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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0. 묵상글 (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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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0. 연중 제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20 03:53
-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
오늘 저는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를 오늘 나눔의 주제로 잡아봤습니다.
인간은 겉모습을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를 천지 차이라고 묵상했습니다.
차이가 클 때 그것을 우리가 천지 차이라고 흔히 얘기하듯이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차이는 실로 천지 차이입니다.
사무엘기에서 사무엘을 선견자(先見者)라고 곧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런 그도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하느님께서 뽑으실 사람을 몰라보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마음을 보시는데 인간은 허우대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허우대 좋기로는 사울이 최고였지요.
지난 토요일 독서에서 사무엘기는 사울의 허우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사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더 컸다.”
그런 그였지만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그를 내치시고,
이제 다른 사람 곧 다윗을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로 뽑으시려는 것 아닙니까?
사무엘도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마음을 보지 못하고 허우대만 볼 것이고,
욕심으로 보면 욕심내는 것만 보지 그 밖의 것은 하나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는 보는 것의 차이뿐이 아닙니다.
인간의 약함과 악함을 대하는 것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악함과 약함에 대해 슬퍼하고 비관적입니다.
사무엘도 사울이 악한 짓을 하고 하느님 눈에 벗어나자 슬퍼하고,
그래서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을 것이냐?”고 꾸지람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한 인간의 죄악과 약함 때문에 세상을 다 비관적으로 보고,
미래까지 다 비관적인 마음으로 보기에 희망이 없고 마음은 어둡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선견자인 사무엘조차 그러하니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보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인간만 보면,
그리고 인간을 보더라도 인간의 악함과 약함만 보면 이렇게 비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섭리 안에서는 악도 선입니다.
인간의 선은 악에 걸려 넘어지는 선이요 악을 초월커나 극복하지 못하는 선이지만
시편 138편 말씀처럼 하느님께는 어둠은 그것마저 어둡지 않고 악마저도 선입니다.
그래서 오늘 베틀레헴 성읍의 원로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뽑기 위해 오는
사무엘에게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는 겁니다.
하느님께는 언제나 사울보다 더 좋은 다윗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에게도
사울만 있지 않고 다윗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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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0.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이 먼저다
<판단의 잣대는 사랑, 예수님>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겠습니다. 정말 이 정도라면 사람이 먼저인, 사람이 존중받는 복음적 나라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은 선진국이기 보다는 다른 차원의 뭔가 있는 특별한 나라라 하며 네가지 사실을 꼽는다 합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의 공통적 놀라움의 찬사(讚辭)라합니다.
1.안전; 야간에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대한민국.
2.분실물; 거의 돌아와 찾을 수 있는 대한민국.
3.병원진료; 어느 병원이나 30분내 진료 가능한 대한민국.
4.어디서나 줄을 서는 나라; 질서가 생활화되어 있는 대한민국.
우리에게 당연한 듯 하지만 외국에선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투버에 짧게 소개된 내용이 고무적이라 잠시 나눴습니다. 정말 복음적인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명실상부한 민주주의의 모범국이 되었습니다. 애국가 가사대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지혜로운 국제 외교요 북한과의 평화공존과 통일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불러보는 <우리의 소원> 노래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시간되면 동심의 순수한 마음으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어떤 나라가 복음적 나라입니까? 사람이 먼저인 나라입니다. 사람 자체가 사랑처럼 절대적 가치입니다. 사람 앞에 모든 법은 상대화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건의 발단은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자른 사실에 예수님께 문제를 제기하는 바리사이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들은 배고픈 현실의 사람이 아닌 안식일법의 잣대로 사건을 재단합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면서 이들을 설득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섬기는 다윗이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성전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먹은 사실을 예로듭니다. 이런 다윗의 담대하고 자유로운 처신을 통해 그가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해 있는지, 예수님이 이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 깨닫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다윗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 사랑에 정통해 있는 대자유인이셨습니다. 이어지는 답변이 정말 명품입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안식일법을 상대화하고 사람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을 확립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즘말로 법만능사상을 물리치고 인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법에 앞서 인간애를 강조하셨으니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반영입니다. 발광체 하느님 사랑을 100% 반사한 반사체 사랑의 예수님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사람이 먼저다>에 이어 금상첨화의 결론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느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며, 하느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이승의 예수님은 안식일법에서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안식일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님이요, 우리는 이에 따라 안식일(토) 대신 일요일(주님의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그러니 판단의 궁극의 잣대는 예수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경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그러니 날로 하느님의 안목을 지닌 예수님과 하나될수록 올바른 판단에 분별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보는 안목은 사무엘을 통한 다윗의 선택 과정안에서 잘 드러납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이어 다윗에 등장하니 지체없이 사무엘에게 명령합니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고,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갑니다. 사울에게 다윗으로 권력이 이양되는 하느님의 비정(非情)한 선택이 깊은 묵상자료요, 각자 주님께 불림받은 성소에 시종여일 충실함이 얼마나 본질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또 한번 실추된 신뢰와 권위의 회복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습니다.
사울과 다윗 사이에서 인간적으로 갈등하는 사무엘의 진퇴양난의 처지에 공감합니다만 하느님은 인정에 연연하지 않고 사무엘을 통해 올바른 판단을 실행에 옮깁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신뢰를 상실한 사울은 퇴출되고 하느님의 선택으로 새롭게 등장한 다윗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우리 모두 참으로 주님을 닮아 올바른 분별의 눈과 더불어 자신의 성소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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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0. 연중 제2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아브라함의 소명!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어, 미지의 길을 걸어가는 여정에 늘 동행해 주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아브라함의 소명
2026년 1월 19일 월요일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신화적이며 원초적인 이야기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라는 세 유일신교의 기초가 된 ‘창조적 신앙의 이야기’로 자리잡았습니다.
