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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080704a창세기36장a
20080704a 울산강의-창세기 36장 (강의 : 이근호 목사 , 녹취 : 한윤범 목사)
창세기 36장,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중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중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흘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삼았다” 이래 쭉 이야기해서 제가 읽어보자고 했지만 36장 다 읽어보세요. 재미 하나도 없지요. 이게 왜 재미가 없느냐 하면, 왜 재미없는 성경을 이렇게 나열했느냐 하면, 하나님과 관련 없는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재미가 없어 있으나마나고, 그렇고 그런 인생이 되는 겁니다.
창세가 36장을 새벽기도나 어떤 정기적으로 강해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상당히 애로사항이 여기서 뭐 뽑아낼 게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굉장히 난처한데요. 사실은 창세기 36장이 굉장히 중요하고 깊이가 있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그건 그림으로 설명을 해야 되는데 여기에 1절에 보면,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대략’이라는 말이 대강이란 뜻이 아닙니다. 대략이란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족보’란 거예요. “에돔의 족보가 이러하니라”라고 족보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성경에서 족보의 중요성을 굉장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족보가 있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사람은 자기 족보에서 못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 족보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구원이 되려면 자기 족보에서 벗어나줘야 되는 겁니다. 제가 방금 말에 모순이 있지요. 인간은 자기 족보에서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근데 구원이 되려면 자기 족보에서 벗어나줘야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래 되잖아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구나. 네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네 혈육이 아니요, 네 족보가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에게 복을 받았기 때문에 네가 예수님을 안다.” 이래 됐어요. 구원받는다 이 말이에요. 새로운 교회를 네 반석위에 세우리니.
족보란 개념이 뭐냐 하면, 베드로 같이 족보에서 벗어나도록 예수님 아버지한테 된 통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의 집단,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나, 구원받았다.’라는 말은 뭐냐? 족보에서 벗어난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못 벗어나는데 예수님의 아버지에게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지금은 예수님의 영이죠.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중요한 족보, 이 족보에서 벗어나서 구원을 받았다.
따라서 족보에서 벗어나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기 위해서는 족보에서 못 벗어나는 집단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 대표적 집단이 뭐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서 집단’입니다. 에서 족보에요. 그러니 족보가 보통 족보가 아니죠.
그 뒤에 37장에 보면 누구 족보 나옵니까?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약전’이란 말이 맨 족보란 뜻이에요.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고 요셉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에서의 족보하고 야곱의 족보하고 비교해보라 이 말이죠. 뭐가 틀리는가? 어떤 것이 틀리고 어떤 것이 차이 나는가? 네가 한 번 봐라.
에서의 족보는 출발점이 에서로부터 출발합니다. 에서의 족보는 제일 윗대가리에 윗머리에 에서가 있어요. 에서가 대대로 자식을 낳고, 자식을 낳고 여기 보면 여자 세 명하고 해요. 여자 세 명과 결혼해서 힛타이트 족속과 이방 족속과 결혼해서 자식을 번창하게 많이 낳았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많이 번창했다는 말은 고대국가에서 개간할 수 있는 노동력을 많이 확보했다는 뜻이고, 노동력을 확보했다는 뜻은 그만큼 많은 숫자가 노동력을 투입해서 개간했기 때문에 그 땅이 넓을까요, 좁을까요? 숫자만큼 넓을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세일산이라 해서 사해 바다 있고 갈릴리 바다 있는데 여기 요단강 흐르죠. 세일산 이쪽에 동남쪽에 세일산 있는데 여기에 에돔이라는 나라, 에서의 나라가 에돔이에요. 에돔이란 붉다는 뜻인데 에돔이란 나라하고 이 근처에 뭡니까? 모압이죠. 그래서 나중에 출애굽할 때 에돔을 거쳐서 모압을 거쳐서 옆구리로 여리고 성으로 기어들어가는 이런 식으로 여정을 잡는데 지리적으로는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바다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 게 에돔인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에서의 족보는 그 시조가 에서란 점입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야곱의 족보의 시조는 야곱이 아닙니다. 누구냐? 야곱의 약속입니다. 야곱에게 맺은 야곱의 언약이 야곱 족보를 좌지우지하고 있어요.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마태복음 1장을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1장에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 다시 한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족보에서 벗어나줘야 구원됩니다. 구원된 사람치고 족보에서 안 벗어난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족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족보는 뭐냐 하면, 족보를 나열하면서 족보에서 이탈한 족보, 족보에서 벗어난 족보에 따라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돼있는데 이게 원어에 이렇게 돼있어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아니고,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이래 돼있습니다. 한글에선 아브라함과 다윗이라고 아브라함이 먼저 선배고 다윗이 후배니까 선배를 앞장세우고 했지만 원래 글에는 뭐냐?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돼있습니다. 이게 뭐냐? 여기 중앙에 다윗의 중심입니다. 아브라함이 중심이 아니고.
