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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네게 가까이 이르렀느니라
롬 10:1-10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10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내 동족들이 구원받기를 진심으로 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2) 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예를 얼마나 열심히 구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향이 빗나간 열심입니다. 3)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선량한 인간이 되는 길이라 여기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4)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얻으려고 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율법을 종결지으셨습니다. 5) [구원은 만민에게] 모세는 ㄱ) 사람이 율법대로 따라 살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한 그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ㄱ. 레18:5) 6) 그러나 믿음을 통해서 오는 구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하늘을 두루 다닐 필요도 없고 도움을 청하려고 그분을 모셔 내려올 필요도 없습니다.' (ㄴ. 신30:12-14) 7) `그리스도를 또다시 부활시키려고 죽은 자들에게로 갈 필요도 없습니다.' 8) 사실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은 먼데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입에 있습니다. 9) 만일 여러분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속에 굳게 믿으면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10) 사람은 마음으로 믿을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고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입으로 고백함으로써 확실하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를 넘어서 믿음에서 난 의의 높은 탁월성을 보여주며, 동족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며 하나님께 간구합니다(9:1).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1-3)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지만 그것은 지식에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2). 지식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과 의도대로 적용했던 유대인들이 율법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쓴 결과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바울이 지적합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4-7) 유대인들이 율법을 취급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율법은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고(레 18:5), 사상은 구약의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신약에서도 그 사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갈 3:12). 하지만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시고(8:3, 4),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분입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만 허락된 것으로 오해를 했던 율법 행함의 배타적인 통로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폐기가 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이 지향했던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표요 그 목표가 성취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8-10) 신명기 30장 14절을 인용합니다(8).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은 모두 우리의 행위를 전제하고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매우 단순한 차원의 행위일 뿐입니다. 구원의 조건으로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적용: 예수를 부활하신 주님으로 지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십시오. 이미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부활하신 주님으로 마음에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의 지식이 아닌, 다른 이들의 말이 아닌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착각으로 인해 우리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는 성경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라
로마서 10:!-4 / 피영민 목사
서 론
로마서 10장 1~11절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1). 로마서를 기록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루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거룩한 소원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고자 기도하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소원한 것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1~3). 바울은 자신이 저주를 받을지라도 동족들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님은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사람이 나오게 해주소서. 내 눈물에 내가 빠져 죽을지라도 한 영혼이 구원받게 해주시옵소서.” 얼마나 간절한 기도입니까? 어디서 이런 기도가 나왔을까 했더니 바울에게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초청받아 나오신 여러분은 우연히 이 자리에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한 열매가 바로 여러분인 것입니다. 오늘 그 기도가 응답되고 열매 맺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자신의 동족을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메시아를 보내주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왜 간절히 기도했습니까?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거절하고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옳은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에게 나오려면 반드시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아들 중 가인은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농산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에 따라 짐승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구원받지 못한 존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에도 아벨의 길을 따르지 않고 가인의 길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속에 큰 고통과 근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10장 1~11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셔서 다 구원 받으시기 바랍니다.
Ⅰ. 인간이 “자기 의”를 세우려 하는 것은 구원의 길이 아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선을 쌓고 의를 쌓아 천국에 가려는 것은 올바른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법을 주셨습니다. 그 법은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자기 능력으로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능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롬 10:5).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능력이 있어서 지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 의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았고 하나님을 경험했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법인 십계명을 법궤 속에 간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의 의를 만들어 천국에 들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지키므로 의를 얻어 천국에 가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이 십계명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지켜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십계명을 100%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전 7:20). 사람은 십계명 중 하나를 지키면 다른 것을 어기고 어제 지켰으면 오늘 어기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십계명을 다 지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에서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6).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17~19). 계명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대답에 청년이 어떤 계명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5계명부터 9계명까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0). 아주 겸손치 못한 청년이었습니다. 제가 자식을 키워보니까 자식 스스로는 부모에게 효도했다고 생각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항상 불효한다고 생각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자신이 부모를 항상 공경했고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자기가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1). 처음에 말씀하시지 않은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결국 5계명부터 9계명까지 지킨 청년도 탐심과 탐욕을 갖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은 지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부자 청년도 십계명을 다 지킬 만큼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 모든 사람은 일단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존재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 복을 받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인생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과 화목해져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화목하여 복받을 뿐 아니라 죽으면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생명의 부활을 해서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받으려면 하나님의 거룩한 십계명을 100% 완벽하게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음을 증거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불신자들이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은 천국과 지옥 중 어느 곳에 갔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 훌륭한 일을 하신 분들이지만 그렇다고 죄가 전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에 갈 만큼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 의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4).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가려고 하는 길은 이미 실패한 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뻔히 그 길이 실패할 것을 안다면 결코 그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가려는 인간의 잘못된 길 외에 성공하는 유일한 한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1~22). 자신의 의로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길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는 길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Ⅱ. 참된 구원은 ‘하나님의 의’를 복종함으로써 받게 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의를 복종해야 구원받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의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인들이 천국에 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의를 준비하셨다가 나누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의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오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나누어주시려고 준비하신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완전한 의를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입니다. 율법의 마침이라는 것은 율법의 종결자라는 뜻입니다. 종결자라는 단어를 요즘 많이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서 음악의 종결자라는 것은 음악을 그 사람만큼 잘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미의 종결자라고 하면 그 사람보다 더 예쁜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종결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히 100% 다 지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완전히 의로운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준 빌라도조차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눅 23:4).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10).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고 율법의 종결자이신데 율법의 완성은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신 종결자가 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100% 사랑하셨고 이웃을 100% 사랑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율법을 완성하시고 완전한 의를 마련해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나누어주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 12:47).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은 율법의 종결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행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을 우리를 위해서 대신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를 옷처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은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 의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마치 냄새나는 걸레를 걸치고 혼인 잔치에 들어가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냄새나는 걸레를 입고 혼인 잔치에 들어가면 당연히 쫓겨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의의 옷을 입은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복종해야 구원 받습니다. 자기의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는 모두 거짓 종교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착하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나쁘게 살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많이 베풀고 구제도 많이 하고 의롭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실패한 길이며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를 내세우지 마시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Ⅲ. ‘하나님의 의’에 복종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는다는 의미
구원의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바울은 구원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 10:6~8). 구원받는 것이 무슨 하늘에서 별을 따고 달을 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해야 될 것을 예수님이 대신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천국에서 모셔 내리는 것도 아니고 음부에 내려가서 모셔 올리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어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누구를 믿어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됩니다. 먼저 마음으로 ‘나는 죄인이다. 내 힘과 능력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 이것을 확신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목사인 저도 죄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용서를 받고 의롭다 함을 받았을 뿐이지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내 죗값을 대신 갚아주신 예수 그리스도, 나를 위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완전한 의를 준비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결 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저는 26살에 예수님을 믿어 죄를 용서받고 영혼에 밀려왔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완전한 의를 받게 되며 하나님과 화목하여 축복의 대상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게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복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공부 좀 잘하고 돈 좀 벌었다고 해서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복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없어질 것이고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 것 조금 없다고 기죽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3).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자는 구원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지상에 있는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과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들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지 않는 길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종교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자기 의를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현세에도 복되고 죽어서도 복되고 영원히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과 오늘 초청되어 나온 여러분 모두 한분도 빠짐없이 저주 아래 살지 마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파한 복음
