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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마의 태자와 천년지기 미륵 눈물의 석불입상.............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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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마의 태자와 천년지기 미륵 눈물의 석불입상.............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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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망한 나라의 백성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처럼 차별과 핍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처절
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 같다. 물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의 삶은 더더욱 그런 것
같다.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삼키며 전 세계로 흩어져 떠돌던 유대인들은 멸망한지 무려 2,500여년이 지난 1948
년에서야 이스라엘을 다시 건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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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유대인처럼 역사상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나라 없이 핍박 받으며 떠 돌았던 민족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처절하게 지배 받았던 민족의 신이 자신들을 지배했던 제국의 신이 되고,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
인류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인 기독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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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하늘재 아래 미륵 리엔 거대한 미륵돌부처[10.6m]가 우뚝 서있다. 미륵돌부처는 북쪽 월악산 영봉을
바라보고 있다. 역시 영봉 아래 암벽에선 거대한 마애불[13m]이 남쪽의 미륵돌부처를 바라본다. 미륵돌부처는
마애불 보고 웃고, 마애불은 미륵돌부처 보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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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가도 싶다. 망한 나라가 결국은 삼국통일이란 大業[대업]을 달성한 것이다. 그들은 나
라 잃은 서러움을 딛고 한 번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은 것이다. 비록 나당 연합군이라는 동맹으로 비겁
하고도 비굴하게 굴면 서도 기회를 엿보며 얻어낸 비열한 결과물이 아닌가도 싶다. 그렇다 비열해도 결국은 살아
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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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그 망한 국가의 민초들의 고통은 그렇게 쉽게 빨리 하루아침에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주
인공인 미륵리 석불입상의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일명 麻衣太子[마의태자] 마의[삼베]옷을 입고
살았다 하여 붙은 이름 그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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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는 1978년 발굴 작업 결과 주춧돌을 옛 모습대로 배치해놓았으며, 충청북도에서 제일가는 입석불인
괴산 미륵 리 석불입상(보물 제96호)과 괴산 미륵 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중원 미륵 리 석등(충청북도 유형문
화재 제19호), 중원 미륵 리 삼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동양 최대의 돌 거북과 흔들바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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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이름은 불문 하지만 사서에 전하지는 않고 다만 후대에 전해지는 이름으로는 金富[김부], 또는 金鎰[김일]등 불
분명한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여 편의상 그냥 마의태자로 통일하여 부르기로 한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과 왕후 죽방 부인 사이 태어난 첫째 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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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이 다하자 도저히 버틸 여력이 없는 신라왕! 935년 10월 부왕인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나라를 고려
에 귀부하려 하자 그의 동생 덕지 왕자 및 이순유 등과 함께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
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불가함을 간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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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충주는 막강한 호족 유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마의 태자가 세웠다는 월악산 미륵사도 충주 유씨의 후원
없인 불가능했다. 덕주 공주가 세웠다는 덕주사도 마찬가지. 그들은 이미 왕건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다. 그러
한 충주 호족이 뭐가 아쉬워 망한 나라의 태자와 공주를 감쌌을까. 차라리 그 두 곳에 이들을 유폐시키고 감시했
다고 보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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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버지 경순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
구나.”하면서 고려 태조에게 나라는 헌납하자 마의태자 그는 모든 삶의 희망을 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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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태자는 실망한 나머지 크게 통곡하며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동생 덕지와 덕주 공주를 데리고 개골산
[겨울의 금강산]으로 떠나면서 처자를 모두 죽이고 닷 돈 재를 넘어 망명 아닌 망명길에 오른다. 그래서 일까 설에
의하면 마의 태자의 후손들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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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는 여주 신륵사에선 은행나무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삼았다. 양평 용문산에선 그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단단히 뿌리를 내려 못다 한 신라 천년사직을 대신해 달라”고 말했다. 그 지팡이가 오늘날 ‘용문사 천년 은행나