산등성이 올라갔다가 내려가거든요.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끙끙끙 올라갑니다. 족보 이탈해서 올라가서 새 정점에 뭐냐? 다윗이 여기 있고, 다윗부터 꼴아 박습니다. 내려갔다가 여기서 완전히 원점 되었다가 다시 다윗부터 올라가서 어디 가느냐? 예수 그리스도로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옴으로 말미암아 다윗이라는 이 인간 하나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그동안 족보의 이탈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건 진짜 신학교에서 강의해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인데 제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혈육을 쥐었다 폈다 지 마음대로 한다 이 말입니다. 지 마음대로 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집안, 한 패밀리, 예수 그리스도의 한 가족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족보를 흔든다 이 말입니다.
한번 흔들 때마다 여기서 뭐가 있느냐? ‘에게서’ 뭐 누구에게서가, 에게서가 계속 나와요. 여기서 이까지 가는데 네 번의 ‘에게서’가 나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맞지요? ‘보아는 룻에게’, ‘다윗은 우리아 아내에게서’ 그리고 마지막에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총 네 개의 ‘에게서’가 나옵니다.
그런데 전부다 여자가 등장하지요. 여자가 등장해줘야 족보 이탈이 벌어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남자의 후손이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빠가 없어요. 이 땅에는 없어요. 예수님은 아버지가 이 땅에는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어요. 아빠 없는 자식이라. 엄마밖에 없고 아빠는 없어요.
아빠가 없기 때문에 족보는 반드시 아버지 혈통이기 때문에 아빠가 없기 때문에 아빠가 없다는 그 빈 자리를 여기에 아브라함에서 다윗에게도 아빠 없이 태어난 자식들을 나열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빠 없으니까 누가 부각되겠어요? 여인이, 여자가 부각되겠지요. 물론 ‘유다는 다말에게서’ 했을 때 유다가 누구냐 하면, 베레스와 세라의 아빠 맞지요. 그런데 그것이 흔히 이야기하는 정상적인 족보하고 다릅니다. 어떻게 시아버지하고 며느리하고 관계를 맺어요. 이게 정상적이 아니잖아요. 꼭 정상적이 아닐 때 반드시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에게서’가 들어갑니다.
여기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거 처음 불신자가 들으면 다윗은 바람둥이라고 대번 들통 날 거예요.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라고 해놓으면 밧세바가 유부녀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가는데 아예 성경은 뭘 박아 놔버려요? 밧세바는 유부녀였단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남편이 있는 여자하고 다윗하고 관계를 맺어서 누굴 낳았다? 솔로몬을 낳았다. 세상적으로 봐서는 불륜 아닙니까?
우린 여기서 물어야 돼요. 왜 그래야 되는가? 왜 그래야 되는가 하면, 장차오실 우리의 구세주는 뭐가 없기 때문에? 아빠가 없는 거예요. 왜 아빠가 없느냐 하면, 아빠가 되지도 않았어. 되도 않는 인간이라. 아빠가 죄를 안고 있기 때문에 안 돼. 죄를 안은 아빠는 메시아를 낳을 자격이 안 돼요. 더러운 죄가 흐르기 때문에.
더러운 죄든 말든 나는 아빠고 니는 내 자식이다. 라고 고수하는 족보가 무슨 족보냐 하면, 바로 오늘 보고자 하는 에서의 족보입니다. 애 새끼 낳으면 그만이지 아빠가 죄 있든 무슨 상관있는데.
죄 있는 자가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희망이 없습니다. 이삭이 낳아져야 아브라함에게 구원이 주어져요. 아브라함 낳은 자식 하나 이름이 뭡니까? 이스마엘. 이스마엘 같은 자식 천 명 낳아 봐도 아브라함 지가 구원 못 받습니다. 구원받으려면 아빠 없는 자식을 낳아야 돼요.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그게 삽입돼요. 모든 구원될 조건에는 그게 삽입돼야 돼요.
저 ‘경주 이가’거든요. 남한테 경주 이씨라 하면 욕한다 해서 이가. 경주 이가가 구원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는 경주 이가에서 못 벗어납니다. 왜? 대대로 우리 아버지가 경주 이가기 때문에. 경주 이가에서 벗어나야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나는 경주 이가입니다. 못 벗어납니다. 따라서 구원될 수가 없어요.
근데 어떤 경우에 우리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를 제거할 수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뭐였다? 죄인이었다. 죄인이었다만 들통 나면, 죄인은 구원 못 받습니다. 아버지가 의인되어야 돼요. 죄인의 계통에서 이탈해서 의인되는 계통의 아버지를 두려면 그 아버지를 교체를 해야 되는데 그 교체,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중요한 건데 녹음 되는가 몰라. 요샌 녹음만 신경 쓰여 가지고.