- 리처드 로어, 영혼의 형제들(Soul Brothers)
주님께서는 아브라함(본래 아브람)과 사라를 불러내시어, 세속적 권세와 안락을 떠나 새로운 계약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신앙의 모범이 되어, 참된 믿음이란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미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창세기의 고대 이야기들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세상 안에서 놀랍고도 경이로운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가 악을 꾀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선을 계획하시며, 우리가 하느님을 이용해 자기만의 축복을 얻으려 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큰 섭리에 집중하시어 그 과정 안에서 우리 또한 은총을 입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사라를 선택하시는 장면에서 이 패턴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가운데 하나인 우르라는 도시국가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명과 마찬가지로, 우르의 풍요로움은 폭력과 억압, 착취 위에 세워진 어두운 비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부부에게 세속 문명의 특권적 삶을 떠나도록 명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나그네와 순례자로서 미지의 길로 보내시며, 이제 아브람과 사라는 더 이상 우르의 군대와 부, 안락함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며 더 나은 길을 보여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제부터 그들은 걸어감으로써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주님의 부르심을 신뢰한 모습은 우리의 신앙에 모범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참된 신앙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신앙이란 이미 익숙한 지도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선을 향한 순례에 나서는 것이며, 현 상태가 최선이 아님을 신뢰하고,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특권이나 성공의 비밀 공식을 얻는 거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월감이나 배제의 표지가 아니라, 모든 이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함께 선을 추구하는 것이며, 우리 모두가 연결되고, 모두가 포함되고, 모두가 사랑받고, 모두가 축복받는 더 큰 공동체 안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에게 신앙은 단순한 목록으로 축소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축복을 받기 위해 반드시 외워 동의해야 하는 교리나 진술의 목록이 되었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식과 규범의 목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교리나 규범, 의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성경도, 교리도, 성전도, 계명도, 전례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참된 신앙은 단순히 "축복받아 축복이 되는"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형식이 아니라, 살아 있음 자체의 길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이제 81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삶은 저를 놀라게 합니다. 젊었을 때는 언젠가 성장하면 더 이상 찾지 않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삶은 크게 변하지 않지만, 그 체험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기쁨과 아름다움, 빛남과 함께 슬픔과 불안, 연민도 더 짙어집니다.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할수록, 슬픔도 더 깊이 느낍니다. 제 평생의 물음은 ‘나의 참된 소명은 무엇일까?’였습니다. 이제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 존재의 모든 복잡성을 깊이 살아내는 것이 바로 제 소명이라는 것을.
—Claire M.
References
Brian D. McLaren, We Make the Road by Walking: A Year-Long Quest for Spiritual Formation, Reorientation, and Activation (Jericho Books, 2014), 24–2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evi Ventura,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작은 푸른 싹처럼, 우리도 저마다의 고유한 땅과 자리와 환경 속에서 자라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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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는 분이십니다!
어떤 교회법 학자가 늘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교회법을 연구하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다. 법으로 사람을 얽매려는 이와, 법을 통해 사람을 자유롭게 하려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후자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법학자로서 다소 파격적으로 들릴 수 있었지만, 그는 라틴어로 교회법전이 codex iuris canonici라 불린다는 점을 즐겨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ius는 단순히 "법"이 아니라 "권리"를 뜻합니다. 곧 교회법은 사람들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가 흔히 교회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규범이나 억압이 아니라,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은총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하느님의 선물인 셈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 계명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탈출기 탈출기 20장의 안식일 규정은 단순한 제도적 법이 아니라, 창조와 구원의 기억을 새기는 신비로운 계명입니다.
그리고 참된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선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시며, 억압된 이들을 해방시키고 모든 이를 은총의 자유로 초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율법으로 사람들을 얽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바리사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학자들아! 너희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 그들이 감당하기 어렵게 하면서도, 너희 자신은 그 짐을 덜어주려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루카 11,4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노동 금지의 율법에도 역사 속 예외들을 찾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순한 규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주신 계명(탈출 20,10)에 관한 말씀입니다. 율법의 가장 깊은 의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는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로 된 이들을 해방시키시려고" 오셨습니다(루카 4,18).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맞서십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을 왜곡하여 본질을 잊고 사소한 것에 집착합니다. 실제로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합니다(마르 2,24). 그들의 까다로운 율법 해석에 따르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수확'이고,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타작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안식일에 금지된 수많은 노동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제사 빵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하느님께 바치는 열두 개의 빵으로, 매주 성전의 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덜 중요한 율법의 규정은 더 중요한 계명 앞에 양보해야 합니다. 의식적 규정은 자연법적 계명 앞에 물러나야 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의 휴식 규정은 인간의 기본적 생존 필요보다 우위에 있지 않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 복음 말씀에 영감을 받아, 사회 질서와 발전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인간이 사회 질서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랑하라, 그리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부차적인 것에 집착하여 우리가 모든 일에 담아야 할 사랑을 질식시키고 있습니까? 일하고, 용서하고, 바로잡고,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병자를 돌보고, 계명을 지키는 모든 행위… 우리는 그것을 의무감 때문에 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합니까? 바라건대 이 묵상은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행위를 새롭게 하여,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요한 1서의 저자가 말하듯이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요즘 저는 아침 묵상 때마다 숨 기도를 하면서, 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지만, 이 기도를 합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조금씩 바꾸어서....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너를 늘 용서한다."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예, 저는 주님의 그 자비를 믿습니다." 등등....
그러면 자연히 마음에 미소가 퍼지기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 마음에 미소가 잔잔히 퍼지게 하는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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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0.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트집을 잡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의 본질과 우선순위를 깨닫게 됩니다. 곧 ‘해야 할 일’(생명을 살리고 축복하고 하느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생명을 저해하고 자신이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자신의 유익과 유쾌함 따르는 일)의 순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을 우선하는 사람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세우신 것일까?
야훼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나 주님이 너희를 성별하는 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나와 너희 사이에 대대로 세운 표징이다.”(탈출 31,13)
이처럼, 안식일을 새운 이유를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마르 2,25) 하고 물으시고, 그들이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임을 밝히십니다. 곧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날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너희 여종의 아들과 이방인이 숨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 쉼도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주님!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저희에게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당신을 입히시니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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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0.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줌 신앙 특강팀’의 이사회를 탬파에서 하였습니다. 3년 전에 저는 미운 오리 새끼와 같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큰 파도를 맞으면서 신앙인들의 영적인 갈증을 ‘줌’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채워주려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기획하였지만 ‘둥지’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사목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찾아왔고, 저는 기꺼이 그분들의 ‘둥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분들은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우아한 백조가 되었습니다. 3년 동안 그분들은 6천 명이 넘는 분들에게 줌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었습니다. 월 신앙 강좌를 통해서 갈증을 채워주었고, 기획 강좌를 통해서 영적인 풍요로움을 주었습니다. 코로나가 끝나면서는 대면으로 만나는 ‘피정’도 하였습니다. 작년 5월 저는 ‘북미주 한인 사제 사목 협의회’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줌 신앙 특강팀에게 새로운 ‘둥지’를 제안하였습니다. 북미주 한인 사제 사목 협의회는 이사회를 하였고 줌 신앙 특강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줌 신앙 특강팀의 주체는 북미주 한인 사제 사목 협의회가 되었고, 가톨릭평화신문은 후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2026년에도 줌 신앙 특강이 북미주에 있는 교우들에게 영적인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탬파에는 바다와 강을 걸을 수 있는 ‘River Walk’ 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달라스에서는 숲속의 길을 걸었는데, 탬파의 길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탬파의 발전과 성장에 이바지했던 분들의 흉상을 보았습니다. 역사는 고독한 마라톤이 아니라, 이어달리기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였습니다. 탬파에는 ‘달리 미술관’이 있습니다. 달리의 작품이 좋아서 수집했던 분이 기꺼이 작품을 기증하였고, 미술관을 건립하였습니다. 미술관에는 많은 달리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중에 ‘링컨’이라는 작품을 인상 깊게 감상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아내 갈라가 창가에 서서 지중해를 바라보는 평범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조금 멀리 떨어져 보면, 에이브러햄 링컨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더 깊이 바라보면, 그 안에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숨어 있습니다. 같은 그림인데,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이 나타납니다.
