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마태오
10,1-7)
Jesus summoned his Twelve disciples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to drive them out and to cure every disease and every
illness.
말씀의 초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이집트로 팔려 가지만,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지혜에 힘입어 그곳에서 재상이 된다. 온 땅에 기근이 들자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간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시험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형들은 과거의 잘못을
깨닫는다(제1독서). 복음을 선포하며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함께 선포할 제자들을 부르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러운 영을 쫓아낼 권한을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의 열두 제자단을 구성하였는데, 그들 가운데 마태오는 매국노처럼 지탄을 받던 세리였고, 시몬은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다짐한 열혈당원이었습니다. 이처럼 극단적인 사람들도 모였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 일꾼들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내 주신 일꾼들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도들입니다. 그들의 출신을 보면,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유한 사람, 학벌이 좋은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얼마나 큰 뜻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평범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과 연결시켜 살펴보고 싶습니다. 일꾼으로 파견된 사도들이 수확할 것이 많은 밭을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농부가 수확할 것이 너무
많아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면, 그는 수확할 것이 많다고 한탄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거두어들일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농부와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고쳐
주고 돌보아 주어야 할 수많은 ‘사도직 대상’이 그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거리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인 소외로 기가 꺾인 가엾은 양 떼였는데, 이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로 거두어들여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교회 내에서
사도직에 온전히 종사하거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봉사하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새벽에
일어나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요즘에는 새벽 5시만 되어도 웬만큼 밝아서 자전거 타기가 좋거든요. 아무튼 기분 좋은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전날 비가 와서인지 더욱 더 상쾌한 기분이었지요. 이런 저를 누가 샘낸 것일까요? 빗물이 고여 있던 곳을 차가 쌩하고
지나가면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제게 물세례를 뿌린 것입니다.
순간 깜짝 놀라서
휘청 거려 넘어질 뻔 했고, 또한 얼굴부터 발끝까지 흙탕물을 뒤집어썼습니다. 처음의 기분 좋던 마음이 싹 가시면서 차를 향해 좋지 않은 말이
나오려고 합니다. 바로 그때 문득 이 운전수는 자신으로 인해 자전거를 타고 있던 제가 곤란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까 싶었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다보니 누군가에게 이런 피해를 주었는지도 몰랐을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러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피해를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는 피해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언젠가 어떤 후배
신부가 제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형을 어렵고
힘들어 하는 후배도 많아요.”
누구에게나 편하게
다가서려고 했고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거리감을 주는 행동과 말을 했었기에 저를 어렵고 힘들어 하는
것이겠지요.
자기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주고 아픔과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도록 파견된 사람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 두 명의 제자를 뽑아 세상에 파견하듯이, 우리 각자 역시
하느님의 일을 위해 세상에 파견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전하고 하느님을 통해 사람들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자기도 모르게 그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다면 과연 주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아래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말씀으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들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으시지만 당신은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눈을 통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다리로 선한 일을 하러 다니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손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나는 혼자이지만 늘
하나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는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헬렌켈러).
무엇을 해야
할까요?
윌리엄 아더 워드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첨해 보아라.
그러면 당신을 믿지 않게 될 것이다.
비난해 보아라.
그러면 당신을 좋아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무시해 보아라.
그러면 당신을 용서하지 않게 될 것이다.
격려해 보아라.
그러면 당신을 잊지 않게 될 것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격려의 삶을 살아야겠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많이 하는 것들이 앞에 있는 것들에 있지 않습니까?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모습,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 귀찮다는 이유로 또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구세주를 보내라
기다린답니다.
-이기정신부-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시골뜨기 정치선동자로 몰아 사형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국적을 포기해야 되는 이스라엘인들입니다. 구약성경 기반으로 강력한 권력을
누리며 예수님과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세상권력의
마력에 걸린 자국을 급 선교지로 부탁하셨겠습니까. 왜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말살하려 했었는지 이점도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오늘도 그들은 하느님의
선민인 자신들께 구세주를 보내라 기다린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오
10,6~7)”
-조재형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12사도의 명단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제자단을 구성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맡겨진 복음 선포의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할 것입니다.
작년 이 즈음에는
교황님의 방한을 준비하면서 바쁘게 지냈습니다.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는 몇 개의 부서로 구성되었습니다.
‘기획,
재정,
의전,
대외협력,
행사,
의무,
봉사자,
영성,
홍보,
문화’
분과가
있었습니다.
회의를 많이
하였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보람된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영성분과를
맡았기 때문에 저에게 주어진 일들을 했습니다.
교황 방한을 위한
기도문을 제작하였고,
순교자 영성에 대한
이해,
시복식의 의미를
알려주는 책자를 제작했습니다.
외국인들을 위해서
영어,
이태리어,
일본어,
중국어로 된
안내책자도 제작하였습니다.
서울교구는
세계청년대회를 유치하려고 합니다.