무로 자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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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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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답답한 세상을 한탄하며 힘없는 국가와 민초들의 억울함을 뒤로하고 떠났던 마의 태자의 일행과 덕주 공
주의 외로운 발걸음에 눈물을 흘리며 넘어야했던 눈물의 고개. 당시엔 세 고개를 통틀어 鷄立嶺[계립령: 오늘날
닷돈재, 지릅재, 하늘재]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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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마의 태자와 덕주 공주는 닷 돈 재를 넘어야만 했을까?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비하인드 스토리, 남
매는 기구한 사연을 가슴에 품은 채 그렇게 먼 길을 떠나야만 했던 운명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제천 여행기 50
번에서 충분히 이야기를 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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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태자 이름은 김일(金鎰) 혹은 김부(金富). 그는 왜 동해안을 따라 금강산에 가지 않았을까. 그는 경주∼영
주 부석사∼문경∼월악산∼여주 신륵사∼양평 용문사∼홍천∼인제를 거쳐 금강산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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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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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첫 번째 도착지가 바로 월악산 자락의 미륵 리였다. 오늘 유랑자는 그가 조각했다는 미륵리 미륵불을
보러왔다. 이 미륵리 미륵불이 있는 절터는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을 하자 금강산으로 길을 떠난 마의태자가
계립령을 넘어와 머무르며 세웠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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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전각은 모두 불타 사라졌지만 그러나 미륵부처가 있는 곳은 석굴암과 같은 형태의 석굴사원이 되어 남아있
는 미륵마을이다. 이 미륵 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고려시대 초기부터 미륵 대원 터란 큰 사찰이 있었던
마을이다. 미륵불이 있다 해서 미륵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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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마의태자는 아직도 전국 곳곳에 살아 있다. 전설로 꿋꿋하게 남아 있다. 1000여 년의 세월도 ‘스토리텔
링’을 이기지는 못했다. 마의태자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978)의 장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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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서 약 1km 정도만 들어가면 70년 대 말에 발굴된 미륵사지 대원 터의 유적지가 있다. 유랑자는 설렘
반. 기대 반 애마를 몰고 좁은 길을 달려 절터입구에 도착한다. 무르익을 대로 익은 가을의 단풍이 길을 수놓고 한
줌의 바람이 스칠 때마다 흩날리는 단풍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종이 꽃가루요,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의 아름다
운 하모니처럼 절정을 이루며 가을의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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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가을이란 늘 셀레임 의 연속이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액자 속의 그림이고 꽃길이고, 행복한 꿈을 꾸는
듯 구구절절 아름답다. 허긴 어느 한철이 바뀔 때마다 아름답지 아니했던 계절이 있었던가.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일 년 내내 이 유랑자에겐 예쁘지 않았던 날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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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고려는 978년 경순왕이 개경에서 눈을 감자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경주에
묘를 쓰려던 옛 신하들의 뜻을 막았다. 경주의 저항 세력들에게 조금이라도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경
순 왕릉이 신라왕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 밖인 경기 연천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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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변화는 바람결에서 시작된다는 진리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또 다른 아름다운 가을을 유랑자는 가슴에 담아
낸다. 유랑자는 애마를 세우고 유적지 안으로 발길을 잡는다. 어디에서 오는 바람인지 가을의 향기가 여기저기에
서 날아와 유랑자는 옷깃에 스며들고 유랑자는 그 수채화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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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석물들이 출도 되었던 곳이다. 마의태자가 계립령을 넘어 안착했던 미륵
사 대원 터라는 큰 사찰이 자리 잡고 있던 터다. 과거엔 사찰 주변으로는 馬房[마방] 시설까지 있었던 흔적이 발견
되었을 정도로 아주 큰 절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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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방이란 당시 계립령(하늘재, 닷돈재, 지릅재)을 넘나들던 상인들이나 관료들이 쉬었다 가는 오늘날의 여
관과 같은 곳이다. 문경에서 시작해 50리 길의 계립령을 넘어 미륵 리에 도착하면 날이 저물었을 것이고 날이 저
물면 상인들이나 관료들이 이곳에 준비된 마방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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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중원 미륵사지 대원 터는 주소상 제천시가 아닌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 리이다. 90년에는 중원 미륵사지
위치한 지역 행정구역이 상모면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는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 리로 편입되어 있었다.