생각해보세요. 죄인이 무슨 수로 자기가 죄인인 걸 압니까? 그렇지 않아요. 강도질 했던 도시가스파이프 올라가서 20층에서 도적질했다. 강남에서요. 당신, 죄인 맞지요? 죄인 맞습니다. 왜 죄인입니까? 나는 20층 올라가서 강남에 부자들 돈 훔쳐서 죄인입니다. 그럼 당신이 평소에 밥 먹는 것은? 그건 죄 아니지요. 사람이 지가 나쁘다고 생각한 것만 골라서 죄인이고, 그 나쁜 짓 말고 다른 짓 하면 죄인 아닌 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뭐냐? 그거는 지 죄를 몰라요. 인간이 아무리 해도 내가 전적으로 죄인이란 말을 인간 입에선 나올 수가 없습니다. 가끔 죄 짓고, 약간 다급할 때 죄 짓고 이렇지 늘 죄 짓진 않는다. 이게 인간의 변명이잖아요. 근데 나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죄만 짓는다. 라는 이야기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비로소 나는 전적 죄인입니다를 밝혀내지 자기가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서 자기하고 거울보고 죄인, 이거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면 자기 아버지가 죄인인 줄 모르고, 자기 아버지 죄인인 줄 모르면 할아버지 죄인인 몰라요. 부모 없이 어떻게 자식이 태어나느냐? 그 소리만 할 줄 압니다. 아버지 없이 나 없었고, 할아버지 없었다. 나는 우리 할아버지가 뭐라 해도 우리 할머니가 뭐라 해도 나는 우리 아버지 존경한다. 심지어 우리 할아버지가 나까무라가 되서 일제시대 때 부역한다고 동네 사람 하더라도 나는 존경한다.
그게 자기 존재의 긍정이잖아요. 그게 바로 에서의 족보에요. 에서의 족보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죠. 지금 우리가 평소에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게 다 뭡니까? 내 족보 잇기 위해서 내 가정 잘 되기 위해서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몸을 이젠 내 후손들에게 잘 가르치고 교육도 시키고 장가, 시집보내서 이걸 도킨스 같은 경우에는 ‘이기적 유전자’라고 하죠. 내 유전자, 우량의 유전자를 번식하는 거기에 열중을 하는 거죠. 내 우량의 유전자를 번식하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죄입니까?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고팔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게 뭐가 죄입니까? 죄인 줄 모르겠지요. 우린 스물네 시간 그것만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노아 당시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노아 당시에 뭐가 왔습니까? 홍수가 왔지요.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과연 자기들이 홍수심판을 받을만한 사람이라고 본인이 그걸 수긍하겠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지금 도시사람들이 차 몰면서 욕도 하고, 돈 번다고 사기도 치고 하지만 저 촌에 전라도 지리산 곡성이라든지, 저 태백산 골짜기에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와서 시부모 죽을 때까지 봉양 다하고 똥오줌 다 가려내면서 감자 캐면서 살았던 할머니가 마지막 죽으면서 나는 죄인이었다. 나오겠어요? 안 나오지요. 그런 소리 안 나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에서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저주 받을 사람에 해당되는 겁니다.
말라기 1장 한번 봅시다. 말라기는 찾기 쉽지요. 구약 마지막 대목이니까. 신약 마태복음 바로 앞이니까. 말라기 1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좀 어려워요. 하나님께서 유다보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 하니까 무슨 식으로 우릴 사랑했습니까? 이렇게 반문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사랑했잖아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미워하는 쪽을 봐라. 내가 미워하는 자를 봐라. 이래 하는 거예요.
오늘 창세기 36장, 에서 대목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뭘 이야기하느냐? 내가 미워하는 족속이 이렇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집합에서 여집합, 이것 빼놓고 나머지는 뭐했다? 사랑이잖아.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사랑하는지 보세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이유가 그들이 에서 집단이 우리보다 죄를 더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미워했다니까요. 지금 제가 교인들에게 제일 답답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불신자를 미워합니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듣느냐 하면, 제가 어떻게 미움 받을 짓을 했습니까? 이래 나오더라 이 말이죠. 여러분 미움 받을 짓을 해서 미워하는 게 아니고, 미워했기 때문에 미움 받을 짓을 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오야거든요.
고스톱 치면서 패를 나눠주는데 팔월 공산하고 십일 똥하고 나눠줬단 말이죠. 패 나눠주는 사람이 그걸 알았어요. 어이, 너 뭘 받았나? 하니까 십일 똥 받았다. 왜 똥 받았노? 몰라. 받았지. 그게 오야 앞에 패 받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주는 대로 받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족보에 뭘 주느냐 하면, 십일 똥을 주는 거예요. 저주를 준 거예요. 저주를 줘놓고 미워하는 거예요. 미워해놓고 밉다고 미워하는 거예요. 그냥.