이제 곧
세계청년대회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구성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릴 될 수 있도록 봉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청년대회이기에
아무래도 청소년 사목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이 많이 참여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제게도 또 어떤
자리가 주어진다면 피하지 않고 해야 되겠지요.
우리의 봉사는 밭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희망을 심으면
희망이 열매 맺습니다.
봉사를 심으면 밭이
풍성하고 아름답게 변화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우리들 역시 세례와
견진을 통해서 예수님께로부터 그와 같은 권한과 능력을 받았습니다.
야곱의 아들 중에서
요셉은 예수님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예수님의
‘패러다임’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점이 예수님과
비슷할까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요셉은 형제인
유다에 의해 은 20에
팔렸고,
예수님은 제자 가롯
유다에 의해 은 30에
팔렸습니다.
요셉은 주인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냈고,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냈습니다.
요셉도 부당하게
고소당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부당하게 고소당하였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근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은 영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을 때 용서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부르셨고,
12명의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복음에서 나온 12명의 제자와 같은
사도직을 받았습니다.
누군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약속을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자매의
부르심에 대한 묵상글을 적어봅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숫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부르고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고
내가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좌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어 누워 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 하고 나를 일으켜
주신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우선하기 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영적(내적)성장의
삶
-이수철신부-
영적(내적)성장이
답입니다.
정말
추구해야 할 바는 영적(내적)성장입니다.
내적빈곤,
영적빈곤의 시대입니다.
물질주의,
금전만능주의가 만연되 갈수록 천박淺薄한 삶에 내적빈곤은 더욱 심화될 것이고
영혼
또한 날로 황량荒?해져 갈 것입니다.
자연만
사막화 되어가는 게 아니라 마음도 사막화되어 갈 것입니다.
아,
어떻게 하면 내적부요, 영적부요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은
영적성장의 삶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수도공동생활의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함께 기도하는 시간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입니다.
사실
'함께 기도하는 일'과 '함께 식사하는 일'보다 더 엄중한 일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행복의 구체적 요건이요 거룩한 일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수도형제들 모두가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식사할
때의 창밖 울창한 숲을 보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지난
5일 남미 3개국(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라과이) 순방길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꺼낸 화두는 '함께하는 삶, 그리고 자연'이라 합니다.
행복한
삶의 구체적 요소를 정확히 지적한 말입니다.
자연이
사라지면 인류 행복도 사라집니다.
환경파괴는
인류가 만든 대재앙이요 지속가능한 개발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기
요셉수도원이 만인의 사랑을 받는 원인중 하나도
초목들
울창하게 우거진 숲같은 아름다운 분위기 덕분일 것입니다.
-창밖
나무를 바라볼 때 마다/영적성장을 생각한다/침묵을 배운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어쩜 저리 늘 푸를수가 있나
어쩜
저리 갈수록 울창鬱蒼할 수 있나
날로
높아져 가는/날로 넓어져 가는/날로 깊어져 가는
크고
넉넉한 나무들
육신의
성장은 멈춰도/영혼의 영적성장은 저 나무들 같았으면 좋겠다-
식당
밖 숲을 바라볼 때 마다 되뇌이는 제 염원念願이 담긴 자작시입니다.
요셉수도원
파견후 28년 째 정주의 삶을 살다보니 나무들의 성장이 너무나 경이驚異롭습니다.
자,
그러면 영적성장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 나눕니다.
영적성장의
빛나는 모델은 아브라함, 야곱에 이은 오늘 창세기의 주인공인 요셉입니다.
세
영적거인들의 삶에는 공통점 셋이 있습니다.
첫째,
하늘을 꿈꾸는 사람이 되십시오.
늘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이 되십시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두 '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늘
하느님을 꿈꿨던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창세기의 주인공 야곱의 꿈은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웠는지요.
하느님을
꿈꾸면서 늘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낸 아브라함, 야곱이었고 오늘의 주인공 요셉입니다.
아버지
야곱을 닮아 꿈이 많았던 요셉은 야곱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꿈장이라
불리며 형제들의 질투를 받아 이집트에 팔려갔지만
그를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됨을 봅니다.
인류역사는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역사입니다.
오늘
창세기가 그 생생한 본보기입니다.
온땅이
기근으로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요셉의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지혜로 비축해 뒀던 양식을 배급함으로 살게되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섭리가 놀라운 신비입니다.
'나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고백대로
늘 하느님을 경외했던 하느님을 꿈꿨던 요셉을 통해
당신의
꿈을 실현시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요셉뿐
아니라 오늘 복음의 주님의 제자들도 주님을 닮아 늘 하늘나라를 꿈꿨던,
늘
하늘나라의 실현에 전력투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꿈꿀 때 놀라운 축복에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주님의 꿈입니다.
둘째,
고독孤獨을 사랑하십시오.
고독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풍요로운 축복도 받습니다.
영적성장에
고독은 필수입니다.
고립孤立은
저주지만 고독은 축복입니다.