미륵 리는 충청북도 충주시와 제천시, 경상북도 문경시를 연결하는 고갯길이 시작되는 구간이기도 한데 어쩔수
없이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설화가 있는 곳이라 마무리 차원에서 들렀던 미륵 리 절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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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돌부처는 몸체에 비해 얼굴이 커서 약간 기형적이다. 미륵불은 문경-충주를 잇는 하늘 재 길목에 자리 잡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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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곳은 마의 태자가 천 년 전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석굴암 같은 석굴사원이 있었던 곳이다. 절터에
들어서자 저 멀리 마의 태자가 누이 덕주 공주를 그리워 하며 깎아 세웠다는 미륵불이 보인다. 한데 석굴은 모두
소실되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저 끝에 보이는 석불입상과 오 층 석탑, 그리고 군데군데 박혀 있는 석조물의 흔적
들만이 천 년 전, 이곳에 큰 사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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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가가 보았더니만 생각 보다는 큰 미륵불이다. 보물 96호인 미륵불부처는 드물게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양식을 한 석등 2기 그리고 보물 95호인 5층 석탑이 있다. 절터를 바라보며 왼쪽의 공터가 미륵원이 있
었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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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돌부처는 몸체에 비해 얼굴이 커서 약간 기형적이다. 미륵불은 문경-충주를 잇는 하늘재 길목에 자리 잡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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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을 향한 미륵불의 시선은 바로 상덕주사 누이 덕주 공주의 마애불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다. 마애불과 미륵
불이 서로 애타는 눈빛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다. 두 남매가 그렇게 苦心慘憺[고심참담]하게 서로가 그리워
하면서 월악산 영봉에 보름달이 걸리고 질때까지 또 그렇게 반복되는 세월속에 각각의 마애불과 미륵불을 피눈
물로 깎아 새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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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바다 두 남매의 그리움에 흘린 눈물은 아마도 눈물바다가 되어 송계계곡의 청수가 되고
그렇게 청풍 강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마의 태자의 미륵불은 그렇다 치더라도 덕주 공주의 마애불은 纖纖玉手
[섬섬옥수]같은 손으로 어떻게 새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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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영봉 아래 마애불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미륵돌부처. 몸체는 이끼로 거뭇거뭇 하지만 얼굴만은 천년
이 넘게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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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고 부모와 형제들을 잃고 피눈물 나는 그리움으로 한뜸 한뜸 가슴에 새기고 또한 바위에 피눈물로 새겼
을 것이다. 지척에 있어도 만나지도 못하는 남매의 한을 아마도 마애불과 미륵불을 새기면서 기나긴 세월을 달래
며 보냈을 것이다. 아무튼 월악산은 부처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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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하늘재 아래 미륵 리엔 거대한 미륵돌부처[10.6m]가 우뚝 서있다. 미륵돌부처는 북쪽 월악산 영봉을 바라
보고 있다. 역시 영봉 아래 암벽에선 거대한 마애불[13m]이 남쪽의 미륵돌부처를 바라본다. 미륵불은 마애불 보
고 웃고, 마애불은 미륵불을 보고 웃는다. 그렇게 먼발치서라도 인사하며 수많은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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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마의태자가 월악산 미륵사 연금에서 풀려난 것도 누이인 덕주 공주와 분리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태자와 공주가 같은 곳에 있으면 그 구심점이 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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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처의 거리는 남북 일직선으로 3km쯤 될까. 사람들은 ‘미륵불은 마의 태자이고, 마애불은 그의 누이 덕주 공
주’라고 말한다. 아니 분명 그 반대다. 남매가 서로 마주보며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두 부처 사이에 오색 무지개가 펼쳐진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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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처는 모두 투박하다. 마애불은 아예 우스꽝 스럽기 까지 하다. 분명 여자의 형상 아니다. 큼지막한 눈, 코, 입
에 늘어진 턱까지 언뜻 보면 유치원생이 그린 ‘비뚤배뚤한 그림’ 같다. 미륵불 또한 전체적으로 돌돌 말려 균형이
맞지 않는다. 머리에서 발끝까지가 원통형이어서 입체감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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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엔 계립령(鷄立嶺)이라 불렀다. 오늘날 ‘닷돈재-지릅재-하늘재’ 3고개를 통틀어 계립령이라고 한 것
이다. 지릅은 大麻(대마: 삼) 줄기 ‘겨릅’의 사투리. 닷 돈은 엽전 다섯 돈을 뜻한다. 이 고개를 넘으려면 ‘산적들에
게 닷 돈을 줘야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계립령은 조선시대에 하늘재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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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굴은 마애불보다 한결 예쁘다. 기다란 초승달 눈썹에 굳게 감은 일자 눈, 두꺼운 입술, 넙적한 코 등 나
름대로 소박하다. 게다가 얼굴색이 파운데이션을 바른 것처럼 언제나 하얗다. 이끼로 거뭇거뭇해진 몸체와 딴판
이다. 햇살이 얼굴에만 비쳐서 그럴까. 아니면 머리에 쓴 갓 덕분에 빗물을 피해서 그럴까.
