조조에 월미도에 먼저 상륙을하고, 오후 만조시에 해병제1사단의 주력이 인천에
상륙하도록하는 2단계작전에 의한 최종적인 상륙돌격 계획이 확정된 것이다.
4.적전 상륙돌격의 감행
앞에서 언급한바 있거니와 인천상륙 작전계획이 확정되는 순간에도, 미해병제1사단의 3분지1이나 되는
세력인 제5연대는 제33해병항공단과 함께 구성된 제1해병원정여단(MEB)의 편성을 갖고
상륙작전이 아닌 지상작전에 투입되어 육군의 지휘를 받으면서 한국최후의 보루이던 낙동강방어선의
서측방을 사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예하의 제8군 사령관인 워커장군은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는 책임을진 입장에서
해병제1여단의 인천상륙작전 전용을 완강히 반대하면서 최후저지선이 돌파당하여도 책임질수 없다는
배수의진을 치기까지 하였다. 이때 상륙작전을 잘 모르고 해병대의 조직문화를 이해할리없는 맥아더의 참모장 알몬드장군은 해병제1사단
장인 쓰미쓰장군을 설득하여 제5연대 대신 약40%가 한국육군신병으로 충당되어있는 미육군 제7사단
제32연대로 대치하는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상륙작전의 경험이나 훈련조차없는 핫바지부대를
거느리고는 유에서무를 창조하는 상륙작전을 할수없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부하였다.
물론 이때 미해병제1사단은 갑자기 동원편성되기 때문에 제7연대가 9월15일까지는 인천에 당도하지
못한다는 조건하에 통영상륙작전으로 명성을떨친 한국해병제1연대가 그자리를 메우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미 육군제10군단을 상륙군으로하여 그밑에 미해병 제1사단과 미육군 제7사단을두되
D일의 상륙돌격부대는 미해병사단과 배속된 한국해병연대가 담당토록하고 미육군 제7사단과 배속된
한국육군 제17연대는 D일이후의 후속상륙부대로 지정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해병제5연대가 영산전투에서 빠저나온것이 9월4일이었다. 피로도 회복못한체 부산에서
재편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탑재하기 시작하였다. 상륙을 불과10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때 전선은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9월 5일 영천이 뚫림으로서, 대구가 위태롭게 되고,
부산도 안심할수 없는상태였다. 미제8군본부의 하와이 이동설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상륙군으로서는 상륙목표지역인 인천 서울 일대엔 얼마나 강력한 적이 포진하고있을까
하는것이 관심사가 아닐수 없었다. 만약 9월15일의 인천상륙작전에 실패한다면 한국의 운명은 끝장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팽배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륙이 성공하더라도, 소련잠수함이나 항공기가 개입하여 상륙군의 후속부대 진입을
봉쇄하던지,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압록강을 건너온다면, 비록 맥아더가 항공폭격으로 압록강을 피바다로
변하게 할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지만, 미국이 제3차 대전을 무릅쓰고 대항할것인지 걱정이 아닐수 없었다.
그 당시의 정보판단에 의하면, 인천 서울지역의 적세력은 모두5천명 내지1만명 정도로 약간 과소평가되고
있었다. 특히 상륙지점인 인천자체엔 아몬드 장군이 말했듯이 경미하게 방어된 해안으로서,
이른바 '최악의 상륙가능 해안'이라 할만했다.
북한군 소속의2개 서해안방어연대가 배치되어있고, 76미리와 106미리포로 장비된 2개해안포대가
해안방어에 임하고 있다는정도가 상륙직전의 정보 보고였다.
아무턴 칼을 뽑아든이상 적을 치지않으면 안되었다. CHROMITE작전계획에 포함된 상륙기동부대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 인천항탈취 및 해안교두보선 확보
* 신속전진 및 김포비행장 점령
* 수도 서울점령 확보
* 서울의 북,북동,그리고 동쪽 차단진지 점령
* 인천 서울을 점령한 군사력이 철상(ANVIL)이되고 북상하는 제8군이 망치가 되어 공산군을 타격.
맥아더는 본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제7합동기동부대(JTF-7)를 편성했는데 상륙작전교리에 따라
제7함대사령관인 스터러블제독이 본작전에 참가하는 모든해군과 상륙군을 총지휘하는 합동기동부대
사령관이 되고, 상륙군으로 해병 제1사단과 육군 제7사단을 제10군단으로 편성했는데 알몬드 장군이
군단장을 맡았다. 합동기동부대의 편성은 인상적이었다. 71,339명의 한 미 육해군 및 해병대 장병과
7개국의 해군함정 230척뿐만 아니라, 34척의 일본 LST까지 참여하였다. 그러나 지원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항공지원세력으로서 함재기와의 미공군부대는 기동편성에 포함되지 않았다.
D일전작전으로서는 진남포와 군산 그리고 주문진에대한 함포사격에 이은 양동 및 양공작전이 실시되었고,
2일간에걸쳐 치열한 함포사격과 항공폭격이 인천항에 집중되었다 이는 과거 태평양전쟁당시의 경험에
비추어 5일간의 공격준비지원화력의 필요성도 거론되었으나,
합동기동부대 사령관의 결심에 따라 2일로 결정된 것이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미해병제5연대 제3대대가 배속된 한국해병 1개중대와 함께
상륙주정에 전재한다음 5시 40분에 월미도로 향발했다. 기동함대 기함에서는 맥아더와 주요지휘관 및
참모들이 쌍안경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월미도일대는 포연에 쌓여 잘볼수없었다. 제1파가'녹색해안'에
상륙한 것은 6시 31분이었다. 뒤이어 6시 59분에는 대대 예비대까지 상륙이 끝났다.