로마서 10:1-13 / 피영민 목사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리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지옥문 앞에서 문지기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 장로교인들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가 “많다”고 대답했답니다. 이어서 “여기 침례교인들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더 많다”고 대답했답니다. 마지막으로 “여기 감리교인들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셀 수 없이 많다”고 대답하였답니다. 자신이 감리교를 창시했는데 감리교인들이 지옥에 많다고 하니까 실망해서 천국으로 갔답니다. 거기서 동일한 질문을 했는데 장로교인, 침례교인, 감리교인 모두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국에는 누가 있냐고 묻자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있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꿈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어떤 교파에 속해도 어떤 종교를 믿어도 영생과 천국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어리석어서 스스로 천국 가는 길을 만들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 가는 길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울을 갖고 계시는데 한쪽은 선행의 무게를 재고 다른 한쪽에는 악행의 무게를 재어서 선행의 무게가 무거우면 천국에 가고 악행의 무게가 무거우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14권이나 저술한 뛰어난 저술가이기도 하지만 교회를 많이 세운 선교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였습니다. 바울은 마음속에 근심이 있었는데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1). 바울은 자기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전도할 때는 기도로 시작해야 됩니다. 그러나 기도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기도를 하고 말로써 복음이 무엇인지 증거하였습니다. 왕의 명령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전령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에게 그대로 전달하였습니다. 바울이 증거한 복음은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Ⅰ. 죄인들이 마음으로 믿어야 할 내용이 있다
아마도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말씀은 로마서 10장 9~10절일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사람이 입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입으로 아무리 주여 주여 해도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무슨 내용을 믿어야 하느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다른 것도 많은데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반드시 증거했고 부활을 믿는 자가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죽어계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을 포함한 모든 사역을 인정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을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는 것이 중요하느냐? 우리 인간은 저나 여러분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공통적인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만큼의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완전한 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법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완전한 법입니다. 제일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이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마라. 제삼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제오는, 부모를 공경하라. 제육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칠은,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팔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제구는,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제십은, 이웃의 아내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십계명은 완전하고 변경할 수 없으며 피할 수 없는 법입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 18:5). 로마서 10장 5절은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한 것인데 사람이 십계명을 완벽하게 다 지키면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천국에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계명 중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 한순간이라도 십계명 중 한 가지를 어긴다면 열 가지를 모두 어긴 것과 마찬가지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자신은 한번 밖에 바람을 안 피웠으니 백번 피운 사람보다는 거룩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기는 똑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십계명을 지키고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것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100% 완전히 지켜야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저나 여러분이나 동일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법을 100%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합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율법을 완전하게 항상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열심히 노력한 것으로도 안 되고 문자적으로만 지키는 것도 안 됩니다. 십계명 가운데 있는 정신까지도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몸으로는 간음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에 음욕을 품었다면 그것은 간음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미워하고 욕을 했다면 죽인 것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은 0%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안타깝게 생각한 것도 이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의 행위로 율법을 지켜 구원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께서 만족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경제학을 잘 모르거나 대한민국 법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런 것은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부탁하면 됩니다. 하지만 복음은 모르면 안 됩니다. 복음에 관해 무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관해 무지하면 그 책임을 본인이 다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져 자신의 죗값을 다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관한 무지는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지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두 가지를 하셨습니다. 사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의 삶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시면서 율법을 100% 다 지키셨고 완전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죄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죄가 없는 완벽한 삶이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에 만족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삶을 사신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완전한 의의 옷을 입혀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행 13:39).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7).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갈 의의 옷을 입혀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창시한 분들도 많고 훌륭한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죄인입니다. 그들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누구를 들어가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신 완전한 분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그의 의를 옷처럼 입혀주셔서 천국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만들어주신 의의 옷을 입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율법을 어기며 지었던 죄들은 어떻게 되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될 율법의 저주를 모두 청산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우리가 십계명을 어기고 지은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와 물을 쏟으시고 죽으심으로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두 가지를 받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의 삶으로부터 천국에 들어갈 의를 받게 되고 둘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시고 의를 주심으로 당당히 천국에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의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혹시 이 중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스스로 노력해서 의인이 되어 천국에 들어가 보겠다는 분이 계시면 한번 해보십시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3:26).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의롭다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Ⅱ. 죄인들이 입으로 고백할 내용이 있다
우리는 첫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둘째, 입으로 고백해야 될 내용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시인’이라는 말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죄인이다”라고 하시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너는 의가 없으므로 예수가 주이심을 믿어야 한다”라고 하시면 예수님께서 주이심을 믿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시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와 인간에게 절대주권을 가지신 주시라는 사실이 로마서 10장 12절에 더 확실하게 선포되어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 10: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의 창조자입니다. 하늘의 별도 지으셨고 이 땅도 지으셨으며 인간도 지으셨습니다. 저는 공부를 했다는 사람이 왜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라는 헛소리를 자꾸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원숭이는 옛날에도 원숭이였고 지금도 원숭이고 앞으로도 원숭이입니다. 인간은 예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인간이 다 다르게 생겼습니까? 쌍둥이도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게 생겼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마다 다르게 지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의 창조자요 보존자요 통치자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옥과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되십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죽은 후에 다 알게 됩니다. 심판을 받게 될 때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0~11). 하지만 그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죽은 후에 진실을 눈으로 보고 나면 고백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신 안에 거하고 있을 때 믿어야 합니다. 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저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가지 어떻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가냐고 합니다. 하지만 본인도 착하게 살지 못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 죄를 용서받고 의를 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Ⅲ.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이 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9).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3). 무엇을 얻는다고 하였습니까?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믿는 순간 즉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제가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런 것을 꾸며낼 권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설교자들에게 전하라고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구원이란 현세에서 세 가지를 받는 것입니다. 첫째, 죄를 용서 받는 것입니다. 둘째, 천국에 들어갈 의를 옷처럼 받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셋째,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로 지냈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친구가 되어 지내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현세에서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얻는 것입니다. 현세에서 세 가지를 얻으면 내세에서는 무엇을 얻느냐? 내세에는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생명의 부활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롬 10:11).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지옥의 영영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은 대통령을 했어도 소용없고 재벌이었어도 소용없습니다. 전부 영영한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로마서 10장 6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내려오게 하시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가까이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말씀과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 10:8). 믿음의 말씀이 전도자의 입과 마음에 있고 믿음의 말씀이 전파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함께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할 때도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심판자가 아닌 구원자로 가까이 계실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어야 사죄를 얻고 의를 얻고 하나님을 나의 친구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 가까이 계신 그리스도를 말씀을 듣는 이 시간에 마음으로 믿으시고 입으로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롬 10:11). 이것이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사죄와 칭의와 화친, 부활과 천국과 영생.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이 모든 축복들을 다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열심입니까?
로마서 10:1-7 / 안효관 목사
18세기 영국 부흥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라는 분이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죤 웨슬리(John Wesley) 등과 함께 18세기 영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분입니다. 이 분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분입니다. 초인적인 힘과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22살에 자신의 고향인 글로스터에서 첫 설교를 한 이후 5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34년간 오직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인데도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수만 명씩 몰려들었습니다. 그가 인도했던 야외집회만도 무려 1만 8천 번에 이릅니다. 그가 설교자로 사역했던 기간으로 나눈다면 한해 평균 530번이나 야외집회를 가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집회 한 번에 30분이나 1시간 정도 설교한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보통 40시간에서 60시간씩 설교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너무 걱정이 되어서 “좀 쉬면서 하시라”고, “그렇게 하다가 병이 나 쓰러지면 어떻하느냐?”고 걱정하며 조언을 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나는 녹이 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1770년,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미국 보스톤(Boston)으로 가는 중에 엑서터(Exeter)라는 마을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몸으로 설교하러 온 그를 보고 한 노인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설교단보다는 침대로 가시는 게 더 어울리겠습니다.” 그러자 휫필드는 “맞습니다. 어르신” 그렇게 대답하고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 예수여,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가지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들판에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인치게 하신 뒤 죽어 본향에 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그날 설교를 마치고 그 다음날 아침 7시에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설교가 가운데 한 분인 마틴 로이드 존스(M. Lloyd-Jones, 1899-1981)는 조지 휫필드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헤라클레스적인 엄청난 노고를 했던 분이다.”