아무튼 앞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유랑자가 보기엔 마애불은 마의 태자. 미륵불은 덕주 공주를 닮았다 이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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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이 설화를 잘못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미륵불은 마의 태자가 동생 덕주 공주를 그리며 깎아 세운 것
이다. 미륵불이 훨씬 여자답고 예쁘기 때문이다. 하얀 살결에 얼굴이 가름하고 눈이 예쁘다. 반면에 마애불을 오
빠 마의 태자 형상이다. 새까맣고 울그락 불그락 천상 남자의 형상이다. 그리고 풍채도 좋다. 여성의 가녀린 몸매
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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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하늘 재는 문경 관음 리와 충주 미륵 리를 연결하는 길(약 3.5km)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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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재는 소백산맥 잔등 중에서 가장 야트막한 곳이다. 해발 525m의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고갯마루다. 하
지만 밑에서 보면 연 꼬리처럼 고갯길이 푸른 하늘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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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누이 덕주 공주를 그리워 하다가 마의 태자는 이 미륵불을 세우고 그렇게 孑孑單身[혈혈단신] 금강산으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금강산에서 마의[삼베] 옷을 만들어 입고 초근목피에 목숨을 연연 하다가 그렇게 세상을 훌
쩍 버렸다. 그리고 덕주 공주도 덕주사에서 나머지 생을 조용히 마감했다. 마의 태자의 미륵불과 와 덕주 공주의
마애불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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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미륵보살의 있는 미륵 리다.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현세부처와 언젠가 메시아로 오실 미래
의 미륵부처가 덕주사와 미륵리가 한 길로 이어져 있다. 관음 리는 아스팔트길, 미륵 리는 흙길이다. 의미심장하다.
미륵 리에서 바라본 월악산은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이다. 그 또한 세월의 風霜[풍상[이 마의 태자의 마음을 읽
어낸 것일까? 아무튼 미륵 리엔 오랜 풍상을 겪어 온 석불과 석탑이 愴然[창연-]히 솟아 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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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 대원지[미륵불] 찾아가기
*주차장 주소: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90-1
*연락처: 043-850-5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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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메모
▶1:당일 여행 코스= 송계계곡 8경(자연대,망폭대,덕주산성 남문, 망폭대, 와룡대, 팔랑소)
→덕주사(수경대, 학소대, 덕주산성, 미륵리 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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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박 2일 여행 코스=의림지→박달재→(숙박)→송계계곡→덕주사→신륵사 → 하늘재
→귀가 → PS~1박2일 산책길=월악산 만수계곡길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143,~ 걷기
좋은길 7선/거리2.0km/만수교~마의태자교~만수교[소요시간:6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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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박 3일 여행 코스
★.해설사가 직접 동행하는 가스트로 투어.[제천미식이와 떠나는 셀프맛여행]★
►체험안내: 가스트로 A, B코스 (각 코스별 식당 5곳)~사전예약 필수
-A코스 : 관계의 미학 -덩실분식 찹쌀떡 -마당갈비 영양밥 -빨간오뎅 -샌드타임
-B코스 : 대장금식당 -상동막국수 -이연순사랑식 -제천 맥주 -빨간오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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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삼한의 초록길→의림지→역사박물관 →솔밭공원→비룡담 저수지(생태숲)→ (숙박)
2일차:가스트로 A.B →중앙시장→달빛정원 → 교동 민화마을 →관란정 → (숙박)
3일차:한방엑스포공원 →탁사정 →배론성지 →박달재 →목굴암(박달과 금봉이사당)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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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찾아 가는길
▷*버스=서울-제천,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30분 간격(06:30~21:00) 운행, 약 2시간 소요.
▷*열차[Itx.]무궁화=청량이-제천역 청량리 역에서 2시간 견격, [KTX 는 1시간 간격 운행]
약 1시간 53분 소요.[KTX는 1시간 소요]
►철도고객센터는 1544-7788,1588-7788이다.
▷*자가정보= 경부(중부)고속도로→영동(중부내륙,충주)고속도로→평택제천고속도로→중
앙고속도로 → 남(북)제천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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