먼저, 갈라의 모습입니다. 가까이서 보이는 갈라는 우리의 일상을 닮았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먹고, 일하고, 고민하고, 걱정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삶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거리에서 살아갑니다. 너무 가깝기에, 삶은 종종 버겁고 의미 없어 보입니다. 고통은 고통으로만 보이고, 십자가는 십자가로만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 보면, 링컨의 얼굴이 보입니다. 링컨은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묶은 인물입니다. 갈등과 전쟁 속에서 통합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부분만 보면 갈라일 뿐이지만, 전체를 보면 링컨이라는 ‘얼굴’이 됩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흩어진 사건처럼 보이지만, 시간과 거리를 두고 보면 그 안에 하나의 방향과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의 깊은 바탕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달리는 이 그림 안에,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숨겨 놓았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실패처럼 보였던 십자가, 멀리서 보면 분열처럼 보였던 역사,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가까이서 보면 고통이고, 멀리서 보면 구원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선택하셨고,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등대와 같습니다.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부활의 표징입니다. 신앙이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리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너무 가까이서만 보면 우리는 갈라의 뒷모습만 봅니다. 조금 떨어져 보면 역사의 얼굴이 보이고,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중심에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주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어 눈앞의 현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신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게 하소서.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의 사랑을 알아보고 그 사랑 안에서 희망을 선택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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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0. 연중 제2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마르 2,23–2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자
사람들은 규정을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초대 교부 성 예로니모는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법은 생명을 억누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명이 숨 쉬도록 지켜 주기 위해 주어졌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규칙을 폐기하지 않으시지만
규칙보다 앞서는 생명과 자비를 회복시키십니다.
문화 주간의 복음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형식을 파괴하지 않되
형식 안에 갇히지도 않으십니다.
성령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길을 여십니다.
성령이신 주님,
제 안의 굳어짐을 풀어 주시고
규칙보다 생명을 먼저 보게 하소서.
판단보다 자비를 택하게 하시고
사람을 살리는 선택으로
오늘을 걸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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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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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0. 연중 제2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17:40>
■ 생활묵상 : 왜 아주머니들이 내 목욕바구니를 관심있게 보는 것일까?
코로나 이전까지 근 20년 넘게 사우나를 했습니다. 언제부터는 정확하게 잘 모르지만 제가 목욕 바구니를 사용한 것은 1999년 가을부터일 겁니다. 서울에서부터 한 습관입니다. 정확하게 성당 이름은 모르겠는데 노량진 근처에 두 개 성당이 있는데 이름이 노량진 성당이지 않을까 합니다. 사육신 묘 가까이 있는 성당입니다. 이 성당 옆에 사우나를 이용했습니다. 이 사우나에서 한번은 한기범 농구선수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땐 제가 비욘드 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 목욕용품을 사용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탈모를 신경써야 해서 비욘드 샴푸를 사용하다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목욕관련 용품은 비욘드를 사용해온 것입니다.
제가 이 묵상글을 올린 걸 며칠 전에 확인을 해보니 만 7년이 됐습니다. 결정적으로 올리게 된 게 가르멜 수도원 신부님이 적극 추천하셔서 올리게 된 것입니다. 초반에 올린 글에서 제가 성모님상을 씻겨드린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아마 제목이 '성모님 목욕하는 날' 일 겁니다. 지금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그건 별 중요한 건 아닙니다. 작년에 탕청소를 하면서 원래는 사우나 락커에는 옷만 보관해야 하는데 제가 잠시 일했던 그 사우나는 목욕 바구니를 어떤 아주머니들은 락카에 보관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도난 때문인지 아니면 공간이 부족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마지막에는 간단하게 샤워를 해야 해서 목욕바구니가 있어야 할 것 같아 구비를 했던 것입니다. 성격상 그런 곳에 잘 넣지 않는데 일단 주인아주머니에게 먼저 말씀을 드리고 보관했습니다. 왜냐하면 면도기도 있고 면도 폼도 있으면 남자 거라는 게 구분이 돼 그래서 노출 안시키는 게 여성분들에게도 좋을 것 같아 그랬던 것입니다. 한 번은 제게 그만 깜빡하고 사우나 파우더룸에 놓고 나와 다음날 사우나 이용하는 회원분들이 제 목욕 바구니를 보게 된 것입니다. 처음엔 난리 아닌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면도기가 있는 거라 이게 왜 여탕에 있지 하는 그런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세신 아주머니가 그런 상황을 보고 이야기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지금 탕청소를 남자가 해서 아마 그 아저씨 소유일 거라고 말입니다. 그때 또 놀란 게 남자가 청소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신 아주머니는 주인 아주머니를 통해 남자가 청소를 하는 걸 알고 있었나 봅니다. 남자가 청소를 한다는 사실을 사우나 여성 회원분들이 대부분 알게 된 건 그날 그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이런 것도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쇼킹했는데 더 쇼킹한 게 있었습니다. 제 목욕 바구니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조금 먹었던 모양입니다. 목욕 바구니는 그냥 이마트에서 파는 걸 사용했고 용품은 제가 사용하는 비욘드 샴푸랑 바디샤워 그리고 세안제는 일반 마트에서 파는 거랑 그외 잘잘구리한 것 치솔 치약 혀클리너 치간칫솔 두피마사지처럼 생긴 솔모양의 머리 세안기, 비누각 이런 게 다였습니다. 저는 목욕용품 뿐만 아니라 옷도 그렇고 속옷 모든 물건이면 다 기능도 기능이지만 디자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독톡한 성격입니다. 백화점 유명 여자 사장님들은 어느 정도 지나면 제 스타일을 완전 압니다. 학원 운영할 때 찻잔을 산 일화를 소개한 글에서도 이런 유사한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제가 생각보다 미적인 감각이 뛰어납니다. 