그런 그의 열정과 열심이 있었기에 산업혁명 이후 혼란에 빠져 있던 영국사회에 변화와 질서가 세워지게 되었고, 불신과 회의, 영적 무기력에 빠져 있던 영국에 신앙회복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제2차 대각성운동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열정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열심을 가지고 무언가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열정과 열심이 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바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열심한다 하는데, 잘못된 열심도 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아주 열심히 한다는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2학기를 마치고 기말고사를 봐야 하는데, 이 학생은 공부는 하지 않고 기도한다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1주일 동안 금식하며 철야하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탄절 불과 며칠 앞두고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시험지를 받아보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공부를 하나도 안 했으니 알 리가 없지요. 뭔가를 쓰긴 써야 하겠고, 아는 것은 없고... 그래서 그 학생이 시험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며칠 후 교수님이 시험지를 채점한 후 이렇게 써서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다 아시니 하나님은 100점, 자네는 아무 것도 모르니 빵점, 해피 뉴 이어!”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는 것을 나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학생이면 학생으로서 공부하는데 무엇보다도 열심해야 합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열심해서는 안 됩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것보다 더 열심하는 것이 있다는 그건 잘못된 열심입니다.
열심을 가져야 성공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잘못된 열심은 오히려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잘못된 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열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열심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특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잘못된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잘못된 열심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열심은 그 중에서 단연 으뜸입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십의3조를 드렸습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구제했습니다. 또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더군다나 율법을 지키는 데에서는 스스로 자랑스러울만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살던 옛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립보서 3:5-6) 이건 대단한 자부심으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전통적인 유대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자마자 8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방인 중에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할례를 받지만, 그들은 성인이 되어서야 할례를 받습니다. 또 이스마엘 자손들은 난지 13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이방인에서 개종한 사람도 아니고 이스마엘 자손도 아닌 순수한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순수한 혈통을 가진 유대인이라고 자랑합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바울은 바리새파에서도 당시 가장 존경받던 가말리엘 아래서 율법과 학문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마만큼 율법을 많이 배웠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을 잡아죽이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섰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도 앞장섰고, 기독교인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자원해서 멀리 다메섹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교회를 아예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그게 모두 하나님을 위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비단 바울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신앙생활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건 ‘그 열심이 누구를 위한 열심이고, 바른 열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생각했듯이, 열심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언가에 열심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또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열심이 바른 열심인가는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열심히 유대교를 섬겼고 열심히 율법을 지켰는데, 그 열심이 바른 열심이었는가 스스로 생각해봅니다. 그 때는 그게 바른 열심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게 바른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열심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일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열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한 그 잘못된 열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았는지 아십니까? 6절에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믿음의 의는 감히 하늘의 자리를 넘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의는 하나님을 높일 뿐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를 위한 열심은 자신이 하늘에까지 높아지려고 합니다. 자신이 하늘에까지 높아지려고 그리스도를 자기 발밑으로 끌어내리고 맙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를 위해서 열심을 내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를 앞세운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그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하나님의 의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의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했거든요. 그런데 그들의 그 열심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는 열심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최고로 신앙생활 잘 한다고 뽐내는 의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그들의 잘못된 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후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해 주십니다. 구제한 후에 ‘나 구제했노라’고 나팔을 부는 그들을 향해, 구제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경건한 체하는 그들에게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금식하고서 금식한 티를 내며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게 모두 자신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자기들만큼 해야 한다고 자기들이 기준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만큼 하지 못한 사람은 죄인으로 낙인찍어버립니다. 자기들만의 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의의 기준에 맞춰보니까,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습니다. 자기들보다 경건하게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 맙니다.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종종 예수님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공격하는 기준은 언제나 자기들의 의였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에게 와서 ‘왜 예수님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누가복음 5:33)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하고 바리새인들도 일주일이면 두 번씩 금식하는데,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기는커녕 먹고 마시는 일을 즐기셨거든요. 그래서 왜 자기들처럼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마태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마태의 친구들인 세리들과 바리새인들이 죄인들이라고 낙인찍은 사람들이 거기에 많이 초대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고 계셨는데, 바리새인들이 와서 따져 물었습니다.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즐기면서 음식을 먹고 있느냐?’고 말입니다.(마태복음 9:11) 자기들은 그렇게 천한 사람들하고는 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또 한 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시장해서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나타나서 예수님께 따집니다.(마태복음 12:1-2)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이 말은 ‘왜 당신은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는데도 그냥 내버려 두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안식을 지키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나타나서 이렇게 따집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습니까?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마태복음 15:2) 자기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몇 가지 예에서 보듯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의의 기준입니다. 그 자기들이 만든 의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니까 예수님은 메시아는 고사하고, 너무나도 형편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님을 그냥 놔둘 수가 없어 십자가에 죽이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앉아 있습니다. 자기들의 의가 최고이고, 자기들의 열심만큼 열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고 뭐고 다 소용없습니다. 자기들의 의가 최고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열심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이 세리가 함께 기도하러 왔다는 것에 불쾌해서 멀찌감치 따로 서서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는 토색하는 자들이나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하게 하나님께 드립니다.” 자랑스럽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부끄럽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자기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큰 소리로 자랑스럽게 기도하는 바리새인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갔느니라.”
그런데 이 비유를 읽으면서 놓쳐서는 안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건 비유를 시작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누가복음 18:9)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자기들만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자기들의 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짐 못한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또 우리의 신앙에 분명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이 우리의 인생과 신앙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그 잘못된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오늘 우리의 잘못된 열심이 예수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적인 열심이 우리의 의처럼 생각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내가 뭔가를 했다고 하나님 앞에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업적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은”(3절) 바리새인이나 유대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의 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뿐입니다. 그런 우리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말씀해 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로마서 1:17) 하나님의 의는 복음 안에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뭔가를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한 일을 많이 해서 구원의 기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나는 죄인이고, 죄인인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복음입니다.
나는 죄인이고 죄인인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그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받았음을 믿는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봉사를 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헌금을 낸다 하더라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한다 하더라도 그게 나의 공치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왜요? 내가 한 그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 사건에 비하며 너무나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한 그 많은 헌신, 헌금, 기도, 열심, 그 어떤 것도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의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열심이 되고 말았습니까? 본문 2절에서 말씀해 줍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잘못된 지식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열심이 자기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는 자기들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다했으나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열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장사도 열심히 해야 하고, 직장생활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의 역할, 아내의 역할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엄마 아빠노릇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른 열심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데에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찬양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구제하고 섬기는 일에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온맘과 정성 다하여 열심히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열심이 내 의를 만드는 열심히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사랑을 통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열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열심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하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보너(Horotius Bonar. 1808-1889)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찬송가 작사가로 그분이 쓴 찬송이 우리 찬송가에도 네 곡이나 실려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양 떼를 떠나서 길 잃어버린 나...,” 또 부활절에 자주 부르는 “기뻐 찬송하세 주님 부활했네...” 그런 찬송이 그분이 지은 찬송입니다. 그분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한번은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자신의 열심을 저울에 달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천사가 보너의 열심을 저울에 달아보더니, 100근쯤 나간다고 말해줍니다. 그는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헌신했는데...’ 그런데 조금 있다가 천사가 보너 목사님의 열심을 이렇게 분석해 줍니다. 이기심으로 인한 열심이 14근, 내 이름을 내세우기 위한 명예심 때문에 일한 열심이 22근, 우리 편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파당을 위한 열심이 15근, 사람만을 사랑했던 열심이 23근...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은 26근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보너 목사님은 자신의 열심 가운데 인간적인 욕심에서 나온 인간적인 것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 후로는 오직 주님을 위한 열심을 갖고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가진 열심은 누구를 위한 열심입니까? 그리고 그 열심은 어떤 열심입니까? 바른 지식으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열심입니까? 내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입니까? 혹 그 열심이 주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 열심은 아닙니까?
