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전쟁을 치르기 위해
독일(獨逸)은 제1차 대전 당시에 연합군(聯合軍)의 전차(戰車)로부터 강렬(强烈)한 인상(人相)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이에 맞서는 전력(戰力)을 갖추려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 독일군이 운용(運用)한 전차 대부분은 연합군에서 노획(鹵獲)한 것이었고,
독일에서 개발된 것은 총 20대의 A7V(↓)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연합군을 벤치마킹[(benchmarking, 측정(測定)의 기준(基準)이 되는 대상(對象)을 설정(設定)하고 그 대상과 비교 분석(比較分析)을 통해 장점(長點)을 따라 배우는 행위(行爲)]하며 시작했을 정도로 독일의 전차 역사(歷史)는 짧았습니다.
더구나 전쟁에 패(敗)하면서 이후 전차의 개발(開發)과 보유(保有)가 불가능(不可能)했습니다.
↑연합국에 비해 등장이 늦었던 독일의 A7V
↑제1차 대전 당시 독일군은 노획한 연합군 전차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히틀러의 재군비 선언(Aufrüstung der Wehrmacht, 보통 독일어: Aufrüstung)은 1935년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을 폐지(廢止)하고 재무장(再武裝) 선언을 한 사건 직후인 1936년부터 '1호 전차'의 양산(量産)을 개시(開始)하면서 본격적(本格的)인 국산 전차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호 전차는 주무장(主武裝)이 기관총(機關銃)에 불과(不過)한데다 장갑(裝甲)도 빈약(貧弱)해서 전차라고 하기에는 민망(憫惘)한 수준(水尊)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승전국(勝戰國)의 감시(監視)를 피해 비밀리(秘密裏)에 연구(硏究)를 진행(進行)해 왔어도 기술 축적(技術縮積)이 충분(充分)히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단지 흉내만 낸 정도였습니다.
↑미국 병기박물관에 전시 중인 전후 독일 최초의 전차인 1호 전차
↑1940년 5월 노르웨이에서 작전중인 1호전차. 옆의 보병(步兵)과 비교하면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 출처: Public Domain >
1930년대에 활약(活躍)한 전차들이 보잘 것 없기는 했어도 그중 1호 전차는 더욱 성능(性能)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군부(軍府)는 1호 전차를 기술 확보(技術確保)와 전차병 양성(戰車兵養成), 기갑부대 운용 능력 확보 용도(機甲部隊運用能力確保用度)로나 생각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미 1호 전차의 양산 직전인 1934년에 주축(主軸)이 될 37mm 포(砲)를 장착(裝着)한 대전차 전용 전차(對戰車專用戰車)와 75mm 포를 장착한 지원용(支援用) 전차의 개발을 시작한 상태(狀態)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이 개발한 중형전차. 또한 독일군이 처음 가졌던 제대로 된 전차이기도 했다. 대전 초반부터 운용되어 장기간에 걸쳐 주력으로 운용되었으므로 4호 전차, Pz.Kpfw. 38(t)와 함께 상당히 많은 바리에이션이 있다.
↑본격적인 전차인 3호 전차 프로토타입
↑4호 전차의 승무원들
이전까지의 3호 전차가 모든 승무원이 포탑 내부(전투실)에 모두 탑승하는 반면에 4호 전차에서는 조종수와 무전수가 전투실 외부 별도 공간에 탑승하도록 개선되었다. 또한 3호 전차의 특징이던 포탑 좌우 출입구 때문에 4호 전차는 각 승무원 별로 전용 해치가 존재하는 몇 안되는 전차다.
훗날 이들은 '3호 전차'와 '4호 전차'로 탄생(誕生)해 제2차 대전 내내 종횡무진(縱橫無盡) 활약했습니다.