월미도에 배치된적은 인민군 제226독립연대 예하의 1개중대와 918연대 예하의 1개포대로서
총병력은 400명 정도였다. 적의 저항은 경미하였고 포로 136명에 적시체 180구를 확인하는 전과를 단번에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는 부상17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대장의 상황보고가 기함인 메킨리호에 탑승하고있는 맥아더에게 전달되자,
그는 다음과같이 격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해군과해병은 오늘 아침보다 더 찬란하게 빛난 적이 없다." 제1단계 상륙은 성공하였으나 오후 만조시간의
제2단계상륙은 주력부대의 본격적인 상륙으로서 인천 북방고지대를 끼고있는 암벽지대인"적색해안'에
제5연대가, 남쪽의 부두를 끼고있는 '청색해안'에 제1연대가 상륙하며 예비대인 한국해병 제1연대가
역시 청색해안에 상륙하도록 함안이동계획이 짜여져 있었다.
D일 오후 5시31분에 에정대로 상륙주정으로 적색해안에 도착한 제5연대는 사전에 준비해간 알미늄
사닥다리를 이용하여 상륙에 성공하였고, 청색해안은 평탄한 해안조건인바 제1연대가 수륙양용차를 타고
해안깊숙히까지 진출할수 있었다. 뒤이어 예비대가 상륙하여 해안을 정리하자 30분후에 LST가 접안하여
보급품을 양육하기 시작하였다. 우려했던 타라와 상륙작전의 재판은 아니었다. 미해병 제2사단이
태평양전쟁시 상륙했던 타라와에서는 상륙초일 1500여명의 사상자를낸 최악의 상륙이었던데 비하면
인천 상륙작전은 초일 전사21명에 전상175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몰시각까지의 짧은 시간내에 적의 반격을 무릅쓰고 3000톤에 달하는 상륙군의 보급품이 양육되고
상륙한 3개연대가 적포화 유효사정권 밖으로 진격하여 해안교두보선을 확보함으로서 야간 진지보강을
할수 있었던것은 이들 급조된 해병사단이지만 그 요원들은 모두 제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역전의
상륙작전 베트랑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2일후에는 치열한 격전끝에 서울을 탈환할수 있었고,
북한군은 병참선이 차단된 상황하에서 제10군단과 제8군의 양익포위공격에 압착섬멸당하고, 반신불수가
되어 38도선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맥아더의 도박은 성공을 한것이다.
5.인천 상륙작전의 교훈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획기적인 승전이었다. 이는 전략적,전술적,
정치적, 그리고 심리적인 승리를 연합군과 한 미 두나라에 안겨주었다 역사에 가정법 과거의 표현을
쓰지 말라고 한바있지만, 그 당시를 회상해볼때, 만약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지 않았더라면,
낙동강방어선은 고수될수 없었을것이며, 한국은 제주도로 물러날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사태가 호전되어 지상군이 북진하여 서울을 탈한하려고 했다면, 엄청난 댓가를 치루어야 했을것이다.
비록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원산 상륙작전이 해상기뢰때문에 성공을 거두지못한 작전으로 평가받고있지만,
미해병대가 중공군의 대량개입으로 실지회복직전에 사상최악의 고통과좌절을 맛보면서도 성공적인
함흥철수작전으로 우리의 수많은 인명을 구출해낸것역시 상륙작전의 연장선상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것이다.
21세기의 탈냉전시대에 즈음하여 우리는 한반도의 전쟁억제와 평화정착을 내다볼때,
북한의 대남전략이 변화하지 않는한 필연적으로 장차전을 상정하지 않을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개연성과 가능성이 큰 전투작전은 역시 상륙작전일것이다. 성공확률이 가장 높기때문이다.
현행 한미연합군의 작전계획5027에 한미연합상륙작전이 명시되어 있다. 상륙작전의지와 능력은
국가생존전략의 차원에서 보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와같은 맥락에서 인천 상륙작전의 교훈을
재음미해본다.
*방대한 규모와 특이한 복잡성을지닌 상륙작전은 유자격 전문부대가 아니면 수행될수없다.
인천상륙작전에 있어서 도일제독이 지휘한 함대와 쓰미쓰장군이 지휘한 상륙군은 명실공히 유자격
전문부대였으며, 두 지휘관은 공히 상륙작전에 대한 누적적 경험과 전문적 지식을갖춘 권위자였던 것이다.
맥아더는 비록 육군장성이었지만 태평양전쟁에서 상륙작전으로 승전을 장식했던 신념의 원로 지휘관이었다.
그래서 상륙돌격작전부대의 기동편성에 전문성이 결여된 부대는 배제하도록 했던것이다.상륙작전의 교리에
의하면 '방어된 적 해안에 대한 해상공격'이 상륙작전의 정의인바, D일 이후의 후속 비전술상륙부대는
해상수송작전에 참가한것이지 상륙돌격(AMPHIBIOUS ASSAULT)에 참가한것이 아니란것을 유념해야 한다.
현재 한국해군은 상륙작전 전문가양성을 사실상 외면하고있으며, 가용 상륙군에 걸맞는 상륙함정과
함안이동수단의 확보에 무관심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 해병사단은 절반은 준육군과 같은 기능을 맡고있는 것이다.*
첫댓글 사령관님의 해박한 지식이 존경스럽군요
사령관님 정말 좋은 정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오늘처럼 심각하게 글을 읽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역사속에...교리속에 해병대의 중요성이 두각되거늘.....어찌 우리 정부과 국방부 고위관료들은 그것을 애써 거부하는 행동만하는지 애석하기만 합니다. 부디 제 2의 맥아더 원수가 한국정부에도 나와주길 기대해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먼저 늘 해왔던 대국민 봉사활동을 게을리 하면 안되겠습니다, 열심히 헌신해서 활동하겠습니다 해병대를 위해서......해 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