참, 제가 이런 소리하면 욕 얻어먹어 싸지요. 하나님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십니까? 그것은 야곱아, 너에게 말도 안 되는 사랑이 주어졌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저쪽부터 이야기한다니까. 미움 받는 자가 나쁜 짓을 해서 미움 받는 게 아니고, 그냥 미움을 당해요. 그러면 반대로 해봅시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합니까? 우리가 무슨 착한 일 해서. 허어, 착한 일 해서 사랑 받는 게 아니고 그냥 사랑한다니까요. 그냥 사랑해요.
이게 물이 아니고 잉크라면 잉크를 가지고 전도사님이 푹 떨군다고. 그럼 온 통에 막 푸른 잉크가 됐다고. 네 몸의 색깔이 옷의 색깔이 푸르노? 하니까 내가 잉크를 부었거든. 사랑이라 하는 것은 마치 잉크 퍼붓는 것과 똑같아요. 그냥 퍼부어지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사랑 받을 짓을 하려고 해요. 참 네.
지난 수요일 날 하나님은 남편이란 설교를 했는데 이게 ‘나는 네 아버지다’ 하니까 말 안 들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강도를 더 높였어요. 아버지 정도가 아니고 ‘네 남편이다’ 이래했어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아버지라 하면 그 앞에서 겁나서 벌벌 떨어야 되는데 남편이란 말은 뭐냐 하면, 제발 내가 너의 남편 노릇하게 놔둬라 이 말이죠. 이 여자야. 내가 네 남편이다. 이러면 여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다면 난 충실한 아내가 돼야지. 자꾸 충실한 아내가 되려하지 말고, 남편이란 말이 뭐냐 하면, 네가 아내답고 아내 안답고 상관없이 그냥 내가 너에게 남편 노릇 하게 해달라, 내가 너에게. 혼수? 그냥 빈손으로 와. 그래야 남편 값을 하니까.
그래서 설교에 보면 나와요. 여자가 바람피우다가 다른 남자하고 놀았거든요. 놀든 말든 관계없어요. 지가 바람피우다 도망가도 한 번 남편은 영원한 남편이라. 기어이 불러내서 아이고, 제가 남편 보기 미안합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미안하다는 소리 하는 게 아니지. 여러분, 사랑하는 사이는 미안하단 소리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흥정할 때나 어떤 거래할 때나 미안합니다. 납품을 늦게 해서 미안합니다.
세상에 아내가 남편보고 여보, 밥 늦게 해서 미안해요. 이러면 다른 남편은 몰라도 진짜 사랑하는 남편 같으면 상당히 섭섭하게 들립니다. 내가 하숙집 주인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네가 밥을 늦게 하든 뭘 하든 남편이고 못해도 남편이고.
그래서 이게 있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 했습니다. 야, 좋은 말 적어야 되는데.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 뭐냐? 남자의 모든 노동의 보람이다. 여자가 있으니까 내가 존재한다 이 말 아닙니까? 면류관이죠. 남자가 애쓰고 노력한 모든 투자한 노동이 전부다 누구한테 꽂히고 누구한테 쌓여야 되느냐 하면, 여자로 하여금 너는 내 여자라는 것을 더욱더 영광스럽게 이뻐하고 죽고 못 살면서 퍼부어서 자꾸 여자에게 돈이 쌓이는 것은 남자의 영광이다 이 말이죠. 이래도 경제권을 남자가 쥐랍니까? 남자가 사는 이유는 여자가 남자로 하여금 점점 더 이뻐지고 점점 더 환해질 때 그때 남자는 사는 보람을 느낀다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와요. 그런 마누라를 줘팼으니 그게 사나.
남자는 여자 없이는 남자 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남자가 남자의 이런 근거는 오직 뭔가 영광스러운 자기의 노동을 다 바쳐야 될 여자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남자가 남자답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예수의 여자거든요. 우리의 남편은 예수님이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 남편노릇을 톡톡히 하는 겁니다.
혼수 뭐 들고 오라고? 빈손으로 오는 거예요. 뭐 착해서? 착하고 나발이고 다 치우고 그냥 빈손으로 와. 죄 있으면 죄 진 대로 그대로 와. 남편이 달리 남편이 아니거든요. 그 죄를 내가 속죄했느니라. 이사야 54장. 내가 모든 죄를 씻어줌으로 말미암아 제발 네 앞에서 남편노릇 표가 나게 좀 해줘.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모든 영광은 전부다 남편이 갖고 있는 혼수로써 뒤집어 쓴 채로 올라가요. 그래서 저는 설교에 그런 여담을 했습니다만 우리 진주도 남편 만나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빈손으로 오면 안 되나. 이런 남편을. 그런 헛된 망상을 자주 한다 안 합니까?