제가 천주교로 올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한 자매님도 도자기를 판매하는데 그곳에서 다기를 사려고 갔다가 전교가 된 것입니다. 그때도 다양한 물건을 샀고 그 이후에 다포를 사는데 다포를 고르는 걸 보고 편의상 자매님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다포를 고르는 걸 보고 남자가 보통아니네 하고 하셨습니다. 아주 놀라워하시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학원을 운영할 때도 제가 가장 딸처럼 여기는 애가 있었습니다. 그 애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런 걸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애도 지금은 재작년에 미국에 완전 풀 장학생으로 유학을 갔습니다만 그 애는 제가 가진 물건을 보면 뭐든지 탐을 냅니다. "쌤, 쌤은 이런 거 어디서 사는가요?" 아무튼 뭐든지 쌤 이거 나 주면 안 되요? 보는 쪽쪽 그럽니다. 이 애도 집에 가면 자기 엄마한테 하는 말이 "아무튼 생긴 건 절대 그렇지 않은데 쌤은 물건 고르는 능력은 정말 갑이야. 진짜 대단해" 라고 해 학부모랑 언제 상담을 하다가 이런 에피소들 이야기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런 쪽으로 뭔가 모르는 남다른 눈이 좀 있습니다. 디자인이런 걸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지른 몰라도 저는 만약에 그런 용품을 바구니에 넣을 때도 그냥 아무렇게나 넣지 않습니다. 아주 독특한 캐릭터이고 요상한 성격이라 배열도 그렇고 이왕 넣는 것 이쁘게 배치를 합니다. 굳이 이런 것까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성격이 좀 유별난 걸 잘 압니다. 그간 사우나를 오랜세월 했어도 잠시 잠시는 여성분들 목욕탕 가시는 거나 아니면 사우나 주변에서 보게 될 때 시야에 눈이 들어와 흘려보게 되는 경우는 있어도 그런 걸 자세히 볼 경우는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청소하면서 대략 약 여자 사우나 실에 80개 정도 바구니가 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진열이 돼 있고 해서 시야에 들어와 그냥 무심코 보는 거지 뭘 염탐하듯이 보는 게 아닙니다. 그때 제가 조금 충격까지는 아니지만 너무 놀란 게 하나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들이라면 당연히 여자인데 여자분들은 성격상 아기자기한 면이 있고 그래서 화장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도 좀 아기자기하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예상밖이었던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그냥 막 아무렇게나 담기만 했다고 표현하면 딱 맞을 겁니다. 이런 건 살면서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목욕 바구니는 말 그대로 물건만 담고 그 기능만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럼 한두 사람이 아니고 제 목욕 바구니가 그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것일까요? 제 바구니를 보고 그분들에겐 약간 신선한 충격이었던 겁니다. 뭔가 모를 여운 같은 걸 남겼던 것입니다. 별거는 아니지만 자기들도 다 서로 서로 비교를 해봐도 제것만큼 외관이 깔끔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고 하다못해 샤워 타월을 봐도 보통 대개가 그냥 말아서 샴푸나 다른 것 사이 빈 공간에 쑤셔넣거나 바구니 전체를 반으로 접어 덮어두는 게 보통입니다. 근데 제 거는 치약과 치솔, 혀클리너 이런 것을 슬림한 용기에 따로 보관하고 샤워타올도 가지런히 접어서 따로 작은 용기에 넣어 보관을 하니 일단 누가봐도 외관상 가지런하니 예쁘게 보였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주 내용은 이게 아닙니다. 이러 전체 내용에 대한 배경을 조금 이해를 해야 지금부터 말씀을 드리는 게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언급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실제로 보면 전혀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를 바탕으로 해서 약간 영양가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신앙과 접목시켜 우리의 신앙의 한 단면을 비추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아주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목욕바구니 속에 있는 용품 하나 하나를 저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는 하나 하나의 개별적인 신앙 하나 하나로 말입니다. 미사, 레지오, 기도, 봉사, 꾸리아, 성경봉독, 사랑, 희생, 극기 이런 것 하나 하나로 말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설명의 편의를 위한 비유에 불과한 것임을 잘 아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목욕바구니 안에 그 목욕 용품을 담는 건 매한가지인데 그걸 어떻게 담고 배치하고 하는 것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다 다른 것입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런 문제는 없지만 우리가 시각적으로 볼 땐 가지런한 게 좀 더 뭔가 달리 보이는 건 사실이다는 것입니다.
많은 아주머니들이 이야기를 하신 것 중 하나가 제 목욕 바구니 하나만 보면 탕청소를 어떻게 할지 그것 하나로 다 알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세신 아주머니로부터 들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이걸 많은 분들에 알리고 싶습니다. 마치 신앙생활도 이런 게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전혀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도 없습니다. 잘 성찰해보면 그렇습니다. 만약에 이런 걸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이것도 마치 목욕바구니 속에 샤워타월을 그냥 빈공간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은 것과 같은 모습의 신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정리정돈인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정리정돈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금 이해가 되시는지요? 바로 자신이 하는 각각의 신앙에 대해 뭔가 점검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대개 보면 뭔가 하긴 하지만 그런 행동이나 행위에만 신경을 쓰지 그에 대해 점검을 하는 경우는 잘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대개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그럼 잘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잘 못합니다. 못하기 때문에 저도 이런 사례를 통해 이런 걸 간접적으로 묵상을 통해 제 신앙을 되돌아보며 이런 간접 체험을 통해 많은 분들도 한번 비록 간접체험이지만 잘만 응용하시면 신앙에 유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공유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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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0. 연중 제2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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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영희”를 찿아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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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9.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 읽는 것을 시간 낭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은 빠르게 정보를 취득할 수 없다면서 인터넷을 통해 정보 취득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긴 영상 보는 것도 낭비라면서 짧은 쇼츠 영상만을 보려 합니다.