이처럼 독일의 전차 개발과 획득(獲得) 계획은 구체적(具體的)이고 장기적(長期的)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변화(變化)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이때 수립(樹立)한 마스터플랜(master plan)에 따라 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처럼 개발자(開發者)는 물론 전력 증강(戰力增强)에 관심이 많은 군부도 차근차근 단계(段階)를 밟아가려 했기에 1호 전차의 성능 부족을 전혀 문제시(問題視)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능이 부족해도 1호 전차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전격전의 신화를 만든 주역인 1호전차는 전차로 불리기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히틀러로 인해 모든 계획(計畫)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군부(軍部)는 그의 호전성(虎田城)을 정치적(政治的), 외교적(外交的)인 제스처 정도로 여겼으나 갈수록 전쟁 가능성(可能性)이 커지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3호, 4호 전차가 필요(必要)했지만, 외형(外形)만으로도 1호 전차와 이들 전차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다르다보니 개발(開發)에 난항(難航)을 겪던 중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1호 전차로 전쟁을 치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히틀러(가운데)가 1940년 2월 24일 뮌헨(Munich)의 명소(名所)인 맥주 양조장(釀造場) 호프브로이(Hofbräuhaus)하우스에서 연설(演說)을 하고 있는 모습. 1920년 히틀러는 이곳에서 2천여명의 지지자(支持者)를 모아놓고 나치 창당(創黨)을 선언(宣言)했다.
[사진 AP=연합뉴스]
↑히틀러 호전성으로 인해 당장 쓸만한 전차가 필요했습니다
3호, 4호 전차의 양산(量産) 전까지의 전력 공백(戰歷空白)을 시급(時急)히 막아야 했는데,
1호 전차가 작아서 단순 개량(單純改良)으로 성능 향상(性能向上)이 어려웠습니다.
이에 대대적으로 차체(車體)를 재설계(再設計)한 6톤급 신예(新銳) 전차의 개발에 착수(着手)했습니다.
100마력 엔진을 장착(裝着)해 주행력(走行力)을 개선(改選)하고 20mm 기관포(機關砲)로 화력(火力)을 증강(增强)하는 것이 핵심(核心)이었습니다.
독일은 대외적(對外的)으로 L.a.S. 100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농업용(農業用) 트랙터를 만드는 것처럼 위장(僞裝)했습니다.
↑전간기(戰間期, Interwar period,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20년 동안의 과도기를 말하는 단어)에 독일이 개발 중이던 시험작(試驗作) 중 하나인 그로스트락터(Grosstraktor)
1934년 1월 27일,
크룹(Croup), 헨셸(Henschel & Son), 만(Mann), 다임러 벤츠(Daimler Benz)가 참여(參與)해서 벌인 치열한 경쟁(競爭)에서 각각 좋은 평가(平價)를 받은 만의 차체(車體)에 다임러 벤츠의 포탑(砲塔)을 결합(結合)하기로 결정(決定)되었습니다.
6호 전차에서 보듯이 독일은 포탑과 차체를 별도(別到)로 개발(開發)해서 결합하는 방식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개발된 전차가 제2차 대전 초기에 1호 전차와 더불어 독일군 기갑부대(機甲部隊)의 중추(中樞)를 담당했던 '2호 전차(Panzerkampfwagen II)'입니다.
1941년 11월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의 독일 국빙군 제11기갑사단 소속 2호 전차
↑북아프리카 전선 당시 촬영된 독일 아프리카 군단 소속 2호전차 C형
↑4월 9일에서 등장한 독일 국방군 소속 2호 전차 "621번차"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당시 2호 전차 A형
↑1940년 5월 프랑스를 침공하는 독일 국방군 제7 기갑사단 소속 38(t) 전차와 2 호전차
↑수륙양용전차. 수중도하전차가 아님에 주의. 수중도하전차로 개조된 건 3호 전차와 4호 전차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일어로도 수중도하전차는 Tauchpanzer, 수륙양용전차는 Schwimmkörper로 단어가 다르다.
↑2호 전차는 독일 기갑부대의 신화를 이끈 진정한 주역이었습니다
1935년 10월부터 a1형을 시작으로 1937년 c형을 끝으로 총 100대의 선행 양상(先行兩相) 모델이 제작되어 실험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확인(確認)된 변속기(變速器), 서스펜션 등에서 발생(發生)한 여러 문제점(問題點)들을 보완(補完)한 후 양산에 들어가 1937년부터 실전 배치(實戰配置)되었습니다.
한창 개발 중이어서 1호 전차와 달리 스페인(Spain) 내전(內戰)에는 투입(投入)되지 않았으나 대량 생산(大量生産)에 힘입어 군부(軍部)의 의도(意圖)대로 제2차 대전 발발 직전(勃發直前)에 기갑부대의 주력(主力)이 되었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