성경 쉽습니다. 우리가 외부에 남편이 있고, 외부에 하나님 있다는 걸 까먹고 하면 그건 에서에요. 자기가 자기 사랑하는 것, 에서입니다. 그게 독자적인 자기 족보를 구성한다고. 나는 돗대다. 자식들은 내 말 들어야 돼. 족보가 외부에서 손 댄 족보가 아니고, 자기 족보, 기어이 애를 쓰고 아주 노력하면서 독자적인 자기 족보만 고수할 때 그걸 보여주는 게 창세기 36장입니다. 창세기 37장과 비교해보라고.
37장은 야곱의 족보라 해놓고 똑같은 형제간의 족보인데 단박에 나오는 이름이 누구 이름이 나오느냐? 놀랍게도 요셉이 나와요. 한번 봅시다. 슬슬 감이 오실 거예요. 창세기 37장 보면,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해놓고 그 다음에 바로 튀어나오는 게 뭡니까? “요셉이 십 칠 세의 소년으로서” 해서 요셉의 이야기가 거의 끝까지 다 가요. 요셉이야기로. 도대체 요셉의 족보야, 야곱의 족보야 도대체 분간이 안 돼.
요셉이 꿈을 꾸는 것도 하나님께서 야곱의 족보에 개입한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로 개입한 겁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로 개입할 때 그 바탕이 뭐냐? 야곱과 하나님이 전에 맺었던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언약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야곱의 족보는 하나님이 개입하지만 에서의 족보는 전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버림받은 거예요. 그냥 방치한 겁니다.
방치한 건데 아까 말라기에 보니까 왜 방치 됐는가? 그들은 미움 받기 때문에 방치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좀더 이야기 어려워집니다만 어렵기 때문에 도표로 그려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쉬운 것 했습니다. 잠이 안 올 때 쉬운 것 해야 돼요. 어려울 땐 도표를 그려서하는데. 도표로 그려보겠습니다.
하늘의 가치 있는 게 있습니다. 하늘의 가치를 그냥 흔한 말로 ‘거룩’이다. 우린 안 거룩하니까. 생명, 거룩. 하늘의 가치가 지상에 오면서 무가치로 평가받습니다. 무가치합니다. 오늘날 복음 전하는 목사님들이 제일 애로사항이 그거에요. 제일 가치 있는 것이 무가치로 이거는 진짜 아까도 목사님께 이야기했습니다만 명맥이 끊어졌어. 복음의 명맥이 모든 한국교회에서 끊어졌어. 왜? 사람들이 무가치하게 보기 때문에. 아무리 십자가 복음 이야기해도 듣는 사람이 그걸 가치 있게 안 봐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왜 하늘의 가치 있는 것이 지상에서도 가치 있어야 될 건데 사람들한테 무가치하게 평가받느냐 하면, 이렇게 무가치하게 평가받아야 여기 무가치한 가짜가 진짜 숨어있던 그 무가치가 뭐로 받느냐 하면, 가치 있는 것으로 우세를 장악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늘의 고귀하신 분이지만 지상에 와서 십자가로 버림받았습니다.
바나바를 살려줄까 예수님 살려줄까? 하니까 이구동성으로 민주주의 촛불집회해서 뭐했습니까? 바나바를 살려주고 예수를 죽이려했습니다. 이 물음을 절에다 물어보세요. 저 보살님, 보세요. 예수를 살려줄까요, 누굴 살려줄까요? 하면 예수 죽이라 합니다. 왜?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무가치하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그 무가치를 통해서 기존의 무가치한 것들이 얼마나 가치 행세하는가를 우세를 드러내죠. 세상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복음 아는 사람들은 항상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 평가기준은 정말 우리 눈에 진짜 무가치를 가치로 보는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가치 있게 보는 것을 가치 있게 보는지 이걸 생각해 봐야 돼요. 좀 너무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에스겔 13장 19절 찾아서 읽어보세요. 구약성경 몇 페이지냐 하면, 1167페이지. 에스겔 13장 19절.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야, 끝부분 보세요. 누가 한번 다시 읽어보세요.