고독할
때 하느님을 찾아 기도하게 되고 삶은 더욱 깊어지며 더 큰 이웃에의 연대連帶로 열리게 됩니다.
아브라함,
야곱의 삶의 여정은 물론 오늘 요셉의 삶의 여정은 얼마나 파란만장했고 고독했겠는지요.
고독했지만
하느님 안에서 겪는 고독이었기에
결과는
빛나는 축복이었고 이웃과의 풍부한 결속으로 이어집니다.
'이집트
땅에 기근이 심하였지만, 온 세상은 요셉에게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왔다.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어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하느님의
심모원려 역시 놀랍습니다.
바로
이것이 요셉의 '고독의 열매'입니다.
하느님의
꿈이 요셉의 고독을 통해 완전히 실현되어 굶어 죽게된 많은 이들을 살립니다.
셋째,
현실現實에 뿌리를 내리십시오.
말그대로
현실주의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꿈꾸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은 결코 뜬 구름 잡는 영성가가 아니라
현실에
깊이 뿌리 내린 하느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온실속의
화초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잡초같이 강인한 생명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고향이요 그 삶의 자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
이런 하늘 꿈을 지닌 요셉과 같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이 정계政界에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현실에 깊이 뿌리내린 이상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명령대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치유해 줌으로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체험하며 살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새삼
하늘나라의 꿈이 현실화되면서
치유되는
삶의 허무虛無와 무의미無意味라는 영혼의 병病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영적성장을 촉진시켜 주시고,
늘
주님을 꿈꾸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참조).
아멘.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 (창세 42,21)
-오상선신부-
내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위로해 주길 바랍니다. 누군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를
위로해주지 않고 외면하거나 그
사람 탓으로 돌려버리면 언젠가는
그 업보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랬습니다. 세월호
참사나 일본이나 중국 등 외국에서
일어난 대형참사를 바라보면서 그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위로하는 마음없이 그저
돈만 밝힌다는 둥 무시하고
폄훼하는 행위는 그들을
두번 죽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런
유사한 일이 생기게 되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누가
압니까?
그러니
형제여, 오늘
누군가 고통받고 있으면 그에게
따뜻한 위로를 보내자구요.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근거도
없는 카더라 통신에 의지하지 말고 그저
측은지심으로 함께
아파해 줍시다. ◆ 그래야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나도
다른 이들로부터 따뜻한
위로를 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될테니까요.
제자됨
-민경일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이른바 ‘열둘’, 곧 사도들을 만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을 만나는데요,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이
흥미롭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과 같은 일을 오늘은 제자들에게 주고 계시다는 것 때문입니다.
즉 사도란,
제자란, 스승의 모범을 따르는 사람들이요 스승이 가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란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 주신 셈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당신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우리가 걸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길이란, 먼저 당신의 부르심에 따라 당신 곁에서 그분의 모범을 따르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 그분의 모범을 따르는 일 말입니다.
신자로서 우리의
사명은, 성당에 열심히 나와서 기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사명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기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
-김대열신부-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오10,7) ---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를 바라며 살게 되어있습니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한결같습니다. 어느 누가 바라는
것이 없다면 삶이 재미없다는 반증이 될 것입니다. 희망은 순경과
역경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삶을 역동적으로 살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가장 바라고 계신 것은 무엇인가요? 답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희망의 의미조차 제대로 모르고 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어떤 것들을 갖고 싶어하는 것을 희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욕심이든지
올바른 기대이든지 상관없이 무엇인가를 바라면서 살고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최종적 희망은 무엇일까요? 결코 변하지 않고
빼앗길 수도 없는 희망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12사도를 파견하시며 그 답을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입니다. 비록 우리의 약함이
늘 현실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구석에는 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늘 불안한 마음,
두려운 마음, 걱정스러운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살고 있는 우리이지만,
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희망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입니다. 누구에게나 이 삶의
끝은 주어집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욕구도 사라지고 맙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무엇이 변하지 않는
것인지, 무엇이 허무로 끝나지 않는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영원한 이별조차 넘어설 수 있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한계는 눈에 보이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저 막연한 개념의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막연한 기대 정도여서는 안 됩니다. 구체적이고 확신에
이르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서 신앙의
꽃이라는 감사와 기쁨의 삶이 허락될 것입니다.
결국 복음의
끝자락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상우신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삶의
중심을 잃어버렸기에 형제를 사랑해야
할 생명의 길도
잃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시작은 사랑의
시작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며
모순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 앞에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 멀리 있는
이들에게 겸손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기쁨과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한결같은 삶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정한
제자는 이와같이 옛방식을
버리고 복음의 새로운
길을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복음의 새로운
길은 주님과
가까워지듯 형제들과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진짜 사도의
기쁨입니다.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아름다운
사랑은 가까이 온 하늘
나라의 아름다움을 드디어
만나듯 가까이 있는 이들과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허약한
모습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먼저 관계회복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회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과
관계회복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기에 알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알아보는 복음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복음은
먼저 가장
가까이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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