구원에 이르는 길
로마서 10:1-13 / 이동휘 목사
1. 헨리 포드가 설립한 자동차 공장에는 큰 발전기 한 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발전기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켰습니다. 이 분야의 기술자들이 총동원되어 고장난 발전기를 고쳐보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장난 부분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기계가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제품 생산이 모두 올 스톱되자 포드는 발을 동동 구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품의 납품일이 불과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전기가 고장난 지 삼 일째 되는 날, 당시 전기 분야에 있어 최고의 기술자로 알려져 있던 촬리 스타인메츠가 이 공장에 불려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타인메츠가 어떻게 그 기계를 고치는지 보기 위해 발전기 주위에 몰려 들었습니다. 스타인메츠는 발전기 앞에 서더니 준비해온 망치로 몇 군데를 두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사람들에게 발전기를 작동시켜 보라고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발전기는 ‘윙!’하는 소리를 내며 이전과 같이 작동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헨리 포드는 촬리 스타인메츠로부터 수리비 청구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청구 금액이 무려 일 만 불이나 되었습니다. 이에 깜짝 놀란 포드는 <촬리 스타인메츠씨, 당신이 잠시 동안 발전기를 두드리며 일한 것에 비해서 요구한 수리비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이유서를 동봉하여 그 청구서를 반송했습니다. 스타인메츠로부터 다시 답신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구 금액 명세를 자세히 적었습니다. <발전기를 두드리며 일한 노임 10불, 어디를 두드려야 할지를 알아낸 기술 값 9,990불, 합계 10,000불> 이에 포드는 꼼짝없이 만 불을 지불했습니다. 인생들은 자신들의 영원한 삶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디를 두드려야 하는 지를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야 할 참된 길은 무엇인지, 인간이 따라야 할 참되고 영원한 진리는 무엇인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등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 권력, 지식, 명예 등으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생이 가야할 ‘길’과 살아야 할 ‘진리’, 그리고 얻게 되는 ‘생명’을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를 분명히 증언했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2.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을 얻기 위해 그 누구도 따르기 어려울 만큼 ‘열심’을 가졌음에도 그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영원한 ‘진리’이며, 인생이 마땅히 살아야 할 ‘진리’이며, 이것을 지킴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열심히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고 힘쓰면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본문 3절에서 “(롬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취하신 방법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어린양으로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를 세례 요한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희생하시므로 자신의 죄가 사하여졌음을 믿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이를 간단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을 ‘의인’(옳을 의, 사람 인-義人)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을 ‘의인’(옳을 의, 알 인-義認)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가 없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이렇게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이 되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아무리 유대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스스로 지켜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을 두고 본문에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유대인이든 아니든,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되어 구원받게 됩니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인류가 의인이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는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은혜로, 값없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을 통해 의롭게 하시지 않으셨는가?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로마서3:20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그 죄를 사하여 의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죄는 율법의 정한 바에 따라 형벌을 받게 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렇게 율법으로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희생하시므로 인간을 단번에 의롭게 하셨기 때문에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한 율법의 요구는 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에 대한 율법의 요구인 죽음을 대신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는 율법의 마침이요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을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에 이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는데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사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야 하느냐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믿기 위해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30장에서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 받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30:8-14)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는 것은 바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14-17)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그래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오늘 본문에서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믿음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어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믿어야만 의롭게 되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해되고 깨달아져야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어야 하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생활하여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말씀”으로 부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4. 다음으로,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6:17-19)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고 고백하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통치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빌립보서2:6-11을 고백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빌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고백을 통해 예수 믿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겸손하며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린도 후서5:14-15입니다.
(고후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이 하나님의 영원한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막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눅12: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2-5) 이 말씀을 하시고 소경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소경이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자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 저마다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요9:11)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뜨게 된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정한 율법에는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바리새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고 주저없이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의 부모를 불러 눈을 뜨게 된 경위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9:20-21)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대답한 이유는 당시 누구든지, 어떠한 연유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바리새인들이 결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출교(黜敎)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생매장되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출교는 곧 죽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 부모가 출교당하게 될까 두려워 자식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하자, 어쩔 수 없이 바리새인들이 그 사람을 다시 소환해서 이렇게 협박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다.” 소경되었던 사람이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다시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한 일이 무엇이냐? 그가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하였느냐?” 그가 대답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너는 그 사람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라며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러자 그 소경되었던 사람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은 들어 주시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 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하였다는 말은,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출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침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하는 그 사람을 어찌할 수 없어 바깥으로 내쫓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들으신 예수께서 그 소경되었던 자를 만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 다시 말해 ‘네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가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고 하자 예수께서 그에게 “너는 이미 그를 보았느니라.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는 바로 “주여, 내가 믿습니다.” 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고 하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에서만이 아니라, 혹 출교당하는 것과 같이 생명의 위협이나 어떠한 생활의 어려움이 따른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자기 생애에 있어서 가장 높은 자리를 예수께 드리는 생활이고, 절대 복종과 경건한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오직 유일한 분으로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범사에 하나님 말씀을 시인하시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시인하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생활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님으로 시인하는 신앙생활로 부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잘못된 열심
로마서 10:1-15 / 임영수 목사
사도 바울에게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근심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는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라" (롬9:1)
사도 바울의 고통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종교에서나 신도들에게 열심을 강요합니다. 열심히 헌물도 바치고, 작정 기도도 하고, 가정이나 직장일보다 자기 종교에 더욱더 헌신적이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종교에서 요구하는 규례를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동족 이스라엘이 너무 열심인 것에 대해 근심과 고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열심인 것은 어느 종파의 신도들도 따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선 안식일 문제에만 있어서도 그들이 엄격하게 준수해가는 안식일 법이나 일상적인 삶에서 그들이 지켜가는 성결법에 대한 조항들은 어느 종파의 신도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어느 교회 신도들이 신앙생활에서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과 같은 '열심'이 알려졌을 때 하나의 모델 교회로 매스컴에 많이 오르내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종파 종교에서나 자기 종파의 부흥, 쇠퇴의 외적 척도는 '열심'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갖는 관심은 어떻게 하면 신도들을 열정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목회하는 목회자들에게도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의 신도들을 어떻게 열심있는 신도들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 열심이 무엇에 대한 것인가 입니다. 바울의 자기 동족에 대한 근심과 고통은 그들의 열심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를 세우려 한다는데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지난 날 한때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매우 열심인 때가 있었습니다. 그의 열심은 기독교의 박해로 예루살렘에서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해서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 설 정도로 거의 광적인 열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는 표면적으로 구원을 지향해 간다는데 차이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갖습니다.
먼저 '자기 의'란 사람이 자신의 종교적 덕행을 쌓아서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가려는 일종의 자기 중심적인 구원의 길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일수록 종교적 규례를 엄격하게 지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으로 구원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 생활에는 기쁨이나 사랑, 자유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자기 의'로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가려는 사람일수록 더 열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는 '자기 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길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빵만으로 만족하며 살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느 정도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 평생 자기 실현을 위해 정열을 바칠 수 있습니다. 좀더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종교적 수련을 쌓는데 열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에 나타난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의 문제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빵만으로 만족하며 살도록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없이 자기 실현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며 살도록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자신의 영혼만이 구원 얻기 위해 종교적 덕행에 몰두하도록 세상에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의 창조의 파트너로, 그와의 대화의 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자기 실현,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과 화해 가운데 있습니다. 그 화해의 길이 '하나님의 의'에 나타나 있는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편에서 이룰 수 없는 이 구원의 길을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구원의 길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4)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사람의 덕행이나 희생이 요구되지 않고, 믿음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을 받아드리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에서는 인간의 의는 불신앙의 행위입니다.