야, 두 종류의 영혼이 있다하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에스겔 보면 모든 영혼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럼 두 종류의 영혼이 있는데 한 종류는 무슨 영혼입니까? 반드시 살아나야 될 영혼, 또 한 영혼은 뭡니까? 반드시 죽을 영혼이에요. 그러면 에스겔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궁금한 게 뭐예요? 하나님, 하나님 그럼 누가 반드시 살아야 될 영혼이고, 누가 반드시 죽어야 될 영혼이고, 그걸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궁금하겠지요, 그죠? 안 궁금합니까? 되게 궁금하잖아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살려주면 좋겠는데 반드시 이 세상에는 두 종류가 있단 말이죠. 반드시 살아야 될 영혼과 죽어야 될 영혼이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구분되느냐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다? 살아야 될 영혼을 죽이고, 죽어야 될 영혼을 살리는 식으로 그 당시 설교를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게 아까 제가 가치, 무가치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목사 입장에서 어떤 점이 난처하냐 하면, 살릴 영혼을 죽이는 것도 나쁘지만 제일 우리 목사로써 제일 답답한 게 뭐냐 하면, 죽을 영혼을 천당 보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설교를 한다는 거예요. 이러면 이거 가짜라는 거예요. 이런 목사는 가짜라는 겁니다. 사람이 목회를 하고 교인들이 왔으면 교회가 부흥돼야 하잖아요. 부흥되려면 고객이 손님이 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려면 좋든 나쁘든 따지지 말고 끌어 모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끌어 모을 때 그때 작용하는 그 기준, 그 기준이 에스겔 13장 하나님 기준하고 다르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뭐냐? 목회자야. 예. 죽일 영혼을 죽이고, 살릴 영혼을 살려라. 그건 쉬운데 그 뒤가 되게 어렵다니까. 죽을 영혼을 반드시 죽이는 설교를 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딴 거 다 떼버리면 뭐가 남습니까? 죽을 영혼을 반드시 죽이는 그런 목회신학을 해야 된다 는 거예요. 어느 총신에서 어느 장신에서 목회신학 그렇게 합니까? 세상에 사람들 끌어 모으라고 수법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죽을 영혼 반드시 죽여 버리라는 그런 식으로 목회를 누가 가르칩니까?
그래서 성경을 함부로 보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정말 복음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이거 보고 안 봤다, 안 봤다 마시고, 하나님이 보는 기준이 뭐냐? 하나님이 보는 평가기준을 봐야 돼요. 이거 아닙니까? 간단해요. 기준이 뭐라고 이야기할 수 없고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사람들이 가치 있게 보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고, 사람들이 무가치하게 본 것은 실은 뭐다?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전은 한 가지 사건으로만 알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
이걸 구분하는 증거는 십자가밖에 없다. 라고 이근호 당신은 주장하느냐 하면, 저는 바로 십자가는 어리석음. 세상 사람들의 지혜로 보면 정말 어리석어요. 전혀 생활에 보탬도 안 되고 도움도 안 되고 어리석은 거예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본다는 십자가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걸 누가 알았으리요. 성령이 임해야 안다는 거예요. 십자가가. 십자가를 알게 되면 남들이 가치 있는 것은 실제는 가치 없는 것이고, 남들이 무가치하게 본 것은 실제로 가치 있는 걸로 보이는 거예요.
왜 이렇게 하나님께 우리를 헷갈리는 식으로 구원을 하시느냐? 우리가 납득 알아듣는 소리해서 구원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헷갈리는 식으로 왜 자꾸 이렇게 하느냐? 그 이야기를 이제 에서의 족보와 야곱의 족보와 비교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춥거든 에어컨 좀 낮춰도 되죠. 꺼도 괜찮아요.
족보의 존속, 족보를 내가 유지한다는 것은 내 가정을 사수하는 거예요. 족보를 존속시킨다. 족보를 존속시키고자 했던 에서는 그냥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니까 에서에서는 에서가 누굴 낳고, 누굴 낳고 그 족보 이어집니다.
그런데 족보를 고수하겠다. 라는 이러한 경향이 야곱의 족보에도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당연히 있지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자기 족보에서 못 벗어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기 가정의 중요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느 애비가 자식을 버리고 어느 에미가 지 자식을 버리겠습니까? 자기는 죽어도 자식은 살아야 돼. 이러한 혈육적인 끈끈한 정은 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버려도 자식 못 버려요.
여자가 사는 것은 지 새끼 때문에 사는 거예요. 남편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지 새끼가 불쌍해서 사는 거예요. 참는 것도. 옛날 여자들은 많이 맞았잖아요. 맞으면서도 참는 것은 지 자식한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냥 나 하나 희생하는 양으로 참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정의 사수, 족보의 사수를 위해서 인간은 마음껏 뭐하냐 하면, 희생하는 겁니다.
이거는 나쁜 아빠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빠도 마차가지에요. 오직 자식을 위해서 회사가 더럽고 추잡해도 자식 하나 살리려고 그렇게 젊은 청춘을 다 바쳐가면서 자식 살리기 위해서 사는 거죠.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본성이죠. 그런데 이 본성이 죄다, 나쁘다고 한다면 인간으로서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이것마저 나쁘고, 이것마저 죄라면 결국 우리는 내가 반듯하게 살아서 구원받을 여지는 전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는 게 없습니다. 그냥 자기의 본성, 이런 본성밖에 없음을 솔직하게 털어놔야 돼요. 나는 교회 뭐라 해도 교회보다 우리 집구석 최고 좋습니다. 교회 오면 난리지 뭐. 내 새끼, 난 못 잊습니다. 솔직하게 모든 게 노출돼야 돼요. 그게 하나님의 거룩한 족보라는 야곱의 족보도 똑같이 그 가정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요셉의 형들, 그러니까 야곱의 자식들 사이에 요셉을 그렇게 미워했지요.