책은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어서 느리지만, 영상을 휙휙 지나가기에 빠릅니다. 그렇다면 기억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책 읽는 것은 느리기에 생각하게 되고 이로써 자기 주관이 생겨납니다. 또 책을 읽지 않으면 문해력이 떨어져서 정보를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무슨 말이야?” 할 정도로, 정보 취득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됩니다.
핀란드는 15세 이상의 독서율이 83.4%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요? 15세 이상의 독서율이 8.4%에 그칩니다. 머리가 좋아서 청소년기 문해력은 세계 상위권이지만, 책을 읽지 않는 25세 이상이 되면 곤두박질쳐서 55세 이상은 세계 최하위권에 머무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저는 40세에 노안이 왔습니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컴퓨터 모니터보다 책에 집중했습니다. 지금 눈이 더 나빠졌을까요? 얼마 전에 안과에 갔더니 더 좋아졌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노안이 와서 책을 못 읽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스마트폰 보는 것에는 집중하십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스마트폰을 보니 눈이 더 나빠집니다.
삶 안에서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즉, 밀 이삭을 뜯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문제일까요?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은 행위 자체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도둑질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23장 26절에 따르면 이웃의 밭에서 손으로 이삭을 자르는 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려로 허용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안식일을 지적합니다. 안식일에 이삭을 뜯는 것은 ‘추수(일)’에 해당하고,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탈곡(일)’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생명처럼 여겼고, 예수님은 율법이 지향하는 생명과 자비를 중심에 두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인간을 옥죄거나 감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노동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쉼을 주며, 생명을 축복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뜻을 새기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 안에 머물면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십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을 잘 알면 알수록 자신을 더 많이 용서할 수 있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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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0. 연중 제2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X X X X X
http://www.ofmkorea.org/ofmhomily
위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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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 중 일부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75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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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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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0g6T-EjEVA
[서울대교구 안환준 바오로(둔촌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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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어떤 법이든 예외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직도 정통 유다인들에게 있어 안식일은 만사 제쳐놓아야 하는 날입니다. 금요일 해가 떨어지면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금요일은 안식일 이브, 토요일은 안식일 당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안식일에 모든 외적인 행위를 멈추는 기원은 창세기와 탈출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 그분의 모상인 인간들도 안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탈출기 20장에서는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낼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금요일 저녁, 일몰 18분 전에 촛대 위에 놓여있는 초에 불을 켜는 의식으로 안식일을 시작합니다. 이어서 찬미가를 부르고, 포도주잔을 들고 기도문을 바칩니다. 만나를 기억하는 빵을 나누고, 토라를 낭독합니다.
안식일 해서는 안 되는 창조와 관련된 39가지의 금지된 활동들이 있습니다. 이는 탈무드에 명시되어 있으며, 모든 금지된 활동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행하신 일들을 반영합니다. 금지된 활동 중에 대표적인 것은 불 피우기, 물건 나르기, 요리하기, 글쓰기, 건축 활동이나 리모델링 작업 등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그냥 빈둥빈둥 쉬는 날, 단순한 휴식의 날이 아닙니다. 외적인 활동을 중지하면서 하느님과의 언약을 기념하고 그분의 이 세상 창조와 인류 구속 사업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이토록 좋은 의미에서 제정된 안식일 규정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 지나치게 해석되고 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규정이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법이든 예외가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제인 경우가 그렇습니다. 초대형 사고로 인해 여기저기 온몸이 망가져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면, 안식일 규정이든 뭐든 다 뒤로하고 응급실로 달려가야 마땅한 것입니다. 사흘을 굶어 정신이 뱃가죽이 등이 붙고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라면, 제단에 올려진 빵이든 그 어떤 빵이든 일단 먹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다윗 일행이 겪은 예를 드시면서 율법이나 규정보다 사람이 우선임을 강조하십니다. 며칠을 굶은 다윗이 얼마나 배고팠던지 사제에게 청합니다. “지금 사제님 수중에 무엇이 좀 없습니까? 빵 다섯 덩이라도 좋습니다. 아니면 아무 것이나 있는 대로 저에게 주십시오.”
사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통 빵은 내 수중에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거룩한 빵뿐입니다.” 사제는 거룩한 빵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주님 앞에 바친 제사 빵 말고는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빵은 마침 그날 제단에 따끈한 빵을 올려놓고 교체한 빵이었습니다.
율법의 최종적인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유다인들이 흠모하고 존경하는 다윗이 사울의 추적을 피해 도망가던 중, 그 거룩한 빵으로 영양을 보충하지 못했다면 분명 후퇴하던 도중에 기진맥진해서 죽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예를 드시면서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아주 살짝 거스른 행위, 밀알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은 행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십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개념을 더욱 크게 확장시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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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율법의 존재 목적은 이웃을 심판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얼마 전에 따뜻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인천 어느 마트에서 삼십대 아빠와 열두 살 초등학생 아들이 어설프게 우유 2팩과 사과 6개를 훔치다 마트 직원에게 적발되어 경찰에 인도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몸을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아빠의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택시 운전사였습니다. 그러나 당뇨와 갑상선 질환 등 병에 걸려 반년 가량 일을 하지 못해 수입이 전혀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기초생활 수급자로 선정됐지만, 아빠와 아들, 할머니, 7살 막내아들까지, 임대 주택에 사는 네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실제 아빠와 아들은 이날 하루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한 상태였고 아빠는 아이들이 굶주림을 호소하자 결국 범행에 나서려 했던 것입니다.
마트는 이 사실을 알고 즉시 신고를 취소했고 경찰은 이 부자를 훈방조치하고 가까운 식당에 데려가 국밥을 대접했습니다.
국밥을 대접한 인천 중부경찰서 소속 이재익 경찰관은 “아침 점심도 다 굶었다고 그러니까, 요즘 밥 굶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라며 끝내 눈물을 보였습니다.
진짜 따뜻한 손길들은 이후에 이어졌습니다. 국밥을 먹고 있던 아빠와 아들의 식탁에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왔고, 느닷없이 식탁에 흰 봉투를 두고는 그대로 식당을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 봉투 안에는 현금 2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남성은, 이날 마트에서 경찰에 붙잡혔던 아빠와 아들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손님이었습니다.