어떤 병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병은 매우 중증입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생명이 위독합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유능한 의사가 그를 세심하게 진찰한 후 그가 병에서 나음을 얻어 건강하게 살수 있는 의학적인 처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환자는 그것을 받아드리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의 처방을 만들어 실천해 갑니다. 그의 병세는 더욱더 악화되어 갑니다. 드디어 그는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깨닫고 의사를 신뢰하고 그가 제시하는 처방을 받아드리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병세는 나날이 좋아져 드디어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구원의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고, 받아드리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에 의해서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약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6∼7)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모셔오거나, 죽음으로부터 살아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의 길을 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길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면 됩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율법을 준수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아 중심의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오직 하나님 은혜로 살아가는 은혜의 길입니다. 이 은혜의 길에 하나님의 용서, 치유, 해방, 거듭남, 자유, 영생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발견한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희망의 미래를 내다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은혜의 길에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인간이 자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일대 전환이 있습니다.
이 은혜의 길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 구원은 자기 실현, 영혼 구원을 다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훨씬 넘어섭니다.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입니다. 이 새로운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 역사 속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후부터 이 '하나님의 의'를 알리는 소식이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여기저기서 메아리쳐 오고 있습니다. 그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 이미 한 세기 전에 우리 한반도에도 상륙하였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의'에 관해 올바르게 전해 들을 때 생깁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종과 섬김이 그들의 삶의 특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입니다. 종교개혁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인간의 의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오직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의'를 다시 본래의 자리매김하는 신앙 바로잡기 운동입니다.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에 안주 하려는 유혹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의 가운데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어둠의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역시 오늘 우리 시대에서도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의가 아닌 인간의 의를 위해 열심을 낼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오늘과 같이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서는 또 다른 유형의 인간의 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하나님의 의' 대신에 심리학적 자아실현, 심신수련, 하나님 없는 영성이 많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켄 가이어는 고독한 인생의 여정길을 걸어가고 있는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아 추구야말로 우리들 대부분이 한평생 해온 일이다. 심지어 신앙 생활을 통해서도. 그러나 자아란 막다른 골목이어서,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부르튼 발로 좌절과 불만에 젖은 채, 남는 것은 패배감, 심하면 인생을 헛 산 기분. 우리의 추구가 영혼 자체로 끝난다면, 영혼의 추구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쉬운 내리막길이 더 많겠지만 이 길 역시 막다른 골목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결국 자기 존재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언저리와 매번 거기서 맴도는 걸음에 조금씩 지쳐있다.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종교적 반경을 맴도는 진부한 걸음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밀한 동행을 원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머무는 이 자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치유, 해방,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형벌과 지옥이 아닌 희망의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와 희망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서로 복종하며, 서로 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식탁에 둘러앉아 이러한 현실과 미래를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 '성만찬의 창'을 통해 비춰진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아픔, 하나님의 희생,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깊이 감사하며 그 은혜에 대해 깊이 응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응답은 우리 자신의 의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구원의 길을 믿고 받아드림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는 일에 열심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근심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는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라" (롬9:1)
사도 바울의 고통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종교에서나 신도들에게 열심을 강요합니다. 열심히 헌물도 바치고, 작정 기도도 하고, 가정이나 직장일보다 자기 종교에 더욱더 헌신적이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종교에서 요구하는 규례를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동족 이스라엘이 너무 열심인 것에 대해 근심과 고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열심인 것은 어느 종파의 신도들도 따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선 안식일 문제에만 있어서도 그들이 엄격하게 준수해가는 안식일 법이나 일상적인 삶에서 그들이 지켜가는 성결법에 대한 조항들은 어느 종파의 신도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어느 교회 신도들이 신앙생활에서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과 같은 '열심'이 알려졌을 때 하나의 모델 교회로 매스컴에 많이 오르내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종파 종교에서나 자기 종파의 부흥, 쇠퇴의 외적 척도는 '열심'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갖는 관심은 어떻게 하면 신도들을 열정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목회하는 목회자들에게도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의 신도들을 어떻게 열심있는 신도들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 열심이 무엇에 대한 것인가 입니다. 바울의 자기 동족에 대한 근심과 고통은 그들의 열심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를 세우려 한다는데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지난 날 한때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매우 열심인 때가 있었습니다. 그의 열심은 기독교의 박해로 예루살렘에서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해서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 설 정도로 거의 광적인 열심이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는 표면적으로 구원을 지향해 간다는데 차이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갖습니다.
먼저 '자기 의'란 사람이 자신의 종교적 덕행을 쌓아서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가려는 일종의 자기 중심적인 구원의 길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일수록 종교적 규례를 엄격하게 지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으로 구원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 생활에는 기쁨이나 사랑, 자유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자기 의'로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가려는 사람일수록 더 열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의'는 '자기 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길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빵만으로 만족하며 살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느 정도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 평생 자기 실현을 위해 정열을 바칠 수 있습니다. 좀더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종교적 수련을 쌓는데 열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에 나타난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의 문제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빵만으로 만족하며 살도록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없이 자기 실현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며 살도록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자신의 영혼만이 구원 얻기 위해 종교적 덕행에 몰두하도록 세상에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의 창조의 파트너로, 그와의 대화의 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자기 실현,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과 화해 가운데 있습니다. 그 화해의 길이 '하나님의 의'에 나타나 있는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편에서 이룰 수 없는 이 구원의 길을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구원의 길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4)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사람의 덕행이나 희생이 요구되지 않고, 믿음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을 받아드리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에서는 인간의 의는 불신앙의 행위입니다.
어떤 병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병은 매우 중증입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생명이 위독합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유능한 의사가 그를 세심하게 진찰한 후 그가 병에서 나음을 얻어 건강하게 살수 있는 의학적인 처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환자는 그것을 받아드리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의 처방을 만들어 실천해 갑니다. 그의 병세는 더욱더 악화되어 갑니다. 드디어 그는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깨닫고 의사를 신뢰하고 그가 제시하는 처방을 받아드리고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병세는 나날이 좋아져 드디어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구원의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고, 받아드리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에 의해서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약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6∼7)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모셔오거나, 죽음으로부터 살아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의 길을 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길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면 됩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율법을 준수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아 중심의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오직 하나님 은혜로 살아가는 은혜의 길입니다. 이 은혜의 길에 하나님의 용서, 치유, 해방, 거듭남, 자유, 영생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발견한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희망의 미래를 내다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은혜의 길에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인간이 자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일대 전환이 있습니다.
이 은혜의 길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 구원은 자기 실현, 영혼 구원을 다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훨씬 넘어섭니다.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입니다. 이 새로운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 역사 속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후부터 이 '하나님의 의'를 알리는 소식이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여기저기서 메아리쳐 오고 있습니다. 그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 이미 한 세기 전에 우리 한반도에도 상륙하였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의'에 관해 올바르게 전해 들을 때 생깁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종과 섬김이 그들의 삶의 특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입니다. 종교개혁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인간의 의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오직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의'를 다시 본래의 자리매김하는 신앙 바로잡기 운동입니다.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에 안주 하려는 유혹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의 가운데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어둠의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역시 오늘 우리 시대에서도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의가 아닌 인간의 의를 위해 열심을 낼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오늘과 같이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서는 또 다른 유형의 인간의 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하나님의 의' 대신에 심리학적 자아실현, 심신수련, 하나님 없는 영성이 많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켄 가이어는 고독한 인생의 여정길을 걸어가고 있는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아 추구야말로 우리들 대부분이 한평생 해온 일이다. 심지어 신앙 생활을 통해서도. 그러나 자아란 막다른 골목이어서,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부르튼 발로 좌절과 불만에 젖은 채, 남는 것은 패배감, 심하면 인생을 헛 산 기분. 우리의 추구가 영혼 자체로 끝난다면, 영혼의 추구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쉬운 내리막길이 더 많겠지만 이 길 역시 막다른 골목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결국 자기 존재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언저리와 매번 거기서 맴도는 걸음에 조금씩 지쳐있다.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종교적 반경을 맴도는 진부한 걸음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밀한 동행을 원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머무는 이 자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치유, 해방,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형벌과 지옥이 아닌 희망의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와 희망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서로 복종하며, 서로 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식탁에 둘러앉아 이러한 현실과 미래를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 '성만찬의 창'을 통해 비춰진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아픔, 하나님의 희생,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깊이 감사하며 그 은혜에 대해 깊이 응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응답은 우리 자신의 의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구원의 길을 믿고 받아드림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는 일에 열심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축복과 책임
로마서 10:1-15 / 박춘수 목사
신앙의 위대한 위인으로 가장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을 꼽을 수 있습니다. 주후354년 북아프리카의 지금의 알레리아에서 태어나 젊은시절을 방탕하게 지내면서 마니교와 같은 이교에 빠져 살다가 젊은날 극적인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의 책 고백록에 보면 12장에서 자신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그가 무화과나무 밑에서 쓰러져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오주여 어느때까지입니까? 당신께서 영원히 노하려 하십니까? 오주 여 어느때까지입니까? 이렇게 그가 죄에 대해서 통회하고 울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계속 노래로 반복되는 말은 “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곧 눈물을 그치고 성경을 펴서 첫눈에 들어온 것을 읽었습니다. 그때 구절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롬13:13-14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이었습니다. 결국 이 성경구절을 읽고 난 뒤에 “그순간에 확실성의 빛’이 내 마음에 들어와 어두움 의심의 그림자를 몰아내었다고 합니다.