아, 그 이야기해야 돼요. 한번 봅시다. 가치 있는 것이 이 땅에 와서 뭐가 됩니까? 무가치하게 되죠. 그 중간에서 무가치가 뭐로 행세한다? 가치로 행세하죠. 그래서 우리는 이 마지막 가치 있는 나, 내가 가치 있으니까 내 가정도 가치 있고 그러니까 가치 있는 것을 확대시키려고 확장시키려고 족보의 존속을 하는 겁니다. 이거는 생물학을 공부해보면 인간의 모든 종족은 오직 종족 보존, 종족 번식, 생식이죠. 생식을 위하여 모든 게 다 움직여요. 무조건 DNA부터 하니까.
그렇다면 만약에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있는 가치 있는 가정을 존속하면 사랑받고, 만약에 자기 가정과 이탈하여 다른 엉뚱한 소리하면 이것은 어떻게 됩니까? 미움 받지요. 지금 제가 아까 말라기 있잖아요. 이것 하지 말고 다른 것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누굴 사랑했습니까? 야곱을 사랑하고 누굴 미워했습니까? 에서를 미워했지요.
이게 하나님의 하나의 동그라미 전체가 하늘의 가치입니다. 이게 지상에 내려옵니다. 지상에 내려오면 하나님의 사랑한 자를 누가 미워한다? 세상 사람들이 미워하게 돼있고, 하나님이 미워한 사람을 누가 사랑한다? 역전되는 감정 그런 경우를 받는 흔적이 야곱의 집안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오늘 강의가 어려운 거예요. 전부다 역전이 돼요.
그 요셉이 누구한테 미움 받습니까? 형제들한테 직싸게 미움 받아요. 미움 받는 이유가 원인이 두 가지에요.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 받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요셉이 자기가 꾸고 싶어 꾼 게 아니고 꿈을 꿨다니까요. 열한 짚단이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자기한테 절을 하더라. 그 이야기를 꿈을 꿨기 때문에 그 있는 꿈 꾼대로 이야기했었어요.
그런데 꿈을 꿨는데 그게 계시 아닙니까? 그런 계시가 왔다는 것은 결국은 누가 개입했다? 하나님께서 개입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개입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사랑으로 받지 않고 뭐로 받는다? 미움으로 받는 거예요. 왜냐하면 왜 신께서는 요셉에게만 특별히 그런 꿈을 줬고, 기도 열심히 하는 나에게는 그런 신기한 꿈을 안 주느냐? 따라서 나한테 없는 것을 저쪽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저쪽은 무조건 이유 없이 나한테 뭐가 된다? 미움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왜 형한테 미움 받습니까? 미움 정도가 아니고 죽었지요. 왜 죽습니까? 하나님께서 개입하니까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하나님이 개입한 쪽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뭐 받게 돼있고? 미움 받게 돼있고, 하나님이 개입 안한 쪽은 그 하나님께 받은 사람을 미워하는 쪽이 돼버리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결국 세상 전체를 뭐로 몰아가느냐 하면, 사랑과 미움, 미움과 사랑으로 모든 것을 분리시키고 몰아가는 거예요. 절대로 이런 식으로 몰아가진 않습니다. 나 열심히 하니까 구원받았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 주님께 사랑받았어.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 사랑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뭡니까? 하필 너만 사랑했나? 너, 뭐 잘났다고 너만 사랑했노. 그러게. 잘난 것도 없는데 사랑했어. 네가 착한 일 했나? 아니 없어. 그냥 사랑해줬어.
이것이 이렇습니다. 이 밑에가 야곱의 족보라면 야곱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이 주어지죠. 언약이 떨어지게 되면 여기에 야곱 전체 속에 분란이 일어납니다. 분란이 일어나면서 언약을 받은 요셉은 주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장차오실 예수님께서 진짜 구원자가 와도 그 예수님은 미움 받게 돼있어요. 평소에 가만있을 때는 아무 일 없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니까 하나님의 꿈을 꾸니까 미움 받았어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뭐가 잠복돼있습니까? 평소에 자기 죄인인 줄 몰랐는데 하나님의 계시 받은 소리 듣고 갑자기 미워지죠. 평소에 뭐가 있다, 뭐가 잠복돼있었다? 신을 미워하고, 신을 미워한다는 것은 누굴 사랑한다? 나는 신보다 누굴 사랑한다? 나를 더 사랑하는 그런 본성이 자기도 몰랐었어요. 몰랐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가 앞에 등장할 때 갑자기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미워함으로 말미암아 평소에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노라 하는 그런 증거가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에서 전체를 미워하게 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에서가 왜 미움 받습니까? 하나님이 그냥 미워하는 거예요. 미워하도록 지음 받은 자가 에서에요. 미워하도록 지음 받은 게 에서인데 그 에서가 ‘하나님 밉다, 하나님 밉다’ 이런 식이 아니고, 그냥 꾸준히 자기 족보를 유지하는 것, 독자적으로 그런 식으로 진행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미움 받은 족보에 속한 사람들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거예요. 나는 미움으로 산다. 내 가정 내 손으로 일궈냈다. 어느 놈이 일궈요, 언 놈이. 내가 고생해서 내가 했다.