빵 몇 개 훔쳐서 오랜 세월을 징역을 살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여도 편하게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법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좁은 의미로는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고, 넓은 의미로는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이 뉴스에 나온 사람들은 법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모두가 행복하게 끝났습니다. 무엇이든 왜 만들어졌는지 모르면 자기 목적대로 사용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배가 고파서 남의 밭에 들어가 밀을 훔쳐 먹은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율법과 남의 재물을 도둑질해서는 안 되는 율법을 동시에 어기고 있었습니다.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심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시며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있는 당신 제자들을 감싸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정신은 모르고 율법만 지키려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법이 왜 생겼는지 알지 못하면 그 법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법이 생긴 목적과 반대로 사용합니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칼이 인간을 해치는 용도로 쓰이게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사용할 때 그것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물어야합니다.
왜 율법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부터 율법은 존재했습니다. 바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법이었습니다.
그 법은 왜 생긴 것일까요? 그 율법을 어기면 결과적으로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어긴 아담과 하와는 그 죄책감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느님과 이웃을 심판합니다.
아담은 하느님께서 괜히 여자를 만들어주셔서 그 여자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율법을 잘 지켰다면 이웃을 심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존재하게 된 목적은 이웃을 심판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으로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였습니다. 이웃을 심판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만드신 율법을 역이용하여 이웃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지켜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하는 이유는 그 율법을 지켜서 주님께서 칭찬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켜야만 죄책감이 생기지 않아 이웃을 심판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진 목적을 잃은 칼이 얼마나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 기억해야합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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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식적인 것은 영적 성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을 갖추려는 노력까지 필요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형식을 불필요하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고는 합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의 형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성사나 기도의 형식이 없다면 어떨까요? 오직 마음만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문제는 형식을 갖추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입니다. 진심을 담지 않은 형식은 껍데기만 남은 허울이 되어 버립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이라는 거룩한 형식을 철저히 지켰지만,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참뜻은 잊었습니다. 안식일에 배고픈 제자들이 이삭을 뜯어 먹는 행동을 두고 그들은 ‘형식’을 어겼다며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의 눈길은 형식에만 머물렀기에, 그 형식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형식 그 자체는 목적지가 아닌, 목적지로 이끄는 표지판과 같습니다. 표지판 앞에만 머무른다면 가고자 하는 곳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신앙의 모든 형식은 우리의 영혼이 충만해지고, 하느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도록 도와줍니다. 형식 안에 담긴 의미를 알고 진심으로 따르면서 구원의 목적지인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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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시고 쉬신 날(창세 2,2-3 참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창조주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그분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예수님 시대에 안식일은 세부 규정들로 가득 차서, 오히려 사람들을 억누르는 짐이 되어 있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을 트집 잡는 바리사이들의 태도는 그 단적인 예이다. 이에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7절)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의 참뜻을 되살리신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보다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셨다. 안식일은 인간을 얽매는 날이 아니라,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생명을 살리는 날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이고,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데 있다.”(Adversus Haereses IV,20,7)
곧,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존중되고 회복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이다(마르 3,1-6 참조).
교회는 안식일 대신 주일, 곧 주님의 날을 지킨다. 주일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새 창조를 여신 날이기 때문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며,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2174 참조)
“주일은 모든 신자에게 ‘주님의 날’로서, 주님을 찬미하며 공동체와 함께 성체성사를 봉헌하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살아가는 날이다.”(2177-2185 참조) 그러므로 주일은 단순히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사랑의 만남이며, 감사와 찬미 속에서 나 자신을 봉헌하는 기쁨의 날이어야 한다.
나는 주일 미사에 ‘의무감’ 때문에 참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의 만남을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 삶 속에서 주일은 참으로 쉼과 회복, 사랑과 선행의 날이 되고 있는가? 혹시 나는 현대판 율법주의에 빠져, 형식만으로 주일을 지키고 있지는 않은가?
안식일은 생명을 위한 날이며, 주일은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날이다. 주일을 “두려움의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초대”로 받아들이고, 감사와 찬미, 봉헌과 선행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주일을 통해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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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에게 달렸다>
마르코 2,23-2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에게 달렸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
사람을
위해
사람을
위한 것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있고
사람을
위한 것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있으니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렸다
사람을
위한 것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있고
사람을
위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있으니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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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3-28)
1)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마태 12,1) 아마도 그들은,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배가 고팠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는 내 제자들이 안식일 율법을 어겼다는 것만 보지 말고, 그들의 배고픔을 먼저 보아라.” 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 제자들이 안식일 율법을 어기긴 했지만, 그들은 ‘죄 없는 이들’이다.”라고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율법보다 자비가(사랑이) 위에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랑 없는’ 율법과 종교는 폭력으로 변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무거운 짐’이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는 인생살이의 고통을 가리키고, 좁은 뜻으로는 유대교의 율법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유대교의 율법들과 관습들을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라고 표현했습니다.(사도 15,10)
2) 본당 사목을 하다 보면, “혹시 예비신자 교리 때, ‘아파서 죽을 지경이라도 주일미사 참례를 꼭 해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이가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고, 너무 아파서 대송도 못 바쳤는데, 그런데도 주일을 안 지키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너무 많이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안 지킨 것이 아니라, 못 지킨 것입니다. 아픈 것은 죄가 아닙니다.>
반대로, 주일에 놀러가느라고 주일미사 참례를 안 했으면서도, 대송을 바쳤으니까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바쳤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혹시라도 그냥 대충 바친 것이라면? 또 몸은 성당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면, 미사 시간 내내 딴 생각만 하고 있다가 간 것이라면, 그 모습을 주일을 제대로 지킨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3)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율법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조금 더 풀어서, “율법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먼저다.”, 또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율법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말하면, “악법은 법이 아니다.”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괴롭히기만 하는 악법들은 법이 아닙니다. 그런 법이 있다면 바로 폐지해야 합니다. <“악법도 법이다.”는, 군사 독재자들이 좋아하는 말입니다.>
4)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을 단죄하는 일은 당신의 권한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안식일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 대한 권한은 당신에게만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모든 율법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온 메시아’를 뜻하고, 메시아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모든 율법은 ‘인간 구원’이라는 메시아의 구원사업을 실현하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구원사업에 방해가 되는 율법들과 규정들은 폐지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음식에 관한 율법들을 폐지하셨고(마르 7,19), 정결 예식에 관한 바리사이들의 관습은 무시하셨습니다(마르 7,1-8).>
5)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17) 또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고,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 5,18-19) 그 말씀들을 겉으로만 보면, 안식일에 관한 말씀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사랑 실천으로 율법의 근본정신을 완성하여라.” 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모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서,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제멋대로 무질서하게 생활하는 경우가 있는데, 공동체 안에서 질서를 지키고,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도 중요한 사랑 실천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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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날>
어떤 분이 고해성사를 보시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셨다. 그래서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규정을 생각하기보다 그 의미, 내용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요즘 법은 왜 그리 물러졌어요?” 하셨다.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지내야 한다. 단순히 미사참례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 이날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한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교회법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 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 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1248조1항) 물론 미사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이나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 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한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는 관습이 생겼다. 지금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성당에 갈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 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8)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다.