모든 성경이 우리에게 복음을 소개하지만 특히 로마서는 특히 우리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성경입니다. 특별히 로마서에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소개하면서 죄인된 인간이 어떻게 복음으로 말미아암 축복을 받는지 소개합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축복을 소개하면서 복음의 위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을 갖고 복음 안에서 인간을 축복하시지만 인간의 인격적인 책임을 다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으로 말미암는 축복을 100% 주권 속에서 주시지만 그 축복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철저하게 인간의 책임을 다하면서 살게 하십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의 존대로 창조하셨고 책임지면서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이미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주셧지만 하나님은 선악과 열매를 따먹지 못하도록 책임을 감당하면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살게 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도록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복음을 통한 놀라운 축복을 베푸십니다.그러나 아울러 우리에게 책임을 다하시길 원하십니다.과연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무엇이고 우리들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1. 복음은 구원의 축복이 있습니다.
1절
2절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 안에서 구원받을 것을 소원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소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소원이십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구원의 참지식이 복음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은 있는데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서 망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문제입니다.사람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인생을 삽니다. 시간을 아끼고 돈을 아끼고 목표를 세워서 열심히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무조건 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잘못된 열심,이기적인 열심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무조건 열심을 갖고 신앙 생활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올바른 믿음의 열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올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면 올바른 열정도 생기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그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으니까 얼마다 뜨거웠습니가?
잘못된 지식으로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단들입니다.우리 주변에 보면 많은 이단이 있습니다. 몰몬교,여호와의 증인,구원파,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지식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차를 몰고 서울에 심방을 가다가 큰 낭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거리를 지도를 통해서 대충 지식을 얻고 그 짧은 지식에 의지하여서 열심히 차를 몰고 갔는데 나중에 물어보니까 반대방향이었습니다.모르는 길을 찾아가는 정확한 법은 물어가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에게 물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잘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찾아가려고 합니다.
바로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여기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여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를 모릅니다. 무식합니다. 그런데도 알려고 하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의를 힘써 세우려고 합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의를 힘써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스스로 양심적이다”“나는 죄를 별로 짓지 않았다” 이렇게 스스로 기준으로 자기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준은 롬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합니다.
구원을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노선대로 우리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 지식은 바로 바로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입니다.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받아주시는 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하나님은 우리가 행하여서 얻는 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의를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서 얻는 의”를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만나야 믿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땅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8절에 말씀합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이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엿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하나님의 의가 어디있습니까? 바로 말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 바로 말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를 말씀을 통해서 누구든지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해두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줍니다. 딤후3:15“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주이심을 참지식으로 알려주십니다. 성경에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교회에 처음 나을때에 먼저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받는 교육과 양육의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알고 바로 믿을 때 구원이 있고 신앙의 성장이 있습니다. 제가 부목사시절 새가족부를 맡아서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을 교육시킨 경험이 있습니다. 타교회에서 왔던 초신자이든 무조건 교회에 등록하신 새가족들은 4주간의 교육을 받아야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회를 다녔어도 이 말씀을 다시 듣고 그 가운데에 구원을 경험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분들을 보앗습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시고,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교회가 무엇인지 배운 분들은 교회생활을 잘 적응하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회를 오랜기간 다녔어도 복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기독교는 혼자서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무조건 내 체험을 통해서 아는 종교가 아닙니다.무조건 내 열심만 갖고 도취되는 종교가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믿고 순종하면서 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복음으로 말미암는 이 구원의 축복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 복음의 축복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롬10:9-10
여기 강조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9절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10절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릅니다.
11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오직 믿음으로 그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특별히 복음의 이 믿음의 축복을 너무나도 귀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로마서 1장 16-17절에 복음의 축복을 담대하게 우리에게 선언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리라”
여러분 우리가 복음의 축복 구원을 축복 의인이 되는 축복은 오직믿음으로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믿을때에 구원을 받습니다. 믿을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너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령 내가 지금까지는 세상에서 죄를 짓고 함부로 살다가 그냥 죽을때에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믿기만 하면 의인이라고 인정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 불공평한것이 아닌가 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면 그런 경우가 소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실때에 십자가 좌우에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달린 사람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렇다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그 사람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에수님을 향하여 간구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잇는 천국에 너도 들어가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것은 복음 앞에서 사람의 의로움 사람의 모든 선과 착한 행실은 사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누가 더 옳고 덜 옳고 우위를 주장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다 다 죄인이라고 하십니다. 모두가 죄인된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행동을 할 수 없는 죄인것을 아시고 오직 한 사람 예수님을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십자가에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에수님을 믿기만 구원의 축복을 주십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나의 주님으로 시인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을 나의 구원의 주로 시인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구원하여 주신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다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라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이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나의 하나님으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시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시인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시인하기를 질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면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시인하는 신앙의 고백 위에 결국 하나님의 교회가 건설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입술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나의 마음에 믿어야 합니다. 그 마음에 예수님에 대하여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주라고 시인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에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들임으로 비로서 주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사건이 여러분에게 일어났습니까?
제가 탄 배가 난파선이라고 가정해보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구조선이 등장했습니다. 난파선에 탄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구조선이 왔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난파선에서 구주선으로 나의 몸을 옮겨타는 것입니다. 나를 구조선에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나의 목숨을 구조선에 맡길 때 나는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의지하는 그 구원의 사건이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일어났습니까? 분명히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고 있습니까?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주님을 입술로 시인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마음에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음을 나의 입술로 시인해야 합니다. 시인한다는 것은 신앙에 대한 분명한 자신의 책임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특히 훈련소에서 입술의 시인을 강조합니다. 작은 소리가 아닌 큰 소리로 시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입술로 시인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깊고 분명하게 새겨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시인하는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교회에서 입술로 시인하는 간증을 증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증을 통하여서 누가 가장 은혜를 받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입니다. 시인하는 입술의 고백을 통하여서 자신의 마음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고 증거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술로 시인하는 가르침의 교사들을 통하여서 가장 은혜받는 사람은 바로 교사 자신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시간에 가장 은혜받는 사람은 바로 목사 자신입니다. 입술의 시인은 마음의 시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마음에 믿으면 되지 입술로 무엇하러 시인하는고 하고 합니다.