그런데 야곱 족보는 뭐냐? 마찬가지에요. 야곱 족보도 에서 족보와 마찬가지인데 난데없이 요셉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버리니까 거기서 분란이 일어나죠. 그러니까 분란이 일어난다는 자체가 뭐냐? 하나님께 사랑을 된 통으로 받은 그러한 족보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 한번 봅시다. 이것만 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쉬도록 합시다. 마태복음 1장 좀더 설명해볼게요. 처음 해서 어리둥절했을 건데. 다윗의 자손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예수님이 같은 레벨에 있어요. 세상 밑에서 보기에. 위에서 보면 안 되지만.
사람들이 다윗 하나 건지기 위해서 아브라함부터 차고 올라오는 거예요. 이게 몇 대에요? 14대입니다. 다시 원상태가 돼가는 게 14대에요. 14대를 다시 거꾸로 올라오는 게 몇 대냐? 이게 14대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예수님을 일치시키는 겁니다. 다윗은 그냥 족보가 아니고, 하나님의 개입으로 만든 족보에요. 하나님이 노선을 트는 거예요.
노선을 트는 그 원동력이 어디서 나왔는가? 예수님 자체가 인간의 혈육에서 온 분이 아니고, 아버지가 하늘에 있어요.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패밀리, 성령으로 잉태한 분의 가족이 아니면 우리 구원 못 받습니다. 죄송합니다. 경주 이가지만 구원 못 받습니다. 경주 이가 태생이라도 우리는 우리 족보에서 벗어나서 예수님 족보에 개입돼야 돼요. 그런데 예수님 족보에 개입되려면 우리가 싫어해요, 그걸. 경주 이가가 어떤데 왜 벗어나야 돼. 우리가 싫어해요.
왜냐하면 평소에 가장 이 세상에 가치 있느냐 하면, 내가 가치 있어. 내 가정, 내 새끼가 귀하고, 남의 마누라보다 내 마누라가 좋고, 남의 남편보다 내 남편이 좋아. 하여튼 내 중심으로 했던 모든 것이 좋아요. 내게 좋은데 내게 좋다는 게 구축된 마당에 예수고 하나님이고 남의 것이 좋아질 리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마찰과 싸움이 벌어집니다. 신이시여, 미안합니다만 나는 주님 사랑 못하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주님, 주님 하지만 남들 보기에는 예수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주님도 아시지요? 예수 안 좋아하고 나 좋아하는 거. 이런 식으로 부딪치게 돼있어요. 몇 달 가느냐? 몇 달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계속 가요.
계속 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바로 그런 부딪침이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이거는 간접적으로 자신의 족보를 떠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부딪침이 있을 때 우리는 내가 미처 예전에 몰랐던 죄를 알아요. 나밖에 몰랐구나.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셨다는 나는 별로이고, 나는 내 노동이 중요하게 여겼는데. 뭔가 느끼는 게 뭐냐 하면, 나 같이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렸다? 아, 정말 엄청난 일을 하셨구나. 사랑은 여기 있나니. 이 피가 모든 사랑을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게 남편의 사랑이라는 걸 느낄 때 아, 나는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게 바로 야곱의 족보에 보면, 결국 요셉을 누가 죽입니까? 형제들이 모의해서 죽이죠. 죽이는 거나 구덩이 파고 넣는 거나 팔리는 거나 똑같은 거예요. 너는 없어야 돼. 죽이는 것 아닙니까? 너는 무가치해. 나는 더 때문에 못 살겠어. 죽여 버린다고.
죽인 그 요셉이 어떻게 하나님이 개입해서 살아나서 누굴 구원합니까? 아버지와 엄마와 자기 친 엄마는 아니지만 모둔 식구들 몽땅 다 구원해서 한 자, 모든 형제들의 뭐가 된다? ‘주’ 주 개념이라고. 주라는 것은 너희가 나를 죽였잖아. 네가 나를 버렸잖아. 버림 받은 내가 너의 주가 되서 오히려 버린 자를 구원하는 것.
그런데 예수의 족보는 일언반구 이런 흔적이 없습니다. 예수의 족보는 한 가지 있어요. 뭐냐? 그들은 온천을 발견했다. 그 대목 나오고 나머지 온천을 발견해서 온천욕하는 그 이야기는 아무것도 이런 가족을 뒤죽박죽 만드는 그런 계획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와 여러분은 평생 우리 집구석 뒤죽박죽 돼야 되고, 교회 뒤죽박죽 돼야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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