안식일 규정은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규정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안식일 규정을 강화하는 가운데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셨다. 법보다 사람이 우선이다.
바리사이들은 마음이 완고하고 오그라들어서 안식일 법을 확대해석하며 사람들에게 짐을 지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 구원에 방해되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뜻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주일은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게 해야 한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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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충돌>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일과 제자들의 행동을 언제나 못마땅하게 여기어 행동 하나하나를 ㅏ시비와 충돌을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법을 앞세워 어떤 때는 관습을 앞세워 비난하고 비웃으며 그 이유는 주님의 일이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경을 받는 것을 시기하거나 질투에서 나옵니다.
“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들이 합니다. “ 주님은 ”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제자들의 행동을 정당화 하시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관계를 가지고 의존하면서 일정한 질서와 법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법이 사람의 존엄성이나 필요한 것을 충당하지 못하면 법의 존재 가치는 사라지고 또 다른 원칙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법은 모든 법을 초월하며 사랑을 거스르는 행위는 비인간적입니다.
우리는 가끔 교회법을 앞세워 인간적 삶을 살지 못하도록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법을 배울 때 주일의 의무를 충실이 지켜야 하지만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 예외의 규정을 배우게 됩니다. 미사오던 의사가 중간에 교통사고로 죽어 가는 사람 돌보다가 미사를 못간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일 의무를 못 지킨 일에 신경을 쓰며 고백성사 거리로 생각하지만 내용을 들어 보면 죄가 되지 않은 것을 잘 모릅니다. 몸이 아프거나 가정에 인륜지대사가 있으면 미사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걱정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영적 행위와 육적 행위의 충돌을 막아주시며 안식 법위에 사람이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법을 앞세워 서로 비난하고 미움을 가질 것이 아니라 법보다 사랑이 우선 한다는 것을 알고 법과의 충돌로 억압, 인색, 미움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화와 기쁨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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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 인간의 시각 차이를 드러내 주십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바리사이들의 도끼눈이 보이십니까? 예수라는 젊은 예언자와 그 추종자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길에 큰 부담을 느낀 바리사이들은 그들에게서 무엇이라도 흠을 찾으려 혈안이 된 듯합니다. 고작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이삭을 뜯어 먹는 장정들의 행위를 추수에 준하는 노동으로 보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에브야타르 사제(실은 아히멜렉 사제; 1사무 21,7 참조) 때 다윗이 한 일을 들어 그들의 편협한 사고에 균열을 일으키십니다. 그들의 경직된 논리로라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왕으로 받드는 하느님의 사람 다윗도 안식일 법이나 어기는 천하의 죄인일 따름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뒤 일곱째 날에 쉬신 것을 대대로 기념하여 지키는 날입니다. 또한 주인뿐 아니라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종, 노예, 이방인, 짐승, 토지까지도 쉬도록 정하신 날이지요. 그러니 안식일의 근본 정신은 생명 존중과 공정, 자비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 올가미가 된 안식일 법은 사실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하고 있다면 헤이한 이들 때문에 법이 무너질까 우려하기보다, 경직된 법 때문에 사람이 다칠까 염려하기 마련이지요.
안식일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더욱 충만히 누리도록 마련된 날이지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휴식은 게으름이나 무기력이 아니라 생명력을 회복하여 창조를 완성하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성을 돈독히 하는 선물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 머무릅니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이신지 당당히 밝히고 계십니다. 그분은 모든 쉼의 주인이십니다. 쉼의 주인은 창조의 주인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창조의 주인은 만물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창조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하셨고,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습니다.
제1독서는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는 대목입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사무엘이 이사이의 아들들 중 겉모습이 훤칠한 엘리압에게 눈길을 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무엘 선견자가 아무리 하느님과 가깝다 해도 그의 시각 역시 사람의 눈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사무엘은 ...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1사무 16,13) 막내 다윗은 애초에 이 자리에 끼지도 못한 처지였습니다. 사무엘의 초대에 아버지 이사이조차 다윗을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요. 그런 그가 형들 한가운데에서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그때 형들 마음이 어땠을지 성경이 굳이 설명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 아이다." 하는 주님의 목소리가 사무엘에게만 들렸을 테니 형들은 그저 이 놀라운 일을 바라볼 수밖에요. 선견자를 통한 하느님의 선택을 경외하면서도 막내동생이 받은 임금의 표지, 기름부음에 대해 의혹과 의심, 시기와 질투도 없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인간적 눈에 막내는 작고 약하고 미숙한 존재로밖에 비치지 않을 테니까요.
인간의 시선이 한계투성이라 그렇습니다. 우리 눈은 겉모습에, 허울에, 장식에 곧잘 팔려 본질을 놓쳐 버리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하느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이행 여부에 눈을 치켜뜨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사십니다.
그래서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 1,17-18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 눈은 주님께서 뜨게 해 주시고 밝혀 주셔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떠야 할 눈은 마음의 눈입니다. 인간의 시력 검사는 얼마나 멀리, 얼마나 또렷하게 보느냐를 측정하지만, 마음의 눈의 시력은 얼마나 깊이 보는지, 얼마나 참되게 보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으로 보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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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의 말씀(2026.1.20. 연중 2주. 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코. 2,27)
예수님 시대에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먼저 내세우며 사람들에게 엄격한 주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규정에 대한 엄격함보다 하느님 아버지는 사람들의 상황을 먼저 공감하시고 이해하며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저 높은 곳에서 사람들 위에 왕처럼 군림하는 우리가 무서워 피해야 하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통을 공감하며 희망을 주기 위해 오신 따뜻한 주님입니다.
따뜻한 주님은 법과 제도를 통제보다 먼저 봉사하는 수단으로 보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수단입니다. 안식일은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안에서 편히 쉬도록 하기 위해 마련하신 날입니다.
일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과 함께 쉬라고 만든 법입니다.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혹사시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편한 멍에입니다.
안식일을 의무적으로 대한다면 우리가 아직 주님을 두려운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뜻한 주님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자신과 주님에게 의무적인 관계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따뜻하게 다가오시지만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안식일 하루쯤은 함께 쉬자고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일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일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면 안식일은 귀찮은 법이 되지만, 주님을 사랑하면 안식일은 환희의 날이 됩니다.