조용하게 마음으로 믿으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하나님만 아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시인하면서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빛이냐 어둠이냐 둘중의 하나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비밀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지만 신앙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빛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신앙은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물론 공개적인 그리스도인임을 선포하면 많은 부담이 있습니다. 아직 변화되지 않는 습관과 삶에 대한 부담이 있습니다.그러나 믿음은 나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떠안는 것입니다.
신앙은 부담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부담을 오히려 껴안으면서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서 분명한 구원에 이르는 온전한 신앙이 되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복음을 발로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구원의 축복을 얻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된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거룩한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에 대한 책임을 부득불 할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전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인생의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20:24“내가 달려갈 길과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합니다.
바울은 이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고난을 기쁘게 받았습니다. 이 복음을 몸소 발로 전하기 위해서 3차에 걸쳐서 아시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붙잡혀 로마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복음으로 인하여 생명을 바쳤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이 책임을 나의 삶의 절대명령으로 절대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바울만 그런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약에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맣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책임을 다하다가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약에 예수님을 통해서 사도들을 통해서 증거하게 하셨습니다.사도들을 통하여 그 사명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고난과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왜 그 일을 계속하라고하십니까?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복음 기쁜 소식을 증거하면서 살기를 소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할때에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인간은 구원의 복음을 받을때에 구원을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인간은 스스로 복음 앞으로 찾아올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하였기에 선택할 수 잇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제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이 복음을 들고 나가서 증거할 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1885년경에 아펜셀러나 언더우드 같은 훌륭한 선교사들이 복음을 증거하여 주었습니다. 만약에 우리나라에 100년 전에 이런 훌륭한 선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의 우리나라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4절을 봅니다.[그런즉 저희가 어찌 믿지 않은 이를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꺼꾸로 말하면 누군가 전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주님!하고 부를수 있다는 말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으로 모든 민족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의 목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루살렘,유대,사마리아와 땅끝까지입니다.
어떤 통계에 보니까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구 가운데 3/2가 복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을 기회가 없어서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쓴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예수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배우고 듣고 할 만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예수를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숫자가 3/2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직 이런 자들을 위해서 문을 닫지 않고 계십니다.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이 구원의 날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무엇을 보아 알수 있습니까? 못들어서 못 믿었다고 하는 자가 없도록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할수 있는 많은 종들을 사방에서 불러 모아서 계속해서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보내시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지상의 교회입니다.
교회 안의 누굽니까? 이렇게 말하면 선교사나,신학생들이나,특별한 전도자들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보내느냐?고 물으면 접니다!!!라고 대답을 해야합니다. 벧전 2:9절 [주님께서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신 목적은 우리를 어두움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떡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 불렀다]고 그랬습니다.우리가 부름받은 이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오늘 복음의 축복을 받은 우리를 주님께서는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마28:19절에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모든 족속에게로 가야 합니다. 세상으로 보냄 받았으니 세상으로 가야합니다. 누구에게 가야합니까? 구체적으로 우리의 이웃으로 가야합니다.우리의 직장으로 가야합니다. 그리고 전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복음을 우리가 증거할때에 가서 말할때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누구에게난 이 복음은 구원을 주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끄러워말고 이 복음을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이 복음을 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음 주간은 그동안 기도하던 우리의 전도대상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시고 교회로 초대하시기를 바랍니다.그래서 11월을 맞이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한사람이 한명씩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 설교가 끝나면 우리가 함께 마음에 작정하시고 전도대상자를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우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이제 복음의 축복을 받은 우리가 그 축복을 누리면서 사시고 아직 그 축복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책임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선포
로마서 10:1-15 / 노경모 목사
수많은 거북이들이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는 사막을 향해 기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를 향해 기어가야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닷가와는 정반대 방향인 사막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어가는 주변에는 뒤집어져 발버둥치고 있는 거북이들도 있고, 작렬하는 뜨거운 태양열아래서 말라죽은 거북이들과 그 뼈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지만 거북이들은 그 사이를 비집고 사막을 향해 낑낑대며 기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곧 뼈만 남게 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기어가고 있는 모습이, 이 타큐멘타리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할 뿐이었습니다.
'방향만 돌려서 해안가로 기어가기만 하면 살 수 있는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 거북이들이 방향감각을 잃고, 죽음을 향해,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태평양 어느 무인도에서 핵실험이 있었습니다. 이 실험 후에 거북이들은 방사능에 오염되어, 방향감각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해변가로 나와서 알을 낳은 후 다시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야, 거북이들아 방향을 틀어라, 조금만이라도 틀어라 그러면 너희들은 살 수 있다.' 제 마음의 외침에 대해 거북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시청한 것이지만 너무나 안타깝고 충격적이어서 지금도 제 머리 속에 그 장면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이 마치 이 거북이들과 같이, 사는 방향이 아니라 죽음의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외치고 있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이 영적으로 올바른 길로 가야하는데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을 바른 신앙을 갖고 구원을 얻기를 원해서 기도해왔습니다. 바울은 1절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그 누구 못지않게 대단한데 하나님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의를 행함으로, 즉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노력했습니다. 인간으로서 의를 완전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요. 그래서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로마서 3:10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완전히 다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다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주셨으므로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덕분으로 율법이 요구한 모든 의를 다 이룬 것이 되기 때문에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칠 필요가 없습니다.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을 요구를 완전히 이루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님을 그냥 믿으면 됩니다. 그래서 4절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과 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자기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찾아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로 내려가려는 행동까지 하려고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왕된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를 이루는 자들은 이런 헛된 일들을 시도할 필요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단지 9절의 말씀대로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주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 다는 말에 대해서는 잘 이해를 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를 않는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8절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8절에 나오는 ‘말씀’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 있습니다. 입에 있다는 말은 말하라는 것입니다.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바울로 이 믿음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8절에 끝에 보면,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10절에도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13절에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이것은 주의 이름을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또한 주님은 구원주이심을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해야만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가 있습니다. 말하지 않는데 어찌 듣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14절에,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라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입으로 말로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크리스천들은 ‘나는 예수님을 믿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아요.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꼭 말로 표현해야 되나, 꼭 고백해야 되나, 꼭 선포해야 하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 분이 있다먄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보아야 합니다.
입사시험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서류 전형도 중요하고 필기시험도 중요하지만 말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면접시험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 회사 입사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말로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 알지’ 하면서 사랑하고 있음을 말로 표현을 하지 않고 교제한다면 그 사람은 얼마가지 않아서 발로 채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면서 우리가 입으로 말로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일을 담대하게 합시다. 자, 그렇다면 무엇을 고백하고 시인하고 선포해야 할까요?
첫째, ‘주님’을 말로 고백하고 시인하고 선포합시다.
‘주님은 나의 구원주이십니다.’, ‘주님은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큰 소리로 고백하고 시인하고 선포합시다. ‘뭐 주님이 꼭 큰 소리로 말해야만 알아들으시나?’ 하지 말고 큰 소리로 외칩시다. 우리가 감사하고 감격하면 큰 소리로 외치게 되지 않습니까.
기도할 때도 큰 소리로 ‘주여’ ‘주여’ 외치면서 기도했으면 합니다. ‘주여’라는 말은 ‘나의 구원자되시는 주님이시여‘라는 말입니다. 물론 조용하게 하는 기도도 필요하고 조근조근하게 하는 기도도 필요합니다. 묵상으로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큰 소리로 외치는 기도, 부르짖는 기도는 더더욱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모세를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말이 참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9:12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예레미야 33:3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이 있지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둘째, ‘아멘’으로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합시다.