안식일은 지친 우리에게 따뜻한 아버지를 알려주시어 우리를 안아 주시고자 만든 날입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되는 강박적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열망하는 따뜻한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고자 만드신 날입니다.
안식일은 따뜻한 주님을 만나고 느끼도록 주님께서 만드신 사람들을 위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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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찬미예수님
차가운 겨울밤 시골 성당의 주교님이 성당을 청소하고 잠자리에 들려 할 때 누군가 성당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주니 경찰들이 부랑자 한 명을 붙잡아 성당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부랑자의 얼굴이 낯이 익어 주교님이 자세히 살펴보니 어젯밤 추운 날씨에 잠자리를 마련하지 못해 곤란해 하여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성당에서 하루 지낼 수 있게 배려해 주었던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경찰들이 그 남자의 배낭을 열어보니 성당에서 사용하는 은촛대가 들어있었습니다. 경찰은 주교님께 물었습니다.
"주교님, 이 남자가 성당의 은촛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수상해서 체포했습니다. 자기 말로는 주교님이 선물한 것이라는 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주교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그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촛대만 가져간 겁니까? 제가 은쟁반도 같이 드렸을 텐데요. 당신은 이런 늙은 주교의 작은 호의에도 너무 미안해하는 착한 사람이군요."
아무렇지도 않게 은쟁반까지 내주는 주교님의 모습에 경찰들은 미심쩍은 얼굴로 그냥 돌아갔습니다. 경찰들이 사라지자 남자는 바닥에 엎드려 울면서 주교님에게 사죄했습니다. 사실 남자는 주교님에게 많은 호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촛대를 훔쳐 달아난 것이었습니다. 주교님은 빙그레 웃으며 남자의 배낭에 은쟁반마저 넣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많은 분들에게 익숙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과 미리엘 주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찬찬히 곱씹어 보면,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해서는 안 될 일을 장발장이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당장 10계명과 비교했을 때 그렇습니다. 7계명, 도둑질을 하지 마라. 8계명, 거짓증언을 하지 마라. 이 두 가지의 잘못을 분명히 어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주교님은 이를 어김없이 눈감아 줍니다.
의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장발장이 아무 잘못 없다고 경찰에게 증언함으로써 미리엘 주교는 스스로 거짓 증언까지 하고 있습니다. 엄격한 잣대로 바라보면 주교님의 죄는 가히 심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방조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를 위해 스스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교님의 행동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모든 행동이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주교님의 행동은 장발장에게 영향을 끼쳐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게 되고 많은 이들이 장발장의 도움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 밀 이삭을 따서 먹기 시작합니다. 이런 행위를 안식일에 행하였다는 점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를 문제로 삼습니다.
그들의 안식일을 지키는 규정은 서른 아홉가지 항목으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추수하는 일, 키질하는 일, 탈곡하는 일, 밀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알맹이를 까먹는 것이 바로 이 규정에 위배되는 행위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들을 때에는 이러한 규정들이 참으로 허황된 일같이 보이나 그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항은 안식일을 범한 죽을 죄에 해당하는 죄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명기 23장 26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제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나그네는 낫을 가지고 베지 않는 한, 밀 이삭을 따서 먹는 것이 자유로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하느님의 일을 판단하고 있는 오류를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을 당하자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무엘 상 21장 1-7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하며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찾아보면 다윗이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도망가고 있을 때 그는 놉의 땅에 있는 하느님의 장막에 들어가 먹을 것을 찾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께 바쳐진 빵밖에는 없었습니다. 그 빵은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물의 하나로 이렇게 바쳐진 빵은 제사장 이외에는 손대거나 먹을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제의 허락을 받아 이 빵을 먹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선례를 드시면서 율법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그 필요성보다 더 우월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을 위해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율법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율법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사람이 만들어졌고 또한 사람은 규칙이나 규율의 노예나 희생자가 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위하는 사랑과 봉사이며, 용서와 자비를 잊어버린 신앙의 규범은 의미가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것을 인간의 잣대로 판단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익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계명을 주신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를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경찰들이 떠난 뒤, 고개를 잔뜩 숙이고 있는 장발장에게 소설의 미리엘 주교는 이야기 합니다. "장발장, 나의 형제여. 이것을 기억하시오. 당신에게는 하느님의 더 높은 계획이 있으니 그 귀중한 은을 반드시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에 써야 하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받은 유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반드시 더욱 소중한 것에 쓰십시오. 더 소중한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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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안식일의 본질인 사랑!>
오늘 복음(마르2,23-28)의 제목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의 이 행위는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규정과 탈곡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위반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은 일을 언급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예수님 말씀처럼 모든 법과 규정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인 율법과 계명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 본질은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율법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종종 법과 규정에 갇힌 삶을 살기도 합니다. 계명에 얽매이고 계명을 지키기에 급급한 신앙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모든 법과 계명의 본질은 우리를 살리고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본질에 충실합시다!
어제 가톨릭 우리농 센타로 첫 출근했습니다.
가톨릭 우리농 활동은 생명 살리기 운동이며, 이 활동의 본질도 사랑입니다. 어제는 직원들과 함께 참기름도 짜고, 생명 물품도 팔고, 교구청으로 가서 영업활동(?)도 하면서 바쁘게 그리고 즐겁게 지냈습니다. 참기름과 들기름과 생들기름을 원하시는 분들은 제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010-7141-5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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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밀밭을 지나던
어느 안식일,
예수님께서는
규칙보다 먼저
사람의 배고픔을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결코 소모품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안식일은
단순한
휴식일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잇는 시간입니다.
그날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규범과 삶 중
무엇이
우선하는가.
규범이 삶을
억압하는 순간,
그 규범은
이미 목적을
잃습니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규칙은 아무리
합리적으로 보여도
그 이유를
상실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은
밀 이삭을 뜯는
그 순간,
죄책이 아니라
자유를 얻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현실을
먼저 보는
눈입니다.
안식일은
날짜가 아니라,
마음이 바르게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안식은
은총을 잊지 않는
삶의 태도이며,
법을 지키기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법이 존재함을
기억하는 지혜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랑이
기준입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한계를
부끄러움이 아니라
배려로 품으시는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그 가치는
사람이 다시
사람답게
살아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일과 성과 이전에,
우리는 이미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존엄을
다시 되새기는
안식일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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