‘아멘’이라는 말은 ‘의지하다’, ‘믿다’, ‘의뢰하다’, ‘그렇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민’에서 파생된 단어로 ‘진실로’, ‘참으로’, ‘온전하게’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멘’이라는 말은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뜻으로 ‘아멘’이라는 한 부분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이라고 고백하고 시인하고 선포했으면 합니다. 어떤 분들은 ‘형식적으로 맹목적으로 아멘을 하고 있다. ’아멘‘이 남발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형식적으로 맹목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안 좋지 ‘아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주 좋고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을 하게 되면 설교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설교 말씀 속에 내가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단지 내가 설교를 듣는 청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그 시간 나에게 적용되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활성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이 나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응답되는 역사가 빠릅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도 매우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있어서도 매우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말할 때는 반응 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믿음의 선포는 역사하는 힘이 강력합니다. 믿음으로 선포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마귀가 도망갑니다. 질병이 떠나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기도가 응답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요 영적인 무기인 믿음의 선포를 우리가 지금까지 소홀히 생각하고 가볍게 여겼다면 오늘을 기점으로 우리의 생각을 바꿉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을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입뿐만 아니라 말을 주신 목적과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밥을 먹으라고 주신 것이기도 하지만 말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많은 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믿음의 선포의 말을 함으로 우리에게 입과 말을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립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말씀을 고백하고 시인하고 선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서운해 하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1:9-10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에 입에도 두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을 고백하고 시인하고 선포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직의 함정
로마서 10:1-3 / 김동호 목사
지난주에 우리는 정직한 자의 함정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생각한 정직한 자의 함정은 실패와 사망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하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함께 생각하였습니다.
정직했는데 망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 망함의 대부분은 과정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예외가 있습니다. 그 망함이 과정으로 끝나지 않고 결론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함정이 정직에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정직한 자가 결국은 형통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의 시간을 이 세상에서의 현세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에서 생각한다면 결국 모든 정직한 자의 실패와 사망은 과정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어렸을 적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 친구 중에 하나는 자그마한 자기 사업을 하는 친구입니다. 요즘 중소기업들이 어렵다기에 힘들지 않느냐 물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습니다. IMF때도 그랬고 IMF때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 요즘도 자기 공장은 늦은 밤까지 불 켜 놓고 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친구는 함께 자라난 교회의 장로입니다. 술 담배 할 줄도 모르고, 자신만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대접할 줄도 모릅니다. 뇌물도 줄줄 모릅니다. 그런데도 사업을 잘 합니다. 자기 말로 큰소리치며 사업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친구의 성공 비결은 가만 들어보니 간단하였습니다. 정직과 성실 그리고 욕심 부리지 않음이었습니다.
자기는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기회로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고객이 자기가 만들어 준 제품에 만족해하지 않을 때 많은 공장들이 우기고 다툰답니다. 그러나 저희 친구는 그런 일이 생기면 즉시 그리고 과감하게 돈을 포기한답니다. 그리고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다시 만들어 준답니다. 일본으로부터 만개의 제품을 주문 받았을 때 고객이 만족하지 못하여 28,000개를 만든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답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것이 손해가 아니랍니다.
그것을 통하여 첫째, 기술이 발전하게 되고 공장에서 생산하게 되는 물건의 품질이 향상된답니다. 둘째, 고객들로부터 돈 주고 살 수 없는 신용을 얻는답니다. 그것이 우리 친구가 이 어려운 경기 속에서도 호황을 누리고 있는 아주 간단한 그러나 아주 확실한 비결이었습니다. 정직과 성실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파워 풀한 무기입니다. 정직에 함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함정이 전부인 것처럼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함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고, 정직에 승부를 거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직에 함정에 대해서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정신으로 직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정직의 함정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정직의 함정은 지난주에 생각한 함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정 반대되는 함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착각과 교만’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정직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면 정직해 질 수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직으로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생깁니다. 정직의 함정은 실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에도 있습니다.
정직에 도전하여 성공한 사람들이 조심하지 않으면 백발백중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자기 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기 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자기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롭게 살려고 발버둥질 치는 것뿐이지 그것을 통하여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어쩌다 정직에 한두 번 성공하다보면 자신이 아주 정직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그 착각은 아주 치명적인 함정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려고 아주 작심을 한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 하나를 붙들고 600여 가지의 규례를 만들어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각오와 노력을 통하여 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율법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기 의에 빠지게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율법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식과 방법 즉 하나님의 의가 아니었습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의와 식은 십자가였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정직해 짐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교만해져서, 자기 의에 빠지게 되어, 남들보다 좀 나은 율법지킴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치명적인 함정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다가 함정에 빠지면 교만해 지지만, 함정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율법을 지키게 되면 점점 더 겸손해 집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욕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욕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의 죄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롬 7:24)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 (딤전 1:15)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바울이 그토록 자기 죄에 대하여 민감하였던 까닭은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로마서 7장 2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제대로 가 박히게 되면 자기의 죄가 점점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이 점점 더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이 어설프게 가 박히게 되면 선무당이 되어 자기의 의가 점점 드러납니다. 자기가 잘 난 사람인 것 같이 착각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바리새인들은 선무당들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아멘.
성경은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행(蒙學先生)이라고 합니다.(갈3:24)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합니다. 구원에 대한 능력이 우리에게 전혀 없음을 깨닫게 하고 그것 때문에 절망하게 합니다. 자신의 한계와 죄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은 성화 론과 은혜 론으로 뜨겁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도는 어설픈 우리 인간의 론(論)으로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크고 어려운 주제입니다. 성화 론의 문제는 잘못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약화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 론의 문제는 잘못하면 율법과 행함이 무시되고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만 강조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이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 수 없고, 우리가 죄인임을 뼈저리게 깨닫지 못하는 자는 실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값싼 은혜주의자들의 문제는 정작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율법과 행함을 섣불리 무시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까닭은 그것으로 구원을 얻으려 함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깨달으려 함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실존적으로 만나기 위함 입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조금씩 더 정직해 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말 정직하게 살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정직의 한계를 깨닫습니다. 한도 끝도 없는 정직함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께 더 가까이 나가기를 힘쓰듯 정직에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힘쓸 뿐입니다.
조금씩 정직해 짐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형통의 축복을 누리고, 그것을 통하여 느끼게 되는 자신의 한계를 통하여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더 확실히 붙잡게 되는 축복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의 함정인 교만과 자기 의에 빠지게 되면 만사가 끝입니다.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그 구체적인 예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위선자가 됩니다. 눈에 보이는 정직은 과장하게 되고, 정직하려고 함을 통하여 점점 더 드러나게 되는 자신의 거짓은 감추게 됩니다. 결국은 정직하지 못한 자가 되고 맙니다. 위선이란 부분적인 정직을 전체적인 정직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직함의 발버둥질을 통하여 부분적인 정직에 성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전체적인 정직에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완전한 정직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만이라고 하는 함정에 빠지게 되면 부분적인 것을 전체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게 됩니다. 그것이 위선입니다. 그것은 가장 큰 거짓입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정직의 함정에 빠지게 되면, 작은 정직을 미끼로 더 큰 거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은 회를 칠해 깨끗한 것 같으나 그 속에는 더럽고 냄새나는 시체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의인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자기 의에 빠지게 된 사람은 하나남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은 필연적인 논리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직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과 정직을 경히 여기고, 우습게 여기고, 내어 버린다면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깊은 뜻이 여기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율법과 정직함을 귀히 여기고 살다가 잘못 율법과 정직의 함정인 교만에 빠져 자기 의에 사로잡히게 되면 또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율법과 행함과 정직함은 잘못 잡아도 위험하고 놓쳐도 위험한 아주 절묘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율법과 행함과 정직함을 섣불리 잡았다가 그것들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이었던 사도바울은 율법과 행함과 정직함을 제대로 붙잡아,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붙잡아 구원 얻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정직에 도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정직이 분명한 하나님의 식이라고 믿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삶으로 주님을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식, 하나님의 길을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식을 붙잡으려면 바리새인들처럼 어설프게 잡지 마시고, 사도바울과 같이 확실하게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율법과 행함과 정직의 함정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율법과 행함과 정직을 포기하고 행함 없는 믿음으로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함 없는 믿음도 아니고, 믿음 없는 행함도 아닌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